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토요일, 경북 예천 축협 3층 회의실에서 거행된 2024년 경북문협 정기총회에 경산지부 이정식 회장님과 이태석 부회장님, 허정자, 하영희 회원, 저 5명이 참석하였다. 저는 경산문협에 가입한 지 몇 년 안 되어서 경북문협은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단체인지 호기심으로 회장님이 참석해보자는 제의에 따라나섰다.
생각을 나눌 수 없듯이, 글도 나눠 쓸 수 없는 혼자만의 고독한 정신 작업인데 굳이 단체나 모임이 필요할까 하는 소극적 입장도 있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일을 위해서나 또 조직을 통한 창구 단일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필요하다는 적극적 입장에서 이런 상급 단체가 필요하다는 양비론적 입장이다.
자존심이 세고 자기만의 文香과 입지를 구축한 大家나 무림의 고수들은 사실 이런 단체활동이나 모임 자체가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동호인 수준의 고만고만한 실력과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접받지 못하고 무시 당하는 입장에서 속된 말로 그들만의 리그로 필요하다. 그나마 공감과 이해도가 높고 말이 통하고 서로를 위해줄 수 있는 모임 내지 자기만족을 이룰 수 있기에 동호인 수준의 문학단체가 존재하는 이유이지 싶다.
전날 팔공산과 학가산 등 高山에 쌓인 눈이 제법 雪山을 연출하고 약간 쌀쌀하면서 흐린 날씨의 주말이었지만 일상을 벗어난다는 해방감과 새로운 곳을 탐방한다는 기대감에 정월 대보름날 5명이 다소 비좁지만, 이정식 회장님의 차를 타고 콧바람 쉬며 부지런히 중앙고속도를 달렸다. 몇 차례 우왕좌왕하는 착오는 있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하여 정기총회를 마치고 한우육회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에 안동 서후면 소재에 있는 학봉종택, 원주변씨 간재 종택과 이태석 선생님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총회를 마치고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가기는 섭섭하여 주위 몇 곳을 협의하다, 서안동IC로 올리는 것을 깜빡하고 놓쳤다. 아무런 생각 없이 국도로 내려오다 보니 길옆 안내 표지판에 학봉고택이 보이기에 이곳에 둘러보자며 즉석 협의가 되어 차를 돌렸다. 마침 이곳이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 가는 길목으로 이태석 부회장님의 고향이라 잘 아시고 계시어 더 잘되었다며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방문했다.
안동시 서후면은 안동에서 최고봉인 학가산(882m)의 줄기를 타고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를 비롯하여 경당종택, 죽헌고택, 단계종택 이상루, 함벽당, 운장각, 명옥대, 관물당, 광흥사, 안동권씨 능동재사, 경광서원, 안동김씨태장재사가 있는가 하면, 서후면에서도 금계리는 금제, 검제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원히 재앙이 없는 천년 불패의 땅으로 불리어왔던 곳이라서 그런지 안동 3대 토성인 안동김씨, 권씨, 장씨의 始祖墓가 있는 곳으로 의성김씨 학봉종택, 원주변씨 간재종택, 광풍정, 소계서당, 동호정, 칠계재 등이 있고 임란 역사문화공원이 있는 명당 중의 명당 터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학봉종택을 먼저 방문하였다. 주말이지만 날씨가 흐리고 보름날이라서 그런지 방문객은 우리밖에 없고 안내인도 없어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로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주리론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와서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아 속죄하는 뜻에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1593년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의 전형으로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 직언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오늘은 학봉 김일성 선생님에 대한 업적과 평가보다는 종택을 구경 왔다. 요즘 종택은 단순히 전통을 지키고 옛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개념에서 실사구시 공존 방법을 모색해 고택 체험 등을 통해 다양하게 외부와 접촉하며 변화하는 중이다.
학봉종택은 경북 안동지역 양반가 大邸宅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살림집인 안채와 사랑채가 ‘ㅁ’ 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채 역할을 하는 별채가 앞마당에 있고 뒤편에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소장 유물들을 보관. 전시한 운장각이 있었다. 학봉종택은 전통 한옥이지만 앞 마당 정원에 잔디를 깔았으며, 꽃나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수목들로 정원을 잘 꾸며놓았다.
雲章閣은 학봉 김성일의 유물관으로 1987년에 개관했다. ‘운장’이란 “저 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맑게 빛난다”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 운장각에는 경연일기, 해사록 등 학봉의 친필 유고와 사기, 고려사절요 같은 조선 초기 간행의 전직 56종 261점과 교지, 간찰류의 고문서 17종 242점 등 73종 503점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생이 사용하던 안경. 벼루를 비롯한 유품과 후손들의 서적, 고문서들이 일괄 보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급히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나왔다.
다음에는 학봉고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원주변씨 간재 종택에 갔다. 처음 들어본 종택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연이 있을 것 같고 이태석 부회장님이 아시는 집안이라며 한번 가보자고 하기에 들렀다. 마침 보름날이라 집안사람끼리 윷놀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채에 간재 종택 척사-대회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척사’라는 한자어는 윷놀이의 한자어로 ‘척사(擲柶)’에서 ‘척(擲)’은 던지는 것을, ‘사(柶)’는 윷을 뜻한다고 한다. ‘척사’ 즉 윷놀이는 부여(夫餘)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도. 개. 글, 윷. 모)을 5部落에 나누어준 뒤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배웠다.
나 혼자 충신. 열녀. 효자를 배출한 집안에만 설치하는 홍살문을 지나 종택 뒤편에 서 있는 간재(簡齋)亭을 갔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고종 11년(1874)에 중건한 것이라 했다. 산을 평평하게 깎아 만든 터 위에 지어진 건물은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난간을 두른 마루를 덧달아 누마루 형식으로 꾸며져 단촐하면서 기풍이 있어 보였다.
간재종택(簡齋宗宅)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간재 변중일(簡齋邊中日)의 고택으로, 그의 아호를 따 간재종택이라 이름 붙여졌다. 간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조모와 모친을 구하여 효자로 이름이 높았고, 창령 화왕산의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운 덕으로 효행과 의병 활동에 대한 포상으로 건원릉참봉에 임명되면서 정려(旌閭)도 내려져 <금고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현재는 간재 11대 종손 변성렬과 종부 주영숙(국회의원 주호영의 친동생)이 간재종택을 지키고 있는데 이 집안은 특히 열친회(마음을 다해 친목을 도모하라)라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매년 8월 종손 11남매(2남 9녀)의 가족과 종손의 사촌 및 외가 가족들의 모임으로 가문 화합의 모임이 매년 이어져 오고 있는 특별한 종가집이라고 한다.
남의 잔치에 客이 참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며 회장님은 꺼렸지만, 이태석 선생님은 어릴 때 방문한 적이 있고, 현재 종손과도 인사한 사이라 한번 들러보자며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돼지고기와 떡 등 보름 음식을 대접받았다. 또한 35도의 家酒도 한잔 나누고 간단히 현황을 물어보기도 했다. 역시 이 집도 종가의 제1 덕목인 奉祭祀接賓客의 전통을 지키며 종손과 종부가 극진히 인사를 하며 음식을 드시고 가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
멋쩍었지만 이태석 부회장님의 인맥과 고향이라는 緣으로 방문해 아직 남이 있는 보름날 집안끼리 윷놀이하는 풍습을 구경한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았다. 이런 기회를 통해 종택, 종손, 종부, 家酒 등에 대한 전통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기에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은 이왕 온 겸에 이태석 부회장님의 고향인 서후면 명리를 방문하였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생에 있어 인간 정서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고향에 가서 환경과 역사를 보면 많은 것이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히 찾았던 학봉. 간재종택을 방문했듯이 마치 인근에 있는 이태석 선생님의 생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서후면 소재지와 서후초등학교를 돌아 경당종택을 지나 송내지 언덕에 집은 없고 생가터만 있어 고향 땅에 남은 밭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내려오다 송내지 뒤쪽에 터 잡아 소를 키우는 초등학교 친구 집을 방문했으나 출타 중이라 없어 돌아 나오면서 송내지를 보시자 가족사와 인생사를 압축해 들려주시었다.
특히 송내지에 스케이트 타다 익사한 동생의 죽음이 아직도 아련하다면서 이 들판에 어머님은 쑥을 캐서 팔고 아버님이 아파 초등학교 5학년 때 1년간 농사짓다 6학년 2학기에 복학해 졸업하고, 서당에 한학을 1년간 배우고 지서 급사로 일하다, 대구로 나와 식당 일과 빵 장사를 하며 주경야독으로 중. 고 검정고시를 거쳐 교대에 입학해 평생을 꿈나무들을 키우며 정년을 마치고 현재는 이런저런 문학 활동 등을 하시면서 지내신다는 약술의 인생사를 차 안에서 들었다.
해방 후 6.25 몇 해 전에 태어나 가난한 시대 생존하기 위해 살아온 힘들고 아련한 추억들을 지금은 흘러가듯 예기하시지만, 그간 고통과 노력과 시간 들이 녹아 있는 한 편의 인생 드라마를 직접 고향 땅을 보면서 들으니 더욱더 현장감과 리얼티를 느껴 선생님의 살아온 인생 역정에 대해 다시 한번 존경을 보내며 수고하셨다, 위로드리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임팸트 있게 80년 평생을 압축해 전달되는 시대의 아픔과 한 가정사의 애환과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과 철학들이 뭉쳐 역사가 되고 인생이 되는 것임을 느끼며 오늘 오후가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부회장님은 오랜만에 고향을 같은 문인들과 함께 방문하게 된 감사와 고마움에 맛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셨지만, 날씨도 시간도 어중간하여 대구로 바로 내려오게 되어버렸다. 집 가까이 오자 귀가하고픈 동행자들의 요청에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정식 회장님이 손수 운전하시고 앞앞이 모셔 주는 정성과 열정 덕분에 동행자들은 편하게 잘 다녀오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운명이란 것이 있듯, 오늘의 일정도 아무런 생각 없이 안동의 서후면의 유명한 종택 2곳과 뜻하지 않게 이태석 선생님의 고향을 방문하게 된 즉석 일정이 오히려 더 묘미가 있었고 잊지 못할 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나도 고택 등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 두 곳은 처음이었고 서후면 일대에 그렇게 많은 고택과 吉地라는 것을 확인한 좋은 하루였다.
2024. 02. 27.
첫댓글 2024년 새해에는 경산문협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나의 마음 보탬이 도움이 되겠지요.
2024년 새해에는 경산문협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나의 마음 보탬이 도움이 되겠지요.
2024년 경북문협 정기총회에 회장님 모시고 다녀오면서 우리 문협의 어른이신 이태석 선생님의 고향 방문은 특별한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정겹고 애틋하여 더욱 선생님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일을 잘 정리하여 글을 올려주신 상일 선생님 덕분에 좋은 추억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