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이라면 잘 모르지만 무진장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알아듣는다.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7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남들은 막내라고 하면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가난한집 막내는별볼일 없다.
피임실패작으로 40살에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께서 나를 원치 안 않았다.
이미 언니4명에 오빠2명이 있어서 원치 안 않아서 날마다 본인의 배를 때렸다고 했다.
그래서 점점 배가 불러와서 이제는 언덕빼기에 굴렀다고 하는데 그래도 배가 불러왔다고
하면서 다시 조선간장을 먹으면 애가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그 짠 간장을 먹었는데
만삭이 되어서 할 수 없이 낳았다고 한다.
정확한 태어난 날짜는 만든 아버지도 모르고 나를 낳으신 어머니도 모른다고 하였다.
내 바로위에 6번째인 넷째언니학교갈때 큰언니가 다락방에 일기장 기록으로 6번째와 7번째
태어난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둘은 큰언니 일기 쓴날이 우리들의 생일이었다.
설마 미리쓰지는 않았겠지? 지나서 쓰였으면 할수 없고, 그렇게 우리둘은 큰언니 일기쓴 날이 생일로
알고 지금까지 살고있다.
아버지는 노름도하고 밖에 나가셔서 다른 사람하고 딴살림도 차리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초등학교시절은 생각이 나지않는데 중학교 2학년때 시절은 평생에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등록금은 2만5천원 3기분 밀려서 7만 5천원 언니랑 둘이 합해서 15만원이 없어서
교실밖으로 쫒겨나서 운동장에서 친구들 수업을 구경하는데 체육샘이 등록금도 안 가져온것이
운동장 친구들구경한다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면서 집에가서 등록금을 가져오라고 하는데
등록금이 있으면 여기에 있겠냐고~~하면서 왜 때리라고 소리를 찔렀다.
진안이라는 곳은 인삼농사를 많이 짓는다. 금산하고 무주하고 경계선이 있는곳이 진안이다.
우리집도 마찬가지로 인삼을 농사를 짓었다. 그 당시 인삼을 캐면 등록금이 해결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린나이에 농약하는 분무기도 매고 열심히 농약도 하고 저녁에 호롱불을 들고
고랑고랑 낫을 들고 지켰다. 인삼캐때쯤되면 도둑놈들이 새벽녁에 인삼을 캐간다.
산속 원두막에서 한달을 넘게 지킨 인삼캐는날 인삼장사들은 아버지한테 20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셨다, 아버지는 농약할때도 없었고 인삼밭을 밤새 지키지 않았는데 아버지라는
이유하나로 인삼장사들은 아버지한테 거금을 주셨다.
아버지는 안주머니 뒷주머니 옆주머니 주머니라는 주머니에 가득 돈을 집어넣고 노름방으로
향해 갈태세였다, 언니하고 난 지금 아니면 저 돈을 못받을것 같아서 무조건 다리하나씩을 붙들고
매달려서 다 필요없고, 그 돈에서 15만원만 주고가라고 애원하면서 다리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버지는 빰을 때리면서 욕을 하셨다. 그래도 메달리면서 이쪽빰도 때리도 괜찮으니 제발 15만원만
주고가라고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무심하게도 그 돈을 다 가지고 그날 그렇게 동네를 떠나셨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 야!! 백남준이 너 늙어서 보자." 그렇게 악을 쓰면서 돌멩이를 양쪽
주머니 3개씩 넣어서 아버지한테 돌을 던졌다. 두번째 정확하게 이마에 꽂혔다.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뒤도 안보고 떠나서 6개월만에 집에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아그들 등록금이라도 주고 가지않았다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날 달밤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문을 걸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또 이성을 잃었다.
오늘은 아버지도 죽이고 나두 죽겠다는 심정으로 문을 부시고 들어가서 수수빗자루로
안죽을 만큼 30분을 넘게 때렸다, 그 당시 난 남자아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싸움을 잘했다.
그리고 중2때 집을 나갈려고 할때 어머니께서 "막내야!! 지금나가면 너 국졸이야 최소한
중학교는 졸업을 하고 가라고 했다. 무슨일을 했든지 너를 졸업은 시켜줄때니 꼭 중학교 졸업을
하고 가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거절 할 수없었다.
그렇게 중학교때부터 나와서 결혼전까지 혼자 자취하면서 알바를 하면서 살았다.
중학교졸업하고 무작정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무작정 남산으로 올라가서 서울 불빛을 보면서 인생의 설계를 시작하였다.
설마 저 불빛아래 내가 살집이 있겠지 하면서 내려왔다. 그렇게 봉제공장에 박스공장에 전자회사에
돌아다니다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겨서 한달에 두번가는 일요일에만 수업이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낮에 일하고 저녁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근로장학생으로
중학교 과학보조로 근무하였다. 첫월급이 4만 5천원이었는데 이것으로 월세 5만원도 못낼것 같아서
과학부장님과 교장샘께 제사정 얘기를 하면서 한시간 일찍보내주시면 아침일찍와서 나머지 일을
하겠다 했더니 흔괜히 허락해주셔서 종로서적 뒤쪽에서 분식집 알바부터 호프집 알바를 5년정도
하였고, 중학교에는 12년 8개월 근무하면서 결혼도하고 아그들을 2명이나 낳았다.
고양시로 들어와서 중학교 경력사항으로 초등학교에 실험실에 취직되어서 지금현재 14년째 근무중
어느정도 얘들이 커고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서 공부에 열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38살 늦은나이에 전문대를 시작하여 전문대 졸업하고 대학교 편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을하고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대학원에서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미술치료과목에 매력에 빠져서 6년동안 미술치료학회에서 800시간
이수하고 다시 건국대학교예술디자인대학원 전문과정까지 졸업을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가 방통대학교 농학과 다니는 친구가 관광학과 추천이 들어와서 3학년 편입을 해서
관광학과를 다니게 되었다.
16년동안 새벽 1시30분에 기상하여 5시쯤에 끝난다. 16년동안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이 나하고
분신처럼 같이한 구르마, 어머니께서 10년정도 장사하시고 주신 구르마로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이 생활한 구르마 나에게 희망주고 꿈을 실연해준 고마운 구르마이다.
남들은 24시간이라지만 나에게는 30시간 같은 인생을 살았고, 새벽신문해서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용하였다. 전문대학부터 시작하여 대학원까지 그리고 미술치료를 배울수 있었고
여행도 다녔고, 해외에 있는 월드비젼과 컴패션, 국내에는 지리산 고등학교와 베이비박스까지 후원을
할 수 있었다, 신문배달하고 남는 신문을 팔아서 후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파지값이 떨어져서
점심식사비를 아껴서 후원금에 보태서 후원할 수 있었다.
구르마가 높낮이 조절이 고장나서 남편이 용접으로 고정시켜주고 바퀴가 고장날때도 용접으로
고쳐주었다, 녹나지 말라고 페인트칠을 해서 비와 눈이 맞았는데 보기에는 멀쩡하다.
그 구르마하고 오늘 마지막 배달을 하였다. 10월초에 고양시에서 양주시로 이사를 간다.
코로나 19 사태가 되면서 4학년을 맞이하면서 너무나 답답해서 우리들끼리 조촐하게 모여서
유선옥 언니집에서 토종닭 잡아먹고 놀면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별 뜻없이
"이곳 조용하고 너무좋다. 언니 200평정도 땅이 있으면 알아봐줘!!!"
말이 씨가 되어서 얼떨결에 6월중순에 땅을사고 지금 집을 짓고 있다.
지금 집을 짓고 있는데 9월말에 완공된다고 했는데 요즘 비가 많이 와서 조금늦어질것 같다
늦어도 10월중순안에 완공되겠지요~~
"여유가 있을때 후원하는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나눌수 있을때 후원하는것이 진정한 후원이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것이 아니다. 나누어줄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하다.
첫댓글 선배님! 살아오느라 애쓰셨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시간내서 함께하며 선배님께 들었던
살아온 이야기 글로 다시 읽으며 공감하고 응원합니다.
거친 삶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맞선 그 용기 박수쳐드립니다.
함께한 구르마 정들어서 아쉬웠겠습니다.
인간승리 바로 백미녀 선배님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이것 저것 챙겨주시는 맘씀 보면서 따뜻한 온정 느꼈습니다.
근사한 집터에 건물이 둘어서면 기뻐할 선배님 얼굴이 그려집니다.
함께 들었던 원목 의자가 제자리에 놓이기를 기대합니다.
물이 흐르는 또랑(섬사투리)엔 오리도 키우시구요.
인연을 감사드리며 구그마 떠나보낸 맘 토닥 토닥입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민희샘 오랜간만입니다. 서면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민희샘에 비하면 그냥 평범한 삶이지만 나에게 고난의 삶이였지요.
고난의 삶 끝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네요.
열심히 살아온 보람을 느끼고 살면서 될수 있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말자는 나의 신조라고 할까?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려고 언제나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중에 한사람입니다.
남은 인생은 봉사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려고요.
집 완공되면 한번 초대할께요,
@백미녀-관광4 선배님! 집 완공되면 초대한다니 감사합니다.
검정냄비에 라면 2개 이야기도 생각닙니다.
스스로 참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선배님
존겅스럽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래요.
선배님이 주신 풍선 아들이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난의 삶 끝에 온 행복 축복합니다.
미녀님 엠티가서 듣고,다시 읽어도 가슴 아리다ㆍ
백미녀 당신 참 대단한 사람ㆍᆢ♡♡
이사가면 집들이 해요
스타다도 못해 얼굴도 못 보고
내 작은 가슴으로 미녀씨 한번 안아주고싶다♡♡
영희언니 오랜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코로나 19가 우리들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네요
당연히 우리 으리으리님들을 초대해서 바베큐
파티를 해야지요
집들이할때 나두 월차 내고서라도 갈끼야. 미녀언니 나 빠뜨리면 안돼요.ㅎㅎ
두루마리 휴지랑 하이타이 사갈께요. 인간승리 백미녀
진정한 위너♡♡
영경동생을 빠뜨리면 안되지~~ 꼭 참석해야지.
저번처럼 선옥언니집에서 무쇠솥걸고 토종닭잡아서 파티해야지
그래야 우리들의 으리으리가 아니겠어
에구~
이게 뭔 조화속인지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출근하는 지하철안에서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 참느라고 괜시리 눈만 깜빡깜빡 거리다가 내려야할 정거장에서 못내리고 훌쩍 훌쩍~
콧물 팽~
에혀~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그 당시는 막막하고 끝나지 않을것 같았는데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세월이 흘러서 추억이
되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네요,
선생이란 작자가 어린 학생에게 그렇게 못되게 이야기를 했을까요
선배님~
등록금 있으면 여기에 있겠냐고 왜 때리느냐고
고래 고래 잘하셨어요
내 속이 다 시원하네...ㅋ
저도 등록금이 없어서
'내일 시험 보러갈거냐'는 아버지 말씀에 이불덮고 밤새 울어서 퉁퉁부은 얼굴로 시험보러간 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결국 한 학기 다니다가 학비가 밀려서 담임이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를 주는지 자존심이 상해서 휴학을 한다니까
'너처럼 휴학한다고 학교 나가서 제대로 풀린애들 본적이 없다며 다시는 학교로 못돌아 온다'고 하던 담임 꼽슬머리와 덧니가 아직도 생각이 나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겨우 마치고 1년 휴학하는동안 동대문시장에 있는 콧구멍 같은 단추가게에서 단추 염색하러 다니는 알바
기를 쓰고 해서 주산 부기 자격증 따고...
그때 아무것도 신경 안쓰고 열흘만 누워서 쉬었으면 하는게 간절한 소원이었는데 결국 못먹고 스트레스받다가 폐결핵으로
청량리 성바오로병원에 1주일 입원하게 됐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밤에 병실 몰래 빠져나와 동전 집어넣고 자판기에서 컵라면 뽑아서 먹는게 얼큰한 국물 마시는게 가장 큰 행복이었어요~ㅋ
요즘 코로나도 그렇고
오늘 날씨도 그렇고
선배님 덕분에
옛날 생각하니 여러가지로
그냥 펑펑 울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래서
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ㅋ
선배님~
잘 살아오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소중한 인연 감사드리고
겁나게 사랑합니다~♡
옛날샘들은 인성이 부족해서 그런것 같아요
지금시대에 같으면 인터넷에 도배를 했을것예요
그 당시 대학교에서 인성이 무엇인지 가르키지 않았기에 그런 샘들이 많았어요 민영후배님 힘들게 학교
다녀셨네요 이것도 추억이 되어서 얘기를 하네요
미녀학우님~~~
올만에 들어오니 미녀학우 자서전이 ~~~
우리가 살아온 시절은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요?
나 역시 미녀학우랑 비슷한 인생이었기에 공감이 되네요.
그래도 이젠 좋은날만 오고있으니 앞으로 열심히 살아갑시다.
날개학우님들~~~
화이팅입니다!
선배님 오랜간만에 인사드립니다~~
80년대는 삶이 힘든시기여서 내힘으로
살기위해 발버둥치었던 시간이었는데
나만 아니라 우리의 나이가 비슷한 50대
중반의 삶이 비슷했네요~~
ㅠㅠ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장편 소설 같은 이야기가...
이제는 행복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갈 일만 남았으니까~
봐도봐도 대견한 우리 미녀~♡
선옥언니 덕분에 공기좋고 사람좋은 효촌리 주민이 되게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10년후 효촌리 반장이신 선옥언니 잘 부탁그렸어요~~~♡♡♡
@백미녀-관광4 지금 막 효촌리로 떠나는 중~♡
@유선옥-관광4 나두 지금출발합니다
선배님 화이팅 입니다
축복도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후배님 감사드립니다~~~
서면으로 인사드립니다,
코로나 19가 지나가면 인사드릴날 오겠지요.
아침에 눈뜨면 카페에 들어와 이런저런 글들 읽으며 (약간 수줍기도 하고 망설이면서 출첵은 하지 못하고...-_-)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요즘의 일과였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울컥 하는 마음에 지난 생을 그려보았습니다. 우선 선배님의 파란만장한 드라마같은 이야기에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지난 세월을 편하게 얘기하실 수 있는 단단한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