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형집행 전 5일
자동차가 도착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자동차가 유리문의 곁을
지나쳐 가는 붕 하는 듯한 낮은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유리문을 등에 지고 유령 같은
그림자가 이미 안쪽 현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얼굴만을 뒤로 돌린 채 자신을
태우고 온 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그 여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거야 그렇다는 느낌뿐이지
아무런 확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가정을 갖고 있지 않은 자유스러운 여자
예상은 뜻밖에도 적중하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도가
지나치면 뭐든지 그렇겠지만, 그녀는 너무
미인이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부담감을 주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공평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의 외모는 저렇게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마음은 온통
상처투성이인 것은 아닐까? 머리 색깔은
거무스름하고, 키도 크고 몸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평범한
여자들이 고민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생활은 틀림없이 무미건조할
것이리라!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은 영락없이 따분한 생활에
젖어 있는 여자의 표정이었다.
씁쓰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짝 열려진
유리문 사이로 그녀의 은색 가운이 작은
물결처럼 아래로 향해 흐르듯 가볍게
흔들렸다. 자동차가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롬버드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안녕." 하고 호텔 보이에게
우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분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롬버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에레트
더글러스 양?" 그는 묻는다기보다는
단정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런데요?"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기다리고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갖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존 롬버드라는
사람인데, 스코트 헨더슨의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당신도
알지 못하는데요. 내가 틀린 걸까요?"
마지막의 '틀린 걸까요?'는 단지 예의상
덧붙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주 형무소의 사형수 감방에서
처형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버드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를 쳐다보며
없습니다. 좀 장소가 이상하긴
합니다만......"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에 살고 있어요.
더군다나 지금은 새벽 1시 15분이에요.
그래도 예의는 있는 것 아녜요.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녀는 호텔 아래층 로비를 가로질러
긴의자와 재떨이가 놓여 있는 한쪽
모퉁이로 걸어갔다. 그녀는 롬버드와
마주보고 섰지만 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티샤 상점에서 일하던 매지
페이튼이라는 아가씨한테서 모자를 산 적이
있죠? 50달러를 지불하고서?"
"글쎄요." 그녀는 보이가 로비에 나와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그녀가 날카롭게 내뱉자 보이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로비에서 사라졌다.
"당신은 그 모자를 쓰고 어느 날 밤에
어떤 남자와 극장에 간 적이 있었죠?"
이번에도 그녀는 모호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갔을지도 모르죠. 극장에는 잘
가니까. 그럴 때는 물론 남자와 함께
가지요. 미안하지만, 빨리 요점을 말해
주시겠어요?"
"지금 요점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 남자와 그날 밤에 처음
만났습니다. 당신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도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함께 극장에 갔었습니다."
"당치도 않아요." 하고 그녀는 꽤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기준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로워요.
그렇지만 정식으로 소개받지도 않고 우연히
알게 된 사람과 어울려 다니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그녀는 은색 가운의 옷자락에서 한쪽
발을 내밀며 돌아가려고 했다.
"부탁입니다. 이건 사교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 남자는 사형선고를
받아서 이번 주에 처형됩니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이지 곤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조금 알겠군요.
그럼, 내가 어느 날 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면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아니,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함께 있었다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은 안되겠는데요. 그런 사실이
없었는걸요."
그녀는 빤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롬버드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모자 쪽으로 바꿉시다. 당신은
모자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모자는 다른
사람이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과 똑같은
거였더군요......"
"또 이야기가 엇갈리는군요. 내가 그
모자에 관한 일을 인정하는 것과, 그
남자와 함께 극장에 갔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그
두 가지 문제에는 전혀 관계가 없단
말이에요."
맞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견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발밑의 땅에 희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극장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여자가 나라는
증거라도 있나요?"
"모자가 바로 그 증거이지요." 하고
롬버드가 대답했다. "그날 밤 멘도자라는
여배우가 그 모자의 원품을 쓰고 무대에
나왔었습니다. 그 모자는 그녀가 특별히
주문한 것이었지요. 당신은 그 모조품을
사들였다고 이미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트 헨더슨과 동행한 그 여자는 바로 그
모조품을 쓰고 있었습니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당신의 논리는
당신이 믿는 것만큼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이
들려왔으며, 그녀의 머리는 여러 가지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롬버드의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문득 그녀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녀의 태도가
바뀌어 관심어린 표정이 나타나며 흥분된
모습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두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요.
멘도자의 쇼였다고 하셨는데, 대충 날짜를
"정확한 날짜를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극장에 간 것은 지난 5월 20일
밤 9시부터 11시가 넘어서까지였습니다."
"5월이라--- " 그녀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재미있게 되어가는군요."
그렇게 말하고 롬버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당신 말이 모두 맞아요.
아무튼 저 위층의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와주셔서 기뻐요."
두 사람은 12층 근처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그는 몇 층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열쇠로 문을 열고
방의 불을 켰다. 롬버드도 그 뒤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팔에 걸치고 있던
내던졌다. 그리고는 그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갔지만, 반질반질한 마루에 거꾸로
비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은색 증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나오고 있었다.
"5월 20일이라고 하셨죠?" 하고 그녀는
다짐을 받듯이 어깨 너머로 물었다. "곧
돌아오겠어요. 앉아서 기다리세요."
활짝 열어놓은 안쪽 방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잠시 방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는 앉아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는 청구서와 영수증 다발을 한 웅큼
들고서 그것을 한장 한장 뒤적이며
돌아왔다. 그의 곁에 올 때는 이미 자기가
찾는 것을 골라낸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한 장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휙
집어던지고는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날 밤 그 남자와 함께 극장에
갔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것을 좀 보세요."
그것은 병원비 청구서로, 입원기간은 4월
30일부터 4주일간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맹장수술 때문에 4월 30일부터 5월
27일까지 입원해 있었어요. 이런 종이조각
한 장이 불만이시라면 그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죠."
"아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끝맺으려고 하지 않고
롬버드의 곁에 앉았다. "그러나 그 모자를
산 것은 분명히 당신이었잖습니까?" 하고
그가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럼, 모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히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주위가 조용한 덕분에 그는 그녀와 방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정적에 흠뻑
빠져들어서 스스로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
있었다. 그 방은 여러 가지 사실을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은 겉에서 보는
것처럼 호화스럽지는 못했다. 이 호텔은
일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제법 훌륭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에 들어오면
깨끗한 마루를 장식한 카펫조차 온전하지
못했다. 또한 가구도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누가 팔아치우기라도 했는지
여기저기 빈 자리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값싼 가구로 그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여자에게서도 똑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구두는 40달러는 될 듯한
특수 주문품이지만 너무 오래 신어서
닳아빠져 있었다. 뒤꿈치와 가죽의
광택으로 그런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옷도 역시 싸구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이었지만, 이것 또한
상당히 낡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잔꾀를 부려서 살아가는 몰락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적일 정도의
경계의 표정. 다음 기회가 어느 방향에서
찾아올지 모르지만,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력. 주의해서
보면 그러한 세세한 사항들이 모여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보면 별것 아닌 잡다한 것이었지만,
하나로 모아서 생각하면 거기에 공통으로
흐르는 내용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의 마음속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어냈다. 그녀는 그전에
자기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것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틀림없이 전당포일 것이다.
다음에 그녀는 한쪽 발을 가볍게 들어서
발등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지금 이
여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스타킹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도
한 켤레가 아니라 몇십 몇백 켤레를. 다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생각하자
돈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무엇이라도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을 만큼의 돈.
그녀는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서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는 침묵을 깨고 그의 물음에 간신히
대답했다. 사실 그 사이는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 모자 이야기는 사실 별것
아니에요. 나는 첫눈에 그 모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 아가씨를 꾀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요. 나는 돈에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곤
하거든요. 그 모자는 아마 한 번밖에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자 은색
"게다가 그 모자는 나에겐 어울리지도
않았는걸요. 별로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웬지 어색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나 같은 사람이 쓸 모자가
아니었던 거지요. 그리고서는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었어요. 그녀는 그 모자를 보더니
한번 써보더군요. 당신이 여자였다면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 멋을 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여자들은 흔히 상대방이 산 물건을
입어보고 싶어하거든요. 그녀가 그 모자가
매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나는 그녀에게
주어버렸어요."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와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뜻 같았다.
"그 친구의 이름은?" 그는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아무리 단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이지만 그는 두 사람의 사이에
불꽃이 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였으므로, 그
자리에서 대답을 받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도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런 것을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거기에 한 남자의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 남자는 금요일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 친구 때문이라는 거예요?
책임이 있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도대체 내 친구를 무슨 권리로
끌어들이려는 거죠? 여자라도 사형에는
똑같은 고통이 있는 거예요. 사회적인
죽음--- 그것은 치명적인 거라고요.
소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친구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잖아요."
그가 긴장함에 따라 그의 얼굴빛도 점점
창백해져 갔다. "당신의 마음속에선 이미
내 부탁을 받아들여 준다는 결심이 서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이라고 해서 내 친구가
죽는다면 태연하게 지낼 수 있을 것
사형을 받는다고 하면 말입니다."
"나는 내 친구는 잘 알지만 그 남자는
알지 못해요. 그녀는 나에게 친구이지만,
그 남자는 생판 남이잖아요. 당신의 말은
제3자인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내 친구를
위험에 빠뜨려도 괜찮다는 뜻 아녜요?"
"당신 친구가 어째서 위험에 빠진다는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내 부탁을 거절하는
거군요?"
"거절한다고 받아들여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
그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순 없소.
여기는 홈 베이스요. 이제 뒤에는 아무것도
사실을 알아내야 할 책임이 내겐
있습니다."
어느새 두 사람 다 일어서 있었다.
"당신 입을 열게 하는 데 내가 폭력을
쓰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마시오. 나로선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는 의미 있는 눈길로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상대방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는 어깨를 몇 번 들썩였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매로 그를 쏘아보았다.
꽤나 비열한 남자라고 비웃듯이---
"아래층에 전화를 걸어 당신을 쫓아내
"마음대로 하시죠. 여기서 불미스러운
격투가 벌어져도 괜찮다면--- "
"강제로 내 입을 열게 할 순 없어요.
선택의 자유는 이쪽에 있으니까." 그녀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란 말예요. 날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이거요."
그녀는 권총을 본 순간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지만, 그것은 권총을 들이댔을 때
누구나가 나타내는 잠깐 동안의 충격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것은 그의 위협에 놀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어쨌든 해결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우선 자리에 앉아나 보자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처음엔
약간 얼굴이 굳어지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그가 권총을
들이대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장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권총을 들고 그녀
앞에 우뚝 서서 그녀를 정신적으로 위협해
보려고 애를 썼다.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거야
굉장히 무섭죠." 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나를 죽일 리가 없거든요.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요.
나는 알고 있는 사실을 억지로 말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죽이고 나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어요? 그렇게 권총을 들이대고
있어도 결정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
당신에게 옮겨가지는 않아요. 내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경찰에 전화해도
되고.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당신이 그 총을 집어넣을 때까지 그냥
앉아서 기다리겠어요."
그녀가 한 수 위였다. 그는 권총을
집어넣고 한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덕을 본 것은 어느쪽이죠? 내 얼굴은
깨끗한데 당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더군다나 아주 새파래졌군요."
그는 겨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알겠소. 당신이 이겼소."
그녀는 망치로 계속 그의 급소를
내리쳤다. 그녀는 상당히 세련되게 상대를
이끌었다. 망치를 쥔 손은 아무리 봐도
당돌한 손이었다. 그녀의 손은 섬세하고도
세련되어 있있다. "흥, 아무래도 나를
협박할 순 없을 텐데요. 당신도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가슴 속에 있는 확신에 대해서
긍정한 것이다.
"좀 앉아도 되겠소?" 그는 이렇게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절취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수첩 같은 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네모난
것이 그의 앞에 놓였다. 그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그 위에다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도중에서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귀찮습니까?"
그녀는 가식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서로를 이해한 두 사람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미소였다.
"당신과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군요.
조용하면서도 유쾌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요."
이번에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구부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다지 좋은 이름은 아니군요." 그는
중얼거리면서 써내려갔다. 그는 100이라는
숫자를 써넣었다. 그녀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서 비스듬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졸린데요." 그녀는 일부러 하품을 크게
하고는 손바닥으로 입을 한두 번 톡톡
두드렸다.
"창문을 좀 열어놓지 그러십니까? 방안
공기가 좀 답답한 것 같은데--- "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는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는 다시 '0'을 하나
더 덧붙였다.
"어떻습니까? 조금 기분이 나아졌나요?"
섞어서 물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꽤 상쾌해졌어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호, 그렇게 금방 말입니까?" 하고 그는
비양거리듯이 말했다.
"정말이에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쓰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책상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순서가
바뀐 것 같군."
"내가 부탁이 있어 당신을 찾아간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나에게 부탁하러 온
것이지--- "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가 열려진 방문 쪽으로 가서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고 할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수첩에서
뜯어낸 것으로, 반으로 접혀져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너무 귀찮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옆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은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문제가
문제이니 만큼--- " 그리고는 그녀가
뭐라고 했는진 모르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걱정마십시오. 지불정지를
당할 정도라면 처음부터 수표 같은 건
쓰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뭐 적은
"내려가실 겁니까?" 하고 엘리베이터
보이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잠깐 뒤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왔군요."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방 쪽을
향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예의바르게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고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녀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잠깐만!" 갑자기 그는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에게 받은
메모지에는 이름이 하나밖에 없잖아."
보이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늦추고
되돌릴 준비를 했다. "되돌아갈까요?"
얼른 손목시계를 보고는, "아니, 됐소.
그냥 아래층으로 내려갑시다." 하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속도를 더하여
아래층으로 향했다.
아래층 로비에 내린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종이를 쳐다보면서 프런트에
있는 보이에게 물었다.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북쪽인지 남쪽인지 잘
모르겠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고유명사와 한 개의
번지가 쓰여 있었다.
'플로라,' 그리고 '1번지,' 끝에
'암스테르담.'
"겨우 끝났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에 있는 한 심야영업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젠 붙잡은 것
같습니다. 단서가 하나 나타났는데,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겁니다.
이야기할 틈이 없어요. 지금 그 근처에
있는데, 당장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곧
와주실 수 있겠죠?"
버지스는 순찰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약속장소를
지나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느 건물
앞에 롬버드의 차가 멈춰 있는 것을
보았다. 한눈에 빈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달리는 순찰차에서 무모하게
훌쩍 뛰어내려 롬버드의 차 쪽으로 향했다.
보도로 올라가서 그쪽으로 다가가서야
비로소 계단에 앉아 있는 롬버드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차에 가려서 보이지
버지스는 처음엔 그가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롬버드는 등을
구부리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윗몸을
무릎 근처까지 구부리고 머리는 보도에
닿을 정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자세를 보면 누구라도 위경련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을 생각할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발작이 일어날 듯한 증세를
모든 점에서 갖추고 있었다. 셔츠 위로
멜빵을 한 어떤 남자가 두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안됐다는 듯이 담배 파이프를 손에
쥐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발
근처에는 개 한 마리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버지스의 요란한 발소리가 다가오자
롬버드는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그것은
입을 여는 것도 귀찮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은 그곳에
가 있겠다고 하지 않았소?"
"아직 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쪽입니다." 그는 커다란 입을 열고 있는
동굴 같은 출입구를 가리켰다. 청동제
파이프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앞쪽 현관에는 검은 벽을 배경으로
번쩍이는 금색 글자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뉴욕 시 소방서
"여기가 그 번지입니다."
롬버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조각을
흔들었다. 이때 점박이 개가 다가와서 그
종이조각에 콧등을 갖다댔다. "이름은
바에 의하면--- "
버지스는 자동차의 문을 열고서 넘어지지
않도록 롬버드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얼른 돌아갑시다. 한시가 급하니까--- "
롬버드는 몸으로 문을 밀었지만
헛수고였다. 그가 힘에 겨운 듯이 숨을
몰아쉬자 버지스가 만능열쇠를 갖고
올라왔다.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아래층에서 건 전화는 받지 않습니까?"
"아직도 계속 벨이 울리고 있소."
"혹시 도망친 것은 아닐까?"
"그것은 불가능해요. 어떤 기가 막힌
방법이 없는 한 그녀가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 눈에 띄게 되어 있소. 자, 이것으로
되어 있소."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방안을
살폈다. 현관 홀에서 한 칸 낮게 내려간
곳에 기다란 거실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방은 두
사람에게 어떤 것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곧 그것을 깨달았다.
전등은 모두 켜져 있었다. 담배 한
개비가 아직 불이 붙은 채로 발 달린
재떨이 위에 놓여 있어서 옅은 푸른빛의
연기가 나선 모양으로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루의 폭만큼이나 큰 창문은
열려져 있어 밤공기 속으로 거무스름한
공간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커다란 별이, 반대쪽에는 그것보다 작은
압핀으로 눌러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창문 바로 앞에 은색의 구두 한 켤레가
뒤집혀진 보트처럼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기다란 융단이 윤이 나는 마루를
2등분하듯이 바로 한 칸 낮게 내려간
곳에서부터 창가까지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융단의 한쪽 끝에는 잔물결처럼 주름이
잡혀져 있었다. 발을 잘못 디뎌서 비틀린
모양이었다.
버지스는 벽을 따라 빙 돌아서 창으로
갔다. 그리고 장식의 역할조차 하지 못하는
난간에서 몸을 쑥 내밀고 한참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허리를 펴고 방안으로
되돌아와서, 아까부터 어쩔 줄 모르고 서
끄덕였다. "여자는 저기에서 곧바로
떨어졌소.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뒤편
빈터에 떨어져 있는 것이 여기에서도
보이는군. 마치 빨랫줄에서 떨어진 세탁물
같소.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오.
이쪽편의 창문이 모두 캄캄한 것을 보니---
"
이상하게도 버지스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수습도 취하지 않고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하곤 방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롬버드는 아니었다. 그것은 담배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였다. 버지스의 눈을 꼼짝
못하게 한 것은 아마 그 연기가
틀림없으리라.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서
손가락으로 집을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는
뭐라고 입속말로 낮게 중얼거렸는데,
그것은 이렇게 들려 왔다. "우리들이
도착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군!"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담배를 꺼내어
그 두 개를 손가락으로 집어들고 끝을 모아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연필을 꺼내어
타다남은 쪽과 똑같은 자리에 자신의
담배에 표시를 했다. 그는 자신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여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가볍게 한 모금 빨았다. 그런 다음,
담뱃재가 남아 있는 재떨이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얹어놓고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롬버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내키지 않는
"조잡한 방법이지만, 저 여자가 언제
떨어졌나 알아내려는 것이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믿을 만한 방법인지 그것은
나중에 전문가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지만---
"
그는 재떨이 쪽으로 가서 자세히
바라보다가 다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더니 담배를 들고
돌아와서 체온계를 보듯이 그것을 위로
치켜올려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다시 손목시계를 보고는 담뱃재를 털어내고
꽁초를 버렸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리들이 이 방에 들어오기 3분
전에 밑으로 떨어졌소. 내가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뒤 재떨이 쪽으로 가서
시간은 뺀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한 것처럼 가볍게 한 모금밖에 피우지
못했을 것이오. 두세 모금 피웠다면 담배는
더욱 짧아졌을 테지."
"킹 사이즈였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저쪽
구석에서 롬버드가 물었다.
"러키 스트라이크였소. 타다 남은 쪽에
간신히 상표가 남아 있었소. 그런 생각도
없이 내가 이렇게 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롬버드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죽인
것은 우리들이 아래층에서 건 전화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버지스가 계속 이어서 말했다.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 앞에서
굴러떨어졌을 거요. 이곳의 상황이 모든
것을 그렇게 말해 주고 있소. 그녀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밤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소. 바깥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면서 유쾌한 마음으로 이것 저것
장래의 계획을 꿈꾸고 있었겠지. 그때
전화벨이 울렸소. 거기에서 그녀는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요. 방안으로 되돌아오려고
서둘렀는지, 몸의 균형을 잃었는지, 아니면
구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이 구두는
조금 뒤틀려 있잖소. 낡아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지. 어쨌든 왁스로 개끗이
닦아놓은 마루 위로 융단이 주르르
미끄러졌소. 그녀의 발은 한쪽이나 아니면
양쪽이 다 융단에 얹혀져 있었겠지. 그
발이 융단을 따라 갑자기 미끄러지며 한쪽
그리고 몸은 뒤로 기울어졌겠고. 열려진 창
곁에 있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그냥 엉덩방아만 찧고 끝날 것을,
재수없게도 그녀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공중으로 날아가 저 밑으로 떨어져 버린
거요."
이어서 버지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녀가 당신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는 그 일은 이해할 수가 없군. 그거
혹시 장난 아니었을까요? 당신과 함께
있었을 때 그녀의 태도는 어땠소?"
"아니, 장난친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고 롬버드가 대답했다. "정말
돈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분명히 얼굴에
쓰여 있었다고요."
"당신에게 엉터리 주소를 가르쳐 주고,
현금으로 바꿔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야기야
제대로 되지. 하지만 이렇게 여기에서 두세
구획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을 가르쳐 준
것을 보면--- 5분 내지 10분 정도면 당신이
다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 않았겠나 하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아니, 혹시 그녀는 문제의 그 여자에게
미리 알려주어서 내가 제시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손에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요? 즉, 그 여자에게 연락하는
동안만 나를 따돌려놓으려고 말입니다."
버지스는 그러한 해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아무래도 알 수가 없군."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몸을 돌려 술취한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어슬렁어슬렁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버지스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
동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롬버드는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마치
흥미를 잃은 듯이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그는 간신히 벽에 다다라서야 기운이 나는
듯이 그 앞에 잠시 멈춰섰다. 계속되는
실망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마침내
단념하려고 하는 듯한 태도였다.
버지스가 눈치채지 못하고 멍청하게 있는
사이에 롬버드는 한쪽 팔을 쳐들어
원수라도 되는 듯이 눈앞의 벽을 마구
두드렸다. "병신 같은 놈!"
버지스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무슨 짓이오, 이게? 손을 부러뜨리고 싶은
거요? 벽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롬버드는 병에 마개라도 쑤셔넣은 듯한
모습으로 웅크리고서 몸을 비틀었다.
얼굴이 찌그러져 있는 것은 손에 느낀
고통보다는 절망적인 분함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타는 듯한 아픈 손을 배에
갖다대고 문지르면서 목이 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놈들은 알고 있어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놈들뿐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아낼 수가 없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