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려산 산행기
설을 쇤 이월 셋째 화요일이다. 가끔 산행을 함께 다니는 대학 동기와 정한 일정을 나섰다. 이른 아침 창원실내수영장 맞은편으로 나가 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기는 상남동에서 그 버스를 먼저 타고 와 같은 차에서 만났다. 창원역과 마산역을 지나 평성 종점을 향해 가는 버스였다. 서마산 인터체인지를 지난 내서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월영동을 출발해 오는 버스로 갈아탔다.
마산에서 외곽인 중리역을 지나 감계 골짜기로 들어갔다. 감계지구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감천으로 드니 산골 분위기가 났다. 화목으로 땔감을 하는 난방이 있는지 아침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도 보였다. 초등학교를 지난 감천마을 종점에서 버스는 되돌아 나와 신목마을로 향해 갔다. 종점을 앞두고 한 아낙이 내리고 우리는 종점까지 가서 기사가 버스를 돌려놓은 후 내렸다.
버스 종점에서 광천사가 가까웠다. 사찰 일주문에서는 드문 추사체를 닮은 ‘광려산광산사(匡廬山匡山寺)’ 편액이 눈길을 끌었다. 절 경내로 들지 않고 우측으로 내려서는 계곡을 건너니 단계사가 나왔다. 왼쪽은 산중 독립가옥이 있었다. 볕이 바른 양달의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수종이 다양한 낙엽활엽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경사가 가파름에도 등산로는 지그재그라 힘 든 줄 몰랐다.
산 중턱에서 올랐던 길을 되돌아보니 북향 산기슭 광산사 법당과 요사채가 옴팍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오른 산등선은 낙남정맥이 북으로 뻗쳐나간 화개지맥으로 상투봉이 화개산으로 가는 산마루였다. 이정표가 세워진 산등선에 서니 영하권으로 내려간 기온에 귓불에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우리를 뒤따라 올라온 두 노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광려산 일대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노인은 상투봉으로 가고 우리는 삿갓봉으로 향했다. 능선을 따라가다 바위가 바람을 막아준 볕바른 자리에서 가져간 곡차를 비웠다. 앉았던 자리 앞에는 소나무들이 청청한 모습으로 우뚝하게 자랐다. 쉼터에서 일어나 산꼭대기에 이르니 삿갓봉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진동만과 거제 일대 섬들이 드러났다. 남향으로 설치된 전망대 데크는 세월이 흘러 삭아 부식이 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남겨둔 곡차를 비우고 있으니 아까 두 노인과 다른 우리 또래 중년 사내 둘이 올라왔다. 마산에서 왔다는 점잖고 교양이 있어 보인 사내들이었다. 삿갓봉은 한치로 불리는 진고개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봉화산을 거쳐 서북산과 여항산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광려산을 향해 갔다. 봄이면 진달래꽃이 아름다울 군락지를 지나자 눈앞에 남해 섬들이 조망되었다.
광려산은 광산과 대산을 지나 바람재와 쌀재를 거쳐 무학산으로 건너갔다. 우리는 일 년 전 광산과 대산을 올라 태봉과 진동으로 내려간 적 있었다. 이제는 광려산에서 추곡으로 빠지는 남향 산등선을 타고 갈 셈이었다. 긴 산줄기는 예전에는 등산로가 있었으나 근래는 다니는 이들이 없어 묵혀져 개척 산행으로 내려섰다. 바위더미에서 가져간 도시락과 남겨둔 곡차를 마저 비웠다.
내리막 산등선을 따라가니 경주 김 씨와 해주 오 씨 무덤을 지나니 김해 김 씨 가족 묘역이 나왔다. 산줄기가 끝난 곳은 진등재를 넘는 국도가 함안 가야로 향했다. 미술관으로 바뀐 폐교 초등학교 앞 정류소에 한 아낙이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잠시 뒤 대현 종점에서 오는 72번 버스는 타니 금방 밤밭고개를 넘은 댓거리였다. 마산합포구청 앞에서 내려 국밥집으로 들었다.
늦은 오후라 손님은 우리 말고 없었다. 국밥 수육으로 맑은 술잔을 비우면서 소진된 열량을 보충시켰다. 일흔 중반 주인은 젊은 날 여러 풍상을 겪고 의연하게 석양을 바라보는 듯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정과 시댁이 내 고향 의령의 친숙한 동네 이름이라 더욱 반가웠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반듯하게 자라 성혼시킨 세 자녀가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어 듬직하다고 했다. 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