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형집행 전 14일, 13일, 12일
젊은 여성
그가 깨달았을 때에는 그녀가 의자에
앉고 나서 5~6분이 지난 뒤였다. 그것은
정말 묘한 것이었다. 카운터 쪽에는 아직
손님 그림자가 조금밖에 없었으므로 그녀가
들어오면 사람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꽤나 조용히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들어온 것은 그가
카운터를 향해서 똑바로 돌아앉은 직후의
일이리라. 그렇다면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도착하도록 시간을 적당히 조절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풀을 먹인 새 코트를 요란스레 차려입은
차례 둘러봤을 때에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 점은 분명했다.
처음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고 나서 몸을
돌렸더니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곧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웬지 이상스럽게도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을 부정했다. 아니야, 지나친
자격지심이야. 손님은 누구나 주문할 때에
내 얼굴을 쳐다보게 마련인걸. 마실 것을
만드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쳐다보는 태도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고쳐 먹었던 처음의 느낌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쳐다보는 것 그
쳐다보는 것이 주목적이고 주문은 첨가물
같았다. 그 모습은 그에게, 즉 그녀가 술을
주문하고 있는 상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잘 보세요. 잘 기억해
둬요.'
그녀는 위스키와 물을 주문했다. 그가
그것을 가지러 갈 때에도 그녀의 눈은
끝까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처음에는 그 야릇한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좀 귀찮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런 사소한 감정은 떠오르자마자 곧
희미해져 버렸다. 처음 얼마간은 마음에
꺼려지는 것도 없이 떠올랐다가는 곧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일단 일은 끝나고 말았다.
주고는 곧 등을 돌려 다른 손님 쪽으로
갔다. 잠시 막간이 있었다. 그 동안은
그녀의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
쪽에서도 그사이에 다소의 변화가 있을
법한 일이다. 손의 위치를 바꾼다든가,
잔을 집어든다든가, 술집 안을
둘러본다든가, 뭐 달리 어떻게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미동 하나
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마치 어디에서 오려낸 여자 인형
그림을 의자 위에 꽂아놓은 것만 같았다.
마실 것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술잔은 그가 갖다놓은
바로 그 자리에, 그가 놓은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단 한 가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눈이었다. 그것은 그의
따라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에 잠시 틈이 생겼기 때문에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의식하고 나서 첫번째의 일이었다. 이미
그는 그녀의 눈이 줄곧 자기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지?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괜스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코트가 좀 이상한가, 원--- 이렇게 생각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상은
없고, 언제나와 같이 변함없는 자기의
모습이었다. 자기에게 저렇게 시선을
중에서도 그녀 혼자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의식적이었다. 그
증거로는, 그가 움직이는 데 따라서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심각한 고민이 있어서 허공에
보내던 시선이 가끔 그에게로 향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꿈꾸는 듯한,
멍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 눈길 뒤에는
의지의 움직임이 숨어 있었다. 분명히
그에게 향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그런 사실을 의식하자 머릿속에서
쫓아내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기어들어와 그를 괴롭혔다. 그
자신도 가끔씩 슬쩍 눈을 돌려 그녀 쪽을
살피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런 것을
그가 쳐다볼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분명히
자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눈길을 돌린
뒤에도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쫓아왔다.
성가신 기분이 점차 강해지고 나중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저렇게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속해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게
없었다. 마실 것도 이제 금방 그곳에
갖다놓여진 듯이 외면당한 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젊은 여인의 불상처럼
그곳에 앉은 채 엄숙한 시선만 끊임없이
보내오고 있는 것이었다.
화는 고통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 앞에
멈춰섰다.
이렇게 가볍게 두드려 봄으로써 분위기를
바꾸어 그녀를 움직이게 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그녀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억양이 없고 의미도
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냥 놔두세요."
상황은 그녀에게 유리했다. 그녀는
젊었다. 남자일 경우에는 바텐더에게
눈총을 받고 싶지 않으면 몇 잔 더 주문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젊은 여성에게 있어서
그런 자격지심은 필요없다. 게다가 그녀의
경우는 바람기 있는 상대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남자에게 계산을
떠맡기려는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나무람받을 만한 행동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녀 앞에서 그는
그는 맥없이 그녀 앞에서 물러나 카운터
끝 쪽까지 가서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변함없이
집요하게 자기 위에 못박혀 있었다.
불쾌함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린 뒤다.
그는 양 어깨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셔츠의
깃 매무새를 바로잡기도 해보면서 그
눈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며 그것을
확인하는 그런 서툰 짓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기분만 더욱 나빠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밀려 들어와 주문이 쇄도하면,
평소 같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지만 오늘밤만은 그렇지 않았다. 할
하고, 그러는 사이에 저 지긋지긋한 시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간중간에는 반드시 작은 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상대를 해줘야만 하는 손님도
줄어들고, 잔은 모두 닦아놓았고, 술을
따라줄 일도 없어지게 되자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이제는 아플
정도로 느껴져 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기의 손이나 행주를 어떻게 해야
좋은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맥주잔을 엎어놓고 금전등록기의
숫자를 바꾸어놓았다.
드디어 인내의 긴 끈을 끊고서, 도대체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도를
잡아내려고 그는 용감하게 나서기로 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그녀의 말투는 변함이 없고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볼일이 있느냐고요?"
그는 앞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어쩐지 볼일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요?"
"실례지만, 혹시 내 얼굴이 누군가
아시는 분과 닮기라도 했나요?"
"아뇨."
그는 침을 꼴깍 삼킨 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생각해서요......" 하고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눈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항복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적대감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올빼미 같은 눈으로 그의 뒤만 쫓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찾아내서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긴 시간, 가령 한
시간, 두 시간, 또는 세 시간에 걸쳐서
가만히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리라.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인내도를 시험받은 적이 없을
테니까.
드디어 그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며 심신이 피곤해져 오는 걸 느꼈다.
막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반원형의 카운터에 둘러싸여 있어서
무기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되받아 돌려 줄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길일 뿐이어서 뭐라고
딱 부러지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 지배권은
그녀의 수중에 있었다. 전파라든가
광선이라든가 하는 종류들은 몸을 돌려
피하려고 해도, 또 막으려고 해도 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절박감이 점차 무겁게 그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로커
룸으로 도망치고도 싶었다. 카운터 밑으로
웅크리고 들어가서라도 그녀의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슬쩍 이마의 땀을
했다. 머리 위의 벽시계로 눈을 주는 것이
점차 빈번해져 갔다. 그전에 어떤 남자의
생사가 그것에 걸려 있다고 했었던 바로 그
시계였다.
그는 여인이 어서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나님에게 그것을 빌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진해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술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보통 그럴
듯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녀의
경우는 그러한 구실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지라, 그러한 이유로 인한
구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술집에 온 것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벌써 상대와
만났을 것이다. 또한, 술을 마시고 싶었던
전에 그가 갖다놓은 그대로 손도 대지 않고
놓여 있었다. 그녀가 찾아온 목적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온갖 방법으로도 그 눈길을 물리치는 데
실패한 그는 문닫을 시간만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 도망칠 길은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손님들이 점차 일어나서 그의
주위에 아군의 숫자가 줄어들어감에 따라서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는 그 마력은 점점
강해져 갔다. 이윽고 반원형의 카운터
여기저기에 커다란 틈이 생기자 메두사
같은 표정으로 쫓아다니던 그 빈틈없는
시선은 더욱더 강해질 뿐이었다.
그는 잔을 떨어뜨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를 철저하게
유리잔의 깨진 조각들을 주우면서 입속으로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다.
그가 이미 포기한 가운데에서도 드디어
분침이 12의 숫자에 다달았다. 새벽 4시,
문닫을 시간이 된 것이다. 마지막 손님으로
남아 있던 두 남자가 뭔가 열심히 얘기하다
폐점시간임을 알고는 자발적으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떠들어대면서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김빠진 위스키를 앞에
두고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그대로 시선을 그의 위에
못박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여인이 듣도록 그는
일부러 큰소리로 두 손님을 전송했다.
그는 전기 제어함을 열고 스위치 한 개를
껐다. 밖의 조명이 꺼지고 그가 있는
카운터 뒤편에서 비추는 희미한 불빛만이
남았다. 마치 그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듯이 나타나는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것을 등진 검은
실루엣이 되어 떠올랐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도 육체에서 분리된 듯이 주위의
암흑에서 주위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여인 쪽으로 다가가서 김이
빠져버린 위스키를 치웠다. 내던지듯이
내용물을 쏟아붓자 술방울이 튀었다.
"이제 문닫을 시간이 되어서요." 하고
그는 귀에 거슬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겨우 움직였다. 급히 의자에서
내려서서 잠시 의자에 손을 대고는, 급격한
시작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는 얼른 흰 테이블보를 벗기면서
곤혹스런 어조로 물었다. "이게 뭐요? 무슨
장난이야?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요?"
그녀는 듣지 못한 것처럼 대답도 하지
않고 불이 꺼진 술집에서 문 쪽으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카운터를
떠나갔다고 하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시원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슴이 꽉 막혔던 것이 풀어지고 커다란
안도감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셔츠
앞쪽을 벌린 채, 그는 한 손을 카운터에
대고서 피로에 지친 몸을 여인이 나간
방향으로 내밀었다.
출구 쪽에 심야등이 켜져 있어서,
출구에서 조금 못 미쳐 그녀는 멈춰서서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아까의 그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죄다
환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주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라, 잠깐
휴식을 취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에 열쇠를 채우고서 몸을 돌리자
그녀는 2~3 미터 앞의 보도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 입구 쪽을 향해 서 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그쪽이므로 싫더라도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지 않으면
정도의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보도가
좁은 데다가, 그녀는 벽 쪽에 바짝 붙기는
커녕 보도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쳐지나감에 따라 그녀도
천천히 얼굴을 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상하리만큼 끈기 있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의 쪽에서
무심코 입을 놀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그는 협박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요?"
그는 계속해서 걸어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휙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여인과
마주섰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어! 밤새도록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는 화가 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자기 손바닥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리고 또 밖에서까지도 이렇게 지켜 서
있다니......!"
"길거리에 서 있으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는 굵은 손가락을 들이밀며, "이봐,
아가씨, 조심하는 게 좋아! 아가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지도
않았다. 말다툼을 할 때에는 잠자코 있는
편이 항상 승리를 차지한다. 그는 스스로의
패배에 허덕이면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뒤쫓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쪽에서도 별로 감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 해도 한산한
밤거리를 때리는 그녀의 연약한 구둣소리는
명료하게 그의 귀에 울려 들어왔다.
교차로가 그의 발밑을 미끄러지듯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한 칸 낮은 아스팔트를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느덧 시가지는
동서로 이어졌다. 그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
조급하지 않은 콩콩 하는 소리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를 쫓아왔다.
그는 결국 뒤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단지
경고만을 줄 작정이었다. 그녀는 마치
대낮에 산책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는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한가로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자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그녀의
경우도 그 느긋한 발걸음이 오히려 당당한
인상마저 주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더 걸어가다가 또
뒤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아예 몸째 그녀
쪽으로 돌려버렸다. 분노의 감정은 마침내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기는 했으나 우뚝
발을 디디고 서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뒤돌아와서 바로 그녀
앞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젠 그만
돌아가시지! 이젠 충분할 텐데, 응?
돌아가지 않으면 내게도 생각이......"
그것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유리했다. 만일
입장이 바뀐다면--- 하지만 경관을 불러서
어떤 젊은 여자가 계속해서 뒤쫓아오고
있어 곤혹스럽다고 호소한다면 정말로
믿어줄까?
그런 바보스러운 일을 의식하지 않고
부끄러움마저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남자가 과연 있을까? 그녀는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도 아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와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술집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진짜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녀 앞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도 어차피 체면을
창피를 당하지 않고 불리한 입장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을 벌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몸을 홱 돌렸지만, 그것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릴 작정으로 해보는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그는 여인에게서 떨어져 다시 길을
건넜다.
열 걸음, 열다섯 걸음, 스무 걸음,
보조를 맞추듯이 또 지겨운 행진이
시작되었다. 빗방울이 천천히 진흙탕에
떨어지듯이 콩, 콩, 콩, 콩--- 또다시 그의
뒤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그는 지붕이 달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매일밤
그곳에서 전철을 타는 것이었다.
있었다. 그는 지금 막 자신이 올라온
경사가 급한 계단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그녀의
발소리가 난간의 철근에 연결되어 금속음을
울리게 했다. 이윽고 계단의 중간에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개찰구를 통과한 그는 쫓기는 쥐새끼의
마지막 발앞과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계단을 다 올라서서 그가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태연하게 다가왔다. 손에는 이미
5센트짜리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는 회전 나무문의 가로 폭
정도로 좁혀졌다.
그는 팔을 휙 뒤로 젖혀, 언제라도
갖추었다. 잘만 명중되면 그녀를 빙글빙글
춤추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는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화를 냈다.
"제기랄, 돌아가! 빨리 밑으로 꺼져!" 그는
잽싸게 손을 뻗쳐 그녀에게 틈도 주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동전 투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녀는 단념하고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하지만 그도 재빨리 위치를 옮겼다. 그녀는
다시 먼저 위치로 되돌아왔다. 그도 역시
몸을 옮겨 방해를 했다. 그때 갑자기
고가전철역 안의 모든 것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막차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손등으로 내리칠 자세로
그녀를 위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그 팔을 휘둘러댔다. 정말 맞았더라면
그녀를 쓰러뜨릴 만한 힘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그때 갑자기 바로 곁에서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초라한 사무실
입구에서 역원이 몸을 내밀고 말했다.
"그만두시죠, 손님.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전차에 타려는 사람을 괴롭히다니,
경찰을 부르겠소!"
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여자가
바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게 날 거요. 계속해서 내 뒤만
쫓아오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한 말투로, "3호선을
탈 수 있는 사람이 당신 혼자뿐인가요?"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쑥 자기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문
번 호소했다. "이 여자에게 행선지를 좀
물어봐 줘요. 자기도 알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역원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단순히 역원에게
대답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27번 구획까지 가요. 2번가와
3번가 중간쯤 되죠. 그렇다면 이 전차를
타는 게 맞죠?"
그녀를 방해하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내릴 역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녀를 뿌리치려고 해도,
따돌리려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서 지나가세요, 아가씨."
그녀는 남자가 길을 비켜주는 걸
기다리지 않고 옆쪽 문으로 들어갔다.
그때의 그에게는 길을 열어주는 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보였다. 더욱이 그것은 그
자신의 강한 의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시적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행선지를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리라.
그 사이에 전차가 도착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편이었고 두 사람이 탈 전차는
아니었다. 전차가 떠나버리자 역 구내는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그녀는 어슬렁어슬렁 플랫폼 끝까지
걸어가서 거기에서 전차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도 그녀에게서 전신주 두 개를
전차가 오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서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녀 쪽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플랫폼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더 앞쪽으로 걸어갔다.
이러한 경우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냥 서서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의미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해서 그녀는 이윽고
역원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이미 역의 지붕은 없어지고,
플랫폼의 폭도 좁아져서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그녀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거기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우뚝 멈춰서서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전차가 오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긴박감, 급박한 위험 같은 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플랫폼의 바닥을 밟는 발소리에
묻혀서 오는 게 분명했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역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정적 속에서
또박또박 들려오는 그의 발소리에 담겨
있는 불길한 여운--- 그것이 바로 문제였던
것이다. 특히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그 리듬이었다. 발에 끈이라도 질끈 동여맨
것 같은 느낌--- 실제로는 잘 맞추어진
그것을 마치 의미 없는 산보로 위장하려는
저의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직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었던 짧은 시간 사이에
그녀의 머리를 문득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지금까진 없었던 불길한 느낌이......
그녀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조금 전 전신주 두 개를 사이에 두었을
때보다 그는 오히려 더욱 점잖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굳게 만든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플랫폼을 따라 걸어오면서
바로 곁의 세 번째 레일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스쳐지나가면서 팔꿈치로 조금
밀거나, 아니면 발로 툭 차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위기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역의 맨 끝까지 와 있는
것이다. 별 생각없이 걷는 사이에 그녀는
역원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
버린 것이다. 사무실은 개찰구를
지켜보려고 조금 안쪽으로 틀어박혀 있어서
플랫폼의 끝까지는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플랫폼에는 그와 그녀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완전히 인적이 끊어져 있었다. 아까의
전차가 모두 휩쓸고 간 것이다. 자기가
타고 갈 전차는 아직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플랫폼은 끝나고 만다. 이제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그의
생각에 달려 있었다. 역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 중간까지 되돌아가려면
그를 지나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바이고, 또한
노리고 있는 목적을 오히려 도와주게 되는
결과가 되리라.
상대가 행동으로 나오기 전에 그녀가
먼저 비명을 지르기라도 한다면 혹시
역원이 달려와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그녀가 염려하고 있는 사태로
도리어 더욱 촉진시킬 수 있는--- 즉,
대단한 위험을 초래할 염려가 있었다.
남자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의 안색을 보고서도 알 수 있었다.
생각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리라. 그러한 일시적인 착란은
분노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겁을 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면 그에게 더욱더 공포감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남자를 몹시
위협했었다. 사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가능한 한
철로 쪽에서 조금 더 물러났다. 이윽고
그녀의 등이 대형 광고판에 닿았다. 그녀는
광고판에 엉덩이를 딱 눌러붙이고는 그대로
몸을 옆으로 비켜 가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플랫폼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남자 쪽을
향해서 한발 한발 떼어 나아갔다. 옷이
소리가 났다. 그 정도로 광고판에 꼭 등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의 궤도 내에 들어오자 그도
또한 그녀의 앞길을 막듯이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는 숨막힐
정도의 슬로 모션이 있었다. 노면에서 세
칸 높이에 있는 인적이 끊긴 플랫폼, 엷은
황색의 불빛이 좁은 간격을 두고 머리
위에서 비치고 있는 무대 위를 한발 한발
떼어놓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어항
속을 천천히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같았다.
남자가 서서히 다가온다. 여자가
그쪽으로 움직여 간다--- 이제 두 사람의
간격은 단지 두세 발자국뿐이었다.
그때 별안간 개찰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무슨 장사인가를 하는 듯한 흑인
쪽으로 걸어오다가 갑자기 몸을 구부려
발목 근처를 긁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흑인 여인이 나타났을 때의
자세 그대로 각자 자기 몸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흑인 여인은 광고판을 등에 댄
채 더욱더 몸을 구부려, 이제는 정강이까지
긁는 것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맥빠진
것처럼 근처의 자동 껌 판매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의
무시무시한 독기가 남자의 온몸 털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것같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허둥지둥 그녀의 곁에서 떨어져 갔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은 채 시종 무언의
연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다시 그녀가 주도권을 잡게
전차가 번개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은 차량의 반대쪽 끝의 문으로
타서 양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다
아까의 그 긴박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남자는 머리가 무릎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상체를 구부리고 있었고, 여자도 등을 조금
구부린 채 천정의 전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흑인 여인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또 생각난 듯이 발을
긁으면서 어딘가 적당한 곳에서 내리려고
자꾸만 역 이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28번 구획에서 내렸다.
이번에도 역시 반대쪽 끝의 문을 이용했다.
그는 뒤쪽에서 그녀가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머리가
알아차렸다. 이제는 순순히 그녀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은 길을 계속
쫓아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27번 구획에서 2번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길 이쪽편, 그녀는
저쪽편에서 집 네 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어느 집으로
들어갈지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런 사실은
이미 그도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미행
아닌 그 미행은 이제 단순하게 기계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이 그의 가슴에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끈질기게
쫓아오는 걸까? 사실 이거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가.
어두운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빈틈없고
냉정한 콩콩 하는 소리가 건너편 보도에서
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뒤돌아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참고 아무런 기색도 내보이지
않았다. 초저녁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거리를
줄이고 그 건물의 정면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열 개 남짓한 어두운 창문들
중에서 특히 두 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 창문에 불이 켜졌다. 그
불빛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돌아온 것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말았다. 급히 명령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계속 어두운 채였다. 다만
회색을 띤 커튼이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가끔씩 흔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그 커튼을
통해서 한 사람 내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대로 그곳에 못박힌 채 계속 서
있었다.
거리의 저편에서 고가전철이 반딧불처럼
꿈틀거리며 지나갔다. 택시 한 대가
지나가다가 운전사가 그녀에게 호기심에 찬
눈빛을 보냈지만, 유감스럽게도 차에는
이미 손님이 타고 있었다. 또, 이런
시간인데도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다가와서는 그녀가 혹시 말을 걸어 오지나
고개를 돌리고 나서 그 남자가 멀리
사라져가버린 뒤에야 다시 몸을 원상태로
돌리는 거였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한 경관이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 사실은 조금
전부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다가와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가씨, 잠깐만...... 실은 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떤 부인에게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아가씨가 그 부인의 남편을
근무처에서부터 줄곧 따라와서는, 30분
이상이나 여기에 서서 저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고요?"
"예, 그래요."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소?"
저기 모퉁이까지 가 주시겠어요? 나를
붙잡아가는 것처럼 말예요."
영문을 알지도 못하면서 경관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창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것을 좀 봐주세요."
그녀는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어 경관에게
보였다. 경관은 근처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누구요,
이 사람이?"
"뉴욕 경찰본부의 살인과 담당 형사예요.
의심나면 전화로 물어보세요. 이 일은 그
사람이 승인도 했고, 또 허가도 받아서
하는 거예요."
"오라, 그럼 미행임무 같은 거란
말이군요?" 경관은 다소 경의를 표했다.
들어가도 일체 모르는 체하고 있어 주세요.
앞으로 2~3일간만 시끄러우면 돼요."
경관이 가버리자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전화 상대방이
물었다.
"이미 침착하지 못한 거동을 보이고
있어요. 술잔을 떨어뜨려 깨뜨리기도 하고,
조금 전에는 고가전철 플랫폼에서 나를
밀어 떨어뜨리려고도 했어요."
"고생하는군. 근처에 사람이 없을 때에는
너무 접근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 친구가
이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이러고 있는지를 조금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된다는 걸 잊지 말아요. 최악의
경우가 닥쳐도 질문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오. 그 녀석이 우리의
그것만 눈치채이지 않는다면 그 녀석은
허둥거리다가 결국엔 우리가 생각한 대로
빠져들 게 틀림없소."
"그는 몇 시경에 직장에 나가죠?"
"매일 오후 5시 정각에 아파트를
나섭니다." 상대방 남자는 참고자료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내일은 그때부터
쫓아다니겠어요."
사흘째 되던 날 밤, 부르지도 않았는데
지배인이 그녀의 자리에 다가와서 말을 걸
듯하다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어째서 이 젊은
숙녀분의 주문을 받지 않는 거지, 응? 내가
조금 전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어. 이
아가씨가 온 지 벌써 20분이나 지났어.
바텐더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녀가
오고 나서는 하는 일이 죄다 이 모양이다.
"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건
고문입니다, 안젤모 씨--- 이 여자는 저를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요."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쿨룩거렸다. 양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납작해졌다.
그녀는 30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순진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밤이 벌써 사흘째라고요. 저 여자는
그냥 앉아서 저를 쳐다보고만......"
"그거야 주문을 하려면 당연한 거
아닌가?" 지배인은 그를 나무랐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지배인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가 아픈가? 집에 가서 쉬고
싶으면 그렇게 하게. 피트에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할 테니까."
"괜찮습니다." 하고 바텐더는 당황해서
말했다. 겁먹은 듯한 여운이 그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 "돌아가다니요. 그렇게 되면
저 여자가 또 뒤를 계속 쫓아와서 밤새도록
길 건너편에 서 있을 겁니다!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이
훨씬 나아요!
"바보 같은 얘기는 그만두고 주문이나
받게." 지배인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면서 슬쩍 그녀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는 그녀가 정숙하고
온화하며 전혀 악의가 없는 여자라는 것을
그녀 앞에 마실 것을 갖다놓는 남자의
손이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떨려서
그만 술이 조금 엎질러져 버렸다.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오, 어서 오십시오." 그녀가 개찰구에
들어오자 역원이 반가운 듯이 말을 걸었다.
"묘하군요. 아가씨와 그 남자 - 지금 막
지나간 남자 말이오 - 그 사람하고는
언제나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하는군요.
그렇다고 똑같은 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아가씨도 알고 있소?"
"예, 나도 느끼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매일밤, 두 사람 다 같은
곳에서 나오는걸요."
그녀는 역원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고
때까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분좋은
밤이죠? 아까 그 남자 친구는 요즘
괜찮은가 보죠? 내 생각엔 다저스 팀은
우승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녀는
가끔씩 플랫폼으로 눈길을 보냈다. 한 개의
인형이 거기에 있었다. 걷고 있는 때도
있었고, 가만히 멈춰서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는
경솔하게 플랫폼으로 나가는 장난은
삼갔다.
전차가 도착해서 문이 열리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그곳에서 나와 토끼처럼
재빨리 전차에 타는 것이다. 그런 도중에는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압이 흐르고 있는 그 세
번째 레일은 이미 전차의 아래에 있기
고가전철이 오늘밤에도 시끄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택시도 한 대 지나갔다.
운전사가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더
이상 손님을 태울 필요는 없었다. 장사는
이미 끝난 뒤라 차를 끌고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밤늦은 통행인 둘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자 그 근처는
또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 순간,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건물 입구에서 한 여자가 튀어나왔다.
여인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건물 현관에서
총알처럼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잠옷 위에 코트를 걸치고 맨발에 찌그러진
구두를 구겨신고 있었다. 확실한 자기
의사를 알리듯 빠른 발걸음으로 오는
바람에 구두가 탁탁 소리를 냈다. 그
어떻게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자는 얼른 몸을 돌려 재빨리
길모퉁이를 돌아 그 골목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당당한 동작으로 보아
무서워하는 기색 같은 건 조금도 없고,
단순히 자신이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상대에게서 몸을 피하는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의 그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벌써
사흘째야! 왜 우리 그이를 쫓아다니는
거지? 빨리 꺼져. 그렇지 않으면 진짜
큰일을 당하게 될 거야, 알겠어!"
여인은 모퉁이를 돌아 잠시 모습을
나타내고는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본 뒤에
얼른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 있던 곳에
다시 멈춰서서 아까와 똑같이 쥐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처럼 건너편의 두
개의 창문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고가전철이 꿈틀거리며 지나간다......
택시가 지나간다...... 밤늦은 통행인이
걸어와서 스쳐지나가고 또 사라져
간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창에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절망의 표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젠 다됐어." 하고 전화의 목소리가
말했다. "내일 하루만 지나면 놈은 완전히
죽는 소리를 낼 거야."
그날은 그가 비번이었다. 그는 그녀를
있었다. 이제는 남자의 태도만 보아도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햇볕이 드는 건물 앞에 멈춰서서 벽에 몸을
기대는 것이었다. 눈앞에는 쇼핑 손님들이
몰려왔다 몰려가곤 했다. 그는 지금까지
두세 번 발을 멈추었지만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가 걷기
시작하면 그녀도 곧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문득 느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멈춘 것처럼 보였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꾸러미가 풀어져 땅에 떨어졌지만
그는 내버려둔 채 주울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지금까지와 같이 자신이 걸음을 멈춘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태양은 눈부신 백광을 남자 위로
퍼부었다. 그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
깜박거림이 점차 빨라졌다.
뜻밖에 그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창백하고 추한 얼굴이 쭈글쭈글하게 변해
버렸다.
두 사람이 이상하고도 희한하다는 듯이
멈춰섰다. 두 사람이 네 사람, 여덟
사람으로 불어났다. 그와 그녀는 어느샌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졌다. 빙 둘러싼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또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그는 창피함도 잊어버리고 군중들에게
호소했다. 우는 소리로--- 자기를 구해
애원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저 여자에게 물어봐 주세요. 무슨 목적인지
말이오. 저 여자는 벌써 며칠 전부터 나를
쫓아다니고 있단 말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젠 참을 수가 없어요. 이젠 나도......"
"뭐야, 이 사람, 술이 취했나?" 하고
어떤 여인이 옆사람에게 말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서 있었다. 그가 애써
그녀를 끌어들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위엄이 있으며 침착한
그녀의 용모는 보는 이의 눈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그에 비하면 남자 쪽은 추하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습게 보였으므로
결과는 뻔했다. 사람들의 동정이 일방적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듯 군중이란
여기저기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쓴웃음이 조소로 변했다. 이윽고 조소가
폭소로, 또 노골적인 야유로 변했다. 그
중에서 한 사람만이 무감동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런 구경거리를 만든 장본인인 그는
입장이 유리해지기는커녕 한층 더
나빠지게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를
괴롭혀 온 적은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30명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는 갑자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먹을 휘두를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자 몇몇 남자들이 달려들어 그의
퍼부었다. 다음 순간 그녀 주위의 사람들이
가세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집단폭행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냉정하지만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행동을 딱 멈추었다.
"그만두세요. 놔주세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따뜻함도 동정도
없이 강철 같은 쌀쌀맞음 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 남자의 일은 내게 맡겨두세요.
이 남자는 내 것이니까.'
그를 붙잡고 있던 손들이 떨어지고 꽉
쥐었던 주먹은 느슨해졌다. 헝클어진
풀었다. 그는 다시 사람들에게 빙
둘러싸여졌다. 그녀도 함께.
그는 어딘가로 달아나려는 듯이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다. 겨우 한 곳을
찾았는지 갑자기 달려들어서는 마침내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자신이 만들어놓은 추태의
현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곳에 선 채 달려가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주먹거리밖에
안되는 가냘픈 여자에게서 커다란 남자가
도망쳐 가는 것이다. 정말 희극의
극치였다.
그녀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중의
박수갈채나 사람들 앞에서 승리를
맛보았다고 하는 얄팍한 쾌감 같은 건 아예
내뻗어 주위 사람들을 밀쳐 내고 남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가볍고도 예쁘장한
그녀는 힘찬 모습으로 발을 내디뎌
남자와의 사이를 좁혀갔다.
기묘한 추적이 시작되었다. 실로
우스꽝스러운 추적이었다. 쫓는 것은
가냘픈 젊은 여인, 쫓기는 것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바텐더. 이런 장면이 백주
대낮의 뉴욕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인파를 헤치면서.
그녀가 다시 쫓아온다는 것을 그는 곧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어두운 불안감에
휩싸여 뒤돌아보았다. 남자가 다시 한 번
뒤돌아보기를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두 번째로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손을 들어 얼른 멈춰서라는 신호를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근처의 벽에다가
남자를 세워놓고 그녀는 버지스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이제 버지스와 교대해서
끝마무리는 그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도 그날 밤 그 술집에서
헨더슨이라고 하는 남자와 함께 어떤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어째서
못 보았다고 말했지? 누군가에게 돈으로
매수된 거야, 그렇지 않으면 협박을 받아
거짓으로 증언한 거야? 도대체 누구의
조종을 받은 거지?'
그는 그 다음 모퉁이에서 잠깐 멈춰서서
덫에 걸린 동물처럼 도망갈 길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공포는
이미 그의 얼굴에 새하얗게 습격해 오고
눈에 띄는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그의
당황한 모습에서 절박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이미 가냘픈
여성,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여신 네미시스인
것이다.
둘 사이의 간격이 급속하게 좁혀지자
그녀는 다시 손을 쳐들었다. 그것은 그의
어정쩡한 도주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길 모퉁이의 인파 속에 파묻혔다.
거기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팔꿈치와
팔꿈치를 맞대고서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었다. 신호등은 빨간색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기를 쫓고 있는
그녀를 뒤돌아보고 나서 사람을 밀어
그녀는 깜짝 놀라서 멈춰섰다. 소리 높여
달려오던 두 발의 뒤꿈치가 보도의 보이지
않는 틈바구니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끼이익 하는 급브레이크
소리가 아스팔트 위에 울려퍼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눈꺼풀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그녀는
남자의 모자가 놀라울 정도로 높게 원을
그리며 공중에서 올라가 춤추는 것을 보고
말았다.
어떤 여인이 비명을 지른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종의 포효와도 같은 혼란의 외침이
사람들 사이에서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