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5,1-6 요한 15,1-8
사랑
포도에 관련된 비유들이 성경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포도가 성경의 땅인 이스라엘의 주된 농작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오늘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며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가지에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글어가는 과정은 신앙인의 삶과 같습니다.
포도가 익어가려면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양분과 수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성숙을 위한 양분과 수분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슨 뜻일까요?
포도나무의 열매는 물론 포도이지만 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열매’는 바로 신앙인의 삶의 거룩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1,45)는 말씀처럼
우리 삶의 성화야말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의 참된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성장시키는 양분과 수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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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5,1-6 요한 15,1-8
진짜 순 참 포도나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여러분들,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이육사의 싯귀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느낌이나 별 이미지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요?
우리가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야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바로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다면 머리에 쓴 빵모자나 가슴에 단 별이 아닙니다. 바로 포도나무였어요.
구약에서 수없이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나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듣기로 해요.
시편 80, 8입니다.
“이집트에서 빼내어온 포도나무, 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신 후
그 앞에 땅을 가꾸시니 뿌리박고 널리 퍼졌사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하는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 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이사 5, 1-3)
예언자 예레미야도 한탄합니다.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는데 너는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구나.” (예레 2, 21)
호세아 예언자도 참담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를 맺기는 했으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호세 10, 1)
예제키엘 예언자는 15장 전체를 ‘포도덩굴의 비유’로 할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외칩니다.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지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넣으리라.”
이렇게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고,
포도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포도나무가 원래의 좋은 품성을 잃고 열매 맺지 못하는 잡종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통탄하며 경고를 퍼붓고 있습니다.
원래는 좋은 포도나무, 진짜, 순, 참 포도 나무였는데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변종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징으로 가장 잘 드러난 외적인 표징이 바로
성전 중앙에 있던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덩굴이었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전의 중앙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포도덩굴은
다시 한번 이룩할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포도덩굴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힘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말로 ‘참’으로 옮긴 희랍어 단어는 alethinos (에이레씨노스)인데
정통적인,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등의 의미를 지닌 낱말이지요.
우리가 참기름을 사려고 보면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선전해 놓은 간판을 보지요.
알다시피,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참기름은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참기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가짜가 아닌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라는 의미이고
여기서 ‘진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휘황찬란하게 보이는 성전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덩굴은
가짜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셨을 말씀을 귀 기울이고 들어봅니다.
“그대들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만일 그대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을 지니고 안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산일 뿐만 아니라 찬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시오!
하느님께서 좋은 참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은 사실이지요.
시편 말씀대로 그 좋은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빼내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말이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대들은 점점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어요.
예언자 호세아 애통해하면서 한탄한대로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구료.
하느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제단의 향이 아닌데 말이오.
예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치 잘못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넣듯이
그대들이 불에 던져 질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이다.
이제라도 그 불을 면하려거든 제발 아버지께서 보내신 나 예수를 믿으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대들을 구원한 진정한 구세주란 말이오.
그대들이 구원을 얻으려거든 모두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단순히 나에게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느냐고요? 내 말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과 허례허식으로 전락한 율법, 그 중에서도 안식일 법, 정결례 법, 제사 등의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대들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지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요? 우선, 나와 함께 머무르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듯이 나에게 머물러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다시 말해,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지요.
그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봄이 오기 전에 가지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아버지께서 굳이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셔도
나를 떠난 가지는 이미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리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불을 보듯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시오.
그러니 제발 그대들은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자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런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말씀들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제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아껴주고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기로 합시다.
제발 당신이 진짜 순 참 포도나무라고 외쳐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로 해요.
예수회 류해욱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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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5,1-6 요한 15,1-8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값진 비유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홀로 남겨진 가지는 불을 지피는 데 던져지거나 땅의 거름으로 사라져 가겠지요.
열매를 맺는 풍성한 수확을 생각하면 가지는 나무에 제대로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는 다른 두 지향점의 공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열매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도나무로 소개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기보다는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로 거듭난다면 서로의 원의와 지향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더러 당신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자고, 어깨동무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두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에 위험한 것들은 대개 하느님을 대상화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대상화된 하느님, 자기 자신과 다른 하느님, 그리하여 늘 목적이 되어 버린 하느님은 그저 우상일 뿐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