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작년) 6월 모평 생윤 16번 문항(시민불복종) 정답 오류

[힉스]

이 문항은 교육과정 이탈, 제시문 오류, 정답 오류 등 총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사례입니다.

1. 교육과정 이탈

4종 교과서 중 3개 교과서는 시민불복종의 일반 이론(공개적이어야 한다든가,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을 다루고 있지 롤스와 소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머지 1종 교과서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할 뿐 이들이 구체적으로 시민불복종에 대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역시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16번 문항 선지들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 묻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④번 선지 ‘소로는 공동체의 정의감을 불복종 정당화의 최종 근거로 본다.’에 대해 수험생들은 판단할 수 없었을 겁니다.

①, ②번 선지는 각각 ‘롤스는 불복종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롤스는 불복종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는 내용인데, ‘공개성, 처벌감수’ 등은 교과서에서 불복종의 일반적 조건으로 서술하고 있지 롤스가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죠. 이에 대해서는 그런 것들이 불복종의 일반적 조건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당연히 롤스에게도 해당된다고 추론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처벌 감수’를 소로 등 다른 사상가들이 모두 동의했어야만 이런 반론이 성립될 것입니다. 소로만 해도 처벌 감수를 인정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 통설입니다. 이처럼 처벌 감수가 시민불복종을 주장하는 모든 사상가들이 동의하는 것이 아닌 한, 이것에 대해 롤스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묻는 것은 교육과정 이탈이죠. 선지가 쉽고 어렵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⑤번 선지 역시 교육과정 이탈이라고 보지만 달리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2. 제시문 오류

을(소로) 제시문의 족보가 궁금하네요.^^ 첫 문장(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은 직역은 아니지만 출처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조차도 불의의 하수인이 된 상황이라면 그 법을 어겨라.)부터 골 때립니다. 우선, ‘선량한 사람’이라는 말이 갑툭튀입니다. 이 문장이 인용된 구절의 원문에는 ‘선량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임의로 집어넣었거나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검증 없이 써먹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불의의 하수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원문은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이고, 이 부분을 인용한 교과서들 모두 이런 번역을 싣고 있죠. 근데 모평 제시문에서는 이것이 ‘불의의 하수인’으로 둔갑합니다. 문제 안 될까요? 아닙니다. 정답으로 평가원에서 발표한 ③번 답지와 관련해서 아주 크게 문제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이제 세 번째 문장인데요. 이것은 ‘양심에 따라 그 법(제시문에 따르면 ‘불의의 하수인이 되게 하는 법’)을 어겨라.’입니다. 이 문장의 출처가 어디인지 원전을 다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문장이 미래엔 교과서에는 있더군요. 인용해보면 ‘법이 자연법에 비추어 형평성보다는 독단에 치우쳐 있다고 판단한다면 순순히 따르지 말고 양심에 따라 저항하라.’입니다. 그런데 미래엔 교과서 역시 출처 불명의 내용을 소로의 ‘시민불복종’에서 인용했다면서 싣고 있습니다(‘바보 같은 법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이하 모두 출처 불명임).

짐작하건대, 평가원은 출처도 확인되지 않은 미래엔 교과서의 자료를, 대충 인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로의 ‘시민불복종’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미래엔 교과서에서 인용한 소로 글의 중반 이후(‘바보 같은 법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이하) 내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평가원이 근거도 없이 미래엔 교과서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면 정말 ‘찐따들의 행진’이 될 것 같네요.

출처가 불명하다고 제가 지적한 저 부분이 혹시 시민불복종이 아닌, 소로의 다른 저서에 나오는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래엔 교과서 내용은 여전히 문제될 것입니다. ‘시민불복종’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로의 다른 저서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아마도 인터넷을 떠도는 글을 미래엔이 인용하고, 그걸 평가원 출제자가 다시 인용한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병신들’이라는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피한 일입니다.

3. 정답 오류

정답이라고 평가원에서 발표한 ③번 선지(‘소로는 양심에 어긋나는 모든 법에 불복종해야 한다고 본다.’)에 대해 설명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소로가 시민불복종 이론을 제시한 것은 당시 미국의 노예제에 반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는 건 ‘시민불복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죠. 그래서 이의제기 기간이 지난 후 평가원 게시판에 이와 관련해서 이의제기 글을 올린 분은, 소로의 시민불복종은 ‘노예제 반대를 위한 불복종’으로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이 정도로는 평가원은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고 우기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제가 어제 작년 생윤 수능 문제 중 ‘불교와 장자의 죽음관을 비교하는 문항’이 오류임을 논증하면서, 불교는 윤회를 ‘생사가 순환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것은 출제자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자의적인 해석이 되는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불교철학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출제자는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면서 우길 수 있겠죠. 이때에 열반은 윤회를 벗어나는 상태이기 때문에, 설령 윤회를 ‘생사 순환 과정’으로 해석하겠다는 출제자의 무대뽀 정신을 존중해준다고 할지라도, 불교가 삶과 죽음에 대해 ‘순환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고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임을 어제 글에서 논증했습니다.

이 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가원에 이의제기하신 분이 소로의 시민불복종은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로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이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평가원은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고 우기면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논증이 필요합니다.

우선, ‘불의의 하수인’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을 꼴리는 대로 바꾼 것임은 上述했습니다. ‘양심에 따라 그 법에 저항하라.’는, 그 출처가 불명하다는 얘기도 했고요. 그런데 ‘양심에 따라 그 법에 저항하라’가 출처 불명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이것을 소로의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미 이 단계에서 오류가 되죠. 하지만 이게 소로의 말이든 아니든 일단 제시문에 제시했으니까 비문학 풀듯이 제시문을 통해 정답을 도출할 수 있다면 뭐 문제되겠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양심에 따라 그 법에 저항하라’를 소로의 주장이라고 일단 인정해주고 설명하겠습니다.

‘양심에 따라 그 법에 저항하라’를 소로의 말로 인정해줄 때, 이제 남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모든 법’에 불복종하라는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원전에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는 경우 그 법을 어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인가 하고 소로에게 물으면 소로는 그렇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소로는 불의로 생각되는 모든 법을 어기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문에도 나옵니다. 원문에서 소로는 ‘만일 불의가 정부에게 필요불가결한 마찰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불의한 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 법을 어겨라’라고 합니다.

모든 불의한 법, 양심에 어긋나는 법을 어기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경우’에만 법을 어기라고 하고 있죠. 노예제도는 남(노예)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로는 그 법(노예제도)을 어기라고 하는 겁니다.

노예제로 국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의의 하수인’과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은 그 의미가 크게 다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게 하는 법이 아닌 경우에도 나는 그 법이 불의하여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를 막는 법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 법은 불의하고 내 양심에 어긋나는 법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법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게 한다고 단정할 수 없죠.

‘불의의 하수인’이 되게 하는 법에서 양심에 어긋나는 ‘모든 법’에 불복종하라는 선지가 도출된다고 보지도 않지만, 이 ‘불의의 하수인’이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을 꼴리는 대로 바꾼 표현이기 때문에 더더욱 ③번 선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누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참고하세요. 그리고 혹시 다른 의견 있는 분은 댓글 달아주세요. 인신공격은 안 보고 싶네요. 학술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인신공격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힉스]

이 글은 작년 9월쯤에 올렸다가 삭제했던 글인데, 다시 올립니다. 어느 사이트 방문했다가 제가 위에서 지적한 내용들이 EBS 연계교재 등에 반영되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예컨대, 1.교육과정 이탈 내용). 그런데 위 문항의 선지들에 갖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은 제가 이 글을 통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출처를 정확히 해두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삭제했지만 또 다른 사이트에는 그대로 있기 때문에, 올린 날짜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평가원에도 글 올리는 경우도 있고, 평가원을 제외하고 복수의 사이트에 글 올리기도 하는데, 위 글은 당시 이의제기 기간에 올린 것이 아닙니다.

[힉스]

평가원 측에서 아마도 이 사이트와 제가 자주 글 올리는 또 다른 사이트를 모니터링하고 있을 겁니다. 이 사이트에서 지적하는 내용들을 평가원 시험뿐만이 아니라 연계교재에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이트가 윤리교육과의 학문적 발전의 성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힉스]

아울러, 조만간 평가원 게시판에 이의제기 기간에 이의제기하지 않은 문항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올릴 예정인데, 이 사이트 모니터링하는 평가원 관계자는 미리 알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현돌]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에 오르비 등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오르비 강사 분을 비롯한 어떤 분도 선생님의 이의제기에 반론을 못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그 이후로 약간의 관심을 갖고 시민 불복종을 공부하면서 선생님의 이의제기에 반론이 될 만한 내용을 보지 못 했습니다. (물론 저는 공부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요.)

평가원 게시판에 올리시는 이의제기 글을 이 카페에도 올려주시면 저를 포함한 다른 선생님들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평가원이 학문적으로 검증되었으며, 교육과정에 근거한 문제를 출제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충]

힉스님...위 본문에서 써 주신 "원문에서 소로는 ‘만일 불의가 정부에게 필요불가결한 마찰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남에게 불의한 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 법을 어겨라’라고 합니다."는 "시민불복종" 몇 쪽에 나오는 내용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