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의 드래프트>
드래프트 명단 --- http://blog.naver.com/pcrang01/140016436288
대졸 95학번과 고졸 99학번.
99년 드래프트 대상이 되는 두 학번이 공히 인재가 많지 않았던 데다가 1차지명감이었던 신일고의 봉중근이 이미 1년전에 애틀랜타와 계약해 한국을 떠났고 이어 청소년대표 에이스였던 백차승이 시애틀과, 대학을 졸업하는 동국대 투수 김병일이 피츠버그와 계약을 해버리면서 더 폭이 줄어듭니다.
아마야구 유망주들의 잇단 해외진출로 위기의식을 느끼며 대책마련을 강구하던 한국야구계는 아시아청소년대회에 출전중 계속 던지라는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고 마운드를 내려온 백차승이 부상의 이유보다는 미국진출이 확정되면서 몸을 사리는 태업을 했다고 판단해 영구제명 징계를 받은 사건을 계기로 해외진출 선수가 쉽게 국내로 복귀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합니다.
처음에는 국내에 복귀하더라도 소속팀이 없는 상태로 5년이 지나고 나서 국내 프로팀에서 뛸 수 있다는 발표를 합니다만 이 5년의 기간이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에 따라 뒤에 2년으로 줄어들고 이 2년유예기간은 현재까지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백차승 이전, 즉 박찬호부터 시작해서 이미 진출해 있던 최경환, 봉중근, 서재응, 김선우까지는 소급적용되지 않으면서 유예기간없이 언제라도 돌아와 뛸 수 있고 1차지명자들(서재응, 김선우)은 그 지명권까지 존속되게 되지만, 백차승이후에 진출한 김병현, 최희섭, 송승준 등은 이미 지명되어 있더라도 지명권이 해제됨과 동시에 2년유예기간의 적용을 받아야 했던 겁니다.
(기준이 되는 백차승은 영구제명상태라 징계가 풀리지 않는 이상 영원히 뛸 수 없는 것은 물론 귀국과 동시에 병역법위반으로 군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2007년 하일성 KBO총장 취임후 국내야구 활성화 명분으로 기존지명은 무시하고 새로운 드래프트와 함께 국내 즉시복귀가 가능할 수 있도록 모두 7명의 선수에게 기회를 주면서 최희섭, 송승준, 이승학 등이 국내로 복귀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지만 이 조치는 한시적인 예외조치일뿐 또다시 그 이후에 진출한 선수들은 다시 2년조항에 적용을 받아야 했습니다.
99년의 드래프트 얘기가 너무 앞서나간 느낌이지만 아무튼 당시 선수들의 해외진출 문제는 각팀 1.2차지명의 큰 변수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서울지역 1차지명 드래프트에서는 역사상 가장 무관심속에 전년도부터 순번제로 우선권을 갖기로 했던 약속에 따라 LG가 먼저 중앙대의 장신투수 김상태를, OB는 경희대 포수 홍성흔을 선택합니다.
신장이 무려 195cm였던 김상태는 정수근, 한규식 등과 함께 덕수상고의 전성기를 열었던 선수로 한때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고 미국진출을 시도했다가 3억 3천이라는 이 해 가장 높은 계약금을 제시한 LG에 입단을 하게 되지만 큰 활약을 하지 못한채 부상과 병역문제로 은퇴하게 됩니다.
반면 전년 조인성의 입단으로 LG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홍성흔은 최기문과 진갑용을 보유한 OB에 입단하면서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특유의 근성과 노력으로 이들을 밀어내고 주전포수로 도약합니다.
봉중근이 떠난 고졸우선지명은 그의 연고팀이었던 LG가 아쉬움속에 같은 신일고의 김광삼을, OB는 서울고 구자운을 지명합니다.
이 해를 끝으로 4년전의 약속대로 폐지되는 고졸우선지명은 3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해태와 쌍방울은 졸업하는 대졸선수가 마땅치 않으면서 1차지명까지 고교생으로 선택을 하는데 광주일고의 정성훈, 군산상고의 이진영이 그들입니다.
전년도 최희섭, 이현곤, 송원국과 막강내야를 구축했던 정성훈은 이현곤의 졸업과 함께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3학년초에 다리 골절상을 입으면서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일찌감치 인하대에 진학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해태가 팀사정을 감안하면 상당한 거금인 1억 5천만원을 제시하면서 즉시입단계약을 맺게 됩니다.
삼성은 유망주 빈곤속에 한양대 정성열과 대구고 이성훈을 각각 1차와 고졸로 지명하면서 한숨을 쉬었고 한화는 4년전 이중계약파문을 일으켰던 연세대의 박정진을 1차로, 북일고 문용민을 고졸로 지명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롯데는 경성대의 정원욱을 1차로, 경남고 투수 송승준을 고졸로 지명하지만 백차승에 이어 라이벌인 송승준까지 보스톤과 계약하면서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동기이긴 했지만 엄연히 백차승 이후의 진출이기 때문에 송승준의 이때 지명은 미국진출과 함께 무효가 되고 훗날 특별사면때 그를 입단시키기 위해 재지명해야 했습니다.
현대는 1차로 영남대 잠수함투수 박장희를 지명하면서 흔치않게 부천고출신을 1차로 선택했고 고졸로 동산고에 박기범을 지명했습니다.
박기범의 지명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는데 그는 저학년까지 배명고에서 뛰다가 3학년무렵 동산고로 전학을 간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전학이 아니라 현대측의 개입이 있었던, 즉 1차지명을 보장받은 전학이었기 때문에 드래프트 제도를 악용한 편법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비신사적이긴 해도 당시까지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박기범의 현대지명은 인정을 받게 되지만 그 이후 타지역 전학생은 1차지명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됩니다.
전년도에 처음으로 고졸선수가 50%를 넘겼던 2차지명은 이 해엔 3/4이상이 고졸선수들로 채워집니다.
95년에 마지막으로 고졸들을 미리 확보해버리는 통에 그만큼 이제 대학에는 뽑을만한 선수들이 없었던 것이죠.
첫번째 순서였던 롯데는 백차승, 송승준과 함께 부산지역 트리오를 형성했던 경남상고의 김사율을 전체 1번으로, 이어 대졸 야수들인 한규식과 임재철에 이어 하위권인 8번에서 원광대 내야수 조성환을 지명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한편 롯데는 5번지명으로 전년도 두산의 지명을 받았다가 유급을 했던 성남고의 김주용을 지명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김주용은 롯데의 선수로 인정되고 그 이후부터는 지명후 유급을 하더라도 지명권이 풀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한화는 국가대표 유격수였던 황우구를 1번으로 지명하고 투수로 지명한 6번 한상훈이 경희대진학후 내야수로 정착한 후에 입단합니다.
극심한 운영난을 겪고 있던 쌍방울은 지명전 1라운드 지명권을 삼성으로 매도함에 따라 그 대상인 라형진은 삼성의 선택이었고 나머지 11명의 지명선수들을 전원 고졸로 뽑은 후 모두 대학을 보내는 어려움을 드러냅니다.
해태는 1순위 성균관대의 유동훈과 5순위 대구상고의 포수 차일목, 7순위로 뽑은 김경진이 활약을 하고 OB는 1순위였던 선린정보고 포수 정종수가 성장을 못한 대신 5순번에 휘문고 투수 정재훈이 큰 성공을 거둡니다.
OB가 2번으로 깜짝지명한 군산상출신 투수 장성진은 94학번으로 건국대를 1년만에 중퇴하고 군에 입대한 뒤에 실업팀 현대에서 뛰던 선수로 KBO가 지명대상 명단에도 올리지 않았던 선수라 지명후 자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행사진행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라형진을 실질적인 첫순위로 확보했던 삼성은 1번 권오준이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하다가 뒤에 핵심전력으로 성장했고 5번 임동규도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LG도 비교적 관심을 받지않던 단국대 투수 이승호를 1번으로 지명한 것이 뒤에 성공적인 지명으로 평가받게 되고 내야수로 선택한 6번 정재복은 인하대시절 투수로 전향한 데다가 드림팀에서 병역까지 면제받은 후에 입단하면서 큰 횡재가 됩니다.
현대는 1번 선택한 양용수가 홍익대에 진학했다가 졸업무렵 미국에 진출한다고 실랑이를 벌이면서 결국 입단도 하지 못했고 2번지명의 이종욱은 영남대를 거쳐 입단은 했지만 팀내에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들이 많다는 이유로 방출, 뒤에 두산에 입단에서 크게 성공하는 아픔을 겪지만 3번지명의 이택근, 그리고 말번에 가까운 11번의 송신영이 주축선수가 되면서 위안을 삼게 됩니다.
12명의 선수들을 빠짐없이 지명한 각팀은 어느 팀 할것없이 2명 내외의 선수들을 주전급으로 성장시키면서 아직까지 어느 팀이 잘했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엇비슷한 성과를 거둡니다.
한편 이 해의 2차지명은 KBO의 회의실을 떠나 롯데호텔 세미나실에서 열리면서 이제 2차지명도 야구계의 큰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