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21:1-13
하나님의 나라운동과 3.1운동
3.1운동의 의미
서론 예수님의 생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의 짧은 생애였습니다. 그 중 30세까지의 이야기는 12살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부모님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3일 후에나 부모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 외에는 별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동안에는 뭘했느냐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성경기록상으로는 없지만 아마 추측컨대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것같습니다. 부친에 대한 기록은 그 때 한 번만 나오고 모친 마리아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30세 되었을 때 선교초기 첫 번 가나의 혼인잔치집에서 물로 포조주를 만드는 이적사건에 모친이 함께 있었고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느라고 식사할 겨를도 없이 나가 돌아다니심으로 사람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찾아왔을때에도 보인은 거기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될때도 모친만 그 발 아래 제자 요한가 함게 있었고 부친은 안보인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예수의 동생이 남동생만 넷이고 누이가 둘이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본인을 포함해서 모친 동생들 여섯을 돌보기 위해서 30세까지는 공생애에 못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니은 효자였습니다.
물론 집안 일만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세계 각처에서 유월절 지키러 모여드는 사람들과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온갖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눈살을 찌푸리고 한탄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1.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치적상황
그리고 고향 갈릴리 지방에 부모와 동생들을 돌보는 젊은 시절에 자주 군마를 타고 몬지를 날리며 시골 마을마다 달리며 횡포를 부리는 로마군인들의 볼쌍 사나운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자신보다 6개월 먼저 나서 갈릴리 지역가 유대광야에서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것을 소리높여 외치는 세례요한의 모습도 눈여겨보며 종주국 로마의 정치적 억입과 경제적 수탈 앞제 그리고 폭군혜롯왕의 폭정에 시달리며 온갖 도찬에 바진 민족이 당하는 불상한 모습을 눈여겨 보시며 기회를 엿보고 계셨음이 확실하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배경-마리아의 가정교육의 영향
예수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친 마리아의 노래에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복중에 잉태하고 6개월 후에 그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레요한의 모친(예수의 이모) 엘리사벳을 방문했을때에 부른 마리아의 노래에 나타나있습니다.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6, 개역)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특별히 1:51절 이하 55절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일명 마리아의 찬가 혹은 혁명의 노래라는 별명을 학자들이 붙혀놓은 유명한 혁명의 노래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싶이 마리아가 살던 시대 예수님은 태어날 당시의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것같이 그 시대는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철권정치와 종주국 로마의 앞잡이 헤롯왕의 폭정에 시달려 정치적 업압과 경제적 수탈에 농민들과 주민들은 등뼈가 굽고 온갖 도탄에빠저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이때나 저대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구원자 메시아야 출연하여 자기들을 그 도탄에서 구해주기만을 마치 파숫군이 새벽을 기다림같이 학수고대하고 있었을때입니다. 예수님은 유년시절부터 모친 마리아에게 이 형명의 노래를 귀가 달토록 들었음이 곽실합니다.
3.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나라의 부는 일부 소수 기득권자들의 손에 다 넘어가고 빈익빈 부익부로 일부 부자들은 호의오식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 농민들을 수탈하여 민중들은 주린창자를 부여잡고 잠 못이루는 밤을 새야했고 나라의 법은 유전무죄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되어 나라의 기강이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종교와 정치를 한 손에 쥐고 헤롯왕의 권력과 야합하고 종교를 빙자하여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성전제물을 독점하고 시중보다 15배 내지 20배로 강매하는 독과점을 차려놓고 집에서 가저오는 제물이나 시중에서 사오는 제물은 흠집이 있다는 이유로 반입을 거부하고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만 사도록 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성전에 들어갈 염두도 못내게 함으로 죄의 사함을 받고자 하는 일반 민중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매년 예수렐렘 성전에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으셨던 예수님은 이같은 구역질나는 세상을 보면서도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모친 마리아가 태중에 꿈꾸었던 세상을 둘러엎고 이상적인 메시야왕국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4. 예수의 공생애(회개와 복음선포)
아무튼 30세가 되어서야 때마침 세례요한이 옥에 같히자 예수님게서 갈릴리 해변에 나가셔서 회개를 외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30년 동안은 준비의 기간이었고 30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공생애로 들어가신것입니다. 예수의 사생애는 길었지만 공생애는 세례요한이 잡힌후 십자가를 지실때까지 3년의 짧은 기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3년도 대부분의 기간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북쪽 갈릴리지방을 중심으로 교훈하시고 병고치시고 이적을 베프시는 등 가난에 굶주리고(5병2어사건) 병고치고 귀신을 축출하는 등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복음을 전파하셨다.
마가복음이 시작되는 벽두에 마가복음1:14절은 예수님 공생애의 첫 번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가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회개운동은 단순이 개인적인 죄를 회개할것만 아니라 주로 정치 종교지도자들와 기득권자들의 회개를 외쳣던 것입니다.
메시야 취임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가복음4:18-19절은 선교 벽두에 갈릴리 가버나움회당에서 행한 메시야 취임사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취임사에서 자신이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어떻게 할 것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취임사를 하는 것 처럼 예수님은 그의 첫번설교마가1:14-5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설교한데 이어 이번에는 그의 메시야 취임사에서 자긴이 첫번설교에서 내 세운 그 하나님의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61장1-2절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자신에게 주의 영이 내린 것은 자기가 기름을 부어 메시야로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누가4:18절) 이는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복중에 잉태하고 부른 노래중 누가1:53절에 있는대로 주린자를 배물리 먹이셨다는 말씀과 일치합니다.말하자면 경제적혁명입니다. 누가4:18b)포로된(prisoner)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르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함이라고 한 말씀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부자유한 자들, 여러가지 제도로 언로가 막혀서 눈은 멀정하게 뜨고 있으나 볼 것을 제대로 보지못하는 청명관(시각장애자)이 되고 따라서 듣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자가 되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따라서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완전히 억눌려사는 부자유한 대다수 민중들에게 언로를 열어서 다시 보게하고 듣게 하고 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선언이다.누가4: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하게한다는 말은 저 유명한 희년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잘못된 사회체제 경제제도를 되돌려좋겠다는 선포를 하신 것이다. 이상이 자기가 메시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구원자로서 메시아 선포를 하신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 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신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외치신 회개의 히브리말은 슈부로, 슈부는 되돌린다는 말이다. 유턴(U-tern)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모든 사회적 공적 질서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기존의 생활방식은 물론 기존의 모든 정치 경제 종교 사회의 뒤틀리고 외곡된 질서를 완전히 제자리로 돌려놓으라는 강력한 언어이다.요새말로 하면 모든 적폐의 청산을 선포하신 것이다. 말로만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같이 당시 기득권을 향해서 외친 이같은 회개운동은 결국은 당시 종교와 정치를 쥐고 민중을 억업하고 수탈하던 권력구조, 특히 당시 선전체제와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예수에게 내린 죄목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었다. 누가복음 23:1-이하에 무리가 예수를 고발한 고발장에는 예수를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로고 조목을 나열해놓은 것으로 반증된다.
5. 예수의 위대한 결단-예루살렘 입성-성전숙청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신 날은 그의 나이 33세되던 해 유월절 전 1주일입니다. 부활주일 전 일주일간을 교회는 고난주간이라고 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한 번 둘러보시고 다음날 다시 들어가셔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제물파는 사람들의 제물을 뒤집어 엎으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역사에 초유의 역사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하게 상인들로 더렵혀진 성전 마당을 청소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온갖 부정이 저질러셨던 최학의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긴 이래 아무도 그런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모친 복중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꿈구던 세상을 이스라엘 민족이면 누구도 학수고대하던 현실질서가 완전히 차단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첫 번 설교에서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신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사건입니다.
참고
고난주간 예수님의 일주일간의 행적
↓노량진교회 제공
„triduum sacrum(성 3일)“ 특별히 성 목요일 밤을 포함한 성 금요일, 토요일, 부활절을 합하여 부른다. 부활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세 날이다. 4세기부터 이 세 날이 확장되어 „거룩한 주“의 의미로 수난 주간을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 밤은 마태복음 26장 17-30절에 그 장면이 잘 나타나 있는데, 서양 예배에서는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성찬을 포함한 예배로 드린다. 이 때는 대영광송을 부르고 침묵으로 들어가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유언에 따라 사랑에 관한 찬양이나 떼제음악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찬양도 어울린다. 성 금요일은 카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제단을 비우고 오르간도 종소리도 사용하지 않는다. 개혁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서의 수난부분을 읽거나 불렀고 예수님의 기도와 십자가 상의 칠언 등을 불렀다. 위 표 자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해서 일주일간의 행적표이다. |
예수님은 주후 30년(33세되던해) 봄 4월 14일(2019년 월력 표준) 유월절 첫날(부활주일)전 일요일에 입성하셨다. 한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기간에 국.내외에서 모여드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월절에 제물로 희생되는 동물의 수는 25만 마리라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사드리기 위해서 모였는지는 상상해 보라.
6.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3.1운동
역사가 있는 나라는 독립운동이 없는 나라는 없다.
10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금년이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 우리 나라형편은 로마치하에 고난당하던 에수당시 이스랑 나라의 형편과 방불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송두리째 겁탈당했습니다. 국토가 수철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습니다. 온갖 자작으로 무죄한 사람들을 까닭없이 연행하여 투옥하고 고문하고 옥사시키는 공포정치의 만행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치욕의 날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로마치하에 이스라엘나라처럼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습니다.러마치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 백성들도 남녀노소할 것없이 일제 폭정으로부터 독립과 해방을 뼈저리게 갈구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한일합방 이래 일제의 무단 폭정을 예를 든다면 수없이 많지만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화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1907년초 안창호·이승훈 등 계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단체로서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독립사상의 고취, 국민역량의 배양, 청소년 교육, 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자체의 실력양성 등을 위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처음에는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서북지방의 풍문을 조사하던 중 점차 총독암살기도가 실제로 추진되었다는 단서를 잡아, 추적한 결과 평양·선천·정주 등에서 기독교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입수했다고 조작했다.1911년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며, 제1심 공판에서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하여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암살행위는 없었으나 이 사건을 암살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11년 9월부터 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를 비롯하여 양기탁·임치정·이승훈·유동열·안태국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했다. 일제는 이미 짜놓은 각본에 맞추어 피의자들에게 진술을 강요하면서 잔인한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받아내어 혐의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했다. 결국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은 1912년 6월 28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제1심 공판이 시작된 이래 1913년 10월 9일까지 5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하고 해체시키는 등 비밀항일단체를 제거했으나, 이와 연루되었던 많은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7. 3.1 독립운동의 발발의 동기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1910년 일방적인 강압으로 한일합방을 한후 한국의 주권을 찬탈하고 무단정치를 감행 조선인의 민족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는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여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함에 이에 우국지사들과 국민들의 나라 잃은 설움과 또한 그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총독정치에 의한 군정의 횡포, 민족적 차별, 언론, 집회, 결사, 자유의 박탈 및 종교적 탄압과 근절정책 등에 대한 민족감정이 쌓여 있던차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Jhomas. W. Wlison)이 강화조약의 기본조약으로 14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하였는데 그중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주의)조항이 있었다. 이 사상이 당시 피압박 민족들에 큰 충격과 용기를 주어 우리민족도 이에 자극을 받아 독립의 열망이 더욱더 고조 되어있는데다가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함으로 그것이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독살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일본인에 대한 분노심이 높아갔다.
8. 국내외의 활약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
국외에서는 상해에서 김규식, 여운형, 김철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미국에서는 이승만, 안창호, 정한경등이 국민회와 흥사단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동경에서는 1919년 2월 8일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 100여명이 학우회 총회의 명목으로 모여 기독청년들이 중심으로 최팔용, 백관수, 서춘, 김도연, 이종근, 김수철, 윤창석, 김상덕, 최근우, 이광수, 송계백등 11명이 주동자가 되어 이광수가 초안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국내외에 이를 천명하고 독립을 호소했다. 국내에서는 서울에서 손병희, 최린등의 천도교 측과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의 기독교측이 추진하였으며, 평양에서는 김선두, 변인서, 도이권, 이덕환 등이 추진했고 정주에서는 이승훈, 김병조, 이명용등이 주동이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쓰기로 하고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쓰기로 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할 대표들을 결정하니 천도교측이 15인 기독교측이 16인 불교측이 2인 도합 33인이 손병희를 대표자로 정하였다.
거사 일을 3월 1일로 정한 것은 3일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이라 전국에서 많은 조객들이 모여들 것을 예측하고 2일은 주일이라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1일로 정하여 3월 1일 정오에 33인 대표중 29인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지방에 있어 불참)이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한편 승동교회에 모인 학생들이 이갑성(李甲成당시 세브란스의과대생)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문 일천오백매를 나누어 주고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은 팔각정에서 경신고교출신 정재용이 도립선언문을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신호로 만세시위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월말 현재로 전국 218개 군(郡)중 211개 군에서 일어났고 집회 수는 1542회 참가인원은 이백만명에 달하였다.
3. 3.1 운동과 기독교의 역할
고종황제의 서거가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게 되자 여기에 항의하여 평양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 및 서울지방의 교인들이 봉도(奉悼)예배를 드린 것이 교인들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으며 33인의 서명 인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나 차지했던 것으로 보아도 당시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이에 참여한 16명의 서명교인은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양전백(梁甸伯), 유여대(劉如大), 이갑성(李甲成), 이명용(李明龍), 이승훈(李承薰),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최성모(崔聖模), 김병조(金秉祚)제씨 였다.
3.1운동의 시위에 앞장은 언제나 학생들이었고, 그중에서도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앞장에 섰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교회를 통한 신속한 연락망과 조직을 통한 인원의 동원과 활동, 그리고 국내외에 독립선언서와 관련 문건들을 전달하는 데에도 교인들의 역할이 컸다. 평양 기독교서원의 총무 안세환은 동경에 가서 일본정부의 총리대신과 저명 정객들에게 독립에 관해서 진정키로 하고 동경에 가서 진술하는 과정에서 체포 되었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 회담에 보내는 탄원서는 감리교목사 현순과 전도사 김지순이 맡아 안동의 김병농(金炳穠)목사를 통하여 전달하기로 했으며 국내의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교회 목사 이필주와 배재학생 김진호가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의 잔학성이 들어나고 종교적 도덕적 문제와 특히 정의와 인도적 문제에 있어서는 그냥보고만 있지는 않았으며 많은 선교사들은 우리들의 동조자적 역할을 해주었다.
그들은 운동의 진전 상황이나 일본의 잔학한 동태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구미(歐美)에 발송함으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여 세계적으로 여론을 환기 시켰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교수 “스코필드”(F.W.Scofield)는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본국에 보냈고 숭실전문교수 모의리(E.M.Mowry)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보호하였고 선언서를 번역하여 선교본부에 보낸 탓으로 평양감옥에 구금되어 6개월의 구형을 받았다. 신성중학교장 윤산온(G.S..Mccune)은 교회 지도자와 함께 3.1운동을 획책했다하여 추방을 당하였고 숭실전문학교장 마포삼열(S.A.Moffett)은 세계선교대회에서 한국 독립을 협조하는 강연을 했다하여 구금을 당했다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마침내 세계여론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9. 경북지방 등 각지방의 3.1운동
서울에서 일어났던 3.1독립만세의 열기는 그 도를 더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경북지방의 3.1운동과정을 경북노회 100회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구에서는 3월 8일 독립만세의 횃불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원한에 사무친 민족의 울분을 독립만세의 우렁찬 소리로 대구의 하늘을 진동 시켰다.
이만집목사는 인원동원을 맡았고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맡아 준비하기로 했다.
그 날 오후 1시에 대구 큰 장터(서문시장)에서 거사하기로 되었기에 정오가 지나면서 시내 몇몇 교회의 목사, 장로와 교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 했으며, 계성학교 학생 60여명은 한복을 입고 나오고 신명학교 학생들은 언덕길을 내려오기 시작했으나, 1시가 지나도록 대구고보 학생과 대구농림 학생들이 오지 않아 기다리던 중 2시경이 되어 대구고보 학생 200여명이 교복을 입은 채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큰 장터로 뛰어 왔다. (대구농림 학생들은 기숙사에 구금되어 참석하지 못하였음) 그 날 거사의 총책인 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이 나락가마니를 실은 달구지 위로 올라갔다. 김태련 조사가 먼저 품속에서 독립선언문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동정을 살피던 경찰들이 선엄문을 빼앗으려 하는 것을 보고 공약 3장만 크게 외쳤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2.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 까지던지 광명 정대하게 하라. . 대구의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경북지방의 각 교회로 파급되어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각 지역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선산군은 해평면에서 4월 3일 오후 11시반경에 해평면 산양동 예수교 조사 최재화가 주동이 되어 50여명의 주민들과 같이 해평 주재소를 야습하여 돌을 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이에 참가한 50여명은 전원이 경찰에 검거 되었다. 그 후 최재화 조사는 6월경에 김영철, 조강재 등과 합의하여 국내의 뜻있는 애국청년을 만주에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받아 장래 무력의 힘으로라도 독립운동을 준비할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1920년 9월 24일 최재화조사(후에 15대총회장 역임)는 안동 풍산의 성서공회권서(勸書)인 배승환 예천교회의 이재영과 같이 제령위반 및 사기죄로 구속 되었다.
▣의성군은 비안면에서 3월 12일 인근교회의 목사, 조사들의 인도 하에 지방의 교인들과 비안 보통학교 생도들이 만세운동을 하고 안평면에서는 3월 16일 대사동 교인들과 동민 100여명이 3월 17일에는 대사, 괴산, 마전, 창길등의 교인들과 주민 400여명 3월 19일에는 도리원과 점곡면에서 운동을 일으켜 경찰에 1명이 죽고 18명이 구속 되었다.
▣안동군은 예안면에서 3월 17일 기독교인과 유생들이 합세 하고 3월 18일에는 안동읍에서 2500명의 군중이 참가 31명이 체포되고 3월 21일에는 임동면에서 3월 24일에는 풍산면에서 3월 23일에는 읍내에서 2600여명의 군중이 결찰과 충돌 13명이 죽고 20명이 부상했다.
▣영덕군은 지품면 낙평교회 조사가 인근교회 교인들과 주민들을 설득하여 3월 18일에 서 19일에 영해에서 1000여명이 참가 지서를 습격하자 경찰과 군인들이 발사함으로 6명이 사망 16명이 부상했다. 3월 19일에는 지품면에서 4월 4일에는 남정면에서 시 위운동을 하여 9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영천군은 4월 6일 신령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18명이 경찰에 피검 되었다.
▣경산군은 고산면 사월교회 목사와 영수 등의 주선으로 3월 15일 장날에 만세를 불렀 고 2명이 체포되었다.
▣칠곡군은 인동면 진평교회를 중심으로 3월 12일에서 14일까지 만세를 부르고 약목면 에서는 3월 14일과 4월 9일에 만세를 부르다가 12명이 체포되었다.
▣영일군은 청하면에서는 교인들이 장날에 만세를 부르다가 23명이 체포되었다.
▣김천군은 김천에서 3월 24일에 계령면에서는 3월 24일 4월 4일 4월6일에 계령교회 교인들이 만세를 불렀고 이로 인해 18명이 체포되었다.
10. 3.1운동의 피해와 결과
3.1운동에 기독교가 앞장서 활약을 하였기에 그 피해도 기독교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그 중에도 수원의 제암리교회(提岩里敎會)가 가장 잔혹한 참상을 당하였다.
1919년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다(有田後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제암골에 나타나 교인들을 그곳 감리교 교회당에 다 모이게 한 뒤 밖으로 문을 잠궈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른 후 안에서 나오려는 교인들에게 군인들이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둘려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30명이 다 불에 타 죽었고 교회당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는 제암리 주민의 가옥 13호와 인근 15개 마을을 불태웠으며 3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사 자료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사망자가 7,509명이고 부상자 15,961명이며 체포된 자가 46,948명이고 교회 건물 파손이 47개소 학교파손 2개소 민가 파손이 715채에 이르고 6월 30일 현재 투옥된 종교인은 장로교인 1,461명 천도교인 1,416명 감리교인 465명 불교인 66명 천주교인 57명 유교인 56명이었으며,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장로교인들과 교회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체포된 교인이 3,804명이며 목사와 장로가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지도자가 수감된 사람이 202명 사살된 사람이 41명 수감중인 사람이 1,642명 매 맞아 죽은 사람이 6명이며 불에 타 없어진 교회수가 12개소라고 기록하고 있다.
1920년 3월 1일 까지 일어난 전국적인 피해상황으로 사망자가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된 자 49811명 가옥소실 724채 교회소실 59개소 학교소실 3개교에 이르렀다.
그들은 만세를 부른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에게만 더 심하게 다루어 잔학한 고문에 못 이겨 옥사한 사람이 많았다.
3.1 운동의 결과는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가져 왔으며 한국민족이 염원하였던 독립은 이룩하지 못하고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실패한 민족거사였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은 우리 민족사에 크게 평가 받을만했다.
10. 3.1운동의 정신
첫째로, 3.1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의 단결된 응집력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분열된 국민의식이 독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공동체의식으로 형성되었다.
둘째로,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꾸준한 독립운동을 추진함으로 조국 해방에 큰 기여를 하게 했다.
셋째로 일제가 무단정치를 포기하고 사이또오(齊蕂實)을 새 총독으로 임명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함으로 언론, 집회, 종교적 탄압이 누그러지게 되고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넷째로 이 운동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기독교가 개인의 내세의 소망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애국적이고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란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11. 3.1운동 100년의 의미
100년 전 이 땅에 울려 퍼진 3.1만세 운동의 물결이, 100년이 지나 다시 재현된다. ‘3.1운동 100년 한국교회기념대회’가 오는 3월 1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및 주변지역에서 전개된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가 모처럼 하나 되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한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하다.
3.1운동 100년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행동에는 한국교회연합을 비롯해 한국교회총연합,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미래목회포럼, 한국교회일천만기도운동본부, 한국대학생선교회, 평신도단체협의회 등 200여 기관 및 단체가 대거 참여하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도 조율 중에 있는 상태다.
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경기 지역의 교회 목사는 물론, 평신도 단체 및 주요 평신도 지도자, 해외 지도자, 100여국가 한인지도자 등도 참석해 하나된 마음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다.
12. 3.1운동의 의미와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의 과제
3.1독립선언서 말미에 공약3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2.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 까지던지 광명 정대하게 하라
12. 3.1운동의 정신과 의미
3.1운동은 신 불신 계층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온 민족의 범 국민운동이었다. 3.1운동 33명 민족대표중 기독교가 16명 천도교가 15명 불교가 2명인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2. 31독립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13. 최근 우리나라 시민 각계각층의 의견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종교계가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모든 국민이 동참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계층과 종교, 이념 등 차이와 다름을 넘어 하나로 일어났던 100년 전 3.1운동의 정신으로 민족의 새로운 100년을 향해 모든 국민들이 함께 참여해달라는 요청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와 시민사회단체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종교계가 국민적 참여와 협력을 당부했습니다.
정부, 시민사회 대표들은 한국종교인평화회의 KCRP 7대 종단 종교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100년 전 3.1운동은 온 국민이 일어선 독립운동임을 강조하며 이번 10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새로운 100년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하나로 모이길 기대했습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이념과 종파를 넘어 종교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이 그리고 노동자 농민 등 전국민이 하나되어 3.1운동의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새로운 100년의 희망을 만드는 또다른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 KCRP 대회장인 천주교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홍정 총무, 대한불교조계종 원행 총무원장 등 7대 종단 대표들도 종단별 협력을 다짐하면서, 국민적 참여를 당부했습니다.
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100년 전 국민 모두가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것 같이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가 그 정신의 계승자입니다."
종교인들은 특히, 민족의 자주독립을 내세운 3.1운동의 정신으로 남북 분단을 극복해 온전한 해방을 이루어나갈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홍정 총무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을 극복하고 온전한 자주와 해방, 민주와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역사가 오늘 한반도의 민(民)에게 부여하는 명령입니다. "
7대 종단 종교인들은 3월 1일 범국민대회에 동참하는 의미로 이날 정오 교회와 성당, 사찰 등 각 종단별 종교시설에서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3분 기도와 타종 등 종교의식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오전 10시 교회협의회와 한국교회총연합 등 개신교 전체가 함께 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가 정동제일교회 열리는 등 종단별 기념행사도 다양하게 진행됩니다.
결론
분단된 조국의 비운의 역사가 이제 종식되고 국제사회를 비롯해서 남북, 북남이 평화통일의 물고를 트고 있는 이 마당에 3.1운동100년을 마지하는 이 역사적이고 중요한 뜻깊은 해야 오늘 우리에가 가장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3.1운동1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화합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부정과 불의를 매우 싫어하는 민족이다.
어쨌든 3.1 운동 100주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비폭력 평화 운동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백만 명 이상이 모여서 했던 큰 규모의 운동입니다. 우리 국민은 4.19 혁명도 이렇게 평화적으로 했고, 촛불시위도 평화적으로 이루었습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렇게 국민이 일어나 세상을 뒤집었어요.
그래서 3.1 운동의 영향으로 대한 ‘제국’ 부흥 운동이 아니라 대한 ‘민국’ 수립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 아니라 민(民)이라고 생각한 거죠. 3.1 운동은 민이 주인이 된 지 100주년이 됐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 ‘평화 통일의 첫 발을 내딛는 새로운 백 년의 출발’, ‘자주독립’ 이런 의미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못 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어요.
3.1 운동, 4.19 혁명, 촛불 혁명을 돌아보면,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습니다. 6월 항쟁 때도 그랬고, 태안반도 기름 제거할 때도 그랬고, 월드컵 때도 백만 명이 모였잖아요. 우리 국민이 가진 평화적인 동력은 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매우 드뭅니다. 세계사를 보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대부분 유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평화적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을 살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3.1 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잘 새겨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계층과 종파나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야합니다. 3.1독립운동시에 계층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서 모든 국민이 참여했던 것처럼 오늘날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여당 야당 모두가 우리 민족의 70년의 염원이고를 초월해서 하나가 되어 민족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하겠습니다.
마무리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그 때 그때 위대한 지도자와 슬기와 지혜를 주심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구원사업을 성취하신다.
예수님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선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일제하에 우리민족의 공동선은 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군사통치하에 우리민족의 공동선은 민주화였습니다.
4.19혁명시에 우리 민족의 공동선은 부패청산이었습니다.
유신치하에 우리민족의 공동선은 인권이었습니다.
촛불혁명은 적폐청산이 공동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선은 뭐니뭐니 해도 온갖 모순의 원죄인 반단극복입니다. 남북분단의 모순은 무력이나 전쟁으로는 물가능합니다. 화해와 화합과 대화로 그 첩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