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읍 천동리의 훈장선생님 김익균(김삿갓의 子)의 족보로 보는 이야기
후세백작 2018.04.2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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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한 장의 사진은 안동김씨 족보의 일부분으로 휴암공파 24세손 난고 김병연(별호-김삿갓)과 子 익균의 족보로
보는 이야기이다.
김병연은 안동김씨 순조 丁酉년에(1807년) 출생하여 癸亥년(1863)에 사망하였다.
김병연의 子 익균은 庚寅년(1830년) 생으로 甲申년(1884)년 사망하였다.
익균의 부인은 반남 박씨로 丁卯생(1839)이며,,癸酉년(1873)에 사망하였다.
위 족보에 의거하여 족보에 기록된 샘몰연대에 의거하여 역사의 진,위를 밝혀본다.
김병연(김삿갓)은 김안근의 둘째 아들로 위로 병호 형이 있으며 자식으로는 학균, 익균을 두고있다.
김삿갓은 22세에 방랑을 시작하여 형의 사망소식을 접하며 집으로 돌아와 24세떄 익균을 낳았으며 익균의 형인 학균은
병호형에세 양자를 보내 익균이 후일 김삿갓 집안에 가장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하, 난고 김병연의 이름은 통칭 정감있는 김삿갓으로 칭한다)
또한 어느 글에 의하면 익균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사망시에 첫째 택진은 나이 스물, 둘째 영진은 16세라는 한다.
여기서 위 호적도표를 세밀히 보면 김삿갓이 병호 형이 죽었다는 소문에 1차 방랑에서 돌아와 24세에 둘째 익균을
낳고 첫째인 학균은 병호 형에게 양자를 보냈다.
위 3인이 호적상 생몰연대를 계산해보면 김삿갓의 사망시(1863) 그의 아들 익균은 32세가 되며 익균은 1884년 사망한다.
그리고, 익균이 부인 반남 박씨는 익균보다 아홉살 연하로 25세때 택진을 낳고 29세에 둘째인 영진을 낳았으며 34세에
일찍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이 사망 3년후 화순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이장하였다 하면 이는 익균이 35세때의
일이되며, 또한 장남 택진이 스무살에 부친 익균이 사망하였기에 익균이 첫 아들을 보았슬때의 나이는 34세로 최소한
33세 이전에 익균은 결혼을 한것으로 볼 수있다. 즉 익균이 결혼후 아들을 보고나서 화순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익균은 언제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첫째 아들 택진을 보았슬때 그의 부인은 25세이니, 아무리 일찍
결혼하였다 가상하여도 익균은 늦장가를 간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와석리 골짜기 속에 숨어살았기에 이곳으로 앞,뒤가 막힌 산꼴짝에 시집올 여자는 없었던 것일까?? 또한 부친의
소식을 모르는데 이곳을 떠서 이사한다면 영 이별이 될것이었슬까?? 차일 피일 기다리다 혼기가 늦어진것은 아닐까??
그가 언제부터인지 결혼후엔 평창 천동리에 서당에 훈장도 하면서 살았는데 이곳일때 마지리, 천동리등은 곡산지씨의
집성촌을 이루는데...
곡산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형행될때 김삿갓 형제들은 노복 김성수를 따라 피신하여 서당도 다니던 곳으로 아마,
곡산지씨네 집성촌인 평창의 이곳과 연이 닿아 중매가 되어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와석리 골짜기에 홀로 살면서 사회로 전환의 돌파구란 연줄이 닿아 중매도 서는등 도움을 주어야 손 쉬운 일이며
여기에 평창 천동리까지 오기란 무엇인가 남다른 인연이 있었어야 하는 것도 아닐까 의문해본다.
다만 알 수 있는것은 김삿갓 묘를 이곳으로 이장당시 익균은 친구들에게 나는 원을 풀었으니 이제 나는 죽어서도라도
아버님 아래에 묻힐것이다라는 소원같은 농담을 하였기에 막상 그가 죽게되자 자식들은 어리고 친구분들이 아버님
곁으로 가라고 김삿갓 묘 아래에 쓴 점이고 또한 묘의 봉분의 형태도 동일한 점으로 볼때 묘의 양태도 같은 솜씨란
점이다.
이렇게 보면 익균은 부친 김삿갓 묘를 이장할때엔 이미 천동리에 막역한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이때에는
그에게는 첫째 아들의 나이를 미루어보면 세살이었기에 이미 최소한 4년전엔 결혼상태라는 점이다.
아마 익균이 와석리 골짜기에서 결혼을 위해 이사 나왔다면,,,그 시기는 이러한 추정 전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현 영월의 김삿갓 묘는 후손들이 인정한 묘가 아니라 당시 영월문화원장 박영국 옹이 학계에 의뢰하여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학계가 인정해준 묘라하며 어느 학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관학회는 아닌것으로
사료된다.
김삿갓 역사의 조명은 정대구의 박사논문에서부터 시작되고, 와석리에 숨어살던 생가가 밝혀지자, 당시 영월은 정계에
정치인이 있었으며 이에 고무된 영월인들은 우리도 무엇하나 해보자는 열의에 김삿갓 묘역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이후, 영월의 김삿갓 축제시엔 김삿갓 후손분들과 안동 김씨 각 종중에서 모두 참석하여 잔을 올리고 절을 드렸는데
근자에 이르러 문중에서 평창읍 천동리의 하 도마치 산속에 위치한 익균의 묘와 그 5m위에 똑같은 형태의 김삿갓묘
(추정분)을 여섯번이나 제를 지니며 다녀갔다 한다.
인터넷상에 아느 글에 의하면 직계 종손분들은 평창을 다녀간 후 영월을 안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한다. 이 부분에 들은
이야기로 그 이유는 가늠할 수 있지만 가족사 관계라 게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인터넷의 그 글에 의하면 방계
종손님들만 영월에 참석하고 있는 형편이라 한다.
여기서 보면 김삿갓은 죽어서도 깊은 산속에 숨어 운둔과 얼마나 조심하였으면 후손들도 선친 김삿갓의 묘를 몰랐다가
근자에 들어 평창 천동리를 다녀가며 선대의 묘를 다시 찾은듯 합니다.
이 부분에서 후손분들은 지금 본인의 김삿갓의 의심점을 서술하기 이전에 천동리를 찾아 동네분들과도 교우하며 여섯번,
3년전쯤에 도미중인 직계 종손님들도 참석하셨다 한다.
*의심점은 아래에 추가 합니다
천동리 주민들은 지금도 익균의 훈장터와 그가 살았던 생가의 위치들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하 도마치
산속에 익균의 묘를 찾아보고 그 바로 위에 묘를 보면 150년과 130년이 지난 묘를 볼 수 있으며 두기의 묘는 동일한
형태로 곡장이 없이 제절은 너른 동일한 형태의 묘를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도 마을 주민 지*한씨나 이*영님이 아버님이
벌초하시던 그대로 대를 물려서 근근히 벌초를 하고 있슴을 전해 들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의 하나는 익균은 화순서 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오기전에 이미 택진을 낳고, 그러면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이곳이 평창 천동리인가 영월 와석리인가하는 시점의 문제는 불명확하지만,,,아마도 익균은 결혼 전, 후로하여 와석리를
떠난듯하다.
김삿갓의 어느 기록서에서 보면 익균은 동네 친구들과 도돈(진바리쯤)의 선술집에서 술을 거나히 먹고 응(鷹)고개를
넘어 천동리로 가기엔 섶다리를 건너는데 익균이 술이 과하게 취해 섶다리에서 미끄러저 물에 빠졌는데 친구분들도
술에취해 건지기 힘이들자 동네 장정들을 부르러 갔다와보니 익균은 얼어 죽었다 한다.
당시 익균의 친구분들은 지*조 옹으로 지금 천동리에 거주하는 지*한씨의 조부님이나 그 친구분들의 이야기일지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몰라도 의리와 인연으로 지금까지 천동리 거주의 지*한씨나 이*영씨는 하도마치의
산속에 위치하는 익균의 묘와 그 5m정도에 위에 위치한 김삿갓묘(추정분)를 지금까지 잊지않고 벌초를 다닌다 한다.
*김익균은 천동리에 살았으며 이 동네분들에 의하면 천동리 하도마치의 산속에 묘가 익균의 묘라고 한다..
그리고, 익균은 아버지 김삿갓의 시신을 모시고 와서 이곳에 묘를 쓰면서 친구분들에게 나는 이제 할일을 다 했으니
내가 죽으면 아버지 밑에 산소를 쓰겠다고 아마도 농담반의 의사를 이야기 하였다 한다.
그래서 막상 익균이 사망하자 동네 친구분들은 그래, 아버님 밑으로 가라고 그 아래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 이야기를 가진 두 기의 묘는 이제 한줌의 봉분으로 얼추 그냥 지나치기 쉬울 묘처럼보이지만,,
이 두 기의 묘는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산 줄기의 혈등의 풍수사상은 무시되어 있으며 곡장은 없고 제절은
둥그렇게 좀 넓은듯 하며 비석도 없다.
제절의 축대는 김삿갓의 묘는 1단의 주병 잡석으로 올렸으며 익균의 묘는 조금 경사가 더한듯 3단의 잡석 단을 올려
쌓았다. 그래서 이 두기의 묘를 보는순간 쌍둥이처럼 한 사람이 만든것같은 느낌이 바로 전달된다.
이러한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이곳은 김삿갓 묘임에 확신은 가지만, 또한 종손분들도 선친의 묘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가
이곳을 와 보고서 알게 되었는듯 이제 종손분들은 영월은 가지 않겠다는 인테넷에 제 3자의 글도 있지만(방계 종친회장)
본인으로서는 이제 본 묘의 정확성의 인정을 기하기 위해 추정이란 임의의 단서를 붙이는 것이다.
(물론 집안 묘에 3자가 왈가부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치만,,)
익균은 원래 김병연(김삿갓)의 둘째 아들인데 첫째 학균은 병연의 형 병호에게 양자가 되고 익균이 김병연의 집안의
대를 잇게된다. 또한 다음 학렬에서도 익균의 첫째 아들 택진은 학균에게 양자로 되었으며 둘째인 영진이 학균의 대를
잇게되었다.
이렇게 양대에 걸쳐 양자를 들였기에 이해가 좀 어렵다 할 수 있다.
모두들 단명을 하여 무고가 되어 양자를 들였는데, 이런 경우에는 족보상의 형식적 양자들이 대부분이며 그 특징은
큰 할머니를 모시게 된다.
본인의 집안에도 이와 비슷한 양대에 걸친 양자 입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장자가 아니라 차자의 양자이다.
그래서 본인은 초교시절 작은집엘 갔더니 작은 할머니가 계신다.,,, 본인은 논리적 사고형의 성격인지는 몰라도 다음날
집에 와서 할머니께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한 분이라야 원칙일텐데 일부다처제의 작은 할머니인가 의심끝에 ,,,왜 작은 집에는 작은 할머니가 계신가하고,,,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양대에 걸친 단명으로 대를 이어 양자를 받을경우 생기는 현상의 하나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양자론에서 양자를 들일 아들이 없는 경우는 "외손봉사"라는 현상으로 그 대표적인 예가 최응헌의
오죽헌 이야기이다.
최응헌은 아들이 없자 사위 이사온이 오죽헌에 거처하며가.그 다음대에도 아들이 없고 사위 신명화 공이 사화를 피해서
느즈막히 오죽헌엘,,
신공은 서울생으로 나이 마흔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사화가 꼬리를 물기에 멀리 강릉 처가로 낙향하였던 것이고 이에
다섯 딸중에 둘째 딸인 신 사임당으로 하여금 아들잡이로 구사하였던 것이다,
신공은 사망 6개월전 서울로 올라와 사망을 하였고, 신사임당은 서울서 3년상을 치르고 봉평 백옥포리에 새 가정을
차린 것이지..신사임당으 오죽헌이 고향도 아니고 갈릉의 욕심에 너무나 굴절된 픽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율곡 이이의 고향은 상실되 버린 것이다.
가령, 율곡선생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오죽헌이라 한다.
무식한들이지,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가이다. 신사임당 어머니 이씨는 이사온의 딸로 신사임당 외조부 이사온은
오죽헌의 원래 주인 최응헌의 사위로 최응헌이 아들이 없자 이사온이 데릴사위같은 형태로 외손봉사를 취한 것이다.
결혼초 아버님의 사망에 오죽헌에서 3년 상을 치렀다는 새빨간 거짓말의 오류들,,
신사임당은 아버지의 고향 서울에서 아버지 신공의 3년상을 치르고 평창의 백옥포리에 내려와 신혼집을 차렸다.
그 이유는 신 사임당이 결혼할때 장인 신공은 사위 이원수 공에게 신 사임당은 고명딸 같기도 하고 가르칠게 많으니
멀리까지 시집을 못 보내겠네 하며 약속한점으로 미루어 볼때 아마도 이 공이 후일 종 5품의 판운수운(한강 수계를
이용하여 배로 조세미를 공출하는)의 세무직 공무원으로서 각 고을에 조세 책정의 잦은 출장과 가을철에 수확 후
세금을 거두어 마포나루까지 배로 실어 나르는 업무후 긴 겨울철이면 하직이란 점을 신 공은 간파한듯 하다.
그리하여 신 사임당의 살림집은 명주군 봉평의 백옥포리에 강릉최씨 문중의 땅을 빌어 집을 마련하고 신 사임당은
아버님 상을 치르고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다.
신사임당은 당시 연고도 없는 봉평에서 신접살림을 차렸슬까??
여기에 장인 신명화공이 멀리까지 시집을 못 보내겠다는 의도가 깔린듯하고 당시 백옥포리는 강릉이므로 서울에
가장 가까운 강릉땅 끝에 집을 마련해 준듯 하다.
율곡은 오죽헌 외가에서 출생하였지만신 사임당이 백옥포리 생활 16년중 10년차에 율곡을 낳았으며 16년째에
덕수이씨 문중을 관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 여기에 서울 집은 오죽헌에 계신 신사임당 어머니 이씨가
세째 외손주 권처균에겐 벌초를 위해 오죽헌을 넘겨 주었고 둘째딸의 외손주인 율곡에게 제사지낼 제수비용으로
서울의 집 한채 있는 것을 율곡에게 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이제 오죽헌 시대가 끝나면 신사임당도 백옥포리에서 서울로 이사갈 채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배려가 담긴듯 하다.
그러므로, 율곡은 오죽헌에서 출생하였지만 오죽헌은 율곡선생 어머니 신사임당의 본가도 아닌 외가이고 율곡이
요즘처럼 호적기재에 율곡의 고향을 오죽헌으로 기재할 것인가?? 요즘처럼 주민등록이 있다면 율곡의 기록은 당시로는
명주군 봉평의 백옥포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강릉에서 율곡을 너무 자기네편으로 미화하니 평창은 거기에 끌려서
판관대 비석의 기록은 음 이월에 이곳에서 만나 잉태하였다는.. 당시핸펀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만났는지..
또한 이를 날이 저물어 대화 장터의 어떤 주모의 같이 자자는등 출생지란 주장은 없고 해괴한 잡담까지 곁들이는..
그게 미담인가?? 웃겨도 웃겨도 참으로 얼빠진듯,,,
세계역사에 잉태지라는 희귀한 이야기는 이곳밖에 없다.
당시 9선 장원급제로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율곡의 고향 백옥포리는 강릉땅이라 그의 고향은 강릉이라 불렀다면 그것은
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04년 행정개편시 이곳이 평창군으로 이전되면 그의 고향은 평창이란 점이다.
평창인들이 이 점에서 역사 취급에 무력한점을 드러내고 있다.율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참으로 우서운건 위의
이러한 연유에서 대 학자의 일대기 역사에서 고향은 상실되어 있다.
오죽헌의 이야기가 부풀려졌으면 평창은 바른 역사로 대응했다면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지 않았었다.평창사람들의
주체성이냐곤,,,향토사 연구엔 자리가 무슨 필요가 있던가??
봉평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출생지 작업에 열을 올리지만,그러한 무리수보다 오히려 더 큰 역사의 줄기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어느 글에서 백옥포리 국립 청소년 수련원이 건설될때 현장으로 가던 평창군청 문화과 3석의 친구인 서주사 왈
수련원 명칭이 고민이라는데 그때 "율곡수련원"이라 하게..하며 신 사임당 수련원이 주문진에 있는 연유도 이야기 하였다.
만약 그때 국립 청소년 수련원이란 명칭이 율곡수련원이하 한다면 한동안 웃음거리가 되었겠지만 먼 후일인 지금은
이곳이 율곡의 고향이라고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이러기에 역사는 바로 서술되어야지 한 문화역사에 그의 출생지 왜곡이나 진짜가 아닌 묘가 진짜로 둔갑한다면..
역사적 파장은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지 누구도 모른다.
출생지를 아닌 곳을 출생지라 우겨서 문화적으로 이용한다면,, 역사의 증명에 반전되는 곳을 출생지가라 단정할 경우
그곳이 진짜가 아니라면 입장료는 사기극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역사는 그 진위의 판가름을 정확히 해야 한다.
본인은 이러한 의미에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 의해 해석해보는 우리의 역사를 쓰다가 우선 역사의 객관적
사실부터 쉽게 쓰는 것이다.
E,H,카는 역사는 오늘의 주관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어느 사가는 오늘에 의해서 과거의 역사는 변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요즘 4,3사태를 보는 다른 시각에 의해 과거 역사에 다른 해석같은 역사적 관점의 문제이지 역사적
객체 사실의 왜곡이나 굴절이 아니다.
그러기에 역사적 사실은 정확해야 하며 이로서 오늘의 역사를 보는 시갓의 관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창 향토사에서 역사적 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진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음편에서 E,H,카의 물음에
답 형식으로 서술 하겠습니다.
글 전반부가 두개로 나누어진 양상이지만 이 모두 평창역사이고 이 모두들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이햏고
액티브를 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록 본인의 주관이 될지 몰라도 다음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이로서 위의 김익균의 족보에 의한 생몰연대 추적으로 우리는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천동리의 이*영씨의 어느 댓글에 천동리에 김삿갓이 다녀간 기록이 있다 하는데 이 부분은
지금으로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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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영월 와석리에 김삿갓의 생가가 있고 그 아래 영춘으로가는 도로의 삼거리에 김삿갓의 묘가 있다.
본인으로서는 여기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기술 합니다.
평창의 어느 역사연구가님은 김삿갓의 전기를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김삿갓 글에서
김삿갓이 방랑을 한 것은 조부의 과실에 의해 자손 대대로 대 역죄인이 되어 무엇하나 할 수 없는..
그로 인해 그의 능력을 나타낼 수도 없고 울분에 차서 방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합니다.
물론 그러하겠지만 본인의 생각에서 그러면 그는 가평, 평창으로 이사를 전전했으며 아무도 없는,
지금도 차도를 잘 이용하지도 못하는 영월 와석리 산간속에 숨어든 이유는 그의 방랑이 전자이며
이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기에 위의 울분에 차서 방랑을 하는 이유는 그에겐 일부분의 부분적 집합일뿐, 인적이 없는
산속으로 숨어사는 이유에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그가 산속으로 숨어드는 이유는 그의 그런 대역죄인이라는 죄스런 객체적 사실리 아니라 당 시대.
구한말의 역사속에 사회상속에서 대역죄인에 대한 취급의 문제때문인 것입니다. 일전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이란 글 속에 당시의 사회상을 일부 그린바 있는데..
양반의,,, 이름만 거명하여도 알 수 있는 유명인사의 몸에서 똥 냄새가 나고, 구한말에는 장티푸스,
콜레라등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회는 양대 전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조선 중기 이후
사회의 몰락속에.. 효종의 북벌계획에 10만 양병론은 가뭄하나도 못이기고 스러져가는 사회에...
소헌세자의 청나라 문물 도입은 묵사발되고 당시에 봉림은 쇄국은 아니지만 나홀로 정의감에
사로잡히는 정치이후 더 나아지는, 발전되는 사회가 아니라 세도정치로 붕괴되는 사회속에...
단적인 예를 하나 본다면 중기에 네덜란드 상인 하멜의표류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표류기는 기실 잘 알고있지못하다
.
33인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제주목사는 그들을 잘 보살피며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데 한양으로
올려 보내라 한다. 이래서 10여명이 죽었고 그들은 노예로서 임금 한푼 받지못하고 병사로 근무하다.
청나라 사신들이 눈치챌까봐 지방으로 보내졌으며 여기서 그들은 탈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은 월남에 표류한적이 잇는데 월남인들은 국가도 역사도 없는 나라에서도 따뜻히 대해주어
돌려보냈는데..우리 조정은 하멜등 생존자 중 살아남은 20여명도 노예취급을 하였다.
하멜이 본국으로 돌아가 그간의 세월을 건조체 형식으로 썼기에 다행이지 그 내용들까지 적었으면
당시 유럽에서 조선은 야만국가로 낙인찍힐뻔 하였다.
이렇듯이 조선 후기사회는 성리학이고 사단 칠정론이고 아무 소용도 없이 도덕적 모랄은 땅에
떨어진 사회로 자기에 잘못은 모르고 남만 탓하는 참으로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였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성격에 조선 후기사회는 비페해지자 세금은 양반이 아니라 하민들, 천민들에게
이중과세가 물려지는등 그 열악성은 도를 넘어서계 되며 양반은 사회적 우위에서 노비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병약한 사회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어느 역사가도 이러한 자성의 소리한번 하지 않은 조선 후기에 사회상에서 김삿갓은 대역죄인의
후손으로 양반에게 들키면 양반의 생각이 곧 법이라.. 어떠한 변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정선 아리랑이 이러한 사회에서도 민초(민중- 자인적 삶을 살지못하는 부류)들
속에서 유통되고 게승되었던가??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길래 고종의 아리랑 장려책에서 힘을
얻고 탄력을 받아 부활하였다.
본인이 바라보는 역사속의 아리랑 전반에 대해서도 아리랑 그 자체만이 아니라 당 사회의 여건과
역사속에서 점철되어야 한다.
그렇듯이 김삿갓 역사도 당 시대의 사회적 배경의 역사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저변에서부터 역사를 파악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가들은 드문것 같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정선아리랑의 시원은 그 증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란 점이다.
이렇게 김삿갓이 산속으로 숨어들은것은 역사속에 대역죄인이란 의식이 표면화 된 것이 아니라,
즉 역사적 사건을 탄하고 숨어든 것이 아니라 당 사회의 사람들,,, 양반들에게 붙잡히면 평생 종신형의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을지 모른다는 사람이 무서워 산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그러하고도 김삿갓이 문을 박차고 방랑으로 나간것은, 산속에서도 관연 안전치 못한것은 그의
머리속에 항상 남아있는 사람들에대한 두려움의 피해망상증이지 자기의 능력을 과시 못하는 울분에서
방랑을 시작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 못하는 울분에서 이사를 전전긍긍하면서 인적이 없는 산속으로 숨어든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산속에서 자란 익균은 후일 부친 김삿의 시신을 전라도 화순에서 수습하여 와석리 집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영월서 영춘으로 넘는 도로상에 삼거리에 묘를 쓰고 이게 김삿갓묘라고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것인가??
익균은 대역죄인으로 역사가 무서운게 아니라 당 사회에 양반등의 사람이 무서워 숨어 살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노루목에다 묘를 쓰고 나 여기잇소 하고 알리자는 정표를 만들었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무서워서 숨어살면서 그 입구에 여기가 김삿갓묘이고 후손은 여기있소
하며 알리자는 것인가..
그럴라면 그는 왜 숨어살았슬까??
이 점이 괴리이며 모순이란 점에서 비 론리적으로 타당성이 결여된다는 지적이다.
.
김삿갓은 대역죄인의 후손으로 노비로 끌려가는 것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익균의
둘째 아들 영진은 16새애 아버지가 타계하시자 고성 건봉사에 입적하여 4년 수도후 서울 근교 절로
옮겨갔는데 이곳에서 궁중 나인이 김삿갓의 후손이란 것을 알고 고종황제에게 알현시킨다.
김삿갓 이야기를 좋아하던 고종은 그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대역죄인이란 족쇄를 풀어 해금시켜주고
곧바로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
이로서 김삿갓 가문의 영어의 몸은 이제 완전히 벗어 버리고 약 65년만에 그는 죽어서라도 자유의
해금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너무나 과민화게 숨어 세상 사람들을 멀리한 탓일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아직 몰라보고 있는 것일까??
5분 드라마 "북한방랑기"로 세상사람들과 친숙하게된 김삿갓.
그는 대 역죄인의 후손이란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에게 짜릿하고 통쾌하고
속 시원한 웃음을 선사한 방랑시인으로서 지금도 세상사람들의 마음속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한 김삿갓은 이젠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아직도 그는 아들 익균의 손을 잡고 평창의 남쪽 삼방산
자락에 천동리 하 도마치의 이름도 없는 산속에 숨어 고요히 잠들고 있다.
민초를 괴롭히는 양반들을 멀리하려고 숨어 살았지만 너무나 운둔한 결과인지 아직도 그는 손자의 손에
의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그가 계신 곳을 알았다면 그를 사랑하는 만 백성들은 꽃 한송이라도 들고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마치 산속에 잠들어 있는 김삿갓 부자는 흙과 푹과 나무, 그리고 돌 이외엔 아무것도 치장한게 없다.
지난해 언젠가 이곳을 찾아오시는 시인님들이 많아진다기에 길도 없는 산 자락에 길의 안내 표시로
어느 시인님이 유도 표시로 검정 리본 열개 메달은것뿐, 정말 그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없다.
그도 이러한 사실을 알며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줄때까지 추정이란 서리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는
참으로 죽어서도 恨많은 김삿갓.
그는 양반을 질타하고 만 백성의 마음을 편케해주었지만 정작 스스로는 아직 긴 겨울속에 동면해있다.
그대여!
이제라도 세상을 덮어버린 삿갓을 벗으시고
맑은 하늘의 햇살을 받으며
그가 사랑하는 시민들 곁으로 다가오소서 !
이름모른 꽃 화원은 못되더라도
언제나 그가 사랑하는 만 백성의 마음속으로 달려 왔으면 좋켔다.
뭇 사람들은 모두들 김삿갓 묘소를 잘 다녀왔고 재미있었노라고 인터넷에 기록들 하지만 본인은 유독
그것엔 큰 괴리가 있다고 지적함에 본인이 틀렸슬까?? 아니면 뭇 사람들이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해
그러는가 하는 점이 본인의 숙제로 남는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