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영적 위기와 함께 시작되는 그녀의 여정(아1:5-11)
Ⅰ. 신부의 여정 시작 : 은혜의 역설 ‘검지만 사랑스러움’
(아1:5-6) (5)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마음은) 검으나 (하나님께는)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내가 …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라
A. 신부의 영적 여정은 그녀가 했던 믿음의 2가지 고백 (아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신실한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영적 위기와 함께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녀가 자신의 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움 또한 보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신실하지만 아직 연약한 신자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B. 우리는 약함 가운데서도 4가지 이유에서 하나님께 아름답습니다. 첫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을 받는 데서 따라오는 것입니다(고후5:17-21). 둘째, 거듭나면서 성령님은 우리 영에 하나님을 향한 ‘Yes’를 심어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모든 움직임은 우리 안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불리는 그분의 일 때문입니다 (시51:12, 마26:41). 셋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감정적 조성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그 감정과 열정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느끼시는지를 결정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보십니다(삼상16:7, 사55:7-9). 넷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의 렌즈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C.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3단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신실한 의도는 승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둘째, 우리는 부분적으로 돌파해 내지만, 아직 계속 싸우게 됩니다. 즉 규칙적으로 승리하지만 여전히 특정한 영역에서 육신과의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갈5:16-17). 셋째는 변화된 갈망을 가지고 많은 부분을 돌파해 냅니다(롬6:14-23)
Ⅱ. 그녀의 영적 위기: 거절과 수치
(아1:6-7) (6)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예수님)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A. 그녀는 아1:6-7에서 영적 위기와 연관도니 5가지 서로 다른 압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 때문에 그녀를 흘겨보는 이들로부터 수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화가 난 형제들로부터 거절을 당했고, 다른 포도원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과로하고 있으며, 자신의 포도원(마음)은 예수님과의 신선한 사랑으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고, 예수님을 멀리서 섬기고 있습니다.
B. 그녀는 자신의 형제들을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교회의 수고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아가서(1:6, 3:4, 3:11, 8:2, 8:5)에서 어머니는 교회를 지칭합니다. 바울과 다른 이들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과 새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갈4:19, 26, 살전2:6-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은 그분의 어머니이고 형제입니다(마12:46-5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시고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를 뜻합니다. 교회의 설립자이신 예수님은 여인의 씨로부터 나신 분입니다(창3:15). 구속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어린 남자 아이로 낳는 어머니라고 표현됩니다(계12:5)
C. 아들들은 그녀의 젊은 열정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어린 신자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늙고 영적으로 둔감한 리더들을 가리킵니다. 왜 입니까? 첫째, 열정적인 신자들은 영적으로 둔감한(종종 율법주의로 영적 열정을 눌러버리는) 신자들에게 자각을 가져다 줍니다. 둘째, 조절되지 않은 열정과 열정적 신자들의 교만은 때때로 영적으로 둔감한 신자들을 화나게 합니다. 우리의 열정은 지혜와 겸손과 함께 길들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있는 이들은 보통 다른 이들로 하여금 온 마음을 드리도록 초청하는 방식에 있어서 자기 집중적이고 교만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을 표현하지 않는 이들을 정죄합니다.
D. 그녀는 다른 포도원들에 대한 많은 책임감을 부여 받음으로써 그녀의 열정을 이용하며 과로하게 만드는 화가 난 아들들에 의해 잘못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영적으로 소진 Burn-out 되었습니다. 소진은 성령님과 연결됨 없이 일하는 종교적인 멍에에서 오는 것이지 단순히 힘든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혹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갈망에서 너무 많은 책임감을 맡는 것이 소진을 가져옵니다.
E. 그녀는 다른 포도원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의 포도원 (마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첫째 책임은 예수님과 함께 우리 자신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원래 그녀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포도원 곧 그녀의 마음의 정원은 영적 냉랭함, 죄, 수치의 잡초들로 덮여 버렸습니다. 자신의 포도원을 가꾸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풍성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1:6) 그들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F. 그녀는 멀리서 예수님을 섬기는 고통을 느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님과 연결됨 없이 일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멀리서 목자를 섬기는 얼굴 가린 여인과 같이 느낍니다.
(아1:7) (7)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 … 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고대에는 친근하지 않은 낯선 이방인과 함께 일할 때 여인들이 얼굴을 가렸습니다. 왜 제가 길 아래에서 섬길 뿐, 이전에 하던 대로 당신 곁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까? 이 2가지는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로부터 멀리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녀는 그분이 있는 어느 곳이든지 그분과 함께 하기 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 달콤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과 주님의 방에서의 경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Ⅲ. 더욱 예수님을 갖고자 하는 결사적인 그녀의 간구
(아1: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이 어디서 당신의 양떼를 치시는지, 정오에 어디서 쉬시는지 말해주세요. 제가 왜 당신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처럼 있어야 하나요?
A. 그녀는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과 방에서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결사적으로 간구합니다. 그녀는 위대한 목자에게 위로를 구합니다. ‘말해주세요. 당신은 어디서 양 떼를 치시나요?’ 우리가 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사랑스럽다ㅑ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이런 결사적인 간구를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외칩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 내게 말해주세요’ 그녀는 연약한 사랑 가운데 실패했다는 것을 압니다. 연약한 사랑은 거짓도니 사랑이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연인입니다. 그녀는 원수들이 믿게 만들고 싶은 절망적인 위선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위기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둔감한 가운데서도 진실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게 말해주세요. 나는 소망 없는 위선자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의 연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 당신은 제가 이미 당신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B.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결사적입니다. 사역 활동과 승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분이 그분의 양떼를 치시는 곳을 알기 원합니다. 이것은 ‘나를 이끌어 데려가소서!’라는 기도의 표현입니다.
C. 정오, 즉 낮의 열기 가운데 양은 배가 부르다면서 눕습니다. 하나님은 낮의 열기 즉 인생의 압력 속에서 그저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연결된 가운데 쉼을 주기 원하십니다. 양은배가 부른 정오에 그저 눕기만 합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D. 그녀는 목자의 언어로 기도를 드립니다. ‘한 낮의 열기 가운데 있는 제가 당신의 어느 곳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까?’ 그녀는 다시 예수님으로 만족하며 정오에 쉬기를 갈망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다른 이들이 저를 먹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당신이 저를 먹이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디서 제 영의 간구를 만족시켜 주시겠습니까?
E. 예수님은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하길 갈망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포기하고 영적으로 둔감한 삶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소망 없는 위선자라고 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대로 저를 먹여주세요. 저는 얼굴을 가린 여인입니다. 저는 지금 멀리서 섬기고 있습니다. 저의 포도원에 잡초가 무성합니다. 많은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실패했고 사람들은 제게 화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분을 만지기 원합니다’라고 간구할 때 그분은 기뻐하십니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던지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을 다시 태울 그분과의 친밀함의 불을 원합니다. 그녀는 그분이 다시 먹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Ⅳ.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응답 : 7가지 중요한 선언들
(아1:8) (8)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A.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결사적인 기도를 들으시고(아1:7),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응답하십니다(아1:8-11). 그분은 그녀에게 어디서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7가지 선언을 하십니다. 첫째, 그분의 눈에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확언해 주십니다. 그리고서 3가지 답을 해주십니다(1:8), 그 후레 3가지 확언을 하십니다(아1:9-11). 그녀는 큰 감사로 반응합니다(아1:12). 거룩한 열정의 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의 응답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부의 여정 가운데 그녀에게 주어진 첫 계시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놀라운 상담자’ 혹은 연약함 가운데서 그녀가 어떻게 나아야 할지 실제적인 조언을 하시는 ‘목자’로 나타내십니다
B. 그분은 신부를 ‘여인 중의 아름다운자야 O fairest of women’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어 ‘fair’는 성경 대부분 번역본에서 ‘아름다운(우리말: 어여쁜)’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너의 정원에 잡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멀리서 섬기고 있지만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의 간구를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에 구애하고 계십니다
C. 예수님은 ‘네가 지금 몰랐다면’라고 하시면서 시작하십니다. 그분의 응답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질책을 기대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원이 지켜지지 못했고 멀리서 그분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잘못 방향을 맞추고 실패한 가운데서도 그분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부르십니다. 화가 난 아들들에게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께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멸시할 수도 있지만, 그분 안에서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그녀의 수치아 거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D.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부르십니다. 이 땅 곧 예수님을 멸시하는 잘못된 종교 안에 있는 다른 여자들의 시야에서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녀를 성숙한 사도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는 50-60억의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향해 강렬한 관심이 있으며 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E.아1:4에서 신부는 딸들에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함 가운데서도 그녀를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하시면서, 그녀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다’라고 부르시면서 위기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F. 어디서 그분이 양떼를 치시는지,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어디서 우리를 세우시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3가지 답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모든 3가지 답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3가지 가장 강력한 유혹에 대한 응답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삶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1:8)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삶에 대한 헌신(8) : 거룩하지 않은 고립을 거절
종 된 사역에 대한 헌신(8) : 거룩하지 않은 게으름을 거절
영적 권위에 대한 헌신(8) : 거룩하지 않은 독립을 거절
G. 가까이 하는 것은 친밀한 것이기에 홀로 행하는 것입니다. 뛰는 것은 사역이기 때문에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 가운데 고립되거나 게으르거나 독립적인 영을 가지고 뛰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H. 첫째는 거룩하지 않은 고립을 거절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의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아1:8). 그분은 그녀가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오라고, 즉 그리스도 몸의 교제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양떼의 발자취는 모든 양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장소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교제 가운데로 돌아가라. 너를 판단하고 잘못 다루는 화난 아들들에게 과잉반응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큰 고립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갈망에서 동기부여된 것이 아니라, 거절, 쓴 뿌리, 수치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우리가 고립되기를 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히10:25)
I. 둘째, 거룩하지 않은 나태를 거절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들을 돌보는 것입니다(아1:8). 우리는 우리 앞에 맡겨주신 어린양 떼를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어린 양 떼 혹은 어린 영혼들을 먹여야 하는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그분 자신을 보다 많이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J. 셋째, 거룩하지 않은 독립성을 거절함으로써 영적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참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린 영으로 우리를 그 아래에 두신 목자(리더)들을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무법의 영이 가득합니다(마24:12). 하나님께서는 현재 당신의 위에 두셨거나, 앞으로 있을 모든 리더들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리더와 관계하면서 깊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리더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다루시며, 우리 마음에 정리되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워두신 불완전한 리더의 잘못을 볼 때, 가르침을 받으려는 영으로 그들의 장막에 거하는 것에 저항하려 하는 유혹을 받게됩니다. 순복하는 것은 겸손에 대한 것이며, 권위를 향해 열린 영을 갖는 것입니다.
K. 요약 : 예수님의 3가지 답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3가지 주요 유혹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느낀다거나 화난 아들들에 의해 잘못 다뤄지고 거절당할 때 나타나는 고립과 쓴 뿌리의 유혹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교제 가운데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기심과 두려움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셋째는 영적 권위에 저항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Ⅴ. 그녀의 신실함은 주님으로부터 다시 확인됩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1:9-11)
A. 아1:9-10에서 그분은 그녀가 지닌 신실함과 자원하는 심령의 사랑스러움을 재확인하시는 3가지 것으로 그녀를 비교하십니다. 그리고서 그분은 아1:11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첫 번째 일은 그녀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에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을 가지고 그녀의 마음에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은 의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신실하고 강력한 그녀의 갈망을 보십니다. 그녀는 바로의 병거 가운데 준마입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아1:9)
준마는 말입니다. 말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의안에서 그녀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준비된 말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힘을 그렇게 비유하십니다.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준비되고 강력한 전쟁 말입니다. 이집트의 말은 당시 전 세계에 그렇게 알려졌습니다. 바로는 세상에서 최고로 훈련되고 준비된 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병거를 끌기 위해 이집트의 모든 말들 가운데 최고를 선택했습니다. 바로에게는 자신의 마구간에 수천의 말들이 있었고 자신의 병거를 끄는 말은 그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은 바로의 말들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있었던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C. 우리의 감정은 그분에게 매력적입니다. 그분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만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에 감정적인 차원을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그녀의 헌심으로 만지십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아1:10)
뺨은 아가서 가운데 감정을 의미합니다. 뺨은 화, 기쁨 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뺨을 볼 때,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지 혹은 화나 슬픔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은 뺨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2. 장신구(역주 – 우리 말 성경에는 땋은 머리털)는 그 대상을 아름답게 햐려는 예술가의 좋은 손재주에 의해 창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려고 일하고 계신 예술가이십니다(사61:3). 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음욕과 분노를 보시지만, 우리 안에 그분을 향해 자라가는 열정 또한 보십니다. 하나님은 ‘너의 감정은 사랑스럽구나! 내가 네 안에서 솜씨 좋게 일하면서 나의 아들에게 ‘Yes’가 되게 하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 하나님은 그녀가 그분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과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한 그녀의 의지를 보십니다
네 두 뺨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1:10-11)
목은 상징적으로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경은 목이 곧은 사람들 즉 강퍅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목은 또한 거룩한 순종을 말하기도 합니다. 목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서 머리를 돌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왕이 다른 나라를 이겼다면, 정복한 장군은 순복을 나타내려고 패배한 나라의 왕의 목을 밟습니다
금사슬은 최고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오직 왕만이 금사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왕 곁에서 금사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금사슬은 왕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왕의 상징이 새겨진 금사슬은 오직 왕자만이 도시를 거닐면서 걸칠 수 있었습니다
Ⅵ. 주님은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마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1:11)
A. 금으로 만든 장신구는 하나님의 속성을 뜻합니다. 금과 그녀의 성품은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불로 연단된 성도들 뜻합니다(말3;1-4), 은이 박히는 것은 구속을 뜻합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구속을 전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준비된 것입니다
B. ‘우리가 만들리라!’라는 것은 그녀 안에서 그분의 일을 마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당신은 나를 어디서 먹이실 건가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속성(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은으로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넘어지는 부분에 승리를 약속하셨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구속에 관여하는 자들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제11부 신부의 패러다임 : 기초적인 진리들(아1:12-17)
Ⅰ 아1:5-17의 복습과 조망
A. 신부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디서 나를 먹이실 건가요 (1:7)?’ 그분은 그녀에게 7가지 답을 주시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선언하십니다(1:8). 그리고서 그분은 3가지 교훈(1:8)을 주시고, 3가지 확언(1;9-11)으로 격려하십니다
B. 예수님께서 그분의 식탁에서 그녀를 먹이시자, 그녀는 3가지로 반응합니다(1;12-14). 그녀의 마음이 지켜지지 않은 포도원(1:5-7)처럼 검지만, 약함 가운데서도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 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 고벨화 송이로구나(아1:12-14)
C. 그 후 그녀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더 큰 계시를 받게 됩니다 (1:15). 신부는 5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잘 생긴 분(아름다우신 하나님), 그녀가 사랑하는 분(내 사랑하는 자), 그녀로 하여금 지금 쉬게 하시어 즐겁게 만드시는 분,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Ⅱ. 십자가에 대한 묵상 :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유익 (아1:13)
나의 사랑하는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아1:13)
A. 그녀는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와 공급을 받게 됩니다(롬3-8장)
B. 몰약은 인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에서 다양한 나무와 관목에 의해 생산되는 향기나는 고무 수지입니다. 그것은 매우 비싼 것이고 향수(잠7:17), 화제에 붓는 기름(출30:23) 장사를 지낼 때 시체에 바르는 데(요19:39-40)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쓴맛이 납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예수님의 출생에 그분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상징으로 몰약을 가지고 왔습니다(마2:11).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몰약을 받으셨습니다(마15:23).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시45:8)
C. 몰약은 우리의 육신적 방법에 대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실재가 향기롭지만 쓴 것임을 의미합니다.
D. 에스더가 아름답게 준비하는 데에는 다른 향료와 몰약으로 목욕해야 했습니다(에2:12). 몰약은 아가서에 8번 나옵니다(1;13, 3:6, 4:6, 14, 5:1, 5, 13)
E. 고대에 부유한 여인은 밤에 향기를 내려고 몰약 목걸이나 향주머니를 가지고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솔로몬은 그녀에게 이 아주 비싼 선물을 준 것입니다.
F. 신부는 예수님이 마치 밤에 그녀의 마음에 놓인 몰약 향주머니와 같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왕 예수님께서 신부에게 주신 아주 값비산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넘치게 부어주는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를 위해 그분이 참아내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치에 대한 선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창1장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셔서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맺으실 길을 만드셨습니다.
G. 몰약은 그녀의 마음에 밤새도록 있습니다. 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녀의 유혹과 시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에 항상 남아 있습니다.
H. 우리는 영원히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어린양을 보며 놀랄 것입니다(계5:8-12). 우리가 진정 그분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알게 될 때,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은 감사로 압도당하며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끝없는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놓인 몰약 향주머니로 생각할 것입니다.
I. 우리는 그것을 밤낮으로 우리 마음에 둘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할 때 끊임없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아1:4). 가장 순종적이면서 예배하는 성도는 십자가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속적인 묵상이고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에 절대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에게 지루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Ⅲ. 예수님의 아름다우심과 즐거움에 대한 계시(아1:14)
A. 예수님은 그녀에게 활짝 핀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벨화 송이셨습니다. 고벨화는 향기로운 꽃이 피는 작은 나무, 관목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시를 가진 이들에게 고벨화 송이이십니다. 그분은 종교가 잘못 선포하는 지루하고 무거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1:14)
B. 우리가 진리 안에서 그분을 이해하게 될 때, 예수님의 명령은 힘겨운 것이 아니고 그분의 멍에는 쉬운 것입니다.
…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내 명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C. 예수님의 인격은 꽃의 ‘송이(묶음)’와도 같습니다(역주 – 우리 말 성경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번역에는 뭉치 혹은 다발입니다) 그분은 한 송이라기보다는 다발이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엔게디의 포도원은 풍부한 향기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향기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5:16)
D. 우리는 온 세상에 ‘고벨화 송이’이신 예수님의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진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면, 훨씬 쉽게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절함으로 가득한 아름다우신 하나님에 대해 전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취하게 하는 향기롭고 달콤한 하나님이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여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최소화)하느냐(롬2:4)
Ⅳ. 신부는 왕의 식탁에서 먹습니다: 그녀 안에 예배가 이러납니다(아1:12)
A.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선물(고후5:21)에서 오는 십자가와 그 유익 위에 우리를 먹이시는 식탁을 제공하십니다(고전10:21). 신부는 구원에 연관된 진리들 위에서 먹이시는 그분의 식탁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들은 그녀로 하여금 향기롭게 올라가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이것은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의 식탁에 앉는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눅15:20-28).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아1:12)
B. 그녀의 예배는 하나님께 향유spikenard의 향기처럼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다. spikenard는 문자 그대로 ‘pike of nard – 향유, 나드 향기가 급격하게 치고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나드는 비싼 향수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인도의 식물입니다
C.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이시는 것은 향수같이 우리 영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올라가는 예배를 만들어 냅니다.
D. 우리가 그분의 식탁으로부터 받은 공급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우리의 영으로부터 올라가는 향기를 주님을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것은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진 이들 안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고후2:14-16)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E. 눅7장에서 창녀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뛰어 들어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향수 한 병을 깨뜨렸습니다. 방을 가득 채운 향수는 예수님께서 보신 그녀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F. 우리는 우리 영혼의 원수 앞에서도 주님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왕의 식탁에서 먹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 영은 수치와 정죄감으로 굶주리게 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시23:5-6)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G.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것과 같은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인식하고 보게 되어 있습니다(고후5:21). 우리는 죄의 판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살아있는 자들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게 당신의 의를 주셔서 나를 살리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우리가 살아있음을 보여드리게 됩니다. 정죄감으로 가득한 거지가 되지 마십시오
(롬6:11-13)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8:1)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H. 당신의 영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향기가 하나님께로 올라갑니까? 하나님께서 확신과 감사의 향기를 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내 마음이 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사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해가 부족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우리가 고백할 때 우리의 향기로운 예배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I. 예수님은 모든 원수를 이기신 위대한 왕이십니다. 왕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획이 보존될 것을 신뢰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왕으로서 모든 창조된 질서를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결정하신 것들을 세우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획은 성취될 것입니다.
J. 그녀의 3가지 반응에 대한 요약(아1:12-14) 첫째, 그녀의 삶은 왕의 식탁에서 먹는 동안 향유처럼 일어나는 자발적인 경배와 감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1:12) 둘째, 그녀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몰약을 감내하시며 그녀를 위해 성취하신 일들의 기반 위에 사랑을 지속적으로 공급 받으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1:13). 셋째, 그녀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보고 있습니다(1:14)
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앞에 그녀릐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아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 (아1:15)
A. 이 문단에서 우리는 신부의 패러다임에 기본적인 2가지 진리를 보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안에서 완벽한 그녀의 아름다움과 ‘내 사랑아’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사랑의 감정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녀는 비록 성숙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아1:12-14). 이 기초적인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진리를 보다 크게 받아들이게 준비시킵니다.
B. 4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아름답습니다. 첫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따라오는 것입니다(고후5:17-21). 둘째, 거듭나면서 성령님은 우리 영에 하나님을 향한 ‘Yes’를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이라 불러주신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분의 역입니다(시51:12, 마26:41). 셋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감정적 조성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부드러움 감정과 열정이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를 결정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보시는 분의 눈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과 매우 다르게 보십니다(삼상16:7, 사55:7-9). 넷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영원한 목적의 렌즈를 통해 우리를 보십니다
C. 각 신자는 예수님이 ‘내 사랑’이라고 부르시는 그 사람입니다. 그분은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시며 선택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는 ‘나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이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요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
D.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사랑받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들뜨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나는 내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아름답습니다’라고 확신 있게 고백하게 될 때 가장 빠르고 가장 깊이 있게 영적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신부는 딸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기억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아1:4) 영어 번역으로는 우리는 포도주보다 나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E. 신부의 영적 여정은 2가지 믿음의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아1:5). 그녀가 자신의 죄를 발견해 가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은혜의 모순이라고 부릅니다. 계시가 없으면 우리가 자신의 죄를 볼 때, 더럽고 수치스럽다고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수치스럽다고 느끼면서 계속 수치스런 일을 행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더럽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랑받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성숙하지 못한 신자는 그분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그분께로 달려갈 것입니다.
F.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마음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분이 다른 이들에게 사로잡히신 것을 더욱 잘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합된 교회의 아름다움 또한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성적으로는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그분이 모든 크리스천에게 사로잡히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만 합니다(아4:9)
G. 복습 : 도입 단계로서 그녀는 ‘나는 내 마음이 검지만 하나님께 아름답다’라고 고백합니다(아1:5). 그 후 예수님은 ‘저는 아름답다. 너는 내 사랑이다. 너의 뺨이 아름답다’라고 말씀하십니다(아1:8-10).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께서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아1:12-14). 그분은 이제 ‘저는 아름답다(1;15)’라고 다시 강조하십니다.
Ⅵ. 신부는 비둘기 같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1:15)
A.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의미들이 있습니다.
B. 한 마음 : 비둘기는 다양한 방햐을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똑바로 앞만을 봅니다. 오른쪽이나 왼쪽에 일어난 일로 인해서 굽어지지 않습니다. 비둘기의 눈을 갖는 것은 좋은(한 마음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마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C. 충성 : 비둘기는 단 하나의 짝을 갖습니다. 짝이 죽으면 다시 짝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은 충성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주의: 배우자가 죽었다면 다른 이와 결혼하는 것이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D. 15절에서 그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보는 것의 결국은 단일한 비전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E. 성령님은 비둘기의 눈을 가지신 궁극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한마음이시며, 예수님께 충성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비둘기의 눈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F. 관점 :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인생에 대한 성령님의 관점을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고벨화 즉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 가운데 한 마음이 되어 정죄감을 거절하고 확신에 차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Ⅶ. 그녀의 예배와 믿음 : 그녀의 5가지 반응
(아1:16-17) (16)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A.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의 계시에 대한 신부의 5가지 반응은 비둘기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잘 생기고(아름다우신 하나님),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며, 그녀의 삶을 이끌며 쉼을 주시기도 하고, 지금 현재의 시간에 안전감을 주시며 장차 다가오는 세대에는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즐거운 분으로 바라봅니다
B. 그녀는 예수님께 선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분, 당신은 잘 생기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이시고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 볼수록 그녀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더 큰 영적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16절). 이것은 아2;3-5에 묘사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름답고 즐거운 분으로 볼 때, 온전한 순종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C.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 즉 우리가 그분의 사랑 가운데 거하며 그분께 순종할 때, 하나님과 함게 걷는 것이 기쁘고 즐거워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대화 가운데 이것을 실행하게 됩니다(1:12-17). 우리의 영은 상황이 어려운 때에라도 이러한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요15:9-11)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Ⅷ.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 쉼, 확신 그리고 영광 (아1:16-17)
(아1:16-17) (16)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A.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녀의 삶에 풍부한 쉼과 확신을 가져옵니다(아1:16). 신부는 ‘크고 푹신한 소파’ 혹은 푸른 침상에서 쉼을 얻고 있습니다. 녹색 들판은 때때로 풍성한 들판 즉 풍성하게 자라나는 들판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의지는 편안하고 푸른색으로 생명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사막(황폐한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크고 푹신한 소파 같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B. 주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2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쉼과 확신을 말합니다
용서의 쉼 :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값없는 선물로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 이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해 용서받아 쉼을 누립니다
친밀함의 쉼 :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면서 이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삶에 최상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까지는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예수님의 리더십에 순종하는 지혜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가지 쉴 수 없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안에 온전한 마음이 되는 것에서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됩니다. 용서의 확신을 하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심판 보좌 앞ㅇ서 후회할 것 없는 위대한 인생과 목적을 찾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C.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정죄와 후회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를 향해 종교적이라고 하며 세상이 우리를 향해 어리석다고 할 때에라도, 신부의 패러다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순종을 선택하는 지혜에 대해 확신을 줄 것입니다
D.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아름다움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진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깊은 연합 가운데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침상(소파)을 말하는 것입니다(고전6:17)
E. 그녀는 집(들보)이 백향목으로, 서까래는 잣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1:17). 집의 구조는 숨겨진 것입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솔로몬의 시대에 가장 오래가고 비싸고 아름답고 향기나는 건축 목재였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성전을 지을 때 사용하여 그 구조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전의 목재는 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F. 하나님은 오래가는 집을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은 강력하고 영원하며 견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신부를 위한 영원한 집을 주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집은 강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능력 가운데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집을 ‘우리 집’ 즉 영원히 함께 거할 집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엡2:19-22)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벧전2:5)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제12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신부의 정체성 (아2:1-7)
Ⅰ. 신부의 독특한 영적 정체성 : 그녀의 2가지 고백
A.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영원한 동반자를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엡5:31-32, 계19:7-9). 사랑안에서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기 위해 자원하여 선택하는 신부는 모든 세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유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사랑을 소유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된이유는 그분의 유업인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기쁨과 즐거움을 올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B. 신부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원하는 아름다운 장미와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원하는 순결한 백합화로 그려집니다. 그분의 의는 먼저 그녀를 아름답고 순결하게 한 후, 성령님을 통해 마음에까지 역사하십니다. 신부는 장미꽃입니다. 장미와 백합화는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다음 절에서 백합화를 신부로 동일시하십니다 (아2:2)
(아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영어 성경은 장미로 번역됨)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C. 시적 언어로 신부는 그녀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받으실 유업으로 선언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갈망하시며 자신이 그분 앞에 깨끗하다고 느끼는 것을 반영하는 2가지 고백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 계시는 아1:12-17에서 보이는 기초적인 진리들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신부의 첫 번째 고백은 ‘나는 검지만 사랑스럽습니다(아1:5)’이었습니다. 그녀는 약함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아름답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후 예수님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확언해 주십니다(아1:8, 15)
D. 장미는 그 색과 아름다움과 향기 때문에(꽃 가운데 뛰어난 것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샤론의 장미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시는지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사35:1-2)
E. 그녀는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유업, 즉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아 도취하게 만드는 장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갈망하시는 보상은 단 한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약속하신 바로 그 유업이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나는 당신(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약속하신 바로 그 유업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변하게 됩니다.
F. 우리는 우리가 바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기업이라는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기르시는 장미로 우리를 선택하시는 큰 투자를 하신 것입니다
(엡1:17-19)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G. 그녀는 어두운 골짜기에 자라는 백합화의 순수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백합화는 순수함을 뜻합니다. 골짜기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낮고 어두운 장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에 백합화를 단 하나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그 안에서 걸어가기를 추구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검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아1:5)
H. 첫째, 그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신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하며 순수함을 느낍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거짓 종교들의 가시들 가운데서 순수한 백합화입니다. 둘째,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타고난 권리인 이 순수함 안에서 온전히 걸어가기를 추구합니다
I. 하나님은 우리를 4가지 이유에서 그분의 눈에 아름답다고 보십니다. 첫째,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고후5:17-21) 둘째,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자원하는 심령이 부어진 사람들입니다(요일3:9, 마26:41) 셋째, 하나님 성품의 본질 즉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감정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며 느끼시는지를 결정합니다(사55:7-9). 넷째, 수십억 년 동안 예수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순결한 처녀입니다(고후11:2-3). 이것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요구와 그렇게 되려고 할 때 갖게 된 실패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죄를 거절하면서 진리 가운데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갈망을 받는 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영원한 동역자, 그분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궁극적인 것들을 추구하도록 유지할 것인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절감을 거부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이 된다는 매우 중요한 진리 안에 서야 합니다
J. 우리의 기본적인 정체성(가치/성공)은 하나님과 친밀감을 나누는 우리가 누구인가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저는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한 것이다’
K. 주님은 그분 앞에서 우리가 장미이며 백합화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수치를 깨뜨리고 우리 안에 잇는 열등감과 실패의 느낌을 파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인생을 재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정한 성공을 정의합니다.
L. 우리의 정체성이나 성공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자로 가치를 찾는 대신에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이 되고 있다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실패의 두려움을 거절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갈망이라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성공한 것이라는 진리 안에 서게 됩니다.
M. 인생의 성공은 친밀함, 온순함, 계시 가운데 얼마나 성장했는지로 측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과는 정반대인 하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에 동의해야만 합니다.
N. 많은 신자가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짓 정의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자라고 느끼고 그래서 아무 목적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을 모방할 필요도 없고 세상의 견해에 위협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O. 우리 삶의 능력은 우리 마음이 그분을 향해 정말 작게라도 움직이는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신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발견됩니다. 그분은 평가하시고 기억하시며 보상해주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키워가는 우리의 노력을 깊이 인정하십니다. 바울의 마음 깊이 주님을 추구하는 심령의 능력은 그가 하나님께 더욱 알려지기 원한다는 계시를 받았을 때 더욱 주님을 갈급해진 것이 발견됩니다
(고후5:11) …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
P. 이 계시와 추구는 그녀의 영적 여정의 시작입니다. 아가서에는 7개의 장이 더 있다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계시는 우리의 여정을 시작하는 데에도 필수적입니다.
Q. 하나님께 우리의 가치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는 단 한 송이 장미와 단 한 송이의 백합화가 있을 뿐입니다. NIV에서는 대부분이 그 장미와 백합화라는 표현 대신에 ‘나는 단 한송이의 장미이고 단 한송이의 백합화입니다’라고 합니다.
Ⅱ. 예수님은 신부의 유일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해 주십니다.
A. 예수님은 순수한 백합화의 유일성 안에서 그녀를 보신다고 선언하심으로써 그녀의 고백을 확증해 주십니다
(아2:2) (2)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B. 가시는 아담의 죄에 대한 결과로서 나온 것이므로 죄를 뜻합니다(히6:8)
(창3:17-18)…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Ⅲ. 그분의 가치와 아름다우심에 대한 그녀의 이해(아2:3)
A. 신부는 많은 나무 중에 사과나무 같은 예수님만의 독특한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의 모든 사람 중에 예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사과나무이십니다
(아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B. 사과나무는 신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2:5)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C. 그녀는 그 누구보다 더 시원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45:2)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아5:16) …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D. 나무는 큰 나무들 너머로 높이 솟은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2:12-13)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단4:10-14)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그 나무(느브가넷살의 다스림)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
Ⅳ.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휴식과 즐김(아2:3-4)
A. 우리는 그분의 식탁에서 먹으면서 그늘에서 쉽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취 안에서 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늘이 아닌 그분의 그늘에서 쉽니다. 우리에게 그늘을 줄 수 있는 나무는 오직 하나입니다. 쉼을 얻고자 우리가 그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성숙함을 근거로 하나님과 관계하려 한다면 결코 쉴 수 없을 것입니다
(아2:3)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B. 우리는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의 말씀을 먹으면서 큰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큰 기쁨과 달콤한 열매를 경험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산입니다.
C. 달콤한 열매는 아름다우신 신랑되신 왕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 말씀의 계시를 받은 결과입니다. 잔인한 죽은 종교는 우리에게 쓴맛을 줍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지속적인 성숙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겨야 합니다
D. 우리는 말씀이 주는 최상의 즐거움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즐거움이 되며 그분을 즐거워할 능력을 갖추고 계시와 함께 그분 말씀의 공급을 받을 때보다 인간의 영에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즐거움 가운데서 많은 큰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E. 그녀는 ‘당신은 어디서 양 떼를 먹이시나요?’(아1:7)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왕의 식탁에서 먹었습니다(아1:12).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먹게 되었습니다. 아1;12-2:3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부는 예수님의 식탁에서 진리와 함께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F. 우리의 원수(죄, 낙담, 어려움 …) 앞에서도 말씀을 먹습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
G. 우리는 하나님의 연회 잔칫상에서 먹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완성될 것입니다(계19:7). 교제를 위한 식탁은 예언적으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때로 ‘포도주의 집’ 혹은 ‘하나님의 포도주가 흐르는 곳’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잔치에서 포도주의 집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2:4) (4)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H. 주님은 우리를 그분의 식탁 혹은 잔칫집, 즉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기뻐할 장소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왕은 신부를 그분의 방으로 이끄셨습니다(아1:4). 예수님은 생명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자들을 이끄십니다(눅15:3). 하나님의 양은 때때로 그들이 이것을 발견하기 전에 저항합니다.
I.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 축제인 잔칫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어 하실 만큼 질투하시기 때문에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 모두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식탁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때때로 그분이 말씀의 달콤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거나, 꿈과 비전을 주시거나, 새로운 우정의 기쁨을 주실 때, 우리는 그분의 리더십에 따라가며 식탁에 자발적으로 앉습니다. 어떤 때 그분은 우리를 훈계하시거나 우리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우리가 계획한 것의 문을 닫으심으로써 가로막기도 하십니다.
Ⅴ. 그녀의 인생 위로 세워진 예수님의 깃발 : 그분의 사랑의 리더십(아2:4)
(아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A. 예수님의 지혜와 사랑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고대에 군대는 특정한 기와 깃발 아래서 전장으로 행진해 갔습니다. 각각의 부대는 나름의 깃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B. 우리 인생의 깃발은 예수님의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첫째, 이 깃발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뜻합니다. 우리 인생 위로 펼쳐진 깃발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 거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내가 실패했을 때에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다’. 둘째, 이 깃발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롬8:28) 우리의 인생에 주어진 부정적인 모든 환경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우리 위의 깃발은 무시함이 아닙니다. 셋째, 우리 위의 깃발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따라오는 거짓 위안이 아닙니다.
C. 우리는 실패와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원케 하시는 바로 그 사과나무이며, 그리고 우리의 인생 위에 그분의 깃발은 유혹과 압박 가운데서도 지혜로우시며 사랑하시는 그분의 리더십임을 고백합니다.
Ⅵ. 신부는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친밀함을 간구합니다 (아2:5)
A. 신부는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친밀함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1:12-2:4를 잘 이해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커집니다. 주님은 ‘나를 이끄소서’라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아1:4)
(아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B. 사과가 예수님께서 시원케 하시는 것을 의미하듯이 (아2:3) 건포도는 건조시킨 포도이므로 성령님의 사역을 뜻합니다. 포도는 상징적으로 성령님의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성령님으로 나를 더욱 붙들어 주고, 예수님께서 나를 더욱 시원하게 하실 수 있도록 하라’
C. 그년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에 부어주실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분명한 삶의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사병에 걸려 살아갈 때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소유하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사랑의 굶주림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데 있어서 ‘평소와 같은 비즈니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는 무너진 것입니다.
D. 영적 상사병에 대한 2가지 양상
사랑의 느낌 – 그녀는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안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사랑의 감정에 의해 능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영적 굶주림의 고통 – 하나님께서 성령님과 충만하게 동행하기를 추구하는 새로운 비전을 우리 안에 일깨우실 때, 그분은 즉각적으로 그것을 채우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고통이고 결사적이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굶주림이기도 합니다. 상사병은 견뎌내지 않고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가장 결사적인 굶주림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셨음을 증거합니다
(마5:3-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Ⅶ. 2가지 하나님의 안아주심 경험하기(아2:6)
(아2: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A. 신부는 그녀의 삶에서 하나님의 2가지 활동 – 하나님의 왼팔과 오른 팔을 이해하게 됩니다.
B. 하나님의 왼팔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왼팔은 우리 머리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많은 것을 붙들어 두셨다가 풀어놓으셔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이 세대 안에서 결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고통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놓으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미래 배우자를 예비하신 다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오른 팔은 보이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즉 솔로몬이 신부를 안고자 그녀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느껴지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달콤하고 명백한 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팔로 만지심을 통해 마음이 부르러워짐을 경험합니다
Ⅷ. 전략적인 영적 계절에 성령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아2:7)
(아2: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A. 성령님은 개인의 영적 삶 가운데서 전략적인 계절을 배치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에 대한 새롭고도 깊은 계시 위에 우리의 마음을 세워주시기 원하시는 계절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안에서 깊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계절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삼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적이지 않은 깊은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계10:9-11)
B. 이러한 계절에 신부를 향한 성령님의 첫째 항목은 상사병을 일깨워서 말씀 안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그들에서 쉬며 잔칫 상에서 사과와 포도를 먹습니다
C. 성령님은 이러한 계절에 다른 신자들이 그들의 판단과 견해로 신부를 방해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기를 부탁하십니다. 계절이 바뀔 때가 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깨우실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2:8에 확연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성령님의 다양한 역사와 하나님 안에 있는 서로 다른 계절을 구분하기에는 부족한 신자들을 나타냅니다
D. 솔로몬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노루와 들사슴으로 부탁했습니다(아2:7). 이 계절에 노루와 들사슴은 어린 신부와 관계하는 데 있어서 부드러움과 섬세함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루와 들사슴은 쉽게 놀랍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혼란스러워합니다. 성도들은 다른 계절에 있는 자들과 관계할 때에 부드러운 섬세함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E. 이것은 동생 마리아가 자신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마르다의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바로 잡아주시는 주님의 일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눅10:38-42). 마리아는 놀라운 헌신으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능력을 키우는 부르심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42절). 우리도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것을 우리 대신 선택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발 앞에 앉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토론을 ‘필요한 그 한 가지’ 그리고 ‘삶의 좋은 방식’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히 종결하셨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영원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F. 구절 가운데, ‘그것이 원하기 전까지는’(역주 – 영어로는 그것 It으로 번역되었으나 우리 말에는 ‘내 사랑’으로 번역됨)은 히브리말로는 그것/그/그녀로 해석됩니다. NAS에서는 ‘그것이 원하기 전까지는’ 대신에 ‘그녀가 원하기 전까지는 깨우지 말라’라고 올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만약 히브리어가 그분이라고 번역하였다면, 그것은 예루살렘의 딸들에 의해 흔들리고 깨울 수 있는 주님의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에 의해 깨어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노루와 들사슴으로 그려지는 부드러움으로 보호되고, 난폭하게 다뤄지지 않아야 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것은 혼란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어린 신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이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까지는 내 사랑을 깨우지 말고 일으키지 말라(2:7, 3:5, 8:4)’ 8:4에서 그분은 ‘그녀를 방해하지 말라’는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두 번의 때와 같이 그녀를 안아주십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와서는 그분은 ‘노루와 들사슴’이라는 구절을 빠뜨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는 성숙하지 못하거나 이리 저리 요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엡4;14)
G.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각기 다른 계절에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자연적인 달력에 나오는 4가지 계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봄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진리(계시 도전, 초대 등)의 새로운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봄은 새롭고 흥분됩니다. 여름은 진리와 경험의 새로운 씨앗을 경작하는(물을 대어주고, 잡초를 제거하며, 가치를 치는) 때입니다. 이 계절에는 성장이 있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서 많은 노동을 해야 합니다. 가을은 우수의 계절입니다. 이 때는 우리의 노동의 열매가 성숙으로 나타나고, 노동의 유익이 수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축제의 계절입니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입니다. 추수 후에 겨울이 따라오고 모든 것이 죽게 됩니다. 겨울은 내년의 추수를 위해 땅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