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세이]흙을 닮아가는 사람들 호미 든 할머니부터 청년 트랙터까지[이미지및 자료 출처 : http://www.ohmynews.com] |
겨우내 버림받았던, 생명 하나 키워내지 못할 듯 척박해 보이기만 하던 땅을 올 봄에도 어김없이 일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딱딱하고 거친 땅만큼이나 두툼하게 군살 박인 손으로 가을에 거둬들일 희망을 뿌리려 논과 밭으로 나선 사람들입니다
괭이와 삽, 그리고 쇠스랑을 들고 화전을 일구듯 한 뼘 한 뼘 땅을 일구어 나갑니다.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만 가을에 거둬들일 희망을 포기할 순 없기에 무념무상의 삼매에 빠진 듯 연거푸 삽질을 하고 괭이질을 합니다.
남들이야 먹거리 투정에 꽃 타령하느라 새싹 잉태할 땅이 보내는 변화의 손짓을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땅을 일구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압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숨을 쉴 수 있게 탯줄을 걷어주어야 하듯 땅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한 꺼풀 파줘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지금이 가을에 거둬들일 결실의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일구고 골라야 할 때인 걸 말입니다.
▲ 충북 청원 괭이마저 들기엔 너무 연로한 할머니는 호미를 들고 밭엘 나오셨습니다. 백발머리, 거칠어진 손은 할머니가 평생동안 땅에 쏟은 땀과 청춘을 바꾼 삶에 흔적입니다
가을에 거둬들일 수확에 눈이 멀어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의 부모가 피붙이와도 같은 밭으로 만들어낸 땅이기에 혈육의 정 같은 그런 뭔가가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조상들이 묻혔고 결국 당신도 돌아갈 땅이기에 버린 듯 외면할 수 없어 오늘도 생명력을 이어주기 위해 골수 같은 땀방울을 촘촘히 흘려줍니다
▲ 전북 남원 이 할머니는 쇠스랑을 들고 밭엘 나오셨습니다. 경운기도 소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직접 쇠스랑으로 일굴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굴과 목덜미는 햇볕에 사정없이 그을리고 배꼽으로 쉬던 숨은 어느덧 목숨이 되어 가랑가랑 숨찬 소리를 토해냅니다. 탯줄로 양분을 공급받고 호흡하다 태어난 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가였을 땐 배꼽으로 숨을 쉬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배꼽으로 쉬던 숨은 가슴으로 쉬어야 했고 결국 늙은이가 된 지금은 목으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불리는 나이쯤이 되면 숨쉬는 소리가 목에서 가르랑거린답니다. 그러기에 '목숨이 끊어진다'는 건 '숨쉬기가 끝났다'는 것이니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 경남 하동 지리산 700고지 멍석 하나정도의 작은 밭도 할아버지에겐 소중한 자산이며 외면할 수 없는 땅입니다. 땅은 거짓말은 안 한답니다. 땀을 주고 눈길을 주면 그만한 대가를 꼭 돌려주는 게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산야로 나가 만나게 되는, 삽이나 괭이를 들고 봄볕에 땅을 일구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로한 할아버지거나 할머니들입니다. 삽이나 괭이를 들 기력조차 없는 할머니들은 호미를 들고 땅을 일굽니다. 그 분들이 하는 호흡소릴 들어보면 '목숨'이 뭔가를 알게 됩니다.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거친 숨소리가 목에서 가르랑거립니다.
세월 따라 변한 인심만큼이나 논밭 일구는 모습도, 도구도 달라졌습니다. 잘 키운 소에 쟁기를 걸어 '이랴~ 어더더'하며 논밭을 일구던 때가 있었습니다. 콩깍지와 쌀겨를 듬뿍 넣어 쑨 여물을 배불리 먹인 소에게 얼기설기 그물처럼 엮어 만든 입멍을 채우고 목덜미에 멍에를 얹습니다
▲ 경남 하동 지리산 할아버지를 거들기 위해 함께 괭이질을 하고 계신 할머니가 흐르는 땀을 씻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목숨을 쉬고 계셨습니다
멍에에 달린 두 줄엔 무거운 쇠 삽날이 고정된, 좀더 구부러진 ㄱ자 형태의 쟁기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잘 훈련된 소는 '어더더' 소리와 줄을 당기거나 늦추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사람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 뼘의 땅도 빠트림 없이 모든 땅을 차곡차곡 갈아엎습니다.
일소를 고를 때는 멍에 자국을 보고 골랐습니다. 손에 박이는 군살처럼 소의 목 언저리에도 군살이 잡히니 그게 바로 멍에 자국입니다. 멍에 자국이 잘 잡혔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잘 한다는 증표입니다.
하루종일 밭갈이를 할 때면 소에게도 참을 줍니다. 음식뜨물에 쌀겨를 듬뿍 넣어 한 양동이 가져다줍니다. 코에서 푸푸 소리가 나도록 힘들게 쟁기를 끌던 소는 단숨에 참으로 가져다 준 뜨물을 먹습니다. 사람이 껌을 씹는 듯 연실 입을 놀려대며 되새김질을 하고는 있었지만 배가 고팠을 겁니다. 젖먹이 새끼가 달린 어미소라면 이때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기도 합니다.
▲ 전북 장수 이 할아버진 이미 일궈진 밭에 삽을 이용해 두둑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봄 배추를 심으실 예정이랍니다
소만 참을 먹는 게 아니라 일꾼도 이때 참을 먹습니다. 요리하기 쉽고 먹기 간단한 삶은 국수와 텁텁한 막걸리가 대부분입니다. 후루룩 마시듯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커다란 양재기사발에 가득 채워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면 등에 붙었던 배가 불뚝 일어나며 허기가 가시고 갈증이 씻깁니다.
쟁기로 하는 밭갈이가 보기엔 그냥 소 뒤에 따라가며 쟁기만 잡아주면 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쟁기가 너무 깊이 들어가면 소가 끌 수 없기에 적당한 깊이가 유지되도록 들어주어야 하고 소의 마음이 되어 소에게 갈 길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지가 되어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믿음을 소에게 주어야 합니다
▲ 충북 진천 비닐을 덮어 만든 두둑에 할머니들이 씨를 넣고있습니다. 넣고 있는 건 더덕씨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건장하고 힘이 세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쟁기질입니다. 옛날에도 시골서 쟁기질을 잘하는 사람은 상(큰)일꾼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60대 후반의 할아버지들 중에는 쟁기질을 할 수 있는 상일꾼이 계십니다. 천하장사도 하지 못할 쟁기질을 할아버지들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농업의 기계화와 함께 등장한 것이 '경운기'입니다. 경운기는 아무래도 동력을 이용하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농기계가 되었습니다. 경운기는 논밭만 가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허리가 휘어라 등짐으로 나르던 지게에 비해 십 수배의 거름이나 농산물을 한꺼번에 옮길 수도 있기 때문에 급속하게 보급되었습니다.
'탈탈탈' 거리며 웬만한 길이면 다 가기 때문에 산과 들 어느 곳이고 길만 있으면 몰고 다녔습니다. 시골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제일 많이 만들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농로가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 부지런한 주인을 만난 소는 이른봄에도 햇풀을 먹는 행운을 얻습니다. 이렇게 먹은 것을 껌 씹듯 되새김으로 소화를 시킬 겁니다
경운기에 이어 등장한 가장 현대적 기계가 '트랙터'입니다. 어른 키 만한 바퀴를 달고 있는 트랙터는 비싸기도 하지만 힘도 셉니다. 바퀴가 작아 경운기가 넘어가지 못하는 논두렁이나 밭둑도 트랙터는 쉽게 넘나들며 일을 합니다.
쟁기로 일구는 흙의 깊이가 10cm쯤 된다면 경운기는 20cm쯤, 트랙터는 30cm쯤 된다고 합니다. 일구는 땅의 깊이가 깊을수록 지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하니 농기계의 현대화와 함께 지력도 향상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밭을 일구는 농기계가 이렇게 발달하였음에도 아직 등골 빼먹는 괭이나 삽질로 땅을 일궈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트랙터는 물론 경운기나 쟁기마저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자투리 땅, 다랑논이나 화전으로 일군 산비탈 밭은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일궈야 하기 때문입니다.
▲ 대전 유성 '이랴~ 어더더' 할아버지와 소가 한 몸이 된 듯합니다. 소를 이용한 쟁기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니 땅들이 남아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골길을 가다보면 버려져도 좋다고 생각될 만한 작고 척박한 땅에도 땀방울을 주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구부정한 허리에 느릿느릿한 동작이지만 쉼 없이 괭이와 삽을 연실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어떤 때는 그 동작이 너무 느려 보기에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느릿느릿한 동작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수십 년 살아오며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가 있습니다. 자칫 일을 서둘다 보면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포기해야 할 만큼 당신이 연로해 있다는 것을 그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둘지 않지만 결코 포기하는 일없이 느릿느릿 목표를 달성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언뜻 생각하면 아지랑이 피어나고 봄볕 가득한 들녘에서 괭이질을 하는 모습은 드라마에 나오는 목가적 농촌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급할 게 없고, 모자랄 것도 없으며 만사가 여유며 평화롭기만 한 그런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봄볕에 땅을 일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은 현실입니다. 그 분들이 흘리는 골수 같은 땀방울만큼이나 진지하며 고단한 삶의 한 순간이 바로 땅을 일구는 모습입니다
▲ 충남 천안 경운기를 이용하여 땅을 일구고 있습니다. 경운기를 이용하면 쟁기로 일굴 때보다 좀더 깊이 일굴 수 있답니다
수십 년을 반복해 돌을 골라내고 땅을 일구며 그렇게 사는 모습이 당신들이 살아온 방식이며 가치일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것조차 애지중지하며 일궈온 그 결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흘린 그 땀들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씨앗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우린 가끔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게 뭐가 있느냐?' 투정도 하고 가슴에 못이 될 실언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며 어머니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말을 고깝게 여기지 않고 당신의 가슴에 담아 버립니다. 그렇게 실수도, 실언도 할 수 있는 게 인생이며 그 실언과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됨됨이를 찾아가길 바랄 뿐 악의적 풍문을 만들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그런 모습에서 우린 자신도 모르게 좀더 성숙한 인생을 배우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당신들도 모르게 흙은 닮은 모양입니다. 피부색이 흙을 닮았고 피부가 흙은 닮아 거칠어졌을 뿐 아니라 모든 걸 주워담아 용서하고 포용하여 새생명으로 키워내는 것도 흙을 닮았습니다.
흙을 모르고 흙을 닮지 않은 사람, 마누라도 팔아먹는다는 투전이나 이데올로기 시대의 완장에 젊은 날을 소진하느라 제대로 된 토속적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해 한낱 늙은이가 되어버린 아주 극소수가 자식 같은 젊은이의 실언이나 실수에서 소시적 완장을 되찾거나 잃어버린 본전을 찾으려 추한 꼴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신이 닮아간 흙처럼 모든 걸 주워담고 새 희망으로 싹틔워 줄 거라 기대됩니다.
▲ 충남 천안 가장 현대적 농기계인 트랙터로 땅을 일구고 있습니다. 트랙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청장년의 젊은이들입니다. 비록 기계로 땅을 일구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때는 우리의 할아버지처럼 흙을 닮아 넉넉한 여유를 우리에게 보여 줄 것입니다
평생을 땅 일구며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문마저 뭉그러진 엄마의 손이 갑작스레 떠오르고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괭이도 삽도 들지 못할 만큼 늙어버린 엄마는 오늘도 분명 호미라도 들고 텃밭엘 다녀오셨을 겁니다.
왠지 엄마가 일군 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파헤친 땅뿐만 아니라 역사란 생각이 듭니다. 변덕스럽고 궁상맞다 흉볼지 모르나 손이라도 잡기 위해 훌쩍 다녀오렵니다. 구릿빛 얼굴에 등걸처럼 거칠고 거무튀튀한 엄마 손잡고 흙 닮은 엄마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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