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초반,
음악, 연극, 오페라 등에 푹 빠져 있었던 나는
밥을 굶어 가면서라도,
공짜 초대권, 담치기, 스탭 아는 척 하기, 등으로
장르 구분 없이 공연장을 전전했었다
남산 드라마 극장, 삼일로 소극장,
명동의 예술극장, 덕수궁 옆 정동극장(맞나?)등이 주 아지트였고,
감동의 폭을 위해 공연은 꼭 초회 아니면 마지막 회를 고집하고는 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동 예술극장에서 오리지날 “햄릿”을 본 후,
충격으로 근 한 달여를 앓아누웠던 것,
삼일로 창고극장의 “빨간 피터의 고백,
드라마센터의 “에쿠우스"를
열 번 이상 보았던 것 등이 가장 기억에 남고,
솔제니친의 단편을 극화 한
“이반제니 소비치의 하루”에서 주인공이 외치던
“너는 오늘 죽어라 나는 내일 죽겠다”라는 대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42번가,
한 블록 마다 있는 미녀와 야수, 맘마미아, 렌트 등의
유명 뮤지컬 공연장과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온다.
황홀해 진다!
“미녀와 야수”는 매진이고,
“맘마미아”는 성에 안 차고,
보고 싶었던 “미스 사이공은” 공연이 없다.
렌트를 보기로 했다
뉴욕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과 우정을 그린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뉴요커 식으로 각색한 것으로,
지금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컬이다.
이유도 없이 춥고 목마르던 시절
“그대의 찬손” “내 이름은 미미”를 듣는
내 영혼은 얼마나 풍요로 왔던가?
조명이 켜지고,
배우들이 등장하고,
첫 곡 “Turn up”의 전주가 시작되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삘이 제대로 온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광분하기 시작하는 나를 아들애와 딸애가 양쪽에서 한 팔씩 잡고 말리고 있다
바뜨...
삼십여 분이 지나자 졸음이 쏟아진다
연일 강행되는 일정에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오 마이 가뜨!
이건 아니야, 절대 이럴 수는 없어
아들애와 딸애는 진지하다.
이미 세 번이나 보았다는 딸애는
바로 자기 이야기 이라며 매 장면 마다 울고 웃는다.
공연이 끝나고 나의 첫 마디
“배고프다 어디 편히 앉아 밥이나 먹자”
말을 해놓고도 모멸감과 수치감으로 치가 떨린다
식사를 하며 좌절하는 나에게 애들이 위로를 한다
“엄마, 그래도 자세 바로 나오던데요. 뭘...”
집에 돌아와서도 딸애는
“렌트”의 “seasons of love"를 온 집안이 울리도록 크게 틀어놓고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친구들 이야기에 가슴아파하고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가끔씩 멍하니 몽상에 잠기곤 한다
그 모습이 꼭 여물기전의 풋콩처럼 싱그럽고 향기롭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다, 얘야
지금도 여전히 그 곳을 향해 펄펄 끓고 있단다. 얘야
연수 들어가 있는 딸애에게 전화가 왔다
“밥 먹었니?” “몸은 괜찮니?”
“엄마, 멘트 메뉴 좀 바꿔 주세요”
“그래 내 영혼의 목표는 오로지 밥이다 왜?”
아이들이 일가를 이뤄 밥걱정을 안 하게 되면
나는 정처 없는 보헤미안이 될 것이다
뒷돈도 군소리 없이 대준다는 약속도 일찌감치 받아 두었다
딸아이의 말을 빌리면 일명 “노예계약”이다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첫댓글 클릭하세요^^
그 끼가 딸들에게 전수되었나 보군요. 열정없는 인생, 삭막하겠죠? 양태는 바뀌었어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워질 때의 그 꿈이 이루어져 님의 나머지 인생이 마냥 풍요로워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날을 꿋꿋하게 기다릴 거에요 ㅋㅋ...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