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3,13-15.17-19 요한 1서 2,1-5ㄱ 루카 24,35-48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 외람되지만, 예수님은 은근히 장난꾸러기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센 풍랑이 일어 잔뜩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에게
굳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오시어 사람을 놀라게 하시고(마태 14,22-33)
오늘도 갑자기 제자들 가운데 ‘짜잔~’하고 나타나시어 간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만드십니다.
그러시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고
구운 물고기 한 마리까지 맛있게 잡숴 보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깜짝쇼에 제자들은 매번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하며 겁에 질리곤 했습니다.
이 ‘유령’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 뭔가 흐늘거리고 물체도 그냥 막 통과해 버리는 바로 그 ‘유령Ghost’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믿으시나요? 사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수행했던 제자들마저도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졸지에 ‘의심쟁이’가 되고 말았지만
저는 그런 ‘의심-놀람-확인-증거’의 과정이 믿음을 완성해 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의심할 여지도 없이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추종하는 것은
자칫하면 잘못된 길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깨달음과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진정으로 ‘주님 알기를’ 청하고, ‘주님 닮기를’ 청한다면
주님께서는 또 한 번 장난꾸러기처럼 우리를 놀래키시고 확실한 증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마침내 ‘주님의 사랑’에 대한 훌륭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루카 24,48 참조).
그런데 ‘부활’이 대체 뭔가요? ‘기쁨’이고 ‘희망’이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안에 그 기쁨과 희망이 충만치가 않고,
불의와 파괴와 상처와 미움 따위가 만연하다면 우리는 또다시 크나큰 과오(1독서 참조)를
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주님을 몰랐을 때 하던 철없는 행동을 멈추고 ‘정말로 사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사랑하고 지키는 일에는 양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사람은 가끔 용서하고, 지구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사랑’ 외에는 해답이 없고,
그 정답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이젠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고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의 훌륭한 증인’이 됩시다.
광주대교구 김진모 펠릭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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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3,13-15.17-19 요한 1서 2,1-5ㄱ 루카 24,35-48
동행하시는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큰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합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들은
그들의 기대감을 더욱 크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서로 배려하고 종이 되어주라고
당신 스스로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대와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을 잘못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이분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실망감은 훨씬 더 컸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과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그들은
엠마오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이 길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해주시며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오해나 헛된 기대에 대해 바로잡아 주십니다.
더 나아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는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미사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쁜 부활 시기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이지훈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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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3,13-15.17-19 요한 1서 2,1-5ㄱ 루카 24,35-48
나는 그분을 안다?
리쌍이라는 힙합 듀오가 부른 ‘내가 웃는 게 아니야’ 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또 내가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야~” 이미 오래전 고음 불가의 목청이
되었기에, 요즘 신세대 노래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내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 소절만큼은 ‘내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야~’ 라고 고쳐서 흥얼거리다 보면
오늘의 독서 말씀이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고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런 세상입니다.
젊은 친구들은 각자의 열정과 패기를 무기 삼아,
또 연세 드신 분들은 나름의 인생 경륜을 무기 삼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네가 아는 게 아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잘난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정하는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에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언젠가 ‘머리는 기억을 하고 마음은 경험을 한다.’ 라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문자, 문장 혹은 내용이다.
하지만 진정한 앎이란 기억하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다.” 라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 2독서 사랑의 복음사가 요한의 첫째 편지의 말씀을 더욱 수긍(首肯)케 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실천(=계명 준수)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자는 거짓말쟁이고 또 진리가 없는 자일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실천의 문제는
동서고금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까지의 ‘최후의 심판’ 말씀도 그러하듯,
주님께서는 정론(正論)이 아닌 정행(正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 베드로 사도께서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시며 설파한 회개는
머리와 가슴의 회개뿐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진정성 있는 회개(turn again)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 24장 42~43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화지(圖畫紙)에 그린 물고기가 아니라 실재(實在)의 물고기를 잡수셨습니다.
이 말씀은 ‘뜬구름(=물고기 그림) 잡는 영성,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영성보다는
실천적(=구운 물고기) 영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그분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닥친 삶(=현실)을 고민하고 연대하고
또 나아가 투쟁할 수 있으면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춘천교구 이기범 요셉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