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계명
제목 : 최고의 계명
성경 : 막 12:28~34
찬송 : 218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42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6.25 한국 전쟁 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추운 겨울 만삭의 한 여인이 피난길에 진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상황이라 여인은 근처에 있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혼자서 아기를 낳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갓난아기를 위해 자기의 옷을 벗어 아기를 감싼 후 몸으로 품었습니다. 그날 밤 여인은 추위로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미군 장교가 지프차 기름이 떨어져 멈췄습니다. 미군 장교는 부대에 무전을 한 후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장교는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갓난아기를 품은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얼어 죽어 있었고 갓난아기는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교는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춘 것은 아기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행각하고 아기를 입양해 키웠습니다. 그 아이는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출생에 대해 늘 궁금했는데, 어느 날 양 아버지로부터 친어머니의 희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와 어머니의 묘를 찾아 자기 옷을 벗어 어머니 묘를 덮으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평생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습니다!”
√한 서기관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오늘 본문에는 한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서기관은 문자적으로는 ‘글을 필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정 관직을 의미했으나 포로기 이후 율법과 관련한 일을 하는 전문 직종이 되었습니다(스 7:11). 율법을 필사하다 차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했고, 신약 시대에는 율법사나 율법학자로 불렀습니다(마 22:35; 눅 7:30).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으로, 오랜 시간 엄격한 훈련을 거쳐 서기관이 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랍비’라고 불렸는데, 예수님은 선생 되기 좋아하고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높은 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해 세세한 규칙을 만들고, 백성의 종교 및 일상생활에 율법을 적용시키면서 백성을 지배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이 248개,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365개로 전체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한 서기관은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을 듣다 사두개인들이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도록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또한 지혜롭게 대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마가가 서기관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한 분’이신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마가는 이 단락에 등장하는 서기관을 유독 강조하는데, 그는 서기관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곧 여러 서기관 중에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입니다. 마가는 이렇게 형용사 ‘하나’를 강조합니다. 그 ‘하나’의 이미지를 하나님께 적용합니다. 이스라엘이 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 점을 32절에서도 재차 강조합니다.
√2)성경의 근본 가르침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째’(29절), ‘둘째’(31절)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서기관이 ‘첫째’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리적 대응일 뿐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한 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 것입니다. 이 점은 “이「것들」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이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와 이 서기관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별개가 아니라 서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34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계명 : 하나님 사랑
서기관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스라엘에는 ‘쉐마’라는 신앙신조(신 6:4~9; 11:13~21)가 있습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우리 성경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쉐마 이스라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첫 단어 ‘쉐마’(들으라)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쉐마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암송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이 든 작은 상자(테필린)를 팔이나 이마에 착용해 일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쉐마 첫 부분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를 인용하십니다. 이는 십계명 제 1계명의 중심이며 신앙의 대전제인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열심 있는 서기관에게 그분의 가르침이 율법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의 연장선에서 완성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 금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계명을 으뜸으로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다하다’(홀로스)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사랑하는 뜻이 아닌, 전폭적이고 전의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전 인격과 모든 정성과 모든 능력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예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준비부터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미리 예배를 준비합니다. 헌금을 준비하고, 의복을 준비하고, 은혜받기 위해서 기도로 준비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준비 없이 건성나발로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 찬송가를 펼쳐본 일이 없이 먼지가 가득한 채로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나온 예배에서 과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 예배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으로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배를 위한 형식과 절차는 철저하게 지켰지만, 정작 예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 걸친 반쪽 신앙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하십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이토록 놀라운 것들을 예비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지성과 의지를 드려서, 생명 다하기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먼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계명 : 이웃 사랑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두 번째 계명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실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정작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살던 거류민들을 가리킵니다.
√레 19: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일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가는 길은 요즘은 넓은 도로가 나있어 손쉽게 자동차를 이용하여 갈 수 있었지만 옛날에는 넓은 도로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고불고불한 산길을 통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옛날 중학교를 다닐 때 20여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아주 고불고불한 산길을 지나야 갈 수 있었습니다. 낭떠러지 길이라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은 아마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서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후에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 역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섬기는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피하여 지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이 사람을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리라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질문합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 교사가 대답합니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강도 만난 자들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강도 만난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면하고 피하여 지나갔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서기관은 뭐라고 말합니까?
√막 12: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은 ‘선생이여 옳소이다’(칼로스 디다스칼레)라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맞습니다. 선생님이여’입니다. 또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다’(에피 알레데이아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하나님이 한 분인 것과,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구약 전승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잠 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 12: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고 칭찬하십니다. 곧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끝나자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여러분!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작은 것 까지도 빠르고 부지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귀찮아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웃을 도와줄 때도 귀찮아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따뜻하고 자상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관대하다면 이웃을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웃은 유익을 위해 내 유익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똑같이 또는 그 이상으로 이웃을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인내와 끈기로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인내와 끈기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미루지 말고 곧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은 내 본성과 같고 내 마음과 비슷하기에, 나와 이웃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계명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입니다. 두 개로 나눈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생명이 다하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성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재능과 물질로, 몸으로 봉사하며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이웃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본주의적 신앙이 됩니다. 이웃 사랑은 인간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 힘쓸 때, 이웃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최고의 계명을 지키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