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곤란합니다
글쓴이: 우주가람
<8>
짤랑 짤랑, 소주병이 달그락거린다. 수빈의 눈앞엔 2m 정도 되어보이는 학교담이 있었다. 뻔질나게도 넘었던 그 자리는 살짝 삐져나와있던 벽돌까지도 그대로였다.
이곳에 오고싶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곳만의 그 향기가 그리워서. 수빈은 픽 웃으며 담을 넘었다. 시간이 너무 짙다. 지금의 어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정도로.
익숙한 길을 익숙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동장이 보이고 수돗가 또한 보인다. 찬물만 쏟아져나오던 샤워장이 보였고 그 곳에서 딱 32발자국을 걸으면 그 녀석의 잔상이 보인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날 향해 웃고있을것만 같은 녀석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낀다. 눈을 부비면 사라지기에 수빈은 한동안 눈을 감지 않았다.
"아파."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우리만이 열 수 있던 오래된 음악실. 폐사되었지만 어째서인지 무너뜨리지는 않는 오래된 음악실이 보인다. 아직도 그 방법이 통하려나. 음악실의 주변을 한번 돌며 42번째 나무조각을 오른쪽으로 비틀고 왼편의 창틀을 살짝 흔들면 음악실 안쪽의 자물쇠가 열린다. 그리고 앞에 가서 자물쇠에 녀석과 나만이 갖고있는 열쇠로 문을 따기만 하면 된다.
수빈은 녹슨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어보였다. 정말 왜 이렇게 녹슬어버린거야.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수빈은 반지를 빼내 돌렸다. 두꺼운 검은 반지가 2개로 나눠지며 한쪽에 고개를 웅크리고 잠들어있는 아주 작은 열쇠가 보인다. 수빈이 검지로 열쇠를 부드럽게 일으켜세우며 자물쇠에 끼웠다.
-찰칵
녹슨 기억과 함께 열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열렸다. 마음 속 어느 한구석에선 열리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녹슨 자물쇠는 보란듯이 입을 쩍 벌려보였다.
낡은 나무 특유의 향이 음악실에 가득했다. 여전하다. 그 음악실 벽에 담뱃재로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제 기분이 좋을때면 조율도 안된 피아노로 노래를 불러주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윤수빈 사랑해'
시간이 지나서봐도 글씨는 정말 못 쓰는구나.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통증이 관자놀이를 내리친다. 수빈이 입술을 깨물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수빈 사랑해'
'같이 살자'
'우리 결혼할까? 대답해'
'사랑해 수빈아'
달콤했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이 남서우의 진심이란 걸 알았기에 기뻤고 동시에 그렇게도 두근댔던거다.
'윤수빈은 남서우꺼'
가장 마지막으로 썼던 가장 유치한 그 말에 대답하라고 땡깡부리던 녀석에게 한마디 대답대신 코끝에 짧은 키스를 해주었었다. 하지만 그 자식은 고마운줄 모르고 끝까지 대답을 보챘었지.
기억난다. 왜 그렇게 묻냐고, 대답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이미 알고 있지 않냐고 묻자 담뱃재로 벽에 하트를 덧붙여 그리고 있던 남서우가 재를 툭툭 털고 뒤로 다가와 등뼈가 으스러질듯 세게 휘감아 안았다.
'사랑해. 너한테 만큼은 한없이 다정하고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사람이 될테니까. 떠나지마.'
그때 난 뭐라 대답했더라. 수빈이 웃음을 흘리며 소주병을 뜯었다.
'숨막혀.'
'대답해.'
'숨막힌다고. 왜 이래 오늘?'
'네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어째서'
그때 녀석은 처음으로 쓰게 웃어보였다.
'넌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같거든.'
아니, 그게 아니었어.
수빈의 한 손엔 술병이 한 손엔 담배가 들려있었다. 온 사방에서 남서우가 보인다. 언제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사랑해라는 주문을 계속해서 속삭여주던 녀석의 목소리가 온 사방에서 몸을 간지럽힌다.
가지마, 가지마 서우야. 난 지금 여기 있는데 넌 지금 어디있어. 내가 가장 힘들때 넌 어디로 사라졌었어.
정신이 끊기기전, 남서우와 재수없던 첫만남이 머릿속을 세게 치고 지나가버렸다. 젠장. 그건 아주 오래된 기억.
-
새로운 학교라해서 초등학생 같이 설렌다거나 여고생처럼 징징짜대진 않았다. 조금은 낡아보이는 학교건물에 어디선가 본 듯해보이는 후즐근한 옷들을 입고 돌아다니는 선생님들. 멋이란 멋은 다 부리고 다니는 그저그런 양아치들과 고등학교 3년은 공부에 한 몸 바치려는지 교실에 박혀서 쉬는 시간까지 공부하는 녀석들까지. 그곳은 그저그런 학교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보통의 학교.
자신은 화장실에 들렸다갈테니 교무실에 가있으라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교무실로 혼자 향했다. 아무런 심장의 떨림없이 교무실의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은 순간 머리위에 쏟아지는 시원한 물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젠장, 세숫대야도 맞았다. 기분이 심각하게 저조해진 그 순간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그것을 시작으로 몇명이 달려오더니 미안한 듯 말을 던 졌다.
"야, 미안하다 진짜. 너 맞출라고 한게 아니었는데."
"아우, 난 최정원이 들어올 줄 알았지."
"전학생이야?"
"그런가봐."
"몇학년?"
쪼잘쪼잘쪼잘... 말도 더럽게 많구나. 치밀어오르는 성질에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데 걔중에 선생님 의자에 떡하니 앉아있던, 그러니까 가장 처음 말문을 열었던 녀석이 다가와 수빈의 머리를 찍고 떨어진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주워들었다.
미안함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보이는 그 모습이 왠지 더 성질이 나버렸다.
"다시해야하나." 남자가 그 말을 뱉은 순간 수빈의 인내심은 끊어졌다.
"네가 사과해."
아, 다시 하기 귀찮은데, 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남자가 방긋 웃으며 수빈에게로 돌았다. 남자가 화사하게 웃어보인다. 잘뻗은 흰 콧대와 조금 푸른 듯한 눈이 인상적인 그는 혼혈인 듯 키까지 훤칠했다.
수빈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수빈의 귀를 그러잡았다. 물이 뚝뚝 흐르는 수빈의 얼굴을 더듬어 반대편 귀에도 손을 올린 그가 장난스럽게 귓가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조금은 차갑게 조금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고막을 느릿하게 울린다.
"You know what babe? if you don't close your d*** Fuc**** mouth. I'm gonna fuck you till your mouth gonna stup up."
수빈이 그에게서 떠나가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한팔로 땡겨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Shut the hell up, bitch."
그리고 미묘하게 웃는 얼굴로 수빈을 바라보던 남자가 수빈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뒤 말했다.
"딱 한번만 안아보자."
그때 생각했다. 이 새끼는 정말 내 손으로 죽여버려야겠다고.
-
"야, 오늘 날씨 무지 좋지 않냐. 아까 비온 흔적도 없어. 날씨도 선선하고."
찬은이 신나서 지훈에게 말했지만 지훈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뿐이었다.
"이런 날 딱 만나면 좋을 것 같은데."
찬은의 입가엔 어느새 밝은 웃음이 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왠지 자꾸만 생각났다. 마주친 그 순간 하나하나가 사진처럼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어이없다는 표정, 까불고 있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놀란표정, 무감동한 표정.
지독히도 표정변화없는 사람이었지만 진절머리나게도 끌리는 사람이었다. 12시가 다 되서야 학교에서 나온 두 남자는 느릿하게 은은한 조명이 뿌려지고 있는 운동장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박사박
모래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들의 옆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Have you ever known a girl who can make your world go in slow motion'
발음도 음정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던 노래였기에 정확히 어느 부분이다,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명에 옅게 흔들리는 갈색머리에 유난히 길어진 그림자가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지 한 손으론 머리를 잡고 걸어가던 그 남자와의 거리가 점점 길어졌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찬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으려던 그 남자를 잡았다.
품안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찬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소리를 질러댔다.
"우악!"
그 소리에 정신줄을 다시 조금 잡은 남자가 찬은의 품에서 무리해 떨어져나오며 찬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
찬은은 수빈을 알아보았고 수빈 또한 찬은을 알아보았다. 그 짧은 공항 와중에 울려퍼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수빈과 찬은 둘 모두를 멈추게 만들었다.
"윤..수빈 선배?"
지훈이었다.
지훈의 말에 찬은은 에?,라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수빈과 지훈을 번갈아보았고 생전 처음 보는 타인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들은 수빈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보통 술이 취하면 왠만해선 웃는 얼굴을 잘 풀지 않는 수빈인데 타인에게서 들려온 제 이름에는 민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수빈의 목소리와 눈동자는 굳어있었다. 지훈은 평소답지 않게 어물쩍거렸다. 하지만 수빈이 계속 굳는 눈으로 바라보자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서우형이랑 조금 알고 지냈거든요."
서우라는 이름을 들은 수빈의 얼굴은 입꼬리조차 내려앉았다.
"그게 누구야? 혹시 서로 아는사이?"
찬은 또한 얼굴이 굳으며 지훈에게 물었지만 지훈은 그저 입을 닫을 뿐이었다.
이번엔 시선을 찬은에게로 느릿하게 옮긴 수빈이 피식피식 웃으며 찬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후배님이셨네."
"...술마셨어요?"
찬은이 묻자 수빈이 눈썹을 애교스럽게 들어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아냐, 난 그런 선배가 아니란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난 그만 가볼테니까."
손을 귀엽게 저으며 돌아서 가는 수빈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던 찬은에게 지훈이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저분 모셔다드리고 가. 머, 먼저 갈게."
얼빠진 듯한 찬은이 대답했다.
"어. 넌 내일 얘기하자."
찬은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않고 지훈은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며 그들이 지나온 쪽으로 달려갔다. 찬은은 비틀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수빈의 뒤를 달려 쫓아갔다.
찬은이 수빈의 손목을 잡았다.
"왜 울어요."
수빈이 무감동한 표정으로 뒤돌았다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바로 돌아서려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것만큼은 찬은이 용납할 수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왜 그래요!"
그러자 수빈의 팔이 찬은의 목을 휘감으며 차가운 입술로 찬은의 말문을 막았다. 필사적인 듯 해보이는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안을 휘저었다. 더 이상은 말하지마. 그걸로 충분해, 라고 울며 말하는 듯한 키스였다.
잠시 페이스를 읽고 있던 찬은이 수빈을 떼어내며 뭐라 말하려 할때였다. 수빈의 눈에서 마른 듯 했던 눈물이 한방울 툭 떨어졌다.
"남서우가 너무 보고싶어."
그 순간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한가닥, 가슴속에서 수십가닥의 줄이 절단되어버린 듯 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몰려들어와 주저앉고만 싶었다. 수빈은 자신이 아닌 남서우라는 개새끼를 찾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목소리를 찾으며 그의 입술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아냐.
눈 앞에 보이는 모든것이 흐려지는 듯 했다. 내가 아냐.
수빈은 홀려버릴 듯한 그 웃음을 얼굴 가득 채우며 새카만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도 수빈의 눈물을 멈추진 못했다. 아아, 결국 입밖으로 뱉어버렸다. 보고싶다고. 보고싶다고.
그 모습을 보고있던 찬은이 조그맣게 미치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찬은의 두 손을 뻗어 부드럽게 수빈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저기요, 나 좀 봐줘요."
수빈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 가있었다.
"...나한테 그 입술로 그쪽 이름 가르쳐줄때까진 이름도 부르지 않을테니까. 일단은 나 봐요."
수빈의 눈동자가 천천히 찬은에게로 돌아갔다. 찬은이 김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지금은 나 봐요. 나만 봐요."
*
나만 봐달라고, 지금은 나만 봐달라고하는
하찬은이 예뻐죽겠습니다.
오늘 학교 들어갑니다. 아, 또 2주동안 삽질하면서 살겠네요.
코멘트 꼬박꼬박 남겨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복받으세요.
첫댓글 찬은이왜이렇게멋있으까요?어머어머 ㅋㅋㅋㅋㅋㅋㅋ
예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XD
호오,.. 찬은이 멋있네요, 수빈이가 좀더 찬은이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읽는도중.. 수빈이의 이름이 고딩때 친구와 이름이 똑같아서 순간.. 깜놀<... 엄훠.. 물론 개는 여자였지만 ㅎ;;; 작고 귀엽긴 했답니다 .. 아하하<[어이.] 뭐어 ㅎ; 앞으로 내용이 기대되네요! 잘읽었습니다~
수빈이란 이름이 흔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의외로 주변에 많네요? 왠지 안심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올릴게요.
와우!!! 이제 서로 인연이 닿게 되는군요!! 지훈이가 수빈이를 조금 알았던 사람이라니!!
조금 일방적이긴했지만 알긴 알았던거죠. :-)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찬은이.. ... 엄청 멋져요!! 이히히히히히히.. 잘보고갑니다~
찬은이 예뻐할 수 밖에 없는 녀석이라 생각합니다. :-) 솔직한 사람 정말 매력있지 않나요?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찬은이 너무멋있다+_+ 아, 근데 수빈이와 첫키스가 이렇게라니! 답답하다!!!! 수빈아. 서우없다. 찬은이 잡아라!!!!!!!! 아,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그러게요. 짜식들 만난지 몇번이라고 벌써부터 입술을 뭉갠답니까. 코멘트 감사히 받았습니다. :D
서우.. 내 베프 이름도 서운데 으캬캬캬~~ 수빈아, 찬은이도 서우 못지않게 멋있는 남자야아~
어랏, 저도 저 이름 친구에게서 얻은것이라 (웃음) 서우라는 이름 좋지않나요? 멋져요 이름이. 수빈이가 그걸 좀 알았으면 좋겠네요. 코멘트 감사합니다.
악 찬은이 맘 아프겠다 첫키스가 서우를 생각하며 한 키스라서... 물어내물어내 담엔 더 멋지게 사랑으로 한방(?)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