|
1. 인과(因果)는 동일하다
❙ 원문
「云何初心二義決定?」
「阿難. 第一義者, 汝等若欲捐捨聲聞, 修菩薩乘入佛知見, 應當審觀因地發心與果地覺為同? 為異? 阿難. 若於因地, 以生滅心為本修因, 而求佛乘不生不滅, 無有是處. 以是義故, 汝當照明諸器世間, 可作之法皆從變滅. 阿難. 汝觀世間, 可作之法誰為不壞, 然終不聞爛壞虛空. 何以故? 空非可作, 由是始終無壞滅故. 則汝身中堅相為地 潤濕為水 煖觸為火 動搖為風. 由此四纏分汝湛圓妙覺明心, 為視 為聽 為覺 為察, 從始入終五疊渾濁. 云何為濁? 阿難. 譬如清水, 清潔本然, 即彼塵土灰沙之倫, 本質留礙, 二體法爾性不相循. 有世間人取彼土塵投於淨水, 土失留礙水亡清潔, 容貌汩然名之為濁, 汝濁五重亦復如是.」
「阿難. 汝見虛空遍十方界, 空見不分, 有空無體 有見無覺. 相織妄成, 是第一重名為劫濁. 汝身現摶四大為體, 見聞覺知壅令留礙, 水火風土旋令覺知. 相織妄成, 是第二重名為見濁. 又汝心中憶識誦習, 性發知見容現六塵, 離塵無相離覺無性. 相織妄成, 是第三重名煩惱濁. 又汝朝夕生滅不停, 知見每欲留於世間, 業運每常遷於國土. 相織妄成, 是第四重名衆生濁. 汝等見聞元無異性, 衆塵隔越無狀異生, 性中相知 用中相背, 同異失準. 相織妄成, 是第五重名為命濁.」
「阿難. 汝今欲令見聞覺知遠契如來常樂我淨, 應當先擇死生根本, 依不生滅圓湛性成. 以湛旋其虛妄滅生, 伏還元覺得元明覺, 無生滅性為因地心, 然後圓成果地修證. 如澄濁水貯於靜器, 靜深不動, 沙土自沈清水現前, 名為初伏客塵煩惱. 去泥純水, 名為永斷根本無明. 明相精純, 一切變現不為煩惱, 皆合涅槃清淨妙德.」
「운하초심이의결정?」
「아난. 제일의자, 여등약욕손사성문, 수보살승입불지견, 응당심관인지발심여과지각위동? 위이? 아난. 약어인지, 이생멸심위본수인, 이구불승불생불멸, 무유시처. 이시의고, 여당조명제기세간, 가작지법개종변멸. 아난. 여관세간, 가작지법수위불괴, 연종불문난괴허공. 하이고? 공비가작, 유시시종무괴멸고. 즉여신중견상위지 윤습위수 난촉위화 동요위풍. 유차사전분여담원묘각명심, 위시 위청 위각 위찰, 종시입종오첩혼탁. 운하위탁? 아난. 비여청수, 청결본연, 즉피진토회사지륜, 본질유애, 이체법이성불상순. 유세간인취피토진투어정수, 토실유애수망청결, 용모골연명지위탁, 여탁오중역부여시」
「아난. 여견허공변시방계, 공견불분, 유공무체 유견무각. 상직망성, 시제일중명위겁탁. 여신현단사대위체, 견문각지옹령유애, 수화풍토선령각지. 상직망성, 시제이중명위견탁. 우여심중억식송습, 성발지견용현육진, 이진무상이각무성. 상직망성, 시제삼중명번뇌탁. 우여조석생멸부정, 지견매욕유어세간, 업운매상천어국토. 상직망성, 시제사중명중생탁. 여등견문원무이성, 중진격월무상이생, 성중상지 용중상배, 동이실준. 상직망성, 시제오중명위명탁.」
「아난. 여금욕령견문각지원계여래상락아정, 응당선택사생근본, 의불생멸원담성성. 이담선기허망멸생, 복환원각득원명각, 무생멸성위인지심, 연후원성과지수증. 여징탁수저어정기, 정심부동, 사토자침청수현전, 명위초복객진번뇌. 거니순수, 명위영단근본무명. 명상정순, 일체변현불위번뇌, 개합열반청정묘덕」
❙ 해설
「무엇이 처음 보리심을 낼 때 갖추어야 할 두 가지 결정적인 이치인가?」
「아난아. 첫 번째 이치는, 너희들이 만약 성문[소승]을 버리고 보살승[대승]을 닦아서 부처의 지견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인지(因地)의 발심이 과지(果地)의 깨달음과 더불어 같은가 다른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아난아. 만약 인지에서 생멸심(生滅心)을 근본 수행의 원인으로 삼아서, 과지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승(佛乘)을 구하려 한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모든 세계[器世間]를 분명하게 살펴보아라. 만들어진 것들은 모두 다 변하고 없어진다. 아난아. 네가 세상에서 만들어진 존재들 중에 무엇이 무너지지 않는지 살펴보아라. 그러나 허공이 부스지고 무너진다는 말은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허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의 몸 가운데 단단한 것은 땅이 되고, 축축한 것은 물이 되며, 따뜻한 것은 불이 되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 된다. 이 네 가지 사대(四大)가 얽혀서 너의 맑고 원만하고 묘하며 깨어있는 밝은 마음[妙覺明心]을 분산시켜,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것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겹으로 쌓여서 혼탁하여졌다. 어떤 것을 혼탁[濁]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맑은 물은 청결한 것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인 것처럼, 저 티끌과 흙과 재와 모래와 같은 종류는 본질이 머물러 막히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바탕의 성품은 서로 순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저 흙을 가지고 맑은 물에 넣으면, 흙은 머무르고 막는 성질이 사라지고 물은 청결함을 잃게 되어, 모양이 어지럽게 되는 것을 혼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의 다섯 겹으로 쌓여 혼탁한 오탁(五濁)도 역시 이와 같다.」
「아난아. 네가 허공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있는 것을 볼 때 허공과 보는 견(見)이 구분되지 아니하여, 허공은 있으나 형체가 없고 보는 견은 있으나 앎이 없다. 이러한 허공과 견정이 서로 짜여서 허망한 세간의 여러 모습[色陰]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둘러싸인 것으로 겁탁(劫濁)이라 하느니라. 너의 몸은 현재 사대가 모여서 바탕이 된 것인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몸에 막혀서 장애가 되는데, 사대를 잘 돌려서 깨달아 알게 한다. 이러한 사대가 서로 짜여서 허망한 세간의 여러 모습[受陰]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둘러싸인 것으로 견탁(見濁)이라 하느니라. 또 너의 마음에 기억하고 인식하고 외우고 익히는 것들이 성품으로는 지견(知見)을 내고[能] 모양으로는 육진(六塵)을 나타내는데[所], 육진을 떠나서는 모양이 없고 지견을 떠나고는 성품이 없다. 이러한 지견과 육진이 서로 짜여서 허망한 세간의 여러 모습[想陰]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둘러싸인 것으로 번뇌탁(煩惱濁)이라 하느니라. 또 네가 아침저녁으로 생멸을 계속하여 멈추지 않으므로 지견이 항상 세간에 머물고자 하며, 업의 흐름은 항상 국토를 돌아다니고자 한다. 이러한 지견과 업이 서로 짜여서 허망한 세간의 여러 모습[行陰]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네 번째 둘러싸인 것으로 중생탁(衆生濁)이라 하느니라. 너희들의 보고 듣는 견문각지가 원래 다른 성품이 없는 것인데 육진에 막혀서 까닭 없이 다름[異]이 생겼다. 성품끼리는 서로 알지만 작용들은 서로 다르니, 같음[性]과 다름[相]이 기준을 잃었다. 이러한 같음과 다름이 서로 짜여서 허망한 세간의 여러 모습[識陰]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둘러싸인 것으로 명탁(命濁)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지금 견문각지를 가지고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계합하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먼저 생사의 근본이 무엇인지 가려내고, 불생불멸하는 원만하고 맑은 성품에 의지하여 공부를 성취해야한다. 즉, 원담성(圓湛性)을 기준으로 삼아 허망한 생멸심을 돌이켜서, 이를 항복받아 원래의 깨달음[元覺]으로 되돌려 원래의 밝은 깨달음[明覺]을 얻은[解悟] 후에, 생멸이 없는 성품으로 수행하는 인지(因地)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과지(果地)의 수증(修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하려고 할 때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고요함이 깊어져서 흔들리지 않게 되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객진번뇌를 처음으로 항복받았다고 하여 초복(初伏)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라앉은 진흙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는 것을 근본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말한다. 그리하면 밝은 모습[明相]이 정밀하고 순수하여,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더라도 번뇌가 되지 않고 모두가 열반의 청정하고 묘한 덕과 합하게 된다.」
❙ 보충
인과(因果)는 동일하다
인지(因地)와 과지(果地)는 동일하다.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처음 발심하여 도를 닦을 때의 마음인 인지(因地)와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인 과지(果地)가 같아야 한다. 불생멸(不生滅)을 구하려 한다면 불생멸의 마음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멸심으로 도를 닦으면 안 된다. 생멸심은 항상 변하는 것이니 망심으로 공부하면 안 된다. 처음 발심할 때부터 진심과 망심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수행하면서도 늘 점검하여야 한다. 허공 꽃에 열매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진짜 열매는 아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인지(因地)(첫마음)(발심) = 과지(果地)(끝마음)(정각)
인지(첫마음)와 과지(끝마음)는 모두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만 바꾸면 깨닫게 된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하였다. 수행을 하면서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분별심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일어나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조작하는 분별심이 멈추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땅[地]은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땅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맺는다. 마음에 깨달음(보리)의 씨앗을 뿌리면 마음땅에서 깨달음의 열매를 맺는다. 원인[因]은 출발한다는 뜻이다. 첫출발은 발심(發心)이며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리심은 자비심에서 나온다. 자비심은 중생의 괴로움에서 나온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심에서 보리심이 나온다. 법회가 끝난 후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하는 이유가 보리심이다.
현상 세계[器世間]는 만들어진 것이기에 결국은 변하여 없어진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여 성주괴공(成住壞空) 및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만들어진 것[可作之法]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으로서 여몽화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은 것이기에 결국에는 없어진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는 공심(空心)으로 하여야 한다. 마음속에 망심(분별심)이 가득 찬 상태에서 공부를 해봤자 헛일이다. 홍삼을 먹을 때는 공복에 먹어야 효과가 좋다.
오탁(五濁)은 오음(五陰)이다
생멸심으로는 불생불멸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면 생멸심(生滅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혼탁한 것이 왜 생겼는지부터 밝히셨다.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에는 사대(四大)가 없는데 결암위색(結暗為色)과 상상위신(想相為身)으로 인하여 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내 몸에 있는 내사대(內四大) 또는 신중사대(身中四大)는 지[地.堅相] 수[水.潤濕] 화[火.煖觸] 풍[風.動搖]을 말한다. 내 밖에 즉 우주에 있는 것은 외사대(外四大)라 한다. 사대(四大)는 물질(몸)을 구성하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견문각지로 인식하게 하는 원인도 된다. 이에 보고 듣고 하면서 혼탁함이 일어나게 된다.
본각(本覺)이 까닭 없이 분별심을 일으켜 육식[六識.見聞覺知]으로 분화되어 오탁(五濁)이 생겼다. 오탁은 본성인 여래장을 어둡게 하는 것이며, 중생의 분별망상이 생기는 과정 또는 마음이 오염되는 상태를 단계별로 말한 것이다. 겁탁(劫濁) 견탁(見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명탁(命濁)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오탁은 불멸(佛滅) 후 시간이 흘러서 중생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능엄경과는 다르다.
청수(清水)는 묘각명심(妙覺明心)인 본심으로서 본래 혼탁함이 없으므로 진토(塵土)인 사대(四大)와 섞이지 않는다. 물의 본모습은 맑은 것이고, 흙의 본모습은 머물러 막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본래 성질이 서로 다르다. 물과 흙은 상극이다. 물과 흙을 혼합하면 맑은 물이 혼탁해진다. 우리 몸도 물과 흙이 섞인 것과 같다. 오탁(五濁)이 오음(五陰)이다. 겁탁(劫濁)은 색음(色陰), 견탁(見濁)은 수음(受陰), 번뇌탁(煩惱濁)은 상음(想陰), 중생탁(衆生濁)은 행음(行陰), 명탁(命濁)은 식음(識陰)이다.
흙탕물처럼 혼탁한 생멸심을 맑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정념(正念) 또는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번뇌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진다. 이 상태를 심청정(心淸淨) 또는 마음청정이라 한다. 이를 근접삼매, 간접삼매, 찰나삼매라고 한다. 알아차림 수행을 통하여 혼탁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생멸심을 가라앉혀서 없애는 수행이다.
진심(眞心)인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무명(無明)을 일으켜, 주객(主客)으로 갈라져서 윤회를 하는데, 부모를 만나서 몸과 마음을 받는다[假身.名色]. 죽어서 업식(業識)이 부모를 통해 몸과 마음[名色]을 가지고 태어난다[五蘊.12연기]. 오탁(五濁)은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 식[識.영혼]이 몸과 어떻게 결합하여 사람으로서 작용하느냐 하는 설명이다.
탁(濁)은 공적영지인 청정한 놈(진심)이 어째서 중생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물질에 결합하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오탁과 아기가 태어나는 것의 관계를 보면, ①겁탁(劫濁) (色陰) 견정과 색공이 마주쳐서 허망을 이루듯이 태중에서 육정과 태아가 합친다. ②견탁(見濁) (受陰) 태중에서 아기가 커지면서 견문각지 작용을 한다. ③번뇌탁(煩惱濁) (想陰) 태어나서 분별을 일으킨다. ④중생탁(衆生濁) (行陰)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윤회한다. ⑤명탁(命濁) (識陰) 생명이 지속된다.
따라서 현재의 오탁(五濁) 상태를 알고 진심(眞心)을 찾아내야 한다. 진심인 공적영지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과를 얻을 수 있다. 진심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수행해야 한다.
겁탁(劫濁)
공견불분(空見不分) 허공과 견정이 둘이 아니다. 허공과 견이 구분되지 아니한다. 보는 견[見精.주체]과 보이는 허공[色空.객체]이 구분이 되는가? 상식적으로는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고 하지만, 눈은 보는 기관일 뿐이고, 보는 놈[견정.보고 아는 놈]은 따로 있다. 보는 놈은 견정(見精)이라 하는데 그러면 견정과 실제로 보이는 허공(색공)은 같은 놈이다. 모두 같은 견성(見性)에서 나온 것이다. 허공(색공)을 볼 때 여기는 허공이고 여기는 견정이고 하는 구분이 되는가? 구분이 안 된다. 따라서 허공과 견정이 다른 놈이 아니다. 허공과 견정이 둘이 아니다. 나하고 허공이 다르지 않다. 내가 바로 허공이다. 허공이 바로 나다. 일체가 허공 안에 있으니, 보이는 것도 허공 안에 있고 들리는 소리도 허공 안에 있다. 나하고 허공하고 따로 떼놓을 수가 없다.
유공무체(有空無體) 유견무각(有見無覺). 허공은 있으나 바탕(형체)이 없다[有空無體]. 허공은 실체가 없으니 바탕이 없다. 그러나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일체가 다 허공 안에서 일어난다. 견은 있지만 알지를 못한다[有見無覺].
견정(見精)(주체) - 색공(色空)(허공)(객체) - 안식(眼識)
주체와 객체가 마주칠 때 안식[眼識.앎]이 일어난다. 따라서 원래 견(견정)에는 식(識)이 없다. 즉, <내> 가 있어서 <눈> 을 통해서 색공을 <본다> 가 아니고, 견정과 색공이 마주칠 때 안식(앎)이 일어난다. 이 안식을 가지고 '내가 본다' 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나' 는 없다. 왜 안식이 일어나느냐 하면 본래 나는 영지(靈知)한 놈이기 때문이다. <나> 는 없고 <영지> 만 있다. 그래서 무아(無我)인 것이다.
보는 것은[見大] 막히지 않으면 널리 볼 수 있다. 허공과 보는 견은 막히지 않기 때문에 공대(空大)와 견대(見大)는 구분되지 않는다. 허공은 존재하지만 형체(모양)이 없다[無體]. 보는 견(見)은 있으나 느낌[覺]이 없다[無覺]. 견은 막힘없이 허공을 보지만 앎은 없다.
한 생각이 일어나 몸을 형성할 때가 겁탁(劫濁)이다. 청정본연한 자리에서[無爲] 한 번 유위법으로 변할 때가 곧 겁탁이다. 능엄경에서는 처음 시작[有始]이 바로 겁탁이며 말세에 일어나는 재앙과 재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처음 형태가 시작될 때가 겁탁이다. 유시이전(有始以前) 또는 공겁이전(空劫以前)은 청정한 자리이다. 공겁이후가 겁탁이다.
견탁(見濁)
몸은 사대(四大)가 모여서 바탕이 된 것인데[四大所造色], 모든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인 견문각지가 몸[六根]에 막혀서 장애가 되어 정확하게 인식을 못하게 한다. 원래 사대[몸.육근] 자체는 각지(覺知.앎)가 없는데, 사대의 성(性)이 잘 조직되어 각지작용을 일으킨다. 몸[육근]을 의지해서 보기 때문에 보는 것을 혼탁하게 한다. 자동차의 부품들은 아무 작용을 못하지만 잘 조립하면 굴러간다. 불을 때니까 열이 나고 바람이 부니까 움직인다. 시체는 견문각지를 못하지만 사대가 합쳐져서 맨 처음 시각작용을 일으킨다. 다만, 몸을 의지하므로 견해가 탁하다.
번뇌탁(煩惱濁)
지견(知見)은 육식(六識)을 내는 것을 말한다. 시각작용 등 여섯 가지 작용을 나타낸다[想陰]. 대상에 영향을 받아 번뇌가 일어난다. 육근과 육진이 상대하여야 육식이 나타나고 상음이 이루어진다. 육근과 육진은 독자적으로는 아무런 작용이 생기지 않는다. 이것들이 서로 짜여서 허망함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번뇌탁(煩惱濁)이다.
중생탁(衆生濁)
태어나서 세상에 오래 머물려고 한다. 태어나서 살 때는 순습(順習)을 따른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간다[生從順習].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좋아하는 대로 산다. 자기 비위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안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세상에 살기를 탐낸다. 이에 업운(業運)은 항상 국토(생활터전)를 돌아다니고자 한다. 이것들이 서로 짜여서 허망함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중생탁(衆生濁)이다. 계속하여 업을 짓고 윤회한다.
명탁(命濁)
본래의 마음자리인 진심에는 다른 성질이 없다. 본래 평등한 진심자리인데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서로 다르게 되었다. 진리는 하나인데 나누어지는 것이 다르다[理一分殊]. 본성인 여래장 묘진여성에서는 서로가 다 안다. 둘이 아니다. 보는 놈이 듣는 놈이고 듣는 놈이 보는 놈이다. 하나의 마음(진심)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그러나 육근의 작용은 서로 다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서로 다르다. 같음[性.體]과 다름[相.用]이 기준을 잃게 되어 같음과 다름으로 갈라진다. 이것들이 서로 짜여서 허망함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명탁(命濁)이다. 육근과 육진이 어울리면 생명이 존재하고 분리되면 목숨도 사라진다[命濁]. 기신론에서는 명근(命根)이라 하여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수명)이라 한다. 명탁은 식음(識陰)에 해당된다. 제8식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해오(解悟) 후에 증오(證悟)할 수 있다
깨닫기 前의 생멸심(生滅心)으로 깨달은 後의 상락아정(常樂我淨)에 이를 수는 없다. 여래의 열반 자리에 이르고자 한다면, 생사의 근본(번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서, 번뇌와 상관없는 여래장 묘진여성에 의지하여 공부해야 한다. 불생멸심으로 공부해야 하고 생멸심으로 공부해서는 안된다. 오탁이 생멸심이다. 이렇게 공부하면 부처님과 같은 상락아정을 이룰 수가 있다. 불생멸심을 인지심으로 삼아서 공부해야만 과지(성불)를 얻을 수가 있다. 깨달은 후에는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번뇌가 되질 않는다.
인지(因地)(첫마음) → 과지(果地)(끝마음)
생멸심(生滅心)을 인지(因地)로 하여 불생멸(不生滅)의 과지(果地)를 얻을 수는 없다. 처음 출발하는 마음이 불생멸심이라야 불생멸의 과지를 얻을 수 있다. ①따라서 먼저 해오(解悟) 후에 수행하여야 한다[伏還元覺 得元明覺]. 수행하기 전에 문사(聞思)를 통하여 진심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②해오 후에 수행을[修]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證悟] 불생멸의 과지를 얻을 수 있다[然後圓成果地修證].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수행하여야 한다. 수행방법은 사마타 후 위빠사나를 한다. 이를 통하여 열반사덕(涅槃四德)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는다. 진흙이 없는 상태의 맑은 물을 아무리 휘저어도 더러워지지 않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하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늘 청정한 마음을 유지한다. 이것이 해오(解悟)와 수증(修證)후에 깨달은 증오(證悟)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