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나는 빨갱이가 뭔지 알고 빨갱이, 빨갱이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였다구!”
몇 년 전 고국 방문 시 제 누이와 정치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제가 참을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던 겁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 구순 어머니의 근심스런 얼굴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냉정을 찾았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던 누이가 어느덧 극우(제 기준) 전사로 변했습니다. 아무래도 정치나 시사 등, 내가 누이보다는 한참 위라는 교만 때문인지 누이와 논쟁을 통해 교화(?)시키려는 야무진 꿈을 갖고 토론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았습니다.
극우 유튜버에 중독된 누이는 일방적인 주장만 했고 내 얘기는 아예 들을 생각조차 안 했던 것이죠. 그래도 모처럼 해후한 형제간인데 얼굴 붉히기도 뭐해서 인내심을 갖고 듣던 중, 내가 평시 존경하던 인사를 빨갱이라고 했던 것이고, 나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겁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그 이전에 하나 더 있었습니다. 촛불혁명 이후 대통령 선거하기 얼마 전 일입니다. 평시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집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과거 교회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어느 정도 막역한 사이라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그러니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것이죠.
누군가 한 인물을 거론할 때였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장로님이 그 인물을 비토했습니다.
“그 사람은 빨갱이라 안 돼…”
“장로님, 빨갱이가 뭔지 아세요?”
그때도 여지없이 내 감정이 빛보다 빠르게 반응했기에 좋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습니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도발적인 발언을 계속해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던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저의 아픈 가족사가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이같이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 짐작할 것 같습니다.
2) 예전 어느 글에서 밝혔듯이 1923년생이신 저희 아버지는 해방 후 한때 빨갱이였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좌익 활동을 했습니다. 남한 정부가 수립된 후 고위직 경관이셨던 친지의 설득으로 전향하였고, 그렇고 그런 남한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어수선한 이승만정권 말기 때, 제가 너덧 살 무렵입니다. 어느날 우리 집에 평지풍파가 일어났습니다. 평범한 교사로 살아가던 아버지에게 큰일이 생겼습니다. 젊은 시절 좌익운동을 같이했던 친구가 북에서 남파됐던 겁니다. 그 친구는 남한에 잠시 머무는 동안 친구인 제 아버지와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다시 북으로 돌아간 얼마 후, 우리 집에 방첩대가 들이닥쳤습니다. 간첩과 접선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잡혀갔던 것이죠.
너무 어린 나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강력한 충격이 평생의 기억으로 자리하는 것을 보면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일들도 드문드문 기억에 남아 우리의 비상했던 가족사가 장편소설처럼 연결됩니다.
제가 너덧 살 무렵, 김제여고 사택에 살던 시절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치 꿈처럼 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탱자나무 담장 너머 드넓게 펼쳐진 김제여고 운동장 하며, 목재로 이루어진 일본 적산가옥의 구조하며, 문밖을 나가면 교장선생님의 사택 담장 안에 감이 탐스럽게 매달린 감나무하며. 그림 같은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타인에게 맡긴 후 옥바라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제 형과 누이는 교장 선생님 댁에 저와 간난쟁이 아우는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 그야말로 이산가족의 신세가 됐습니다.
나와 간난쟁이 아우는 이리 읍(지금의 익산) 외가에 맡겨졌습니다. 온통 논밭으로 이루어진 당시 가난했던 시절의 이리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간난애의 울음을 귀찮은 듯 달래던 외할머니의 황망하신 표정들이 스틸사진처럼 펼쳐집니다. 외할머니와 같이 살며 당시 인근의 국민학교에 교편을 잡고 있던 막내 이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들떠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귀여운 조카들이 왔다는 반가움 때문이었던 거죠.
내 손을 잡고 읍내 극장에 데리고 가곤 했던 막내이모의 아름다운 얼굴(얼마전 한국방문에서 만난 막내이모는 팔순의 할머니임에도 어릴 때 느꼈던 아름다운 모습들이 오버랩되곤 했습니다)과 근심 어린 얼굴로 서글픈 노래를 부르셨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철없이 그 서글픈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는데, 지금까지 그 노래와 가사가 남아있는 거로 봐서 당시의 기억이 꿈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당시 너무 어린 관계로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훗날 돌이켜보면 그 이리읍의 시골스런 풍경들이 시릿한 기억으로 남는 걸 봐서 우리 가족의 스산했던 분위기를 나름대로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2년여 복역을 하고 나온 아버지는 다시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우리 집의 고난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소위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호적의 붉은 글씨 때문인 거죠. 연좌제가 있던 시절 우리 자식들도 그 악법에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우려는 우리 집 주위에 늘상 잠복해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가끔씩 아버지를 면박했습니다.
“니 애비가 빨갱이였잖아…”
평생 어머니에 억눌려 사시던 양처럼 순한 아버지도 어머니의 이런 빈정거림에 격하게 반응하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빨갱이’는 함부로 거론하면 안 되는 금기어였습니다. 하기사 당시 반공이념에 세뇌된 우리 아이들도 빨갱이라는 언어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불온한 언어로 각인 되었던 시절이었죠.
여기까지 우리 가족사를 아신 분은 제가 ‘빨갱이’라는 단어가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저의 과민함은 가족사에 얽힌 트라우마 때문이 아닙니다.
3) 2000년대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와 단둘이 대면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아버지의 과거 이력을 물었습니다. 어느덧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체제에 사시는 아버지는 과거와는 전혀 딴판으로 당신의 전력을 담담히 회고했습니다.
“그때는 의식 있는 사람은 공산주의가 대단히 괜찮은 이념이라 생각했던 기라…”
저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평생 한 번 잘나가신 적이 없던 평범한 아버지가 한때는 자신의 영달보다 더 웅대한 이념에 열정을 바쳤다는 것. 그것이 설령 잘못된 선택이었고, 평생 벗을 수 없는 족쇄로 작용했지만, 당신의 과오(?)를 평생의 한으로 삼고 살아오시지 않았다는 사실로 충분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위엄하곤 전혀 다른, 격없이 소탈하신 성격인지라 저하고 막역하게 대화를 잘 나눈 사이였습니다. 소위 민감한 시국 문제나 정치 얘기도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개진했었습니다. 오직 단 하나 ‘빨갱이’라는 단어는 말을 흐리거나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곤 했었던 거죠.
저는 아버지보다 훨씬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고 나름대로 이념의 허구성 같은 걸 잘 판단하고 살고 있다고 자부하기에 저희 집안의 아킬레스건에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습니다. 제가 ‘빨갱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 단어가 갖는 야비한 폭력성 때문입니다.
보수우파가 개발한 프레임 중 가장 성공적인 언어가 ‘빨갱이’입니다. 반공 이념을 국시로 알고 살아왔던 우리 세대는 한동안 이 무지막지한 프레임에 갇혀 살았습니다.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는 21세기 들어서도 낡은 이념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대립된 개념을 생산해 소비자인 국민에게 뿌립니다. 제가 대해본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념도 정확히 모르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호한 개념에 갇혀 사는 사람일수록 ‘빨갱이’를 아무 생각없이 치트키처럼 사용하더군요.
나를 분노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악질적 언어-빨갱이를 아무런 생각없이 날리는 맹목성에 있습니다. 보수우익이 개발한 언어 ‘빨갱이’. 그 프레임에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사고가 갇혀있는 줄 모르고 상대를 공격하는 모습에서 혼란했던 시절 완장을 차고 아무 죄의식없이 이웃에 죽창을 휘두른 폭력성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4) 어릴 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한마디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이승복 얘기하며,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사건들이 빨갱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떠오릅니다. 도깨비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빨갱이라고 각인되어있기에 보수우파의 최종병기가 된 거죠. 스스로 보수우파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런 맹목적 언어를 아무 생각없이 사용해 상대를 공격합니다.
한국에 나가서 대하는 많은 노인네들에게 느끼는 비애는 바로 이런 화석화된 이념들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정치지향성이 무엇인지 모른 채 땡볕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재타도”를 외치는 왜곡된 애국심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저는 정치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실용적 사고를 가지려 합니다.
사실 정치는 프레임 전쟁이기도 합니다. 정치에서 최고의 프레임은 언어입니다. 소비자인 국민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프레임을 공급해야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라는 사람은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종속된다’고 규정했듯이 우리의 의식은 프레임에 갇히기 십상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프레임은 아주 강력하기에 스스로의 자율 의지가 매몰됩니다. 저 역시 평범한 인간이기에 이 프레임에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나는 프레임에 자유로운가?” 최소한 맹목적인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물음인 거죠.
첫댓글 처음 쓰는 댓글입니다. 저도 청하님 아버님께 존경과 자부심을 공유합니다.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빈 깡통이 더 시끄럽다고
얄팍한 지식을 갖고 '우월감'을 갖고싶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모임이 항상 소란합니다. 물론 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머리가 숙여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해방 이후 나눠진 분단의 고통이 아직까지 청하님 가족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잘못된 정보에 세뇌되었다 하더라도 누님 나름의 세계관임을 인정하시고 편하게 대하셨으면 좋겠네요. 존경하는 아버님도 그러길 간절히 원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4년 전, 카페에서 정치논쟁이 있을 때마다 냉전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우리 세대의 의식과 무의식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리려고 "레드 컴플렉스 (Red Scare)" 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빨갱이" 매도는 미국이 원조였으며 지금도 진보 집단을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오바마케어가 통과될 무렵 공산주의식 발상이라고 데모하던 정치인과 국민들, 만약 한국식의 정부가 관리하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추진하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올해 들어 진보 성향의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독자적으로 다시 발의되어 주하원을 통화했다던가 하는 뉴스를 본 것 같긴 합니다.
적극 공감 합니다.
문득 저의 고숙 고모 생각이 납니다. 고숙은 남로당 전라남도 정치위원(도지사급) 이셨던 분인데 빨치산 활동을
하시다 영광 불갑산에서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 그리고 출소하셨습니다. 동경 제국대를 졸업하시고
남로당 여운영선생 보좌하여 정치 활동을 하셨는데 고숙을 잡으려 군경들이 매일 고숙 집에 찾아와 니 남편
어디있냐? 며 고모를 두둘겨 패서 그로인해 고모의 청각이 손상 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시절 고모에게
장난으로 큰 소리로 고모!! 하고 소리를지르던 기억이 납니다.
하얀 소복에 중절모를 쓰시던 고숙. 분단을 매우 안따까워하며 통일을 바란다며 돌아기실때 유언으로 남기셨다는
고숙 그리고 고모가 이 글을 읽으니 생각이 나네요.
어린시절 고숙께서 티비에 나오는 박정희를 보시며 저 일본놈 앞잡이 하시며 쳐 죽일놈 하시던 생각도 납니다.
어서 분단에 벽을 넘어 통일이 되고 우리민족이 하나가 되어 세계에 우뚝 서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진영논리는 이제 구태입니다.
이 ' 빨갱이' 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우린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 희생을 강요받았어요.
요즘 한국 대선을 보면 좌우진영논리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박사모 태극기부대가 민주당 이재명을 지지하고, 문파들이 2번 윤석렬을 지지해요.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 우선인 진정한 보수가 대한민국에 새롭게 탄생하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적으로 보라색을 좋아하고 자신이 빨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카페의 어떤분에게 빨갱이로 몰려본 적은 있습니다.
그때 궁금해지더군요.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빨갱이의 정의는 무엇일까?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박정희가 한때 자생적 빨갱이 단체인 남로당의 고위간부였다가 붙잡혀서 사형선고까지 받은 골수 빨갱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저 혼자 살아보겠다고 동료들을 팔아먹은 댓가로 풀려난 자라는 걸 알고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의아하기도 하네요. 그런데 박정희를 빨갱이로 몰아대며 메카시즘을 우려먹은 장본인이 다름아닌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윤보선이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웃픕니다. (참고자료: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4277.html)
뭐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된 빨갱이는 예수 부처 슈바이처 박사를 제외하면 호찌민이나 체 게바라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의식 저변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들이 깔려 있을지도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만...
공감하는 글입니다.
앞으로 빨갱이 라는 말을 더이상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리스펙트 합니다.^^
역사속에서 많은 위인들이 폄하되고 있고 또 많은 악인들이 미화되고 있죠.
어쩌겠습니까? 그게 우리 인간의 한계인 것을.
오늘 새벽 또 다시 "철수"하신 분을 보면서 씁쓸하기도 했지만, 저 정도 쓰레기들이어야 정치하겠다고 국민을 위하겠다고 나서고 온갖 헛소리들을 쏟아 내니 참 통탄할 일입니다.
늦게나마 접한 글 잘 읽고 공감하는 바 큽니다.
그나마 해외에 사시는 분들은 사고의 영역이 조금은
트인 것 같은데 우리세대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아직도 그 프레임에 갇혀 소위 보수라 주창하며
옹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보수 진보를 떠나 열려있는 사고가 필요한 소위
꼰대 새대들이 한국에는 아직 많은 것 같아 씁쓸합니다.
건필 유지하시고 즐겁게 일상 보내세요.
아버님께서는 그 시대의 희생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주어진 환경대로 살게 됩니다...
그 어는 누구도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겠습니다.
아버님의 인생에 도리어 연민에 정을 느낍니다....
어려운 마음의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이고요
나는 내인생을 살면 됨니다.
지나간 세월을 소환까지 해서
가족 간에 언성을 높일 필요가 있을까요?
아버지 인생도 중요하지만,
누이의 인생도 중요합니다.
진영논리로 지인끼리 싸우는것은
불필요한 자기중심적 사고 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유, 민주주의, 평화의 공존입니다
민주가 없는 자유도 안되고 자유가 없는 민주도 안됩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북한 공산당 좌파 사회주의에서 느끼는 것은 전체주의 입니다.
공산당 좌파 사회주의가 독재가 더 심하지요
푸틴 보세요 시진핑 보세요 김정은 보세요 독재자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좌파 전체주의자 들입니다.
전체주의 세상에서 살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탈북민들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