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강 2
중원에는 소수민족이 있다. 해남도에도 소수민족이 있다.
여족인? 묘족? 물론 그들도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그들 외에
같은 한인이면서도 소수민족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있다.
해남십이가를 제외한 사람들.
그들의 선조는 같은 시기에 해남도에 이주되었으나 해남십
이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더부살이를 자족하고 말았다.
그것이 후손에게 얼마만한 짐이 될 것인가는 생각지도 않고.
범가주 범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하는 짓들인가!"
그렇지 않아도 큰 목소리가 더욱 크게 터져나왔다.
"가주, 우리의 권리를 찾고 싶을 뿐이오."
"권리? 권리라고 했느냐?"
범장의 음성은 노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일할 만큼 일해 주었소. 그런데도 범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를 여족놈들과 똑같이 취급
한데서야 섭섭하지 않소."
"하하하……!"
범장은 웃었다.
이들이 이런 소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섭섭하면 섭섭
하다는 표시나 할 것이지, 잠자코 있다가……
"자신 있어서 하는 행동인가?"
범장은 비아냥거렸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보고들은 것이 범가의 무
공이오. 그만한 대책쯤은."
"보고 들었단 말이지? 보고 들어? 하하하!"
범장은 될 수 있는대로 말을 많이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은 결코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으리라. 뒤에 누
군가가 있다. 그가 누구란 말인가.
십이가주 중 한 명을 살해한다는 것은 해남파 전체를 적으
로 돌린다는 말과도 같다. 적엽명처럼 공식적인 비무를 겨루
는 것하고 이들처럼 느닷없이 검을 들이대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범장이 생각하기에 이들은 해남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배짱
이 없다. 틀림없이 다른 자가 뒤에서 조정하고 있으리라.
창! 차창! 창창창……!
바깥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네 이놈! 네가 감히!"
"하하! 웃기지 마. 이제 네 놈들 시대는 끝났어."
"이 놈이!"
"지랄발광 그만 떨고…… 갓!"
같은 욕설과 분노에 찬 소리도 들렸다.
범가 전체가 혈겁에 쌓였다.
이 싸움은 만만치 않다.
범가의 절기는 오직 범가 혈족에게만 전수되었지만, 그 수
는 범가 전체 식솔의 채 삼 할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낯선 인물들도 섞여 있다.
그들에게서는 무인의 강한 기운이 풍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들판을 떠도는 야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기운…… 본 적이 있다. 적엽명에게서.
범장은 깊은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들을 베고 나가 밖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검을 집어들었다.
옆에 차고는 다녔지만 사왕과 겨룰 때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써본 적이 없는 검.
범장을 둘러싼 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다.
충분한 인원이다. 허나 그들은 실수를 저질렀다. 기왕에 뒤
집으려고 작정했으면 검을 뽑을 틈조차 주지 말았어야 한다.
검을 든 이상 이들을 베는 것은 시간문제다.
소덕(蘇德), 이 자는 주방(廚房)을 맡고 있다. 음식 솜씨
가 일품이었는데.
파앗!
범장은 단각검법(斷角劍法)을 펼쳤다.
단각검법은 말 그대로 물소의 뿔을 자르는 검법이다.
단각검법을 절정으로 익히는 잠자는 물소를 깨우지 않고 뿔
을 잘라낼 수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 비유하면 고통을 느길
사이도 없이 죽는다고나 할까?
단각검법의 특징은 초식이 극히 간결하다는 것이다.
일검에 전신의 진기를 실어서 쳐내기 때문에 위력이 강한
반면 공격이 실패했을 때는 곧바로 위험에 처해진다. 진기의
흐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랑검법과는 대조적인 검이다.
언뜻 생각하면 다수의 적과 싸우는데는 해랑검법이 더 좋다
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천만에. 단각검법이 더 뛰어나다. 단각
검법은 좁은 공간에서 다수의 적을 맞이하기 위해서 창안된
검법이다.
쩌…… 억!
소덕이 기묘한 소리를 쓰러졌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마치 머리에 철퇴를 맞은 물소처럼 맥
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심항(沈恒), 이 자는 목재를 관리한다. 배를 만들거나 수리
하는데는 꼭 이 자를 거쳐야 한다. 사람을 대하는 솜씨가 뛰
어나 목재를 공급하는 한가와 조그만 충돌도 없었는데.
파아앗 !
소덕을 베는 짧은 틈만으로 진기를 되돌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렇다. 단각검법은 공격이 실패했을 경우에만 틈이 생긴
다. 일단 검을 되돌린 다음에는 처음과 같이 위력적인 검이
튀어나온다. 그래서는 일검필살(一劍必殺)이다.
퍼엉……!
심항은 폭죽 터지는 소리를 냈다.
머리를 반으로 가를 때 나는 소리다. 그게 이상했다. 머리
는 묘하게도 위에서 아래로 가를 때와 옆으로 가를 때 터지는
소리가 각기 달랐다.
심항은 뚜껑을 들어낸 접시처럼 뇌수를 흩뿌리며 거꾸러졌
다.
미련한 사람들!
이런 실력으로 검을 들이댔단 말인가. 그래도 강성오가의
가주인데, 남해삼십육검 중 초강자 반열에 든 사람인데. 무공
이 어떻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검을 들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서재(徐載)는 회계(會計)를 담당한다.
성격이 차분하고 셈이 밝아 사공들의 노임(勞賃)을 전담시
켰는데.
그건 그렇고 서재도 무공을 익히고 있었단 말인가?
"끄륵……!"
서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심장에서부터 오른쪽 등까지 길게 그어진 검흔.
서재는 왼쪽으로 무너졌고, 그의 몸은 짚단처럼 갈라져버렸
다. 그저 얇게 저민 듯한 검흔이었는데.
"이 놈들아! 하하하하……!"
대청 밖에서 쩌렁 울리는 일갈이 들려왔다.
사자가 포효하듯이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일갈이었다.
범장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큰 형님이다.
불안했다. 나중에 들린 웃음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범장이 웃음소리에 홀려 잠깐 틈을 벌린 사이 살아남은 네
명은 몸을 물렸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들은 범장이 이토록 강할 줄 몰랐다. 옛날에 남만의 신이
라는 사왕과 겨루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대단하지는 않았
다. 아니, 대단하지 않게 보였다.
그들은 그나마 비무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검을 익히기는 익혔으되 누구에게 털어놓을 성질이 아니었
다. 오늘을 기다리면서 십 년을 넘게 갈고 닦았을 뿐이다.
눈짓을 주고받은 네 명은 일제히 검을 버리고 품속에서 피
리만한 대롱을 꺼내들었다.
"이 놈들……"
범장도 바깥에서 들려온 것과 같은 종류의 노기를 터트렸
다.
검을 들었으면 무인다운 면모를 갖추어야지 야만인처럼 독
침을 사용하려 하다니.
검을 모욕하는 인간들이다. 검을 들 자격도 없다.
범장은 소덕, 심항, 서재를 베면서 한 가닥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오랜 세월동안 기쁜 일, 궂은 일을 같이 겪어온 사람들인
데.
무엇에 홀렸단 말인가.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이런 놈들에게는 한 가닥 잔정조차
아깝다.
파앗!
범장의 묵중한 몸이 푹 가라앉는다 싶었는데 어느 새 일 장
거리를 치달려와 전면에 있던 자를 베어내고 있었다.
푸욱! 풋……!
네 명은 일제히 대롱을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그러나 배
에서 사용되는 굵은 밧줄을 관리하던 화천(華遷)은 대롱을 불
어내지 못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푹!
등이 따끔거렸다.
화천을 베는 순간 옆으로 이 보를 움직였지만 독침을 전부
다 피하지는 못했다.
분노 때문이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했다면 화천을 베지 않았을 게다. 대신
독침을 피하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으리라.
이들이 발사하는 독침은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두세 번쯤
불어내면 대롱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대나무 조각으로 변
하고 만다. 그 때를 노려서 공격했어도 충분할 것을.
범장의 신형은 팽이처럼 빙글 돌았다. 동시에 손에서 뻗어
나온 푸른 검광이 언백(彦伯)을 가로 그었다.
풋! 푸웃……!
독침이 다시 발사됐다.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내뿜은 독침이었다.
추무(秋撫)와 민옥(閔 )은 저항 한 번 변변히 못해보고 무
너졌으니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큰 형님 범장의 묵중한 몸
이었다.
큰 형님은 청석(靑石)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형님의 얼굴에는 세침(細針)이 빼곡이 박혀있어
고슴도치를 보는 듯 했다.
검도 보였다.
뒤에서 찔렀는지 검날이 배를 뚫고 삐쳐 나와 있다.
"범장이닷! 범장이 살아있다!"
범장은 소리가 터진 곳을 노려보았다.
이민금(李旼錦), 노비를 관리하는 자다.
그가 말한 '범장이닷! 범장이 살아있다!'는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말할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 동안의 정리를 생각
한다면 설혹 이해관계가 달라 검을 찔러 죽이는 한이 있더라
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예의를 갖춰야 도리지 않은가.
덕이 부족했다.
이들의 내면에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겉으로만 허허거리며
웃었을 뿐, 속으로는 남남과 다름없었다. 모두 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따스한 정을 쏟았는데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다니.
범장은 현기증이 돌았다.
독기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다.
쉬익!
"커억!"
범장은 앞에서 쳐오던 자를 베어 넘기며 치달렸다.
범장이 달려간 곳은 범위가 무공을 수련하던 해변이었다.
자식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무공도 변변하지 않은 자들이 악독한 암기를 믿고 일으킨
반란.
그들이 범위라고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또한 안
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에 범가 일족 모두의 행적이 세세
하게 노출되었다.
범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쯤이면 파도를 벗삼아 대검법을 익히고 있어야 한
다. 장마가 들어 대검법을 익히기에는 더욱 좋다. 높은 파도,
끊임없이 부서지는 포말.
그런데 범위가 보이지 않는다.
범장은 불안한 마음에 백사장 너머에 있는 초옥을 향해 치
달렸다.
'살기!'
불안이 적중한 것일까?
초옥 안에서는 매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범위의 무공이라면 이들 수십 명이 덤벼들어도 쉽게 무너지
지 않으리라. 자식의 무공은 이미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
으니. 그러나 독과 암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절대적
이다. 불행히도 범위는 독과 암기에 맞서 싸운 경험이 없다.
꽈직……!
범장은 문을 부시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후욱! 푸욱……!
깊은 숨을 몰아쉬는 소리, 살에 검이 박히는 소리.
범장은 또 다른 살기를 찾아 검을 휘둘렀다.
초옥안에 은신하고 있던 자는 모두 여섯 명이다.
이들은 그래도 제법 검을 다룰 줄 안다. 십검으로 논한다면
검을 길들였다는 목검(牧劍) 정도는 될 것이다.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자신이 벤 자들은 겨우 검을 발견했다는 삼검(三劍), 견검
(見劍)을 이룬 상태였다. 그런데 이 자들은 두 단계나 뛰어넘
고 있다.
물론 자식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문제는 목검을 이룬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목검을 이룬 자
들이 있으니 그 윗단계를 익힌 무인이 없으리란 보장을 어떻
게 하랴.
범위는…… 자식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초옥을 나온 범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이십여 명의 낯선 사내들.
복장으로 보아 한인과 여족인이 섞여있다.
'무군……?'
범장은 비로소 사태를 올바르게 인식했다. 그리고 안심했
다.
건곤검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장문인은 벌써 저승길을 지르밟고 있으리라. 마음은 편할
게다. 복잡한 세상사를 훌훌 떨쳐버리고 떠났으니.
범장은 죽을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군의 존재는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일은 굳이
비파를 통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제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하
지만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범가의 배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일. 무군이란 존재는 범가 무인들에게 최초로 발각되었
다.
범가주는 고민했다.
무군이 저지른 일은 즉각 중대 사안이다.
감히 나라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것은 관계치 않는다 하더
라도 한인과 여족인이 손을 잡았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
가 아니다. 해남도를 이끌어 가는 입장에서는.
범장은 누군가 뒤에서 조정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이 벌어지
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암암리에 장문인을 관찰하기 시작했
다.
제 일급 관찰 대상자는 장문인, 관찰자는 범가주인 셈이다.
근 일 년에 걸친 관찰 끝에 범장은 장문인에게서 아무런 흔
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제야 범위는 장문인과 상의했다.
장문인은 눈과 귀가 다 틀어 막힌 장님에 귀머거리나 다를
바 없었다. 장문인에게 전달되는 모든 정보는 비파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무군을 조정하는 자는 강성오가의 가주일 수도 있고, 우화
일 수도 있다. 당시, 장문인과 범장은 우화 쪽에 심중을 두었
지만 해남파 무인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범장은 유가주 유질을 맡았다. 장문인은 전가주 전팽을 맡
았다.
둘이 넷이 되고, 강성오가의 가주들이 전부 무관하다고 판
단되자 그 때부터 관찰하는 일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진 채 진
행되었다.
뜻밖에도 걸려든 사람은 건곤검 한혁이다. 그리고 가물함
수좌인 하파다.
장문인을 비롯한 강성오가의 가주들은 분노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하파와 한혁의 뒤에는 기사청 장군이 버티고 있다. 일국의
장군이 말이다. 또 너무 많은 사람이 연류되어 있다. 그들을
모두 내치자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뿐 아니라 잠잠한 여족인
을 자극할 수도 있다.
결국 장문인과 강성오가 가주들은 다른 대책을 세웠다.
다른 대책…… 태풍(颱風)이라 이름지은 계획.
태풍이 발동되었다. 범위는 안전하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으니, 바로 가문에서 일어난 내란이다. 한혁은 무군 뿐만
아니라 십이세가의 식솔들에게까지 손을 뻗친 모양이다.
하기는…… 그런 일을 벌였으니 그토록 많은 은자가 필요했
겠지만.
'범가주로써 무력하게 죽는다면 말이 안되지.'
파앗!
범장은 사내 이십여 명의 틈바귀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달랐다. 이들은 쳐오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온
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검을 부딪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범장도 이런 적을 맞아보기는 처음이다. 포위는 하되 싸우
려고 들지 않는 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내들은 품에서 두툼한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일제
히 주머니 속에 든 것을 던져내기 시작했다.
'세침!'
범장은 큰 형님이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 알게 되었다.
급히 겉옷을 벗어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무군은 달려오는
만큼 물러서며 세침을 던져댄다.
"크윽 !"
범장은 마침내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다리가 따끔해서 쳐다보았더니 다리에 털이 수북히 난 것처
럼 세침이 빽빽이 자리잡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범장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에 중독되지만 않았어도 이들 중 절반은 황천길 동행으로
삼을 수 있었으련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것이 '맹장 사냥법'이라고 일컬어
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맹장에게만 사용되는 방
법이라는 것도.
* * *
무음검 석불은 폐관수련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본문에서 온
장문인의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어느 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문인의 명은 곧 해남도의 법이지 않은가.
허나 석불은 전가주를 베어 넘어트린 적엽명의 검만을 생각
했다.
아직은 전검을 당해낼 자신이 없다. 폐관을 끝낼 때는 무음
검과 암암검을 하나로 합일시켰을 때…… 석불은 그렇게 생
각했다.
"장문인의 명을 받지 않을 생각이오!"
사신으로 온 한유(翰釉)는 화가 난 듯 고함을 질렀다.
한유 역시 삼십육검 중 일인이다. 그런 사람이 문전박대(門
前薄待)를 당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리 없다. 우선 존장
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해남오지에 등용되기 전에는
폐관이다 유랑이다 하고 수련을 거듭하지만 해남오지라는 중
책을 맡고 나면 개인사는 일절 접어두고 본문에 매달렸다.
십삼대 해남오지는 모두 특출난 인간들만 모였단 말인가.
한광, 석불, 범위가 폐관에 들어갔고, 전혈은 종적도 남기
지 않은 채 잠적하고 말았으며, 유소청은 해남오지라는 직책
을 버렸다.
공무(公務)에 전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러나 석불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폐관수련에 들기 전에 이미 장문인께 보고한 사항이다.
무인이 폐관에 들었을 때는 부모가 상을 당했어도 나가지
않는다. 하물며 장문인의 명령임에야.
석불은 한유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은 탁자 위를 기어가는 개미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꽈당……!
문이 부서지며 인형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석불은 검을 쳐냈다. 개미에게가 아니라 문을 부시고 들어
선 자를 향해서.
한유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다. 무인의 정신을 모욕한 자
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베어버리리라.
"멈췃!"
쩌렁한 일갈에 석불은 검을 회수했다.
잠겨진 방문을 부시고 들어선 사람은 아버지 석중이었다.
장삼자락이 너풀거리며 떨어졌다.
검을 회수한다고 했지만 너무 빠른 검인지라 완전히 회수하
지 못한 것이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자칫했다가는 아버지를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회수가 가능해졌구나."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석불과는 달리 석중은 기쁜
미소를 지었다.
발출과 회수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음검과 암암검이 섞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리라.
"벽혈검(碧血劍)을 따라가서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라."
"아버님!"
석불은 다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가는 중원으로 진출한다.
해남파에는 미련이 없다. 드넓은 대륙으로 건너가서 중원제
일검가(中原第一劍家)라는 패자(牌子:간판)를 내걸고 무음검
과 암암검을 널리 알리리라.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석가의 재산을 조금씩 중원으로 옮기
는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장문인의 명을 받들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벽혈검, 장문인의 명은 한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 법. 차
한 잔 줄 시간이 없네."
"하하! 마신 걸로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본문으로 들어가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옷가지도 그
렇고, 기거에 필요한 물품이나 서적 같은 것을 챙겨야 한다.
그런데 차 한 잔 줄 시간이 없다면 지금 당장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나서란 소리가 아닌가.
"가거라."
아버지는 재촉했다.
"장문인께서는?"
"운명하셨습니다."
"역시 건곤검?"
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가주, 변수(變數)가 있습니다."
"……?"
"한인들이 대거 들고일어났습니다. 십이가를 제외한 한인들
모두 적이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허허허! 일이 그렇게 되는가."
"안녕히…… 가십시오."
"철없는 아일세. 잘 부탁하네."
"하하! 해남오지가 철없는 아이라면 세상 사람이 모두 웃습
니다."
한유와 석중은 끈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건곤검 한혁의 목표는 삼십육검이다.
남해삼십육검을 모두 제압하지 않고는 해남파를 장악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무군이란 외부 사람을 동원하여 해남
파를 전복시키려고 하는지 석중은 알지 못했다. 그 뿐만이 아
니라 강성오가 가주들 전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혁이 들고 일어섰다면 빠져나갈 모든 퇴로가 막혔다고 봐
야 한다. 장문인이 죽었다. 해남파 제일 강자로 서슴없이 지
칭되던 사람이. 장문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헸고, 죽
음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급습.
지금쯤 해남도 전역은 피로 물들고 있으리라.
장문인의 죽음으로 시작된 혈겁이다.
해남도를 떠나기 전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랬는
데.
"십이가를 제외한 한인들 모두라……"
석중은 중얼거렸다.
일이 대단히 심각해졌다.
어쩌면 장문인의 마지막 안배가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잘 되겠지. 남은 것은 천운……"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오던 석중은 눈을 부릅떴다.
피, 피, 피……
석중은 한유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고 말았다.
시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바로 석가에서 한 가족인냥
정답게 지내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석가에서 태어나 석가에
서 묻혔다.
이제는 검을 들고 있다.
석가 식솔들을 죽였다. 어린아이, 부녀자 할 것 없이……
"네 놈들이!"
석중은 범장이 자신보다 먼저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
까?
"석가주, 우리가 뼈빠지게 일한 돈을 중원으로 빼돌려서야
되겠소? 중원제일검가? 하하하!"
"석가주, 석가주의 암암검이 일절이라니 구경이나 합시다."
"무음검도 이름만 거창했지 별 것 아니던데? 암암검도 그럴
까?"
석중은 비웃는 소리를 들으며 검집을 움켜잡았다.
발검의 쾌, 암암검.
석중은 무리들 틈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들은 입으로는 연신 비아냥거리면서도 석가주의 곁에는
다가서지 못했다. 암암검이 얼마나 빠르고 무서운지는 그들처
럼 잘 아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검을 쥔 자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용타(龍 )를 쥔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용의 발톱 모양을 한 쇠갈고리에 줄을 매달아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병기.
그들은 석중 곁에 다가섰다가는 목숨이 열이라고 모자란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휘익! 휘익……!
용타를 돌리는 소리가 매서웠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용타를 수련했는지 일거수일투족이 매
우 자연스러웠다.
석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순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고 했던가? 늘 웃던 석
중이 웃음을 지우자 험상궂은 사람이 인상을 쓰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쉬익!
용타 한 개가 날아들었다.
그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 석가주는 대륙을 많이 오갔
고, 종류가 다른 병장기를 접한 기회도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
했다.
쇠갈고리가 텅!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거의
동시에 석중의 몸은 앞으로 퉁겨져 나왔다. 옆에서 보기에는
용타를 일부러 허공으로 쳐올린 듯 보였다.
"크윽!"
답답한 신음.
석중은 한 명을 베자마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용타를 빼앗
아 다른 자에게 던졌다.
그가 잠시 몸을 움찔거린 사이 석중은 그의 곁에 바짝 다가
섰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인데 그 자는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암암검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니만.
용타를 사용하던 마지막 여섯 번째 사람이 쓰러졌다.
석중이 신형은 번개처럼 빨라서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만들
었다.
쾌검은 기검신(氣劍身)이 일치되어야만 이룰 수 있다.
확실했다. 그들은 석중을 통해 오래 전부터 회자되어 오던
무언(武言)을 확인했다.
몇 명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던지는 암기를 손에 들고 있다.
조가에서 암기를 만들어 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중원
에서 들여온 암기이리라. 조가에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형제
처럼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표변한 것으로 보면 조가 식
솔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였다.
"석가주라면 해남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무인인데
암기로 상대하다니. 쯧! 내가 맡지."
낭랑한 소리와 함께 뛰어난 미장부가 나타났다.
유살검 한광.
그는 석중을 향해 씩 웃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