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사 모습이다.
낙안읍성 입구
금전산 금둔사(金錢山 金芚寺) / 전통사찰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금둔사는 금전산(679m) 서쪽에 있다고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낙안조(樂安條)에 기록이 있다.
문화재인 금둔사지 석불비상과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보면 창건 시기는 통일신라 때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은 금둔사 지층 120∼150㎝에서 건물지 지층을 발견, 발굴하여 4동의 건물지를 확인했다.
초석·기단·연화문 수막새·주름무늬병 등의 유물도 발굴했다. 이런 유물을 토대로 금둔사는 9세기쯤 창건한 사찰임을 확인했다.
1979년 7월, 도굴되어 흩어져 있던 삼층석탑을 복원,
1984년부터 지허 선사가 대웅전과 일주문, 선원, 약사전, 요사채, 홍교 등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초창주 담혜화상(曇惠和尙)
554년, 백제(百濟) 위덕왕이 담혜화상과 승려 여덟 명을 일본에 보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10여 명의 승려를 양성시킴.
담혜화상은 귀국하여, 583년(위덕왕 30)에 금둔사를 창건하였다.
제2창주 의상대사(義湘大師)
통일신라 신문왕 2년(682)에 금둔사를 중창하고 산내에 금강암(金剛庵)을 짓고 주석하였다.
제3창주 철감국사(澈鑒國師)와 징효대사(澄曉大師)
철감국사는 당나라의 남전보원 선사의 법을 받고 825년에 돌아와 신라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철감국사는 제자 징효대사와 금둔사를 중창함과 동시에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을 조성, 동림선원을 세워 육조의 선풍을 진작함.
제4창주 고봉화상(高峰和尙)
고려말인 1385년에 금둔사를 중창한 뒤 산내에 수정암(水晶庵)을 짓고 머물렀다. 뒤에 송광사로 가서 16번째 국사가 되었다.
제5창주 지허화상(指墟和尙)
선암사 칠전선원 수행하다가 이곳으로 와 밭으로 변한 절을 1983년부터 복원불사를 하였다.
(금둔사 홈페이지 연혁에서 글을 가지고 와 정리함)
담혜를 기록한 자료가 거의 없다.
554년, 신라와 전쟁으로 성왕이 사망하고 즉위하였다. 패전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일본으로 여러 승려를 보냈다는 건....
화순 쌍봉사에 철감(도윤, ~868)선사탑(국보)이 있다.
영월 흥녕선원(현재 법흥사)에서 징효국사가 사자산문을 개설, 888년 스승인 철감선사탑을 참배하기 위해 내려 옴.
내려 오는 길에 동림사(桐林寺, 현재 금둔사)에 머물렀다.
(인터넷, 담혜/철감/징효 등 찾아보기 함)
금둔사는 매화가 필 때 여러 밴드에서 자주 접한다.
오전 8시 30분, 금둔사에 볕이 들지 않았다. 오전 11시쯤 되어야 제대로 볕이 들겠다.
주차, ㄱ자 기와집은 다원이고, 그 뒤는 금둔사 범종루다.
좌우 돌장승 같은 것, 어제 선암사에서 같은 모양을 봤다. 금둔사가 태고종임을 알겠다.
일주문
홍교(무지개다리)
대웅전
범종루
금둔사지 석조불비상(金芚寺址 石造佛碑像) / 보물
높이 3미터, 불상 높이 2.1미터. 통일신라 때 만듦.(어떤 자료엔 고려시대로 표기)
비석처럼 만들고 불상을 새긴 것은 처음 본다.
뒤는 찍기가 어렵다. 위에 글자가 있으나 마모가 심해 형체를 볼 수 없다. 아래는 코끼리 모양이다.
금둔사지 삼층석탑(金芚寺址三層石塔) / 보물
높이 3.92m. 통일신라 때 만든 석탑.
받침돌 네 면에 팔부신중상이 새겨져 있으며 1층 몸돌 앞뒤에 문비(門扉)가 있다. 좌우엔 공양상이 있다. 상륜부는 남은 게 없다.
1층 몸돌에 공양보살상이 있는 탑은 처음인 것 같다. 불비상과 삼층석탑, 조합이 맞다.
좌우 공양상 모습이 다르다. 관음보살상 같기도 하다.
앞부분 문비
공양보살상, 공양보살상이 석탑 몸돌에 새겨진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뒤 문비
낙안면에서 별량면으로 가는 고갯길에서 본 낙안, 사진 오른편 바위가 보이는 산이 금전산이다.
개운산 동화사(開雲山桐華寺) / 전통사찰
- 전남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전해지는 건 통일신라 말에 선각국사 도선이 동화사를 지었다고 한다.
기록(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조성기, 이두변의 동화사 중창기 현판)엔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의천이 낙안지역에 왔을 때 동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와 산이름을 개운산이라 하였다.
또 그 지형이 오동봉서형(梧桐鳳棲形)이라 절이름을 동화사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절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고, 승려 법홍(도갑사, 보림사, 천관사 등에서 수행함)이 동화사로 와 중창(1650~1661)
(동화사 입구 안내문 내용을 정리함)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한자가 같다.
절을 구경하다가 주지의 권유로 차를 한잔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부끄러워진다. 내가 기억하는 게 잘못이 많다는 것이다.
대구 동화사나 순천 동화사 창건 설화가 비슷하다고 하였다. 거기에 곡성 태안사까지.
대구 동화사는 한겨울에 오동나무꽃이 피어서 동화사, 순천 동화사는 오동봉서형이라 동화사다.
태안사를 안고 있는 산을 봉서산이라 했는데 봉두산이다.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군자와 봉황, 이것은 도교다. 불교가 중국에 와서 도교와 섞인 것이다. 습합이라 한다. 누가 누구를 습합했는지 모른다.
동화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앉은 자리가 매우 편안하게 보인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볕이 들기에 따뜻한 느낌도 있다.
외진 곳이라 절은 오랜 세월 방치된 것 같다. 세월을 말하여주는 건 삼층석탑과 대웅전, 부도(승탑)다.
다른 전각은 아직 이끼가 끼거나 벌레가 먹지 않았다.
구례 천은사에서 소임을 맡았던 주지 승문께서 작년에 동화사로 왔고, 불사를 통하여 절을 부흥시키려고 애를 쓰고 계신다.
차를 대접 받고, 점심 공양까지 호사를 누렸다. 점심 후 나한전과 부도를 보고 나왔다.
유감, ~의해서/~의해, 이런 표현은 우리글에서 어색하다. 영어나 일어 번역투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안 써야 한다.
<이두변李斗采>이라고 한자를 병기하였다. 弁/변을 采/채로 잘못 썼을까?
어느 블러그. 2023년 11월 17일에 동화사를 방문하고 글을 썼다. 그 글엔 지금 종합 안내도가 아닌 안내문이 있다.
그 안내문에는 동화사중창기를 지역 선비인 '이두실'이 썼다고 나온다. 이두실 한자 표기는 없다. 悉/실이 변과 채와 비슷하다.
도선국사 개산(구전), 의천국사 개창(구전), 임진왜란(1592년, 파괴), 정유재란(폐허)
선조 34년(1601) 신총대사가 대웅전 중건, 영각대사가 불상 10구 봉안
1661년(현종 2) 법홍대사가 향로전 중건, 1662년 희안대사가 호선루 중건(낙안 태수가 지원)
1666년 삼신대사가 첨성각 복원, 의침대사가 범종 조성
1696년 법홍대사명으로 계환대사가 대웅전, 선승당, 요사, 정문누각 등 건물 60여 동 복원
침굉 현변대사, 환성 지안선사 이름도 이 안내문에 나온다.
예전 안내문과 지금 안내문은 차이가 많다. 전문가가 아닌 아닌 나로서는 무엇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안내문을 지은 담당 공무원은 주의를 세심하게 기우려야 한다.이 안내문 내용은 내 마음엔 안 든다.
봉황루, 일주문이며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이다.
사천왕은 그림으로.
입구 문엔 금강역사를.
종무소
범종루
요사채
동화사 삼층석탑 / 보물
고려 초기에 만든 석탑이지만 신라 석탑을 계승한다.
상륜부 노반, 복발, 양화 보륜, 보개 등 보기 드물과 상륜부가 원형을 갖추고 있다.
1층 몸돌(탑신석) 상부에 청자 사리함과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 4과, 금동제 삼층석탑(높이 4.5cm), 녹색 사리병 2개, 옥석제 염주 33알. 자수정 1개, 진주 2알 등이 있었다.
1989년 해체, 복원하였다.
상륜부는 정교한 조각품이 화려하나 전체 균형감은 다소 미흡하다. 야윈 모습이지만 날씬하다.
대웅전 / 전남 유형문화재
1657년(효종 8) 승려 법홍이 지었고, 1696년 승려 계환이 중수하였을 수 있다. (내 추측)
1657년 대웅전 안에 목조 삼세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이 시기에 대웅전도 지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
1696년 동화사 중수기 현판에 법홍이 계환에게 여러 전각을지으라고 한 것으로 봐 대웅전 이때 중수할 수도 있었다.
동화사 대웅전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한 느낌이다. 주지 승문은 대웅전을 보물로 승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가치는 충분하다.
삼성각
복원, 해체하고 쓸만한 재목은 그대로 써서 지었다.
감로전
글씨가 예술이다.
나한전(응진전)
지장전
대웅전 안
목조 삼세불, 지금은 비지정 문화재이지만 문화재(보물)로 지정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1657년(효종 8) 조성, 대공덕자는 법홍, 증명은 성일, 조각승으로는 계찬, 인계, 영언, 정민, 성윤, 사민, 종협 등 일곱 명.
수미단도 요즘은 문화재로 등록한다고 한다. 동화사 대웅전 수미단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설핏 봤을 때 닫집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닫집이 있다.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명부전(지장전) 안
목조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조성기문엔 승려 성원이 1672년(현종 13) 2월 봄에 화사승 운혜와 승균에게 청하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 이야기, 부도가 다섯 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비지정 문화재로 세 기가 있다.
<왼편/고려 후기, 가운데/고려시대, 오른편/조선 후기>라고 안내문에 적혔다.
내 생각엔 왼편은 고려 전기, 가운데는 조선 후기(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오른편은 조선 전기.
조선시대 부도가 대다수 석종형, 오른편도 석종형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과 받침돌 네 방향 용모양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왼편 부도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 받아야 할 것 같다.
복수초를 여기서 만나다니.....
응진전(나한전)에서 본 동화사
응진전(나한전), 옛 재목을 사용하여 복원한 상태다.
(추가, 송광사 성보박물관 글을 올리다가 안 사실이 있어서 추가한다)
풍암 세찰(1688~1767)은 부휴 선수(임진왜란 때 사명당과 같이 승병을 이끈 분) 6세손.
순천 동화사 철웅에게로 출가, 무용 수연/영해 약탄 문하에서 수행함.
풍암의 제자로 묵암, 응암, 제운, 벽담 등이다.
2024년 3월 8일(금)
낙안읍성..금둔사..동화사..도선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