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역사
영남대로 길목… 추화·밀성·밀주 명칭 삼국지 위지동이전엔 변한 24국 중 미리미동국 최초 기록 |
밀양의 역사를 보면 지명이 '밀양'과 '밀성'이라는 이름을 자주 오갔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아직도 밀양에는 밀성이란 이름을 가진 곳이 많다. 낙동강을 끼고 옛 영남대로의 길목이었고 경부선이 통과하는 등 교통의 요지로 밀양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밀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밀양은 삼한시대 변한 24국 중 하나인 미리미동국으로 불렸다. 이후 지증왕 때인 505년 신라에 병합돼 추화군에 속했으며 경덕왕 16년(757년) 밀성군으로 개칭됐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할때 경주와 함께 영동도에 속했으며 격을 높여 밀주군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충렬왕때 밀성현과 밀성군을 오가다 공양왕 2년(1390년) 밀양부로 승격되면서 마침내 밀양이란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밀성과 밀양이란 이름을 왔다갔다 했다. 태조때 밀성군, 밀성부로 불리다 태종 15년(1415년) 주민 호수를 기준해 천호 이상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때 밀양도호부란 이름으로 다시 환원됐다. 이후 지금까지 밀양이란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한말인 고종 33년(1896년)에 이르러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때는 대구부 밀양군으로 됐으며 이듬해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됐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엔 밀양군의 면 중 밀양면이 대전, 순천, 안동 등과 함께 밀양읍으로 승격됐다. 1989년엔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되면서 밀양시와 밀양군으로 분리됐으며 1995년 다시 밀양시와 밀양군이 통합돼 지금의 도농 복합형 밀양시가 탄생됐다. |
밀양의 3대 신비
삼복더위에 얼음 어는 얼음골 / 국가 대소사에 땀흘리는 표충비 두드리면 종소리 나는 만어석 |
밀양에는 3대 신비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들 유적은 그래선지 밀양의 명소로 자리잡아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밀양 산내면 남명리에서 천황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 중턱에 그 유명한 얼음골이 자리하고 있다. 안산암 돌무더기로 이뤄진 이곳에는 바위틈에서 3~4월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 한여름인 7월말~8월초에 가장 많은 얼음이 생기며 냉기를 내뿜는다. 반대로 겨울에는 얼음이 녹으면서 따뜻한 바람이 감돈다.
얼음골의 이같은 신기한 자연현상의 정확한 원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만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협곡지대에 위치한 너덜과 너덜내부의 지하수 등 특수지형이 여름철 냉기와 결빙의 원인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진 무안면 무안리의 표충비도 또 하나의 신비다. 조선 영조때 사명대사 5대 법손이 사명대사의 한평생 행적과 서산대사 등의 공적을 새겨 세운 비석이다. 옛날부터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때마다 땀방울이 맺혀 사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명대사의 영혐이 나타난 것이라고 전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큰 사건때마다 빠짐없이 땀을 흘린 것으로 조사됐다. △1950년 6·25 발발 이틀전(3말8되)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 5일전(10시간) △1983년 8월 KAL기 피격사건때(4시간) △1996년 6월 북한 수해로 아사 및 탈출자 극심할때(3시간) △1996년 11월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침입때(9시간) △2004년 6월 김선일씨 피살때(1되) 등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자락에 자리잡은 만어사. 1만마리의 물고기가 돌로 변해 명명됐다는 고찰이다. 전설대로 절 주위로 널려 있는 온갖 모양의 바위들에 또 하나의 신비가 숨어 있다. 폭 100m, 길이 500m의 골짜기가 온통 바위들로 장관을 이뤄 만어석이라고 불린다. 바로 이 바위들에 숨겨진 신비가 돌을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는 것. 때문에 이 바위들은 종석(鐘石)너덜이라고도 불린다. 돌에 따라 종소리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만어석의 3분의 2가량이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 |
새길 열린 밀양 / 다시 "날좀 보소"
경부선 철로따라 열리는 지름길 / 제한속도 110㎞ 영남대로 명성 잇는다 전체노선 40%가 교량·터널로 오르막 거의없어 밀양 교통요지·물류기지 등 최고 수혜지역 부상 |
밀양은 이른바 '가깝고도 먼 땅'이었다. 지도를 펼쳐보면 부산과는 지척이지만 정작 가는 길은 유달리 먼 탓이다. 자동차로 남해고속도로를 지나 25번 국도를 이용하면 대략 1시간10분. 결코 만만찮은 여정이다. 하지만 그 멀게만 느껴졌던 밀양이 가까워졌다. 지난 연초 대구·부산고속도로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부산서 밀양까지 30분. 경부고속도로로 종전 1시간30분 걸리던 대구도 1시간 내로 단축된다. '축지'라는 표현이 걸맞은 대구·부산고속도로를 기자가 시원스레 달려봤다.
영남 남부내륙을 관통, 부산~대구를 최단거리로 잇는 대구·부산고속도로는 지난 1988년 기본설계 이후 2001년 2월에 착공, 사실상 17년 만에 대역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부산(대동분기점)~삼랑진~남밀양~밀양~청도~수성~대구(동대구분기점)를 연결하는 총연장 82.05km, 왕복 4차로 폭 23.4m이다. 모두 2개의 고속도로 분기점과 IC 7곳, 청도군 상·하행선에 각각 1개의 휴게소가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주)의 협조를 얻어 상동 IC에서 대구방향으로 차를 올렸다. 차는 시원스레 뻗은 신작로를 미끌리듯 내달렸다. IC 진입로를 벗어나자 확 펼쳐지는 김해의 들판. 도로 바깥 노변을 따라 촘촘이 이어진 전신주들, 그너머 한가한 겨울 들판과 낙동강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먼발치서 경부선을 오가는 열차와도 간간이 낭만적인 조우를 한다. 간혹 도로를 역주행해 오는 공사차량과의 '잘못된 만남'도 있었다.
제한속도는 110km(설계속도 120km). 소통이 원활하다면 목적지까지 도착 시간도 예상보다 훨씬 짧아질 것 같다. 아스팔트 포장 구간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이점. 터널 구간을 제외하면 도로의 절반 가까이 아스팔트가 깔려 있다. 아스팔트는 주행시 소음이 적고 눈부심 등을 막아 운전의 피로를 덜어주지만 콘크리트에 비해 강도가 낮아 잦은 보수가 흠으로 지적된다. 그래도 시원한 드라이빙만큼은 보장된다.
운전 내내 시야가 트이면서 주변 경관이 눈 아래 놓인다. 이유는 고속도로 전구간이 지표면보다 최고 50m(청도읍 고정대교) 높게 놓여져 있기 때문. 산악·계곡이 많은 영남지역의 험준한 지형 탓에 전체 노선 중 40%, 33km를 터널과 교량으로 도로를 이어 붙였다. 터널 13개, 교량만 무려 104개나 된다. 그 덕에 딱히 오르내리막 없이 전 구간이 고루 평탄하다. 가속페달을 밟은 발끝으로 은근히 힘이 들어간다. 도로 특성상 절개지가 많지만, 환경을 보전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김해 상동면의 야트막한 용산의 경우 도로 통과로 완전히 두동강난 산등성이를 터널 형태로 만든 뒤 콘크리트와 흙으로 산을 다시 복원했다. 그 위로 '로드킬(road kill:야생동물·차량 충돌)'을 막기 위해 30m 길이의 야생동물 통로도 설치했다. 또 터널 주변에 소나무·전나무 등을 심어 풍부한 녹지공간도 조성했다. 그 외에 차량 사고시 원활한 소통을 위한 널찍한 우회로도 자주 눈에 띈다. 이윽고 눈앞을 떡 가로막는 장쾌한 무척산. 서로 어깨를 곁붙인 산맥을 향해 직선도로를 따라 빨려들 듯 직진. 최장인 2040m 무척산터널.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시 시야는 지평선까지 닿일 듯 넓어졌다. 좌우 들녘에는 목가적인 정취가 물씬하다. 눈 깜짝할 사이 삼랑진과 남밀양. 밀양IC에 다다르기 직전에 만나는 1290m의 밀양대교. 450t 잭 4개를 사용, 교량을 한쪽 끝에서 제작해 밀어내는 일방향 연속압출이란 특수 공법을 적용해 만들었다. 고속도로측은 "이 공법으로 1290m의 긴 교량을 만든 것은 세계 최초"라고 자랑한다. 밀양IC에서 빠져나오면 밀양시청까지는 5.5km. 24번 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밀양과 청도 사이, CJ푸드시스템(주)이 운영하는 하나뿐인 청도휴게소. 대지 1만6000평에 통유리 외관의 건물이 도시적 세련미를 뽐낸다. 대기업이 휴게소 시장에 진출한 첫 사례이다. 기존 휴게소와의 차별화를 위해, 메뉴별 특화매장과 스시·딤섬코너 등도 마련한다. 자연친화적 화장실과 휴게소 2층엔 여성전용 휴식공간, 그밖에 1000원 숍 형태의 생활편의 쇼핑공간도 운용한다.
지능형 교통시스템(ITS)도 주목할 만하다. 갓길쪽에 10m 높이로 1km마다 종 모양의 CCTV를 설치, 밀양의 도로본부에서 전 구간의 교통상황을 모니터한다. 역시 1km 간격으로 바닥에 차량검지루프(VDS)를 묻어둬 도로를 지나는 차량 정보·교통량·속도 등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한다. 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최고 수혜 지역인 밀양은 현재 부푼 설렘에 젖어 있다. 고속철도 정차지역인데다 2008년 건설 예정인 울산~함양 고속도로(130.7㎞)도 밀양을 관통함에 따라 영남 남부내륙의 교통요충지로 급부상했다. 밀양시는 대구·부산고속도로가 개통되는 올해부터 연간 관광객이 예년보다 배 가까이 늘어 500만명대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대구·부산고속도로 통행료는 - 거리는 짧지만 요금은 되레 비싸 - ㎞당 103·6원으로 경부고속도로 2.2배 부산~대구 통행료 8500원. 민간자본 72.3%(1조8415억원) 투입, BTO(Build Transfer Operate) 방식으로 향후 30년간 통행료를 징수할 대구·부산고속도로에 운전자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법하다. 40km나 짧아진 거리에도 불구, 경부고속도로 부산~동대구 5600원보다 2900원이 더 비싸기 때문. 이는 1km에 통행료 103.6원을 부담하는 격으로 경부고속도로 부산~동대구(1km 46원)의 2.2배, 일반 고속도로(1km 39.1원)보다 3배 가까이 높게 매겨졌다. 이에 대해 신대구부산고속도로㈜측은 "거리 단축에 따른 시간 절약과 함께 유류비로 6000원(쏘나타 기준) 정도가 절감되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이다"라는 논리만 되풀이 하고 있다. 즉, 기존 경부고속도로로 우회해 추가되는 기름값보다 직선도로를 이용하면 운전자 입장에서 3000원 정도 이득이란 뜻이다. 하지만 지난해 9월 건설교통부가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대구·부산고속도로의 통행료는 7000원으로 책정될 것으로 명시한 바 있다. 민자고속도로라는 특수성을 무시할 순 없지만, 채 4개월이 안돼 통행료가 정부 예상치보다 1500원이나 웃도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통행료는 운전자의 도로 사용에 대한 대가와 투입된 공사비 환수를 위해 적정 이윤을 붙여 산출하는 것이지, 우회도로 이용시 부담해야할 기회비용을 기준으로 정해서는 곤란하다. |
무안면 밀양 돼지국밥의 원조
3형제 한동네 나란히 식육식당 / 구수하고 담백한 맛 3대째 가업 | |||||||||||
밀양에서 창녕으로 가는 국도에 자리잡은 무안면 소재지. 이 자그마한 동네에 3형제가 운영하는 돼지국밥집이 있다. 무안식육식당, 제일식육식당, 동부식육식당 등 3곳이다. 7남1녀 중 셋째인 최수도씨, 넷째 수용씨, 막내 수곤씨가 각각 운영하는 곳이다. 밀양 무안돼지국밥의 연원은 이들 형제의 할아버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최달성씨가 일제강점기 후반 무안면 시장터에서 '양산식당'이란 돼지국밥집을 연 것이 시초. 이후 이들 형제의 아버지가 인근에 '시장옥'이란 상호로 분가해 나간 뒤 무안식육식당으로 이름이 바뀌어 최수도씨가 지금껏 운영해오고 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산식당은 막내인 최수곤씨가 이어받아 지금의 동부식육식당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다 쓰러져가는 옛집에서 가마솥에 나무를 때 장사를 했습니다. 장날이면 비좁은 가게에서 허기를 채우는 사람들로 늘 시끌벅적했죠." 동부식육식당 최수곤씨의 추억이다. 무안식육식당 최수도씨는 "80년대 초 창원에서 열린 전국음식축제에 밀양 대표로 온 가족이 참가해 큰 인기를 끌었다"며 "이때문에 이후 밀양돼지국밥이 더 유명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밀양돼지국밥의 원조답게 이들 식당에는 외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다. 구수하고 담백한 그 맛의 비결은 뭘까. 우선 소뼈를 3일간 고아 나온 육수를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없이 개운한 맛을 낸다는 것. 돼지고기도 직접 김해 등지에서 누린내가 나지 않는 암퇘지만 고른다. 또 고기를 씻을 때도 소금과 밀가루를 섞어 씻어 최대한 누린내를 제거한다. "돼지국밥집을 열려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로 문의도 많이 옵니다. 밀양돼지국밥을 널리 알린다는 셈치고 일반적인 조리법 정도는 가르쳐 주죠." 부산 경남 등 인근뿐 아니라 서울지역에서도 자주 전화문의가 와 한편으론 뿌듯하기도 하다고 최수곤씨는 덧붙였다. |
時空의 오버랩 - 스크린, 향수로 적시다
영화속 궤적을 따라간 밀양 |
조금 나른함마저 느껴지는 전형적인 소도시, 밀양. 마천루로 뒤덮인 대도시에 비하면 80~90년대의 아련한 흔적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한적한 풍경으로밀양이 제법 영화 촬영지로 대접받고 있다. 어찌보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더딘 발전이 밀양 주민들에게 최대 불만이지만, 시간을 거스르고자 하는 예인의 눈에는 오히려 매력적인 땅이니 말이다. 밀양 일대에서 영화 전반이 촬영된 '똥개'와 '오구'를 통해 스크린 속 밀양의 궤적을 되짚어 봤다.
# 똥개 꽃미남 정우성의 '망가진' 연기로 화제가 됐던 영화. 미워할 수 없는 '청년백수' 똥개의 일상을 걸쭉한 밀양사투리로 코믹하게 그렸다. 밀양시와 시민들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지난 2003년 3월21일~5월29일 2개월여간 밀양시내와 그 인근에서 집중 촬영됐다. ● 용평터널… 100년된 터널 속 동네 불량배들과 한판 똥개가 속한 MJK(밀양주니어클럽) 회원들과 동네 불량배들간 패싸움이 벌어진 곳. 내일동과 교동의 경계지점으로 1905년부터 1940년까지 경부선 철로로 사용되다 현재까지 차도·인도로 이용되고 있다. 터널 앞으로 밀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위에는 조선 중종때 한림학사 월연 이태 선생이 낙향해 학문을 수양하던 월연정과 희귀 수종인 백송이 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는 백송터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터널 높이는 약 5m, 길이 300m 정도. 폭이 채 3m가 안돼 차량 한대만 겨우 지나다닌다. 100년 넘은 옛 터널치고는 어디 한군데 삭은 데가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됐다. 어둑어둑한 터널 내부로 들어서면 발소리가 빈 공간을 그윽하게 맴돈다. 드문드문 벽에 걸린 전구의 불빛이 약간 음산하면서 몽환적이다. 터널 중간 천장이 뻥 뚫려있어 자연광 역할을 한다. 싸움 장면은 여기서 촬영됐다. 시청에서 약 5km 거리. 교동사거리를 지나 4차선 봉답교 중간에서 용평방향으로 빠져나와 길따라 직진. 터널입구 근처 식당의 메기매운탕 맛이 얼큰하다.
● 삼랑진철교… 똥개와 정애, 스쿠터위 사랑을 싹틔우다 커피배달하던 정애의 스쿠터 뒤에 탄 똥개가 엉겁결에 정애의 허리를 감싸는 장면. 두사람의 미묘한 감정이 여기서부터 싹튼다. 길이 602m, 폭 4.2m. 1943년 철로로 개통된 후 재건축을 통해 1964년부터 인도·차도로 쓰이고 있다. 김해 생림면~삼랑진읍 낙동리를 잇는 다리로 하루 통행량만 4000~5000대. 빈번한 통행으로 주말·명절때는 철교에 진입을 기다리는 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소형차 두대가 겨우 교행할 정도로 좁아 트럭 등이 오갈 경우 철교 양쪽 검문소의 청경들이 무전으로 교통을 통제한다. 옆으로 나란히 난 또 하나의 철교가 경전선 열차가 지나는 낙동철교이다. 일대 삼랑진의 서정적인 풍광이 일품이다.
● 삼문동 밀양강 둔치… MJK '평원의 결투장'은 시민의 쉼터로 밀양 지도를 펼치면 유독 시선이 모이는 곳이 있다. 삼문동. 밀양강으로 둘러싸인 총면적 2.93㎢의 '섬마을'이다. 과거 밀양 행정의 중심이기도 했다. 삼문동을 감싸고 있는 밀양강 둔치. 똥개가 MJK의 쇠파리와 '평원의 결투'를 벌인 장소다. 현재 삼문동 둔치는 대표적인 시민 휴게장소로 영화 촬영이후 파크 골프장이 들어섰다. 섬 둘레로 5.5㎞에 달하는 조깅·자전거 코스와 야외조각 공원, 수영장 등이 있다. 그밖에 삼문동 일대의 골목길과 옛 밀양경찰서 부지에서 영화의 잔상들과 조우할 수 있다. ● 그 밖의 추억어린 촬영지… 사라진 백수청년의 집터엔 소방도로 나고 영화의 주무대가 되었던 작지만 너른 마당의 똥개네 집. 교동타워맨션 뒤에 있던 이 곳은 영화촬영이 끝나자 소방도로 설치로 이내 철거됐다. 더불어 영화 속 흔적도 말끔히 사라진 상태. 밀양에서 가장 번화한 북성사거리와 내일동 곳곳에서도 영화 속 장면이 아스라히 오버랩된다. 특히 내일동사무소 앞의 시장골목. 진녹색 트레이닝복에 머리를 긁적이며 구부정하게 장을 보던 정우성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밀양의 유일한 상설시장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역사 또한 깊어 시장 형성이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장안쪽 골목 전부를 돔 형태의 천장으로 가려 현대화를 꾀했지만 살내 가득한 옛 시골시장의 정취만큼은 변함없다. # 오구
동양적 사상을 토대로, 죽음을 해학과 풍자로 묘사한 작품, 밀양연극촌에서 장기 공연한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했다. 밀양의 수려한 풍광이 영화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똥개보다 앞서 2002년에 촬영됐다. ● 퇴로마을 이씨 고가… 세월도 비껴간 토담골목 부북면 방향으로 24번 국도를 10여분 죽 달리다, 밀양연극촌 지나 곧 우회전. 이후 직진. 그지없이 평온한 겨울들판과 햇살을 받아 눈부신 가수못에 이르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고택마을이 나타난다. 영화 '오구'의 주무대인 여주 이씨 종택들. 1890년께 이곳으로 들어온 여주 이씨의 집성촌으로, 5대에 걸쳐 그 원형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 기와를 얹은 토담 골목을 걷노라면 과거로의 여행이 따로 없다. 세월의 풍파에도 보존이 매우 잘돼, 그 중 6채가 1985년 경남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현재 집들 대부분은 비워져 있고 몇몇 관리인들만이 기거하면서 종가를 지키고 있다. 한때 전통 가옥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학생과 관광객들에게 고가를 개방했지만 최근에는 거의 문을 잠근 상태. 퇴로마을 인근의 위양못, 퇴항리에서도 영화의 주요 장면을 담았다.
퇴로마을과 위양못은 매년 봄 개최되는 밀양아리랑마라톤대회의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
축제가 끊이지 않는 고장
봄 여름 가을 겨울 / 밀양아리랑 · 얼음골 사과 행사 등 명물 | |||||||||||
밀양아리랑대축제는 매년 음력 4월16일 이전 4일간 밀양강변 등 시내일원에서 성대하게 치러진다. 정절의 표상인 아랑낭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축제는 이제 전 시민의 민속문화 축제로 자리잡았다. 화려한 전야제를 시작으로 밀양아리랑의 밤, 아랑규수 뽑기, 무형문화재 한마당축제, 밀양아리랑 가요제 등 50여가지의 각종 행사가 시민은 물론 외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밀양에서 빠질 수 없는 명물은 역시 얼음골 사과. 얼음골 자체도 명승지지만 사과 또한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얼음골 사과축제는 지역특산물인 사과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1997년부터 열리고 있다. 사과가 알맞게 익는 11월초 산내면 얼음골 일원에서 이틀간 개최된다. 직판행사는 물론, 사과먹을거리 시식회, 가요제, 불꽃놀이, 풍물패 공연, 전통문화 작품 전시 등 부대 행사는 또 다른 재미다. 얼음골의 명성답게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축제가 있다. 소설 '동의보감'의 무대였던 점을 활용, 허준과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인술정신을 기려 1996년부터 매년 8월 얼음골 동의축제를 열고 있다. 이 기간동안 생약전시를 비롯, 한방 무료진료, 재약산 약초탐방, 산중음악회, 도자기 만들기 등 특별한 체험거리를 선사한다. 밀양 삼랑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딸기. 벚꽃이 봄의 도래를 알리는 3월말~4월초면 양수발전처 일원에서 삼랑진 딸기 한마당축제가 열린다. 물 맑고 토질 좋은 천혜의 조건에서 재배되는 삼랑진 딸기를 실컷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 축제다. 딸기 먹기·쌓기 대회, 딸기 품평회, 딸기 비교전시회, 먹을거리 장터 등 딸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이밖에 밀양의 새 명물로 떠오른 밀양 연극촌에서 주관하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도 볼거리다. 7월 중순 보름간 열리는 축제는 30~40편에 달하는 연극공연을 비롯해 어린이 연극캠프, 주말극장, 뮤지컬·무용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로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한다. |
'맞춤형 영화인'의 산실
실기위주 밀양영화학교 올 첫 입학생 받아 | |||||||||||||
한국의 '영화사관학교'를 꿈꾸는 밀양영화학교. 지난해 12월 전문영화인 양성을 목적으로 재단법인 밀양영화촌(촌장 김한규·사진)이 7억원을 들여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폐교를 리모델링해, 강의실·스튜디오·실습실·시네마테크·기숙사 등을 갖추었다. "모든 수업은 철저히 실습과 현장교육 위주로 실시된다"고 김한규 촌장은 말한다. 졸업후 영화제작 현장에 투입되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준비된 영화인들을 만들겠다는 포부이다. 실무 위주의 강의를 위해 교수진들도 현역에서 종사하고 있는 영화감독, 촬영·편집·미술감독 등으로 구성했다. 4년제 대안대학 형식으로 오는 2월 첫 신입생을 받아 봄부터 본격적인 수업이 이뤄진다. 신입생 모집은 내달 1일부터 연출, 연기, 영상제작, 문예창작, 디자인 등 5개 학과에 총 100명. 수능시험과 관계없이 고등학교 졸업 학력만 있으면 응시할 수 있다. 학교 위치가 조금 외져 전교생의 절반 정도는 기숙사 생활이 가능하다. 그밖에 밀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밀양연극촌(www.stt1986.com)이다. 지난 1999년 문화게릴라 이윤택씨가 '연희단 거리패' 단원들을 이끌고 밀양시 부북면의 한적한 시골 폐교로 들어오면서 시작된 연극촌은 그간 꾸준한 활동과 명성으로 경남 일대의 연극 메카로 자리잡았다. 연극촌은 6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4개의 실내극장과 500석 규모의 야외 숲속에 위치한 극장이 있다. 연극촌이 밀양에 가져다 주는 경제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매년 보름간 열리는 여름공연축제때만 2~3만명의 관람객이 모여들고 이중 절반 가까이가 외지인들이다. 이들의 동선은 자연스레 밀양의 관광산업과 연계된다. 현재 밀양연극촌과 영화학교의 폐교 사용료는 모두 밀양시가 교육청에 대신 지불하고 있다. |
양반의 고장 관광명소
'뼈대있는 고을' 원조 아인교 / 예림·혜산서원 , 추원재 등 선비정신 가득 영남루 아래 대나무밭 전설 깃든 아랑각 / 천년고찰 표충사에 피서명소 호박소까지 |
밀양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뭘까.
산꾼들은 주저없이 영남알프스의 베이스캠프라 하겠고 어르신들은 양반고을이라 말한다. 혹자는 아리랑의 고장이라고도 하고 장삼이사들은 영남루 표충사 얼음골(사과) 호박소가 생각난다고 전한다.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씨는 이중 양반고을임을 강조한다. 흔히 경북 안동이 양반고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알고보면 밀양이 '원조' 양반고을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설명은 이렇다. 안동은 퇴계 이황 배출 이후 비로소 양반고을로 이름을 올렸는데 밀양은 조선 성리학의 계보로 볼 때 퇴계의 증조부쯤 되는 점필재 김종직의 고향으로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다. 퇴계가 생을 마감한 후 수백명의 선비가 구심체를 잃어 동요할 때 당시 예안 현감이던 밀양 출신의 추천 손영재가 고향의 옥답을 팔아 도산서당 뒤 도산서원을 지었다. 양반고을의 맥을 잇게 한 것이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밀양사람들은 그래서 밀양을 '笑(소)안동'이라 부른다. 안동을 보고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양반고을이란 의미란다. 밀양이 양반고을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예가 또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할 때 걱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양반고을의 반대에 대한 우려였다. 고민끝에 시범 케이스로 뽑힌 곳 중 하나가 연극인 손숙의 고향이기도 한 밀양시 산외면 다원마을. 다원은 임진왜란때 안동에서 전란을 피해 이주한 안동(일직) 손씨의 집성촌. 흔히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로 청도 신도마을이 유명하지만 이는 마을 어귀에 세운 입석 때문. 입석이 없는 다원마을은 그저 역사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밀양의 정신은 바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선비정신이다. 이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림(禮林)서원. 봉수대가 있는 부북면 종남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김종직의 생가인 추원재는 예림서원서 차로 10분 거리.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 김숙자의 거처이기도 하다. 추원재 뒷산에는 그들 부자의 묘도 있다. 시간이 날 경우 다원마을에 위치한 일직 손씨 오현을 모신 혜산서원도 찾아보자. 뭐니뭐니해도 밀양의 얼굴은 영남루. 밀양지도를 펴놓고 보면 정중앙에 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국내 3대 명루로 손꼽힌다. 웅장한 규모에 놀라고 밀양강변 절벽 위에 절묘하게 위치해 감탄한다. 이층 다락식 누각인 영남루는 좌측에 능파각, 우측에 침류각을 거느린 독특한 형상. 능파각은 마당쪽으로 나와있고, 침류각은 강변으로 물러나 있어 위에서 보면 태극문양. 다시말해 음과 양의 조화를 고려했다. 발아래엔 밀양강변이, 고개들면 밀양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여 조망이 수려한 영남루 내부에도 챙겨야할 볼거리가 있다. '영남제일루', '영남루'라고 적힌 현판이 그것으로, 조선 후기 중수 당시 이인재 부사의 11, 7세의 아들이 각각 쓴 것이다. 아직도 서예가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남아있다. 영남루 위 편에는 단군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태극나비의 전설을 지닌 무봉사, 조선 여인의 정절로 대표되는 아랑의 전설이 전해지는 아랑각, 동심원 모양을 한 돌꽃인 석화(石花), 시립박물관 등도 둘러보자. 표충비가 국가 변고의 예시자라면 무봉사 태극나비는 나라의 경사때만 날아온다고 전해온다. 밀양시를 나와 남쪽의 삼랑진으로 가면 만어산 중턱에 만어사란 절이 있다.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 남방불교설의 한 근거가 되는 만어사엔 절 앞 너덜이 진귀한 볼거리다. 수 만개의 거무튀튀한 돌은 하나같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돌로 이 바위를 두드리면 종처럼 쇳소리가 난다. 해서 종석(鐘石)너덜이다. 너덜 맨 위쪽 미륵전에는 거대 종석이 하나 있다. 높이가 4, 5m쯤 돼 보이는 일명 미륵바위에는 부처님의 형상이 보인단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표충사.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3000여명의 승병을 이끌고 왜적과 맞선 구국성지.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탈고한 곳이다. 유교와 불교가 한 울타리에 공존하는 독특한 사찰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임란때 큰 공을 세운 서산 사명 기허 등 세 대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유교식 표충서원이 있고,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불가의 세계를 만난다. 경내 영정약수는 신라 흥덕왕 셋째 왕자의 지병을 낫게 했다고 전하는 신비의 물이다. 경내에서 바라보는 천황산과 재약산의 자태는 힘이 넘친다. 사과로 유명한 산내면 얼음골은 천황산 기슭 해발 700m에 위치한 신비의 골짜기. 삼복더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솟는다. 정식 이름은 시례빙곡(詩禮氷谷). 천연기념물 제224호. 주차장에서 넉넉잡아 25분쯤 걸어야 한다. 얼음골에서 200m 떨어진 곳에는 가마볼협곡이 있다. 기암절벽이 절경인 이곳은 여름철 찜통더위로 악명높다. 호박소는 얼음골 입구에서 1.2㎞ 지점에 위치한 여름철 계곡여행의 원조. 계곡 입구까지 차가 들어가며 주차장에선 걸어서 6분 거리. 둘레 30m, 높이 10m의 대형 물웅덩이 호박소의 시퍼런 물빛은 뭣이라도 삼킬 듯한 블랙홀을 연상시킨다. 양산과 인접한 삼랑진의 낙동강변에 위치한 작원관은 조선시대 동래~양산~밀양(작원관~영남루)~상동~경산~대구~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상의 국립 숙박기관. 지금은 관문만 남아있다. 인근 양수발전소로 유명한 안태호 천태호는 벚꽃이 한창일 때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창녕과 인접, 밀양돼지국밥 원조집이 있는 무안면에는 사명대사 생가지 및 기념관과 표충비각이 볼 만하며 인접한 초동면에는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미리벌민속박물관이 있다. ◇ 맛집
- 1급 한우고기에 울릉도 나물 별미 - 신선한 아귀만 고집, 시원함 일품 표충사 입구 강촌가든(055-353-3905~6)은 갈비맛(사진위)이 끝내주는 집이다. 그날 그날 받아온 한우만을 고집하기에 고기맛으로 승부한다. 이곳에선 특히 울릉도 나물이 밑반찬으로 나온다. 주인 조복선(55)씨의 사돈댁이 울릉도라 희귀한 명이(산마늘) 잎과 줄기를 맛볼 수 있으며, 날이 풀리는 봄에는 고소한 부지깽이, 삼나물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물도 나온다. 고기못지않게 구수한 시골된장찌개도 기가 막히게 맛있다. 갈비 1인분 1만6000원, 시골된장 5000원. 밀양시청 서문 옆 옛 결혼이야기 맞은편에 위치한 생아귀 전문점 고려관(055-354-6694). 주인 조계현(47)씨가 매일 새벽 부산 다대포 어시장에서 구입한 크고 신선한 아귀를 구입해 맛이 뛰어나다. 생아귀찜(사진아래), 탕, 수육이 주메뉴이며 특히 생아귀탕은 복국보다 시원하다. 밀양을 찾는 연예인 등 외지인 단골들이 많다. 찜 2만~3만원, 탕 7000원, 수육 3만~5만원. 산내면 봉의저수지 입구 인골산장(055-353-6531)은 산꾼들에겐 아주 유명한 집. 주인 유임준(54)씨 부부의 후덕한 마음씨와 별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닭백숙 흑염소 등이 주메뉴. 방목하는 흑염소는 주문을 받으면 직접 잡아와 요리하며 토종닭도 산속에서 직접 키워 약이나 진배없다. 백숙 3만원, 흑염소 마리당 45만~55만원. |
밀양의 대성(大姓)
허… 뿌리없는 우리 없을낀데… / 각박한 세상, 가문 지키기도 벅차데이 솟을대문 지나면 99칸 위용 자랑 / 300년 견뎌 도지정 문화재자료로 129년 전 추화재 자리에 새로 건립 / 일제시대땐 밀양읍성과 함께 수난 | ||||||
밀양은 추화, 밀주, 밀성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태종 이후 밀양으로 지명이 확립됐다. 밀성을 관향조(본관)로 하는 성씨는 여럿이 있지만 그 중 세가 가장 큰 것이 밀양 손씨와 밀양 박씨. 밀양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밀양 손씨와 밀양 박씨 고택 및 재실을 찾아보았다.
# 밀양 교동의 손씨 고가 밀양 향교 아래로 밀양 손씨들이 모여 살았던 고택을 볼 수 있다. '교동(校洞)' 이라는 지명은 항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 밀양문화원 손기현 원장은 "전국 어디든 교동은 그 고을의 대표적인 성씨를 가진 양반들이 사는 동네라 생각하면 된다"며 교동의 손씨 고택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실제로 항교 가까운 곳에는 반촌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만석군집으로 불렸던 99칸의 손씨 고택은 조선 숙종 때(1659~1674년) 인묵재 손성증이 지은 것으로 약 300여년간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인묵재는 시묘살이를 해 효자로 이름났었다고. 만석군집답게 높은 솟을대문 옆에는 말을 탈 때 딛고 올라설 수 있는 마석이 있고 대문 바로 옆에 마굿간이 붙어 있다.
교동파(추천공파) 14대 종손 손백식씨는 "마석은 본래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 집앞에 두는 것으로 지체높은 사람이나 부자가 사는 집이라는 표시"라고 설명했다. 추천공 손영재는 도산서원 창립자로 경북에서는 이름이 높다.
인묵재 종손 손영배씨는 "집안의 살림이 한창 번창할 때는 선산인 임야를 제외하고 순수 농토만으로 270만평을 보유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여다 본 인묵재 고택은 남성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가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 '남녀칠세 부동석'의 유교적 가치를 따르던 것이 집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 낮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문은 잠가 놓고 옆의 쪽문으로 여성들이 드나들어 서로를 볼 수 없게 했단다. 큰사랑채는 집의 외부에 모두 창문을 달았다. 본래는 다 뚫려 있는 것이나 사람이 살기에 편하게 개조한 것으로 이같은 구조는 고 윤보선 대통령의 안국동집과 같은 모양이다.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에서 큰사랑채까지는 꽃잎 모양의 돌이 깔려 징검다리 건너듯 딛으면 '맹몽헌'이라는 큰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다. 고택에 거주하며 고택을 돌보고 있는 손영배씨는 큰사랑채 현판에 '맹몽헌'이라 쓰인 것은 꿈에서 맹자를 만나는 정자라는 뜻으로 고조부께서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 글(학문)을 빌리지 않으며, 자식을 빌리지 않는 것으로 이름 높았으나 이제는 그 의미를 지키는 것도 어려워졌다"며 종손으로 가문을 지켜가는 어려움을 내비쳤다. 현재 고택은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시에서 보수, 관리하고 있다. # 밀양 박씨 재실
밀양 박씨는 워낙에 파가 많고 수가 많아 현재 종가라 할 만한 곳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에 밀양시 내동의 재실을 중심으로 가문의 일을 처리한다. 재실은 약 129년 전에 추화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것이다. 1230여평의 한옥으로 모두 소나무만을 사용해 지었단다. 재실에 모시고 있는 분은 밀성대군과 그의 아들인 박욱과 박난. 밀성대군은 밀양(밀성) 박씨의 시조로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홉 아들 중 첫째다. 밀성대군이 밀양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많은 박씨들 중 밀양 박씨가 박씨의 대표로 자리잡았다. 현재는 종파는 있지만 종가는 없는 상태로 밀성대군의 12종파 중 직계가 태사공파인데 태사공파의 6대손인 은산부원군의 직계가 대종손으로 경북 청도에 살고 있다고. 재실에서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영남루에서 밀성대군의 제사를 모시고 재실로 돌아와 밀성대군의 아들인 박욱과 박난의 제사를 모신다. 특이한 것은 보통은 위패를 모시는데 박씨 재실에서는 목상을 깎아 모시고 있는 점. 밀양박씨 대종회 상임부회장 박수명(73)씨는 "현재 밀성대군의 묘나 그 아들들의 묘소가 남아 있지 않아 나무로 깎은 목상을 대신 모셔놓고 있다"고 밝혔다. 재실의 대청 마루는 남향이라 겨울인데도 볕이 길게 들었다. 대청마루 앞에 서면 영남루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전망. 재실은 150여년 전에 '추화재'라 불리었다가 밀양의 지명이 바뀌면서 현재의 '밀성재'로 바뀌었다. 재실을 보고 왼쪽으로는 청년회 사무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밀성 대군의 두 아들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밀양박씨 대종회 감사인 박희학(73)씨는 "밀성재가 있는 뒷 산은 '아북산'인데 본래 돌로 만들어진 밀양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때 이곳의 지기를 끊기위해 일본인들이 성벽을 허물어 그 돌로 경부선 철도를 짓는데 받침돌로 사용했다"며 재실과 관련된 역사를 들려 주었다. 박상진(84) 수석고문은 "재실에서는 매년 여름 하계 연수를 주관해 박씨 가문의 젊은 사람들에게 예절을 가르쳐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박애의 실천… 천주교의 성지로
삼랑진에 첫 순교자 김범우 묘역 / 복지시설 '오순절 평화의 마을'도 | |||||||||||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야산자락. 1000여평 부지에 깔끔하게 단장된 김범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89년 발견돼 천주교 부산교구가 2003년부터 묘지조성에 나서 지난해 9월 준공 미사를 가졌다. 김범우는 1751년 서울의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역관이던 김범우는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1785년 자신의 집(명례방)에서 집회를 갖다 발각돼 온갖 고문끝에 밀양 단장으로 유배돼 2년뒤 이곳에서 선종했다. 그의 나이 37세때다. 김범우는 엄혹한 유배생활 속에서도 선교에 주력, 그 후손들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한 모태가 됐다. 묘지 발견 당시 이곳에서는 김범우의 치아와 십자가가 발굴되기도 했다. 한국천주교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또한 삼랑진읍 미전리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다. 이곳은 오갈데 없는 행려자나 정신질환자 노약자 등 400여명이 의탁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이자 천주교 수도공동체 마을. 오순절 평화의 마을의 역사는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 동항성당에 한 알코올 중독자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 당시 주임사제였던 오수영 신부가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후 많은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동항성당에 몰려들어 60여명의 인원을 수용할 곳이 없게 됐다. 마침 한 신자의 도움으로 삼랑진 야산에 땅을 마련해 1989년 2월 평화의 마을이 문을 열고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도 여주에도 천사들의 집과 평화재활원을 설립해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해가고 있다. . |
얼음골 사과의 원조 김문섭씨
"얼음골에 바친 청춘 열매를 맺었죠" | |||||||||||
"얼음골 사과를 한 번 맛보면 다른 사과는 맛이 없어서 못 먹게 될 정도로 맛과 향이 뛰어납니다. 다른 식물에는 혹독한 환경인 일교차가 사과맛의 비결이지요."
밀양이라면 쉽게 떠올리는 얼음골 사과의 원조로 알려진 김문섭(60·사진)씨는 얼음골 사과 칭찬에 부모가 자식 예쁜 것을 말하듯 신바람나 했다. 얼음골 사과는 과육이 아주 아삭아삭하고 향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상품. 현재는 높은 품질로 사랑받는 명품 사과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한 농민의 땀과 눈물이었다. 김씨는 1973년부터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에 최초로 사과나무를 심어 사과 재배에 성공해 밀양 얼음골 사과의 원조가 되었다. 그는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부농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돌아온 고향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며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김씨가 처음 시작한 것은 통일벼였는데 일교차가 너무 커 잎이 누렇게 말라 죽어 완전히 실패했었다고.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얼음골에선 벼농사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작물을 심을지 고민 끝에 지난 73년 진주농민교육원에서 과수교육을 받으며 얼음골에서도 사과를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 하천부지에 사과나무를 처음 심었다. 사과는 일교차가 심한 곳에서 자라야 낮에 만들어진 영양분의 손실이 적어서 당도가 높아진다는 설명을 듣고 착안한 것. 이듬해는 영국에서 개발된 작은 사과나무 종류인 대성왜목 450주를 구입해 1200평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었다. 하지만 사과나무를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지는 막막했었다고.
김씨는 "얼음골에는 본래 밤나무가 많았는데 밤나무의 천호충이 사과나무 새순을 말려 죽이는 어려움부터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며 당시의 고생을 떠올렸다. 하지만 4년간의 갖은 고생 끝에 첫 수확을 거두어 100여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소문이 나자 사과 재배를 하는 농가가 급격히 늘어나 1990년대부터는 얼음골 사과가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브랜드 가치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김씨는 "다른 지역은 생산된 농산물의 가격을 경매장에서 결정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과를 선별해 각각 가격을 매겨 소비자에게 내놓는다"며 사과 품질에 자부심을 보였다. '얼음골사과 영농조합'을 설립한 그는 지난 97년부터 얼음골사과축제 초대 위원장을 맡아 얼음골 사과 홍보에도 힘을 쏟았다. 2003년에는 '얼음골사과발전협의회'를 만들어 산내면 전 지역에서 생산한 사과를 같은 디자인의 박스에 담아 내놓는 박스 단일화 작업에도 큰 역할을 했다. 영화 '밀양' Steel-cut
영화 '밀양'의 흔적이 서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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