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장 20-26절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제1장 우리는 ‘하나님의 악기’입니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1966년 폴란드 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이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최초로 콘서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하여 그렇지 않지만, 50년 전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한국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콘서트 장소와 훌륭한 악기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장소를 섭외한 곳이 이화여대 강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콘서트를 하기 전에,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를 한 번 두드려 보더니, 갑자기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기 상태가 너무 나빠서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주최 측에서 일본 동경에서 피아노 조율사를 급히 불러다가 피아노를 조율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에 앉아 연습을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연주하는 동안 저 기차 소리가 나면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결국 신촌 구간의 기차를 정지시켜 놓고 연주회를 진행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음악가는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 아마추어들도 악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전에 미리 악기를 점검합니다. 그리고 연주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비로소 연주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연주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악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기들인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연주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보실까? 우리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2장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그릇은 큰 그릇보다 깨끗한 그릇입니다. 예쁜 그릇보다는 깨끗한 그릇입니다. 아름다운 그릇보다는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아무리 크고, 아무리 예쁘고, 아무리 아름다워도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인터넷에 ‘조앙마두’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의 글입니다. “금 그릇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질그릇을 보면 무시했습니다. 금 그릇이 아닌 것을 원망하며 사람들에게 금 그릇인양 보이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깨끗한 그릇을 쓰시겠다고.......”
하나님은 어떤 그릇이든지 깨끗한 그릇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여기에 ‘그릇’은 세상의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그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도, 배우지 못했어도, 키가 작아도, 예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스펙’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스펙’을 쌓으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합니다. 영어 점수를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자원봉사도 오로지 스펙을 쌓기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이것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스펙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깨끗한 사람만 쓰십니다.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리 다양하고 많은 스펙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무용지물입니다.
예원교회를 시무하시는 정은주 목사님의 글에서 ‘용서 시리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름인 요즘에 여자들이 배꼽티를 많이 입는데, 이 배꼽티에 빗댄 유머입니다.
“배꼽 티 입는 것은 용서한다. 그런데 배꼽에 때가있는 것은 용서 못한다.”, “과거가 있는 여자는 용서한다. 그러나 과거를 잊지 못하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죄도 용서할 죄가 있고 용서 못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과거에 가졌던 생각과 습관에 매여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다 믿음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성으로 인하여 깨끗한 그릇에 때가 묻어 더러운 그릇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깨끗한 그릇들입니다.
제가 개와 고양이를 키우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언뜻 보면 개보다 고양이가 더 깨끗할 것 같은데,밥그릇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두 짐승이 먹는 방식이 다르다보니, 개의 그릇은 깨끗한 반면에 고양이 그릇은 항상 더럽습니다. 음식을 주면, 개는 그릇을 깨끗하게 핥아 먹습니다. 그래서 깨끗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음식을 씹어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릇에 음식물 찌꺼기가 쌓여 더러워집니다.
그릇을 깨끗하게 핥아 먹는 개처럼 우리들도 매일 기도하고 회개하면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깨끗한 척하고 음식만 먹으면 그릇은 어느 순간에 묵은 때가 끼어 닦아도 잘 닦이지 않는 더러운 그릇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러우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과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깨끗한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이 깨끗한 가정이 되고, 우리 교회가 깨끗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3장 하나님께서는 동역을 잘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어 놓고 독처 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시고 돕는 배필인 하와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같이 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제대로 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같은 환경과 조건 아래 세 개의 상자를 준비하고 A상자에는 쥐 한 마리를, B상자에는 쥐 열 마리를, C상자에도 쥐 열 마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세 상자에 들어 있는 쥐들은 똑같은 음식, 온도, 습도로 길렀습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C상자에 있는 쥐들은 매일 정성스럽게 어루만져 주며 말했습니다. “쥐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고 쥐들의 수명을 관찰하였습니다.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A상자의 쥐는 500일을 살았습니다. B상자의 쥐들은 평균 750일을 살았습니다. C상자의 쥐들은 평균 950일을 살았습니다. 실험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혼자 사는 쥐보다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사는 쥐들이 훨씬 더 오래 살았습니다. 공동체를 사는 쥐들 중에서도 날마다 사랑을 표현하여 준 쥐들이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함께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1개 소대가 무더운 여름 벌판 한 가운데서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무더위와 갈증에 허덕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아 있는 물이라곤 소대장 허리춤에 있는 수통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소대장은 비장한 마음으로 수통을 열어 병사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병사들은 수통을 돌려가며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수통이 다시 소대장에게 돌아왔을 때, 소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물이 반 이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마실 전우를 생각하느라, 병사들은 겨우 입만 축였던 것입니다. 여전히 물이 반 이상 남아 있는 그 수통은 병사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견디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4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주인’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마스터를 잘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사명입니다. 내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인생의 스승입니다.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동역자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믿음 안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달려갈 믿음의 친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세상 친구들은 좋을 때에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다가도 서로 등을 돌리면 원수지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야 합니다. 물질적인 목적으로 만난 동역자가 아니라 주님의 비전을 품고 함께 달려가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동역을 잘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제4장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쓰십니다.
딤후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여기 ‘온유’라는 단어는 영어로 ‘Trained Horse’입니다. 즉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의미입니다. 본래 야생마는 힘이 있지만, 길들여지기 전까지는 밭을 간다든지, 짐을 운반한다든지, 사람을 등에 태우고 가는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들은 오히려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싣고 가던 짐을 떨어뜨린다거나, 태우고 가던 사람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생마가 잘 길들여지면 과거에는 전혀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인에게 아주 유용한 짐승이 됩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길들여진 야생마를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는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장터에 나갔다가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민족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혈기 많은 모세를 쓰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많은 훈련을 받고 그가 온유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로 보면, 이 말씀은 맞지 않습니다. 사실 땅을 얻으려면 전쟁을 해서 이겨야 합니다. 따라서 약한 자는 땅을 빼앗기고,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불의한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거친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카 롯과 싸움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이 넉넉하고 좋은 요단 동편 땅을 모두 조카 롯에게 양보하였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엄청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아브라함에게 더 넓고 좋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나중에는 그의 후손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칼을 쓴 나라는 결국 망하였지만 온유의 방침을 쓴 나라는 승리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 유럽을 호령하였던 나폴레옹이 세인트 헤레나 섬에서 최후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칼로 유럽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정복했다.”
우리가 온유하면 온유할수록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5장 예수님을 만나서 값비싼 유기 그릇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최용문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최목사님 사모님이 시집 올 때 놋으로 만든 요강을 가지고 왔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잘 쓰지 않고 해서 한 쪽에 버려두었습니다. 하루는 놋그릇을 만드는 집사님이 사택에 왔다가 놋요강이 눈에 띄었습니다. 집사님은 사모님에게 버릴 것이면, 자기에게 달라고 하여서 기꺼이 주었습니다. 며칠 후, 그 집사님이 번쩍거리는 황금그릇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에 버려진 요강을 가져 다가 그릇을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사모님은 깨끗한 유기그릇에 밥을 푸면서 왠지 꺼림칙하였습니다.
지금은 깨끗한 그릇이지만, 전에는 똥, 오줌 받아내던 요강이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모님은 자신이 마치 요강단지 그릇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요강 단지 같았는데, 예수 믿고 침례 받고, 목사님의 사모가 되어 하나님께 새롭게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사모님은 밥을 푸다가 찬송을 크게 부릅니다.
목사님이 찬송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가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함께 찬송했고 나중에 그 소문이 교회에 퍼져 온 교회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놋요강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값비싼 유기 그릇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깨끗한 그릇, 동역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