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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 기성세대가 추천한 가장 좋아하고 듣고 싶은노래만 엄선하여 48명의 국내최고 힛트가수만 엄선하여 편집하여 제작한 음반입니다.그동안 7080 추억의 도시락1집 출시에서 많은 성원으로 감사드리며.2집인 추억의 도시락 골드는 한층더 업그레이드한 곡을 선정하여으며.1.2.3.집전곡가사을 수록하여습니다.
노래 : 김세환
1970년대를 풍미한 통기타 가수에서 최근 세시봉 열풍으로 다시금 전설을 이어가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음유 가객. 자타가 공인하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틈만 나면 한강으로 나가 한강의 바람과 냄새에 몸을 실어 왔다. 은륜 위에서 만나온 한강을 서슴없이 '애인'이라 부른다.
노래 : 김정호
어니언스(Onions)의 노래 ‘작은새’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정호는 국악의 명인들이 많은 외가 쪽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었다. 졸업 후 미8군에서 기타를 치다가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쉘부르 >등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룹 4월과 5월에서 잠깐 머물다가 1973년 자신의 자작곡인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했다. 이후 ‘하얀 나비’로 정상에 오른 그는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등의 히트곡을 쏟아 부으며 최고의 포크가수로 자리 매김 한다. 그는 <꽃잎 >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강은철, 김학래, 임하룡, 남궁옥분 등과 함께 무대에 섰으며 자주 국악 공연을 관람하며 소울풀한 음색에 토속적인 맛을 입혔다.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니언스(Onions)의 노래 ‘작은새’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정호는 국악의 명인들이 많은 외가 쪽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었다. 졸업 후 미8군에서 기타를 치다가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쉘부르 >등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룹 4월과 5월에서 잠깐 머물다가 1973년 자신의 자작곡인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했다. 이후 ‘하얀 나비’로 정상에 오른 그는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등의 히트곡을 쏟아 부으며 최고의 포크가수로 자리 매김 한다. 그는 <꽃잎 >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강은철, 김학래, 임하룡, 남궁옥분 등과 함께 무대에 섰으며 자주 국악 공연을 관람하며 소울풀한 음색에 토속적인 맛을 입혔다.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지는 병마와 싸웠다. 심해지는 병은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갔으며 변변치 않던 작곡비로 연명하던 그는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끊어 녹음한 끝에 1983년 마지막 앨범을 낸 김정호는 병원의 환자에게서 영감을 얻은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8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임종 3개월 전, 딸에게 자신이 인기가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TV에 출연했고 이것이 마지막 그의 모습이 되었다. 그의 유작에선 또한 ‘하얀 나비’와 함께 그의 죽음을 예견한 곡으로 비유되곤 하는 ‘님’이 사후에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음악은 포크로 분류되지만 독특한 음색에서 품어져 나오는 혼의 목소리는 소울과 블루스의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꽹과리를 들고 우리의 소리에 심취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또 다른 원천은 국악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망하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에서는 추모 방송을 연일 내보냈고 1986년에는 홍민, 김수희, 김학래, 하남석, 윤시내, 김범룡, 이정선, 신형원, 윤승태, 한마음, 전영록, 김현식, 서수남, 하청일, 송창식, 이태원, 강은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힘을 합친 트리뷰트 음반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생을 영화화한 <님 >이 개봉되었다. 팬들의 사랑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는 1998년 조선일보가 선정한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 50 >중에서 30위를 차지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노래 : 김현식
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시 실리는 ‘떠나가 버렸네’ 등이 실려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밤무대를 떠도는 무명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간다. 결혼과 함께 피자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1984년 그의 소울 창법이 블루스 속에서 빛을 발하는 2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당신의 모습’ 등이 크게 사랑 받았으며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서서히 얻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 조원익이 리드하고 최구희가 기타를 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로 있기도 했으며 이 그룹의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팀을 이끌어 가던 메신저스의 싱어도 맡으면서 진가를 발산하기도 했다.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후에 빛과 소금이라는...노래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가수로 사후에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김현식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학교에서 자퇴한 후에는 음악다방에서 통기타를 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1978년 이장희의 주선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했으나 대마초 사건과 회사 사정으로 2년이나 늦게 자신의 앨범을 갖게 된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3집에 다시 실리는 ‘떠나가 버렸네’ 등이 실려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밤무대를 떠도는 무명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간다. 결혼과 함께 피자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1984년 그의 소울 창법이 블루스 속에서 빛을 발하는 2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당신의 모습’ 등이 크게 사랑 받았으며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서서히 얻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 조원익이 리드하고 최구희가 기타를 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로 있기도 했으며 이 그룹의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팀을 이끌어 가던 메신저스의 싱어도 맡으면서 진가를 발산하기도 했다.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후에 빛과 소금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박성식 장기호 등과 함께 만든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이 한 3집은 그를 인기 가수로 만든 앨범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비처럼 음악처럼’은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라디오의 전파를 탔으며 ‘그대와 단둘이서’, ‘쓸쓸한 오후’ 등이 연이어 인기를 끌었다. 이 앨범에는 후에 그들의 앨범에 실리게 되는 ‘쓸쓸한 오후’를 비롯한 봄여름가을겨울의 작품과 유재하의 작품 ‘가리워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마초로 약 2달간 전인권, 허성욱 등과 구속되었던 그는 삭발 콘서트를 벌여 대성공을 거두고 1988년 4집을 발표한다. ‘언제나 그대 내 곁에’가 사랑을 받은 4집에는 윤상의 데뷔 곡 ‘여름밤의 꿈’ 고 유재하의 ‘가리워 진 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3집의 ‘우리 이제’에 이어 ‘한국 사람’이라는 하모니카 곡이 그의 연주로 한 트랙을 차지하고 있다. 이정선과 엄인호의 신촌블루스에서 절절한 필링의 블루스를 열창하던 그는 강인원, 권인하, 신형원 등과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 >의 메인 타이틀을 불러 엄청난 인기를 모은다. 그러나 고독을 항상 술로 달래던 그는 이 때부터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 속에 노래를 부르는 병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고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가운데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1990년에는 그의 공식적인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인 5집이 발매되고 하반기에는 그가 ‘이별의 종착역’을 부른 신촌블루스 3집이 발매된다. 그의 5집은 특별한 히트곡은 없었지만 ‘넋두리’, ‘향기 없는 꽃’이 사후에 사랑을 받았으며 <비오는 날 수채화 >에 실린 ‘그 거리 그 벤치’도 영화 사운드 트랙의 판매에 힘입어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 나왔다. 1990년 11월 1일 오후 5시 20분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6집을 녹음하다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불과 서른 두 살의 나이로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과 동료들의 염원도 소용없이 너무나도 빨리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후 앨범인 6집은 팬들의 명복 속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히트곡 ‘내 사랑 내 곁에’는 오태호에게 작곡가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의 사망 1주기에는 추모콘서트가 열려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해 그의 노래를 부르며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했고 2000년에는 그의 트리뷰트 앨범에 신인 가수와 중견 가수들이 골고루 참여해 그를 기리는 것은 물론 가요계 화합의 장으로 이어졌다. 김현식, 그는 모든 악기와 곡의 멜로디, 리듬을 떠나서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음성 자체가 외로움이 되고 사랑이 되며 무궁무진한 절대적 표현이 됨을 보여준 절창의 뮤지션이다.
노래 : 박미경
프로듀서 김창환 특유의 감각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으로 기억될만한 박미경의 변신은 그녀를 기억했던 모든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이였다. 놀라운 자기 감량과 파워풀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인 소울 음악의 기법을 살린 가창력은 댄스 음악이 주도하는 시장에 기름을 부었으며 당시만 해도 기근 이였던 여자 가수의 성공 시대를 열었다. 어머니에게서 절창의 피를 이어받은 박미경은 대학 축제 행사의 하나였던 <연영가요제 >에서 임기훈의 ‘벗들아’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으면서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985년 그녀는 <강변가요제 >에서 동상을 수상한 ‘민들레 홀씨 되어’로 대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룹 위대한 탄생 출신인 이호준의 지도아래 천성일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으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김창환의 부름을 받은 그녀는 박진영, 강원래 등과 그룹 프리스타일을 만들기도 했지만 흑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필을 갖기 위해 신승훈, 김건모, 그룹 노이즈 등의 코러스로 참여 하며 R&B 감성을 연마해 자신의 얇은 목소리를 두껍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슴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시원하게 끌어올리는 방법을 터...프로듀서 김창환 특유의 감각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으로 기억될만한 박미경의 변신은 그녀를 기억했던 모든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이였다. 놀라운 자기 감량과 파워풀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인 소울 음악의 기법을 살린 가창력은 댄스 음악이 주도하는 시장에 기름을 부었으며 당시만 해도 기근 이였던 여자 가수의 성공 시대를 열었다. 어머니에게서 절창의 피를 이어받은 박미경은 대학 축제 행사의 하나였던 <연영가요제 >에서 임기훈의 ‘벗들아’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으면서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985년 그녀는 <강변가요제 >에서 동상을 수상한 ‘민들레 홀씨 되어’로 대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룹 위대한 탄생 출신인 이호준의 지도아래 천성일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으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김창환의 부름을 받은 그녀는 박진영, 강원래 등과 그룹 프리스타일을 만들기도 했지만 흑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필을 갖기 위해 신승훈, 김건모, 그룹 노이즈 등의 코러스로 참여 하며 R&B 감성을 연마해 자신의 얇은 목소리를 두껍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슴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시원하게 끌어올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녀가 공식적인 첫 앨범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2집에선 유로풍의 댄스곡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큰 인기를 끌며 높은 앨범 판매량을 가져왔고 3집에도 수록된 ‘서툰 기대’라는 곡이 주목을 받았다. 이어 3집에서는 정글 리듬을 표방한 ‘이브의 경고’가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였으며 후속곡 ‘넌 그렇게 살지마’도 내지르는 창법으로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지극히 성공의 모범 답안을 답습한 그녀의 앨범은 4집부터 예전만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한다. 급기야 ‘아담의 심리’보다는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와 같은 소울곡이 더 기억된 4집의 여파로 그녀는 미국에서 유수한 가수들을 지도한 트레이너에게 발성법과 창법을 교정 받았으며 강약의 세기를 조절하고 그 사이에 부드러움을 넣는 방법을 배웠다. 2년 반만의 컴백으로 떠들썩했던 그녀의 5집은 유행하는 트랜드를 모아 김창환이 만든 라틴풍의 ‘집착’으로 승부수를 띄웠지만, 기대만큼의 결과에는 미치지 못했고 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나이 또래의 댄스곡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의 세대는 완벽히 그녀의 음악을 외면했다. 김창환이 손을 놓고 천성일이 전면에 나선 그녀의 6집도 일본에서 유행하는 미디엄 템포의 곡을 주무기로 삼아 일본의 유행을 한국으로 끌어오려 했지만 워낙 강도가 센 그녀의 음성은 모든 댄스 넘버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오히려 박완규와 함께 부른 ‘You Are My Friend’가 그녀와 박완규의 가창력을 돋보이게 하며 팬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녀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과감한 댄스를 주무기로 시장에서 견디고 있지만 과거의 변신이 그녀를 성공으로 이끌었듯이 다시 한번 변화를 도모할 때이다. 훌륭한 목소리는 댄스뿐 아니라 R&B나 소울 등의 화려하지 않은 장르도 그녀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노래 : 박학기
꾸준히 언더 그라운드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박학기가 가수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노래 실력이 월등했던 그는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인기 있는 가수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통기타로 고액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1988년 <우리노래 전시회 3집 >에서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로 좋은 반응을 얻은 그는 전곡을 김현철의 곡으로 도배한 데뷔 앨범에서 ‘향기로운 추억’을 크게 히트시키며 1989년 골든 디스크 신인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휩쓸며 음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고 그렇게 성공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도 라디오에서 호명되게 하며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첫 앨범에는 ‘이미 그댄’, ‘아름다운 비밀’, ‘내 소중한 사람에게’ 등이 연속해서 인기를 얻었으며 가늘고 독특한 음색은 애청자들을 위로하며 앨범의 전 곡이 심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신청을 받았다. 그는 이 인기에 힘입어 같은 소속사 식구인 푸른하늘의 4집에서 ‘우리 모두 여기에’라는 곡을 같이 부르는 한편, 기독교도로서 CCM 음악에도 활동 무대를 넓혀 복음성가집 <우리 모두 하나되...꾸준히 언더 그라운드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박학기가 가수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노래 실력이 월등했던 그는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인기 있는 가수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통기타로 고액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1988년 <우리노래 전시회 3집 >에서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로 좋은 반응을 얻은 그는 전곡을 김현철의 곡으로 도배한 데뷔 앨범에서 ‘향기로운 추억’을 크게 히트시키며 1989년 골든 디스크 신인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휩쓸며 음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고 그렇게 성공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도 라디오에서 호명되게 하며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첫 앨범에는 ‘이미 그댄’, ‘아름다운 비밀’, ‘내 소중한 사람에게’ 등이 연속해서 인기를 얻었으며 가늘고 독특한 음색은 애청자들을 위로하며 앨범의 전 곡이 심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신청을 받았다. 그는 이 인기에 힘입어 같은 소속사 식구인 푸른하늘의 4집에서 ‘우리 모두 여기에’라는 곡을 같이 부르는 한편, 기독교도로서 CCM 음악에도 활동 무대를 넓혀 복음성가집 <우리 모두 하나되어 >에서는 ‘나의 기도’를 작곡해 직접 불러주었으며 <빛으로 모두 함께 >라는 앨범에서는 ‘언젠가 당신 곁에서’라는 곡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김현철의 풋풋함이 살아 있는 그의 첫 앨범이 성공한 뒤로 너무 뚜렷한, 혹은 개성이 없는 그의 음악 세계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만다. 2집에서 역시 김현철의 힘을 입은 ‘자꾸 서성이게 돼’가 인기를 얻고 어떤날의 곡을 보사노바로 리메이크한 ‘오래된 친구’가 리퀘스트를 받았지만, ‘유난히’가 수록된 3집, ‘그대 창가로 눈부신 아침이’가 수록된 4집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했고 그는 좌절한다. 실의의 나날 속에 한동안 진로에 대한 고민과 전공이였던 미술에 대한 회귀를 생각한 그는 노래에 대한 애정을 담은 ‘나의 길’이 수록된 5집을 발표하고 조규찬과 같이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재기의 전의를 다진다. 라이브 공연에서 보여준 팬들의 성원과 단짝 조규찬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1998년 ‘자전거’와 ‘제발 나를’, 그리고 김광석의 추모곡인 ‘남겨진 너의 노래’가 수록된 6집을 발표한 그는 1999년에는 조규찬과 같이 김민기 트리뷰트 공연에서 ‘그 사이’를 불렀다. 2000년 그는 유리 상자의 노래 ‘신부에게’를 피처링 해 주기도 하고 김광석 추모 앨범을 기획하고 프로듀싱하는 저력을 보이며 김광석의 장학재단에 힘을 실어 준 그는 들국화의 트리뷰트 앨범에서 역시 조규찬과 함께 ‘매일 그대와’를 부르는 등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유리상자, 이수영 등에게 곡을 주는 작곡가로도 활동하며 음악학원의 강사로도 바쁜 그는 최근 그의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Go Back >이라는 타이틀로,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Go Back과 발음이 비슷함)한다는 의미로 콘서트를 했다. 이런 그가 심기일전해서 새 앨범으로 팬들의 가슴을 다시 두드리길 기대한다.
노래 : 산울림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이 되었다. 둘째 김창훈의 곡인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은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문 좀 열어 줘’란 곡으로 출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 이여서 자격미달로 실격한 이들은 자신들의 기념 음반을 가지고 싶었던 나머지 친척들을 졸라 앨범 제작비를 구걸했고 그간 만들어 놓았던 150곡 중 몇 곡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레코드 회사인 서라벌을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얘기했다. 이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본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며 손수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이들의 이...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이 되었다. 둘째 김창훈의 곡인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은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문 좀 열어 줘’란 곡으로 출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 이여서 자격미달로 실격한 이들은 자신들의 기념 음반을 가지고 싶었던 나머지 친척들을 졸라 앨범 제작비를 구걸했고 그간 만들어 놓았던 150곡 중 몇 곡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레코드 회사인 서라벌을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얘기했다. 이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본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며 손수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이들의 이름을 산울림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져온 악기는 연주를 하고 나면 줄이 풀려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평론가 이백천에게서 팬더사의 스트라토 기타와 암페그에서 만든 베이스를 빌려온 이들은 하루만에 녹음을 끝마쳤으며 음반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채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거두며 삽시간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을 4개월만에 내놓았으며 역시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로 소리를 내지르며 커다랗게 산울림을 자아냈다. 이것은 2집이 나온 지 6개월만에 발매된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까지 이어진다. 동생들이 군대에 가자 산울림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4집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 쓰였던 주제곡들을 모아 편집한 음반으로 발매했고 5집은 동생들이 휴가 나온 사이 녹음을 끝내야 했다. 데뷔 음반의 폭발적인 반응에서 멀어진 듯한 이들의 인기는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동생들이 제대하고 같이 만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같은 스탠더드 류의 히트곡으로 계속 이어지며 초창기의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곡들보다는 대중성이 뛰어난 곡들로 꾸며지며 계속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3인 밴드 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며 우리 나라 헤비메탈 사운드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9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혼자 남은 김창완은 <기타가 있는 수필 >이란 솔로 앨범에서 ‘어머니와 고등어’를 히트시키며 이후 계속 되는 솔로 여정의 첫 삽을 뜬다. 그는 이어 본인이 혼자 만든 산울림 10집에서 감상적 발라드 ‘너의 의미’를 히트시킨다. 그는 또한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모아 포크 그룹 꾸러기들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갔으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긴 제목의 곡으로 100일간의 장기 공연을 치뤄 냈다. 밴드 음악의 감독으로 산울림을 지휘한 김창완의 한편에는 동요라는 장르가 있다. 처음의 기획의도는 기존의 동요를 재해석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곡들이 외국 곡이라는 한계를 알게 된 그는 직접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곡들로 시장을 두들겼고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안녕’ 등과 같이 정규 앨범의 히트곡 못지 않은 인기곡들을 양산한다. 그의 동요 앨범들은 그의 천진무구한 창작적인 감수성이 뽑아낸 새로운 시도였다. 9집 이후 김창완 혼자서 작업했던 산울림은 과거의 뮤지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합체식을 가졌다. 국내에서 트리뷰트를 받은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내 마음’에서 보여준 김창훈의 메탈성 보컬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삼 형제의 힘을 발휘하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 자체의 순수성을 엮어낸다. 그리고 폭풍 속의 댄스씬을 빠져 나온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산울림이 있었다는 것을.
노래 : 송창식
노래 : 유익종
자신의 포크적인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유익종은 1974년 박시춘의 막내아들 박재정과 듀엣 그린빈즈(Green Beans)를 결성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첫 번째로 발표한 음반에서 ‘난 이 다음에’란 곡 등을 발표했지만 군 문제 때문에 휴식기를 가진다. 다시 파랑새란 이름으로 합쳐 ‘나는 왜’가 수록된 음반을 발표한 이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박재정은 종교 음악과 재즈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그는 다른 사업거리를 구상한다. 1981년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지금은 녹음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성일 등과 유리박이란 그룹을 결성한 유익종은 이 팀의 와해와 동시에 이주호와 듀엣 해바라기를 출범시킨다. 해바라기의 1집에선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 이예요’ 등이 히트했지만 이주호와의 음악 차이를 느낀 그는 팀을 떠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사랑의 눈동자’를 히트시킨다. 하지만 그룹 활동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기로 했던 해바라기 3집으로 다시 해바라기의 멤버로 오랜 활동을 한다. 이 앨범에서는 ‘내 마음의 보석 상자’,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등이 크게 히트하고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도시의 밤 풍경’ 등이...자신의 포크적인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유익종은 1974년 박시춘의 막내아들 박재정과 듀엣 그린빈즈(Green Beans)를 결성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첫 번째로 발표한 음반에서 ‘난 이 다음에’란 곡 등을 발표했지만 군 문제 때문에 휴식기를 가진다. 다시 파랑새란 이름으로 합쳐 ‘나는 왜’가 수록된 음반을 발표한 이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박재정은 종교 음악과 재즈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고 그는 다른 사업거리를 구상한다. 1981년 해바라기 출신의 이주호와 지금은 녹음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성일 등과 유리박이란 그룹을 결성한 유익종은 이 팀의 와해와 동시에 이주호와 듀엣 해바라기를 출범시킨다. 해바라기의 1집에선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 이예요’ 등이 히트했지만 이주호와의 음악 차이를 느낀 그는 팀을 떠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사랑의 눈동자’를 히트시킨다. 하지만 그룹 활동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기로 했던 해바라기 3집으로 다시 해바라기의 멤버로 오랜 활동을 한다. 이 앨범에서는 ‘내 마음의 보석 상자’,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등이 크게 히트하고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도시의 밤 풍경’ 등이 라디오를 타면서 2년여간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모으게 된다. 아직도 이 시절의 인기는 그를 해바라기 시절의 멤버로 각인 시킨다. 해바라기 3집 발표 시에는 그의 솔로 2집 앨범이 일주일먼저 나오고 이주호의 앨범 등과 겹쳐 솔로 활동은 해보지도 못하고 접는다. 2집에서는 아직까지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가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1987년 옴니버스 앨범에 유영건이 만든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를 수록해 주목을 받은 그는 1989년 미국의 LA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으로 교민들의 인기를 모은 하광훈의 ‘이연’이 수록된 3집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는 여진의 ‘그해 가을’, ‘가을에 떠난 사람’, ‘하나가 되어’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91년 ‘차창에 흐르는 이별’이 수록된 4집은 그가 처음으로 제작하고 가장 많이 공을 들인 앨범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외면을 받은 앨범으로 기억된다. 후에 아쉬움이 남는 곡들을 모아 발표한 <Worst >앨범에서 이두헌이 만든 ‘저길 저편 저 차에 오르면’, 박강성의 ‘그대의 허상’ 왈츠 풍의 ‘그리움’ 등을 수록해 4집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반추’가 수록된 5집을 발표한 유익종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리메이크 앨범을 내놓는다. 앞으로 나올 3장의 기획 앨범 중 첫 번째라는 의미로 이름 붙인 <3분의 1 >앨범에서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조용필의 ‘들꽃’, 최성수의 ‘해후’ 등을 불러 오랜 소원을 풀었다. 1998년에 발표한 6집에는 ‘그리운 얼굴’이 주목받으며 매스컴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앨범에는 따로또같이의 ‘나는 이 노래하리오’의 두 가지 버전을 수록해 자신의 스타일과 유행하는 현재의 음악 스타일을 비교하였다. 1999년 묻어만 두기엔 아까운 노래들로만 모은 <Worst >앨범을 발표한 그는 최근 미사리에서 라이브로 팬들을 만나며 7집을 구상하고 있다.
노래 : 이광조
미대에 재학하면서 축제나 음악살롱, 라이브 홀 등에서 노래를 부르던 이광조(1952년)는, 활동하면서 김의철, 한영애 등을 만나고, 제대 후에는 콘서트를 하던 이정선을 만나 해바라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아름답고 순수한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해바라기에서 이주호의 빈자리를 메우며 2집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솔로 작업을 병행하여 ‘나들이’라는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1979년 <MBC 서울국제가요제 >에서 김수철의 곡인 ‘행복’을 불러 입선한 그는, 이정선, 이엄인호와 함께 트리오 풍선을 만들어 활동하고, 다시 솔로 음반을 발표해 삼바리듬을 차용한 ‘즐거운 인생’, ‘오늘 같은 밤’ 등을 히트시키며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85년 발표한 솔로 3집은 그를 정상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 앨범에서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민해경의 ‘사랑은 이제 그만’과 경합을 벌이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곡은 차트의 정상을 차지했고, 계속해서 권인하의 곡인 ‘사랑을 잃어버린 나’, ‘상처’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부른 ‘갈 수 없는 나라’를 리메이크 하여 사랑을 받았다. 여성적인 감성을 제대...미대에 재학하면서 축제나 음악살롱, 라이브 홀 등에서 노래를 부르던 이광조(1952년)는, 활동하면서 김의철, 한영애 등을 만나고, 제대 후에는 콘서트를 하던 이정선을 만나 해바라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아름답고 순수한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해바라기에서 이주호의 빈자리를 메우며 2집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솔로 작업을 병행하여 ‘나들이’라는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1979년 <MBC 서울국제가요제 >에서 김수철의 곡인 ‘행복’을 불러 입선한 그는, 이정선, 이엄인호와 함께 트리오 풍선을 만들어 활동하고, 다시 솔로 음반을 발표해 삼바리듬을 차용한 ‘즐거운 인생’, ‘오늘 같은 밤’ 등을 히트시키며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85년 발표한 솔로 3집은 그를 정상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 앨범에서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민해경의 ‘사랑은 이제 그만’과 경합을 벌이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곡은 차트의 정상을 차지했고, 계속해서 권인하의 곡인 ‘사랑을 잃어버린 나’, ‘상처’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부른 ‘갈 수 없는 나라’를 리메이크 하여 사랑을 받았다. 여성적인 감성을 제대로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문세의 음악 감독 이영훈을 섭외 해 ‘세월 가면’으로 다시 한번 정상으로 올라서고, 앨범의 수록곡 ‘뜨거운 바람 되어 네 곁에 다가서리’, ‘사랑은 한 줄기 햇살처럼’ 등으로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발라드 음악의 전성시대에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1987년에는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김영미가 일시 귀국해 이정선, 한영애 등과 같이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도’라는 뛰어난 감성이 서린 곡을 발표해 인기를 얻었고 1988년에는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의 닉네임을 연상시키는 이광조와 보통사람들이란 백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며 ‘연인이여’, ‘그대만을’ 등을 계속 발표한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블루 스케치 >의 주제곡인 ‘그 누구인가’로 다시 한번 표면으로 올라선다. 그의 시대는 마치 인기와의 이별을 암시한 듯한 제목을 지닌 ‘우리 이제 잊기로 해요’라는 곡과 함께 마감을 한다. 중견 가수가 된 그는 댄스 음악의 종횡무진에서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고 TV의 라이브 프로그램에 간간이 모습을 내밀며 과거의 히트곡들을 불러야 했다. 1996년 ‘외면’을 타이틀곡으로 한 <파라다이스의 꿈 >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음악에 대한 회의와 공중파에 대한 염증을 느껴 한 동안 고국을 떠나 요양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에 미친 새(광조)’는 돌아와, 전속으로 출연하는 <이광조의 벤허 >라는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전의를 다지고 있다.
노래 : 이용복
‘한국의 호세 펠리치아노’ ‘한국의 레이 찰스’로 197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추억의 이름이다. 무엇보다 당시 이탈리아 니콜라 디발리의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을 번안한 노래 ‘1943년 3월4일생’과 ‘마음의 집시’로 올드 팬들의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특히 ‘1943년 3월4일생’은 코미디언 이홍렬이 ‘어머님 왜 날 낳으셨나요?...’ 하며 불러 다시금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사실 이 곡의 번안 노랫말은 시각장애자 가수인 이용복의 처지를 반영해 당시 심금을 울렸다. 그는 3살 때 마루에서 마당으로 떨어져 왼쪽 눈을 잃었고, 이어 7살 때 썰매를 타다가 오른쪽 눈이 칼날에 찔리면서 두 눈 모두 실명하는 불우를 겪었다. 1970년 친구를 따라 그 무렵 젊음의 전당인 음악다방에 놀러 간 것은 음악인생으로 새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여기서 우연히 무대에 올랐다가 강렬한 음색에 반한 작곡가 김준규씨에 발탁되어 음반을 취입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첫 앨범에 이어 이듬해 1971년에는 ‘1943년 3월4일생’과 ‘마음은 집시’가 수록된 앨범을 발표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 두곡은 번안 곡임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았다. 번안 곡...‘한국의 호세 펠리치아노’ ‘한국의 레이 찰스’로 197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추억의 이름이다. 무엇보다 당시 이탈리아 니콜라 디발리의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을 번안한 노래 ‘1943년 3월4일생’과 ‘마음의 집시’로 올드 팬들의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특히 ‘1943년 3월4일생’은 코미디언 이홍렬이 ‘어머님 왜 날 낳으셨나요?...’ 하며 불러 다시금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사실 이 곡의 번안 노랫말은 시각장애자 가수인 이용복의 처지를 반영해 당시 심금을 울렸다. 그는 3살 때 마루에서 마당으로 떨어져 왼쪽 눈을 잃었고, 이어 7살 때 썰매를 타다가 오른쪽 눈이 칼날에 찔리면서 두 눈 모두 실명하는 불우를 겪었다. 1970년 친구를 따라 그 무렵 젊음의 전당인 음악다방에 놀러 간 것은 음악인생으로 새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여기서 우연히 무대에 올랐다가 강렬한 음색에 반한 작곡가 김준규씨에 발탁되어 음반을 취입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첫 앨범에 이어 이듬해 1971년에는 ‘1943년 3월4일생’과 ‘마음은 집시’가 수록된 앨범을 발표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 두곡은 번안 곡임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았다. 번안 곡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같은 시각장애자 가수인 호세 펠리치아노의 ‘비(Rain)’ 등의 곡들은 이용복을 통해 일반에게 친숙해졌을 정도였다. 이후 그의 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워 로보(Lobo)의 ‘We’ll be one by two today’를 번안한 ‘우리 함께’를 비롯해 순수 가요인 ‘그 얼굴에 햇살이’ ‘어린 시절’ ‘줄리아’ ‘잊으라면 잊겠어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당대 최고인기 가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군림했다. 70년대 중반에는 방송사 10대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 그는 고음으로 치솟는 가늘지만 강한 음색을 특징으로 팬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또한 TV에 나와 시각장애인답지 않게 유머러스한 말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당시 TV에서 경쟁한 트로트, 스탠더드 진영과 젊은이들의 포크 서클을 아우르며 중도 성향의 음악노선을 취했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인기는 눈에 띠게 하락했으며 80년대 들어서는 음악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이어 198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7년만인 1991년에 귀국해 녹음실을 운영하다가 2001년부터는 경기 양평에 공항카페를 개업해 운영하고 있다. 2003년에는 25년 만에, 그가 작곡 편곡 노래 믹싱 등 작업 전 과정을 도맡아 ‘아이야’가 수록된 새 앨범을 발표했다. 올 1월에는 서울 YWCA 마루홀에서 거의 30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노래 : 정태춘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한가족 열린 음악회 >,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아! 대한민국 >,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한가족 열린 음악회 >,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아! 대한민국 >,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이 농부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는 현악반에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방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이별은 그를 어두운 사춘기적 자화상 속에서 살게 했고, 재수와 함께 시작된 여러 번의 가출은 이 우울한 시인을 젊은 날의 불안한 군상들 속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이미 학창시절에 곡을 쓸 줄 알았던 그는 이 시절에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모아두었던 곡들로 제대 후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에 의해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1978년 말에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은 엄청난 대중적인 파고를 일으키며 정태춘을 스타덤으로 인도했다. 비록 많은 가사들이 검열에 의해 수정되긴 했지만 그는 ‘시인의 마을’로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인가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8년 만난 인생의 동반자 박은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린다.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 2집, 국악과 양악 편곡의 멋진 대비를 보여주는 3집의 실패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그는 부인 박은옥과 같이 하기 시작한 1984년의 앨범에서 ‘떠나가는 배’로 또 다시 스매시 히트를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스테디 리퀘스트곡을 남긴 이 음반은 포크적 색채를 버리고 스트링 세션 위주의 편곡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간 앨범이었다. 음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던 그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1985년 1월부터 시작된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 >라는 공연을 벌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던 그는 TV를 배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강에서’, ‘붕숭아’와 같은 곡으로 계속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주화 투쟁과 6.29 선언 등으로 변화한 국내의 분위기를 실감한 그는 검열을 의식해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모아 <무진 새노래 >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며, 이 때부터 달라진 사회적인 시각과 국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엉켜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88년부터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라는 공연을 펼쳐 외세의 시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현 세대를 교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지지공연을 시작으로 전교조 지지공연, 전노협 지지공연 등에 참석하거나 주도적으로 행사를 만들어 대중집회의 단골주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들어진 <아, 대한민국 >이 1990년 발효된 새 음비법을 따른 공륜에 의해 거부당하자, 음반을 불법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하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으며1991년 1월 29일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 위원장을 맡아 반대 성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전검열제도 폐지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해서 <92 장마, 종로에서 >를 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이 앨범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 있는 사전 심의 조항 폐지 운동은 19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힘없던 시인의 승리는 이렇게 기나긴 길을 돌아서 찾아왔다. 그의 고생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1998년 정태춘은 늘 함께 해온 부인 박은옥과 함께 2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함춘호, 조동익 등의 일급 세션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서정미의 단아해진 멜로디들을 들을 수 있으며 한 층 더 깊이가 새겨진 선동성을 읽을 수 있다. 포크 음악인들 위주의 중견 가수들과 함께 위성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콘텐츠 회사 S.O.K를 설립한 그는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는 국악에 대중적인 접근을 꿈꾸며 지금도 대중 집회를 빠짐없이 순회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의 거울이다.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가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이번 내레이션 진행은 그의 첫 영화작업으로, ‘블랙딜’ 기획안을 보고 한번에 흔쾌히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울림있는 내레이션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진정성을 더했다.Album1978 《시인의 마을》 1980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詩》 1983 《떠나가는 배(이어도)》1985 《북한강에서》 1988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노래》1993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5 《정태춘 박은옥 - 20년 골든》 2002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12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노래 : 조영남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알려진 삽교면으로 이주했다. 한양대 음대를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으나 1968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로 가요계 스타로 등극하며 중퇴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명예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란 풍자가요를 부른 다음날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중 1973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험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성가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가수로 복귀했으며, 1990년 카네기홀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었다. <조영남쇼>, <투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을 진행하는 등 방송인으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지금은 MBC 라디오에서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생방송 진행을 맡고 있다. 앨범으로 <제비>, <보리밭>, <불꺼진 창>, <딜라일라>, <화개장터>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조영남 양심학』, 『놀멘놀멘』,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조영남 길에서...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알려진 삽교면으로 이주했다. 한양대 음대를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으나 1968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로 가요계 스타로 등극하며 중퇴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명예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란 풍자가요를 부른 다음날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중 1973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험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성가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가수로 복귀했으며, 1990년 카네기홀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었다. <조영남쇼>, <투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을 진행하는 등 방송인으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지금은 MBC 라디오에서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생방송 진행을 맡고 있다. 앨범으로 <제비>, <보리밭>, <불꺼진 창>, <딜라일라>, <화개장터>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조영남 양심학』, 『놀멘놀멘』,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 『어느날 사랑이』,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천하제일 잡놈 조영남의 수다』 등이 있다. 1973년 한국화랑에서 첫 미술 전시회를 연 후 오늘날까지 서울·부산·뉴욕·LA 등 세계 각지에서 화가로서 작품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노래 : 최백호
노래 : 하남석
노래 : 해바라기
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콘서트를 갖기 시작한 이들은 1977년 8곡의 합창곡과 4곡의 솔로 곡이 실린 첫 음반을 발표하고 ‘구름 들꽃 돌 연인’을 히트시키며 기타를 든 청년들에게 주요한 레퍼토리를 제공 해 준다. 이 음반은 이미 2장의 솔로 앨범으로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과시한 이정선이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참여했고 그를 비롯한 각 멤버가 솔로 한 곡씩을 불렀다. 이 중 이주호가 고교 시절 지었다는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은 한영애의 목소리로 담겨 있으며 후에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리메이크 한다. 1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1978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주호 대신에 이광조가 한 자리를 차지한 이 앨범에...1970년대에 중창단의 진영으로 빼어난 선율과 화음의 융화를 선보이며 모던 포크 계열의 선두에 섰던 혼성그룹 해바라기는 처음에 김의철을 리더로 하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가 한 팀이 되어 명동에 있는 업소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다. 김의철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떠나자, 이정선이 대장으로 들어오고 이광조가 군에 간 사이에 이정선과 자주 콘서트를 가졌던 이주호가 들어와 4인조의 진영을 갖춘다.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홀에서 콘서트를 갖기 시작한 이들은 1977년 8곡의 합창곡과 4곡의 솔로 곡이 실린 첫 음반을 발표하고 ‘구름 들꽃 돌 연인’을 히트시키며 기타를 든 청년들에게 주요한 레퍼토리를 제공 해 준다. 이 음반은 이미 2장의 솔로 앨범으로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과시한 이정선이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참여했고 그를 비롯한 각 멤버가 솔로 한 곡씩을 불렀다. 이 중 이주호가 고교 시절 지었다는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은 한영애의 목소리로 담겨 있으며 후에 이주호, 유익종의 해바라기가 리메이크 한다. 1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1978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주호 대신에 이광조가 한 자리를 차지한 이 앨범에는 ‘뭉게 구름’이 히트를 했고 같은 해 <TBC 해변가요제 >에서 징검다리의 노래로 대상을 차지한 ‘여름’, 이정선의 솔로 앨범에 수록했었던 ‘섬 소년’ 등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앨범을 끝으로 이정선은 이광조, 엄인호와 풍선이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고 한영애는 솔로 앨범의 실패로 연극계로 발을 옮긴다. 그리고 김영미는 유학을 떠난다. 1986년 김영미의 일시적인 귀국으로 같이 모이게 된 이들은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우리네 인생’이 수록된 고별 앨범을 발표한다. 이중 타이틀곡인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는 이별과 재회의 희망을 단아하게 노래해 라디오를 중심으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노래 : 이필원
노래 : 우순실
노래 : 강승모
노래 : 임병수
노래 : 배따라기
‘아빠와 크레파스’라는 동요풍의 가사가 인상적인 곡으로 잘 알려진 배따라기는 전곡을 작사, 작곡하는 특출난 감성의 소유자 이혜민이 리드하고 맑은 음색을 가진 양현경이 주요 멜로디를 부르는 형식으로 짜여진 혼성듀엣이다. 혼성듀엣이지만 둘이 번갈아 부르는 형식이나 한쪽이 주요 파트를 부르고 다른 한쪽이 화음을 넣는 여타 그룹과 달리 대부분의 앨범에서 3∼4곡을 제외하곤 이혜민이 거의 다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여성 보컬 위주의 곡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84년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란 곡으로 라디오를 강타하며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떠오른다. 이어 ‘내 마음은 외로운 풍차예요’, ‘그대 작은 화분에 비가 내리네’ 등의 긴 제목으로 계속 해서 인기를 얻으며 꾸준한 앨범 판매고를 올린다. 이들은 TV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의 전형처럼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이혜민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와 찻잔 사이’, ‘당신의 창가에’, ‘유리벽 찻집’, ‘아빠와 크레파스’ 등을 사랑했으며 1987년에는 ‘안개 속에’, ‘크...‘아빠와 크레파스’라는 동요풍의 가사가 인상적인 곡으로 잘 알려진 배따라기는 전곡을 작사, 작곡하는 특출난 감성의 소유자 이혜민이 리드하고 맑은 음색을 가진 양현경이 주요 멜로디를 부르는 형식으로 짜여진 혼성듀엣이다. 혼성듀엣이지만 둘이 번갈아 부르는 형식이나 한쪽이 주요 파트를 부르고 다른 한쪽이 화음을 넣는 여타 그룹과 달리 대부분의 앨범에서 3∼4곡을 제외하곤 이혜민이 거의 다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여성 보컬 위주의 곡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84년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란 곡으로 라디오를 강타하며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떠오른다. 이어 ‘내 마음은 외로운 풍차예요’, ‘그대 작은 화분에 비가 내리네’ 등의 긴 제목으로 계속 해서 인기를 얻으며 꾸준한 앨범 판매고를 올린다. 이들은 TV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의 전형처럼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이혜민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와 찻잔 사이’, ‘당신의 창가에’, ‘유리벽 찻집’, ‘아빠와 크레파스’ 등을 사랑했으며 1987년에는 ‘안개 속에’, ‘크레파스 사랑’, ‘회상의 등불’, 라디오의 로고송으로 쓰인 ‘나 그대를 사랑해요’ 등이 꾸준히 인기를 얻었고 양현경이 결혼으로 탈퇴하고 이혜민 혼자서 발표한 1988년의 7집에서도 ‘희야’를 히트시켰다. 1986년 이동기에게 ‘커텐을 내려줘요’란 곡을 준 바 있는 이혜민은 1988년 김흥국에게 ‘호랑나비’를 작곡해 주며 히트 작곡가로 위상을 드높이고 그에게 ‘59년 왕십리’, 김재희에게 ‘애증의 강’ 등을 주며 인기 있는 작곡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전형적인 발라드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따라기는 3집에서는 시낭송의 형태를 띤 곡을 발표하기도 하고 ‘희미한 불빛 아래’와 같은 트로트 성향의 곡들도 이혜민의 둔탁한 목소리로 소화해내며 아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했던 팀이었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지극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멜로디에 과거의 사랑을 회상하는 투의 가사 그리고 비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듯이 일상의 아름다운 소재들을 제목으로 붙인 이혜민의 음악세계는 1980년대 하반기를 쥐고 있었던 발라드의 명백한 결정판이었다.
노래 : 김인순
노래 : 양병집
노래 : 남궁옥분
노래 : 이재민
노래 : 가람과 뫼
GARAM &MOE멤버 : 민재홍, 윤영로
노래 : 강은철
노래 : 사랑의 듀엣
멤버 : 김정환
노래 : 이재성
노래 : 한경애
노래 : 나미
노래 : 논두렁 밭두렁
노래 : 유심초
멤버 : 유시형, 유의형
노래 : 한마음
멤버 : 양하영, 강영철
노래 : 김태정
노래 : 정오차
• CD1
• 01. 촛불잔치 - 이재성
• 02. 아니벌써 - 산울림
• 03. 날이 갈수록 - 송창식
• 04. 개구장이 - 산울림
• 05. 서른즈음에 - 박학기
• 06. 가면 어데로 가나 - 유익종
• 07. 골목길 - 이재민
• 08. 줄리아 - 이용복
• 09. 너 - 해바라기
• 10. 불꺼진 창 - 조영남
• 11. 사랑하는 사람아 - 사랑의 듀엣
• 12.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 배따라기
• 13. 오늘 같은 밤 - 이광조
• 14. 행복을 주는 사람 - 해바라기
• 15. 미운정 고운정 - 나미
• 16. 정주고 내가 우네 - 김훈
• CD2
• 01.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산울림
• 02. 기타하나 동전한잎 - 이재성
• 03. 영상 - 논두렁 밭두렁
• 04. 스물한살의 비망록 - 스물하나
• 05.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 이종만
• 06. 제비 - 조영남
• 07. 옛시인의 노래 - 한경애
• 08.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 임병수
• 09. 사랑 사랑 누가말했나 - 남궁옥분
• 10. 사랑했어요 - 김현식
• 11. 사랑하는 그대여 - 유심초
• 12. 촛불 - 정태춘
• 13. 여고 졸업반 - 김인순
• 14. 잃어버린 우산 - 우순실
• 15. 비와 찻잔 사이 - 배따라기
• 16. 사랑이 그런것처럼 - 박미경
• CD3
• 01. 작은 새 - 김정호
• 02. 삼포로 가는 길 - 강은철
• 03. 내일로 가는 마차 - 이재성
• 04. 무정 부르스 - 강승모
• 05. 가슴앓이 - 한마음
• 06. 약속 - 이필원
• 07. 밤에 떠난 여인 - 하남석
• 08. 백지로 보낸 편지 - 김태정
• 09. 생일 - 가람과 뫼
• 10. 창밖에 낙엽은 그대로인데 - 배따라기
• 11. 내 마음 갈곳을 잃어 - 최백호
• 12. 우리네 인생 - 이광조
• 13. 타박네 - 양병집
• 14. 바윗돌 - 정오차
• 15. 고래사냥 - 송창식
• 16. 토용일 토요일 밤에 – 김세환
이혜민
이혜민 배따라기
데뷔작 홈페이지
[노래] 7080 오리지널 베스트 [LP]신라뮤직
[노래] 오리지널 통기타 베스트 7080 가람뮤직
[노래] [USB] 7080 오리지널 베스트서울미디어 (음반)
고등학교 때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 가는 길》을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 《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등을 작곡했다. 1983년 《은지》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양현경 등과 함께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등을 히트시켰다. 가족뮤지컬 《아빠와 크레파스》를 제작하면서 《꼬마 요리사》, 《내 친구 똥》, 《이를 닦는 슈퍼맨》, 《꼬마와 해바라기》, 《내 이름은 풀잎이에요》, 《밥 송(감사합니다 송)》, 《맛있는 우유 송》 등의 동요를 발표했다.
자료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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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 괜찮아 읽어보다
중복 문장이 많습니다. 정리를..
수고했습니다.
옛친구님이리불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곧 반갑게 만나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