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자크 데리다의 신간이 번역돼 나왔다. <불량배들 -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휴머니스트)가 그것인데, 원저는 <Voyous>(2003)이다(알라딘에는 원저명이 'Yoyous'로 잘못 표기돼 있다. 이 책은 대학 도서관들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216쪽 분량이다). 사실 알라딘에서 신간을 검색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서 반갑고 적잖게 놀랐다. 반가운 거야 당연하지만, 놀란 것은 웬만한 데리다 서지는 꿰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들어본 책이었기 때문이다!(불어본을 읽지 못하는 나는 프랑스 현지 사정에 어둡다.) 원저가 올해 나온 책이라는 걸 고려하면, 아마도 그의 최신간이 아닌가 싶고,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인 듯하다(아마존을 다시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영역본으로 나온 그의 최신간은 9.11 이후에 관한 하버마스와의 대담집이다. 하니, 출판사와 역자의 순발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신간은 9.11 이후의 세계정세, 특히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불량국가(불량배들!)로 지목하고서 대테러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목차를 보건대). 촘스키의 <불량국가>(두레, 2001) 정도가 여기에 대응하는 책일 듯싶다. 국제정세를 다룬 책으론 유럽연합 출범에 즈음하여 그 의미를 성찰해본 <다른 곶>(동문선, 1997)을 잇고 있는 책인 거 같고. 어쨌든 영역본보다도 빨리 나온(일역본은 나왔을까?) 두툼한(326쪽) 데리다 번역서는 조금 일찍받은 연말보너스 같은 책이다. 역자도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을 번역한 바 있으므로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엉터리 번역의 모델이다). 데리다도 유려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해주었으면 한다.
책값은 18,000원이니까 다소 비싼 편이지만, 요즘 나오는 학술서들에 견주면 그럴 만한 가격이다. 동문선에서 나왔다면, 최소 25,000원은 했을 것이다. 동문선에서 신간으로 나온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가 336쪽에 23,000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슈레가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1994)의 저자라고 해도 데리다와 네임밸류를 견줄 수는 없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고. 빌어먹을 동문선 얘기가 나온 김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를 능지처참하게 번역한 최생열이 여전히 동문선에서 번역서들을 내고 있다. 끼리끼리 노는 거야 말릴 수 없지만, 출판 생태계를 고려해 본다면 퍽 걱정스러운 일이다. 무단으로 폐수를 방류하고 있는 이 공장과 업자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불가능한 것인지?
입아픈 소리 그만하고, 다시 데리다로 와서, 어쨌든 그의 신간을 많이들 사두셨으면 한다.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냥 책을 사두는 걸로 출판 생태계에 보시하는 게 되고, 그래야 데리다의 다른 책들이 (더 빨리) 나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어본 <데리다 사전>이 곧 출간된다고 하는데, 생존철학자 사전이 나오는 건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게 말 그대로 '생전에' 나올지는 아직 불확정적이다.
그리고, 9.11과 관련하여 내가 읽은 책 가운데(별로 안 읽긴 했지만) 압권은 역시 지젝의 <실재계 사막>이다. 지난주에 며칠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냉정한 분석'은 그와 거리가 멀다. 그의 모든 분석은 '열정적'이다. 나는 그것이 드문 자질이며, 기념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단지 재치있는 철학자라고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보드리야르의 <테러리즘의 정신>(동문선)을 같이 읽었는데, 보드리야르는 분량도 그렇지만, 지젝의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시리즈의 (아직 미번역된) 폴 비릴리오의 <Ground Zero>도 입수했는데, 지젝보다는 보드리야르에 가까운 책일 듯싶다. 어쨌거나 당신이 인문학도라면, 지젝을 정말 열심히 읽으시길 바란다. <실재계 사막>은 물론 번역은 아주 조야하지만(이런 얘기는 이제 입이 아프다),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쉽게 읽힌다(따라서 원서를 구해보셔도 된다). 내가 읽은 바로 가장 어렵게 읽히는 책은 의외로 <믿음에 대하여>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몇 권의 책을 포함해도 그렇다.
다시 데리다. 알라딘에 있는 신간의 목차를 끝으로 아래에 옮겨놓는다...
역자 서문 - 두 가지 회전
첫 번째 에세이
최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존재하는가?
0. 시작하며
1. 자유로운 바퀴
2. 방종과 자 : 교활·방탕한 자(roue)
3. 민주주의의 타자, 차례차례 : 양자택일과 교대
4. 지배(maitrise)와 계량(metrique)
5. 자유, 평등, 형제애, 또는 어떻게 표어를 내걸지 않을 것인가
6. 나는 불량배
7. 신이여,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가? 도래할 어떤 언어로 말인가?
8. 불량국가들 중 최후의 불량국가 : '도래할 민주정치', 이중 회전으로 열림
9. 더 많은, 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불량국가
10. 발송
두 번째 에세이
도래할 계몽주의 '세계' - 예외, 계산 그리고 주권
0. 시작하며
1. 목적론과 구성술 : 사건의 약화
2. 도달하다 : 국가의(그리고 전쟁과 세계전의) 종말에 도달하다
의외로 일본의 경우 번역 수입이 더딥니다. <제국>의 경우도 올해 여름 정도에 나왔으니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편집인들이 번역의 질이 좋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 것은 주저하지 않으며, 교열을 여러 번 보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부정변증법>의 경우,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번역본이 나왔는데,
번역판권 획득과 기획에서 출판까지 20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번역문화가 탄탄한 것은 꾸준히 작업을 진행시키기 때문이죠. <에크리>의 겨우, 총 3권으로 번역되었는데, 1권이 번역되고, 2, 3권이 나오는데, 14년 정도 걸렸죠. 한국어판 <에크리> 출판이 몇년째 지연되고 있는데, 14년 정도 기다려야
덧붙여, 믿음사에서 나온 <니체와 철학> 번역의 질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잘 읽히지 않습니다. 이는 역자가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 몇 군데 누락이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판 <니체와 철학> 쪽이 잘 읽히고 이해가 빠릅니다.
들뢰즈 번역들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비평할 입장이 못되네요. <천개의 고원>에서의 오역 일부를 지적한 바 있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나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솔직히 읽기 어렵습니다. 읽어도 감이 잘 안온다고 해야 하나. 번역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그다지 나은 것 같지 않습니다...
첫댓글 "당신이 인문학도라면, 지젝을 정말 열심히 읽으시길 바란다." -- ".........." (아직 인문학도가 못 된 사람^^)
지젝을 읽어야만 인문학도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인문학도에게 아주 유익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누군가 이 책의 교열을 보는 것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판권의 입수와 번역, 출판... 정말 빠르군요. 휴머니스트의 기획력~!
의외로 일본의 경우 번역 수입이 더딥니다. <제국>의 경우도 올해 여름 정도에 나왔으니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편집인들이 번역의 질이 좋지 않으면, 퇴짜를 놓는 것은 주저하지 않으며, 교열을 여러 번 보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부정변증법>의 경우,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번역본이 나왔는데,
번역판권 획득과 기획에서 출판까지 20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번역문화가 탄탄한 것은 꾸준히 작업을 진행시키기 때문이죠. <에크리>의 겨우, 총 3권으로 번역되었는데, 1권이 번역되고, 2, 3권이 나오는데, 14년 정도 걸렸죠. 한국어판 <에크리> 출판이 몇년째 지연되고 있는데, 14년 정도 기다려야
덧붙여, 믿음사에서 나온 <니체와 철학> 번역의 질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잘 읽히지 않습니다. 이는 역자가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 몇 군데 누락이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판 <니체와 철학> 쪽이 잘 읽히고 이해가 빠릅니다.
덧붙여 2, 이는 서동욱의 번역들에도 해당된다고 말할 있습니다. 그의 번역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평이 좋으나, 그의 번역으로 읽는 들뢰즈는 몽롱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걸 오역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분명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들뢰즈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 번역들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비평할 입장이 못되네요. <천개의 고원>에서의 오역 일부를 지적한 바 있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나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솔직히 읽기 어렵습니다. 읽어도 감이 잘 안온다고 해야 하나. 번역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그다지 나은 것 같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