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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백두대간 산행 2013.03.10 도래기재-구룡산-곰넘이재-신선봉-차돌베기-깃대배기봉-부쇠봉-태백산-화방재 23.6km 12시간
출발 :03.04
도래기재 도래기란 지명의 어원은 도역으로 옛날 이 부근에 말을 갈아타는 도역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2주만에 다시 도돌이표처럼 도래기로 돌아와 다시 산을 타게된다. 또 밤이다.
04:34
나는 야간 산행이 싫다. 그 가장 주된 이유는 배변습관 때문이다. 마치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내 배변 시간 때문에 새벽이면 아무리 산행 중이라 하더라도 꼭 볼 일을 봐야만 한다. 별 문제 없을것 같지만 찬바람이 쌩쌩부는 어두운 산중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는것도 무지 겁나는 일이거니와 아무도 없는 산중에 외톨이가 되어 일행을 뒤쫒아 가야하는 상황 또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동료들에게 좀 기다려 줄것을 부탁해 문제를 해결했지만 앞으로 남은 수많은 무박산행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05.46 구령산
고민이라! 인간의 하루는 86400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략 오만초가 된다. 그 오만초 동안 우리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되니 거의 매초당 한가지 생각을 한다는거다. 이렇게 보면 생각의 시간은 정말 빠르고 걱정거리 또한 너무 많다. 그런데 생각의 90%는 대게 어제도 했던 생각으로 무의식 중에 어제한 걱정들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생각의 40%는 전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망상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대한 걱정거리다. 22%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사소한 걱정. 나머지 4%는 걱정한다고해도 어쩔 수 없는 고민, 그리고 마지막 남은 4%만이 진정한 고민거리다. 오늘 산길을 걸으며 세상 오만가지 근심은 다 날려버리고 최후로 남은 4%의 근심이나 붙들고 고뇌하는 인간인척이라도 해 볼까.
05:46
두시간 사십분을 올라 구룡산에 도착하였다. 부스럭거리는 소음뭉치를 결혼식 부케처럼 휙 어둠 뒤로 던져버린다. 산은 금새 깊은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길을 걷는다는것이 운동보다는 오히려 수양에 가깝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지만 특히 어둠속을 걸음에 집중하여 걷는 일이야말로 더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든다. 명상을 할 때나 혹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잠들기 직전에 나오는 뇌파를 알파파라하고 운동을 할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뇌파를 베타파라 하는데 산행 중에는 주로 알파파가 나오는것으로 보아 산행은 운동이라기 보다는 명상에 가까운 자기 수련법이라 할 수 있겠다.
06:19
고직령 고개를 일컷는 말중에 고개외에도 재,치,령들이 있다. 고개는 재와 함께 순 우리말로 옛날에는 재라는 단어로만 쓰이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고부터 고개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것 같다. 峙는 고개의 높이보다는 주위에 험한 산이 놓여있을 때 주로 쓰이는 단어로 지리산 정령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嶺은 추풍령에서 알수 있듯 꼭 고개가 높아서 붙이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고개를 일컬어 대개 령이라 한다. 백두대간 고직령. 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안스러운 적막만이 백설을 뒤발한 채 대간꾼을 쓸쓸히 마중하고 있다.
07:05
곰넘이재 가는 길 산속 아침은 더디게 왔다. 더디게 온 아침이라도 사물의 윤곽이 여자의 어깨선 처럼 드러나며 마침내 밝음이 세상에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는 순간, 그 순수하고 명징한 자연의 배려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마치 기분 좋은 잠을 자고 난 아기의 선하고 맑은 눈동자처럼 아침의 그윽한 눈길이 비질하듯 가슴을 쓸고 다녔다.
그 아침의 청량함 속으로 연어살과 같은 거제수 나무의 나신들이 속속 드러났다. 거제수 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고로쇠 나무처럼 수액이 풍부하여 去災水 즉 나무의 수액을 마시면 재앙이 사라진다는 속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참고로 거제도와는 아무 상관없다. 거제수 나무는 살색의 수피도 그렇지만 한풀 한풀 껍질을 벗는 모습이 꼭 치료를 받지못한 화상 환자를 닮아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다. 그것도 한겨울이니 오죽하랴!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목질은 판목으로 쓰일 정도로 단단하다. 거제수 나무는 사스레 나무나 자작나무처럼 주로 중부 이북의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다. 흰눈 쌓인 산길 풍경을 더욱 차갑게 만들며 서 있는 거제수 나무. 그 껍질을 주워 누구에게라도 편지 한장 쓰고 싶은 아침이다.
07:09
곰넘이재
마침내 일행을 만났다. 꼴찌들에게는 산행 중에 일행을 만나는 일만큼 반가운것은 없다. 일행들은 바람을 피해 이미 식사를 마치고 길을 막 나서려는 중이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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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9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하루 중 이 시간대의 햇살을 가장 사랑한다. 열시가 넘어면 찍사들은 사진기를 들고 현장에서 철수한다. 아침 산행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이처럼 정갈한 햇살을 마주할 때이다. 선어와도 같은 이른 아침의 첫 햇살. 너무나 투명하고 영롱해 마치 햇살이 내 몸을 투시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 사물들이 아무리 못난 얼굴이라도 이 시간 동안에는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싱싱하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매혹적, 사랑스러움. 대상이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이런 감정은 아침 산길이 주는 선물이다. 햇살이 살갗을 쓰다듬는것 같은 에로틱한 기분, 폐장을 넘나드는 맑은 공기. 오늘 하루를 내내 이런 기분으로 걸었으면 좋겠다.
제아무리 태백의 눈이라 하여도 春心을 어찌 당하겠는가. 봄기운에 속이 허해진 눈밭은 숨벙 숨벙 개미 지옥같은 함정들을 만들어 산꾼들의 지친 발을 노렸다. 푹 푹 빠지는 발. 그리고 그것이 또 재미있어 장난을 치는 동료들. 지리한 산행을 통해 얻는 고통을 적절히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산꾼들이 가진 독특한 재능이 아닐까.
08:02
신선봉이 있는 풍경
산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는 인생을 산길에 비유하는 습성이다. 산행처럼 삶을 함축하는 소재가 또 있을까. 오늘도 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겠지만 힘이 든다고 하여 산행을 실패라 규정짓지 아니하고 힘이 덜든다고하여 성공한 산행이라고 규정짓지 아니한다. 인생을 길게 펼쳐 보면 이처럼 오직 하나의 산길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 수많은 부침이 있고 인간들은 이런 부침을 성공과 실패로 규정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생에 있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도 성공도 없다. 오르는 길이 있으면 내려가는 길이 있듯 실패는 성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실패를 교훈 삼아 마침내 성공을 이루었다면 이 실패는 과연 실패인가 성공인가?
마구령 가는 길에 갈곶산 연봉을 마지막으로 오르내리며 산길에 힘이 부쳐 가는 길을 멈추고 "무슨 산이 이렇지"하며 내뱉는 내 탄식을 이어받아 옆에 있던 산대장님이 "산이 이렇지"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할! 그 한마디가 내 머리 속에 우레처럼 강렬하게 꽂혔다. 그래 산은 산다워야한다. 산이 산이어야하는것이지 산이 물과 같아서는 안될 말이다. 산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치고 이만한 말이 또 있을까? "산이 다 그렇지!" 산길을 나서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미역국을 끓여주시며 내게 국맛을 보라고 하셨다. "국이 어때?" "국이 국이네요" "무슨 말이야,맛이 있다는 말이냐 없다는 말이냐?..." "국이 국맛이네요" 국이 딱 국맛이라는 말만큼 국에 대한 찬사는 없다. 그렇다! 산이 산인것처럼 산의 본질이 변해서는 안되고, 또 변할 수도 없듯 국은 늘 국맛이어야하고 니맛도 내맛도 아닌 어중간한 맛을 지녀서는 안된다. 가장 나다운 나. 세상 풍파에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나. 그 나를 찾아 마음 공부 나서는 일이 산행이다.
다섯시간을 산행하고서야 이제 겨우 신선봉을 코 앞에 두게되었다. 우리의 갈 길은 멀고도 멀다. 태백산은 역시 큰 산이라 산을 오르 내리는 부침 또한 심하다. 오르는 모든 비탈들이 깔딱고개다. 길도 호락 호락하지 않다. 오늘 9시간 산행이 예상된다고 했지만 벌써 다섯 시간을 소모해버렸다. 마음이 고무줄처럼 늘어져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이 때 마음을 다잡아야하지만 다잡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바람막이 오리털 패딩이 아니어서 억지로 좁은 곳에 우겨넣을 수는 있지만 그 상태대로 놔 둔다면 결국 발광을 하고 만다. 마음에 여유를 주어야 한다 힘들 수록 더 그렇다. 이럴 때 제일 도움이 되는 말은 뜻밖에도 "산이 그렇지" 하는 산대장님의 선문답같은 한마디다. 그래 산은 이런거야. 나는 산을 타고 말면 그 뿐,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그 뿐. 어자피 산은 나를 초대한적 없으니까.
08:27
신선봉 정상
게으른 햇살이 넘치는 숲
삶은 언제나 초행길을 걷는것과 같다. 대간길도 마찬가지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늘 두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인생에 멘토가 있듯 길에도 이정표가 존재한다. 어디로 가야하는 바를 가르쳐 주는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 속에 놓인 그 많은 이정표들을 놓치고 지나버리기 일수다. 내 인생의 전환점. 나도 불과 오년전까지만 해도 산이라면 고작 동네 뒷산에 오르는것이 전부였다. 내 다리의 신경이 반쯤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산을 모른 채 살아갔을것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에 산이 찾아왔다.
09:25
차돌베기
왜 우리는 살아가며 놓쳐서는 안될 삶의 이정표를 보지 못하고 통과해 버리고 마는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삶이 대부분 관성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들어 준 성공의 미끼를 좇아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달려나가는 삶. 위기와 방황의 순간, 누구나 전환의 순간을 맞이하게된다. 전환점은 실로 삶의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이정표가 없는 삶은 차라리 방랑에 가깝지 않을까? 여행자는 스스로 길을 찾아 걷지만 방랑자는 사람을 대신하여 길이 걷는것과 마찬가지다. 추신: 차돌베기에서 차돌을 찾지 못했다.
09:43
비탈길을 의지해 이른 점심을 먹었다. 625를 겪은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그린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불현듯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이다. 일제 침략과 한국전쟁을 통해 이 민족이 얻은 가장 큰 덕목은 이제 더 이상 무서울게 없다는 자신감이다. 우리는 역경을 통해 더 무모하고 용감해졌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경제를 일으킨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것이 아니다. 준비된 자의 것이다. 수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나는 얼마나 강해졌으며 또 얼마나 준비되었을까?
구룡산이 보이는 풍경 졸참나무 우듬지 사이로 우리가 걸어 온 마루금이 보인다. 고치령 이후 줄곧 육산을 걸어오며 철망 뒤의 부옥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있으되 있지않는듯한 풍경. 내것이되 남의 것만같은 풍경. 그런 풍경들이 늘 우듬지 너머에 쓸쓸히 걸려있었다.
"저리로 가세요"
겨우살이
태백산 겨유살이, 태백산 가는 길에 겨우살이 지천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누구는 암에 좋다하고 누구는 혈행에 도움을 준다고 하는데 참나무 가지 마다 까치집처럼 둥지를 만든 모습이 소담스럽기 이를 때 없다. 길을 가는 자의 마음 또한 겨우살이처럼 넉넉해 진다.
가짜 깃대기봉에서
기념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설령 가짜라도 기념하리라. 이것은 모 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고 진짜 정상석은 여기서 200m 쯤 더 가야 나온다.
산림청에서 세운 진짜 표지석
11:09
깃대베기봉에서 부쇠봉 가는 길은 그야말로 설원이다. 하늘의 파란 빛깔이 스며들 정도로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눈밭은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 설원을 마냥 기분좋게뚜벅 뚜벅 걸어갈 수 있는것이 아니라 곳곳에 산재한 녹아 물러진 눈구덩이를 교묘히 피해가며 마치 지뢰밭을 걷듯 조심해서 걸어나가야만 했다. 선답자의 실패를 눈 앞에 뻔히 보고서도 헛발질을 하기 일수였다. 너무 깊이 발이 빠져 일행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을 빼내기도 했다. 걷다보면 발을 밟는 규칙이나 요령따위를 익힐법도 하건만 발이 빠질 때는 그 요령과 규칙들도 여지없이 어긋났다. 시간은 설원을 미끌어져나가는 썰매처럼 우리를 지나갔고 우리에게는 숨길 수없는 시간에 대한 초조감이 더해갔다.
12:30
12:45
예상외로 산행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가지고간 물이 다 떨어져버렸다. 물을 많이 안마시는 일행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물이 제일 많이 남았을 법한 우리 산대장님께 물 좀 달랬더니 "아니 물도 없이 부쇠봉에 갈려고요?" 하시면서 핀잔을 주고는 물을 패트병 하나 채워 주셨다. 정말 산대장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한병 가득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이제 정말 코 앞이 부쇠봉인데. 러셀이 되지 않은 거친 눈밭을 이리저리 가늠질 해가며 우리는 기어이 산을 오르고 말았다.
부쇠봉 0.4km
눈이 많은 겨울 고산의 백미 중의 백미는 사스레 나무 숲이다. 백두산에서도 한라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스레 나무의 고통에 신음하는듯한 저 모습을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인간의 모습을 나무에서 찾아 영혼을 이식하여 사랑하는것이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하얀 수피. 눈보라에 마구 뒤틀린듯한 자태. 그 눈부신 영혼들의 협주가 부쇠봉 위에서 화사하게 떠다녔다.. 나는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통해 위로받았다. 산을 오를 때의 온갖 힘들고 부정적이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불현듯 사라지고 일망무제한 하늘 끝에 바위처럼 깊고 확고한 평화가 쏟아졌다.
12:57
부쇠봉에서 천국의 들머리에 서 있는것처럼 마음에 큰 평화가 찾아왔다.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봄과 같은 갈망이요 아무리 마셔도 해가 될것같지 않은 물과 같은 해갈이었다. 심연을 차고 오르는 물고기와 같은 흥분이요, 몸을 던져 얻고싶은 요람과도 같은 평화였다.
우리가 지나온 깃대베기봉으로 이어지는 연봉
그 어디에도 음모가 있을것 같지않은 자잘한 잔설만이 어지럽게 널린 풍경 하나가 걸려있다. 설원이라 불렀던 그 눈밭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열두시가 지나면 모습을 바꾸는 신델렐라처럼 산은 면모를 일신했다. 내가 지나 온 길은 저 산길이 아니라 다만 한 순간의 꿈이었을 뿐이다.
청옥산 방향
쪼록바위봉-진대봉- 달바위봉 높은 곳에 올라 낮은 곳을 생각합니다. 조용히 닻을 내려 낮게 마음을 머물러 둡니다. 산 파도 거칠고 우리의 길 또한 험한데 봄은 또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들어 나를 흔들고 갑니다. 세상의 온갖 일들은 다 흔들거리는것이라 우레처럼 세상이 나를 흔들 때마다 나는 이렇게 또 높은 산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물고기가 회유하듯 저 낮은 생의 母川을 향해 그렇게 헤엄쳐갑니다.
함백산이, 아니 그리움이 보인다. 고독에 꼭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홀로 산길을 걸을 때, 문득 자신이 세상 속 풍경이 되어버렸다고 느껴질 때, 허전하면서도 오히려 맑아진 기분을 느낄 때, 그것이야 말로 고독이다. 고독은 세상의 불필요한 우수리를 제거하고 오로지 내가 나 다왔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외로움과는 다르다. 외로움은 사람이 그리워서 느끼는 감정이다. 함백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순간. 그것을 고독이라해도 또 외로움이라 해도 좋다.
13:05
"아이구 한 숨 자고 갈란다"
자유의 상대어는 구속이 아니다. 자유의 반대는 관성이다. 자유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지금껏 지켜온 생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것이다. 자유의 높은 산에 올라 지금껏 나를 가둔 세속의 관성을 벗어난다는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랴. 저들의 모습에서 무한 자유가 느껴진다.
태백산 정상부의 사람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
13:15
주목이 덤성 덤성 자라는 태백산.
죽어가는 것일까? 피어나는 꽃보다 죽음의 상처들이 더 아름다워 그 상처를 향해 사진을 찍는다. 주목처럼 아름다운 상처를 품고 늙어갈 순 없을까? 내가 살아온 영광의 아우라보다 내가 극복한 상처의 아름다움을.
그대처럼 살아 온 한 인생을 추념하며....
깃대없는 깃대베기봉에서 출발하여 하얀 설국의 기차가 태백을 오른다. 상처받은 사람들이여, 다 태백으로 가는 열차에 오르라! 이곳은 상처를 추념하는 곳. 타인의 상처를 통해 그대의 상처를 또한 치유하는곳.
한없이 넓은 반야의 지혜를 닮은 부쇠봉
부쇠봉의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천제인 단군의 제를 올리는 천제단이 태백산에 있는것으로 미루어 단군의 아들인 부소의 이름을 따서 부쇠봉이라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를 때는 몰랐으나 되돌아보니 그 넉넉한 품이 모양 그대로 반야이다. 천제단이 있는 수두머리에서 부쇠봉을 거쳐 각화산에 이르는 큰 고개를 아주 오래전에는 천령이라하여 하늘고개로 삼았다. 하늘에 닿을듯이 높은 고개라는 뜻이었을것이다. 고려 이후 새길재가 생기며 왕래가 끊어졌다고 한다. 새길재는 혈리에서 천평을 넘어가는 고개로 새길령이라고도 한다.
상처를 입고도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나무처럼
어지러운 삶 속에서도 우주를 품고도 남을 희망의 씨앗 하나쯤 가지고 사는것은 어떨까. 나는 이미 머물고 싶지 않은 곳에서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다. 나이의 무게야말로 내 삶의 무게다. 젊음은 무기력한 삶일수록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이제 나에게는 쾌락을 도박할만큼 판돈이 없다. 나의 마지막 판돈이 되어버린 산행. 내 마음의 싱싱한 새싹이다.
13:32
태백산 천제단
세상을 벽이라고 느꼈을 때, 바로 그때 담쟁이처럼 벽을 오르라. 그것이 정말 저 절벽의 산처럼 높고 험한것일수록 서두러지 말고 나아가라. 도종환이 노래한 담쟁이처럼 한뼘 하늘이라도 꼭 두 손 잡고 나아가라. 푸른 잎으로 절망을 다 덮을때 까지.
나태주 시인의 싯구처럼 오래 보아야, 오래 볼 수록 사랑스러운 나무.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14.45
화방재로 가는 하산길
14.52
사길령 도착
생각해보니 장군봉에서 사길령에 이르는 구간을 나는 미친듯 달려왔다. 산행 끝머리에 이렇게 힘이 많이 남았다는것은 선두에게 들키기 싫은 비밀이다. 긴 산행거리에 물은 떨어지고 목은 말랐지만 힘의 안배는 잘 한 셈이다. 새로울것이라고는 없는 맹물같은 오십대를 살아가며 이렇게 매번 도전이 내 앞에 놓여있다는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조선 상고사를 쓴 신채호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 풀이했다. 도전할 목표를 정하고 여기에 자신있게 응전하는 일. 매주 반복되는 신나는 산행이 힘없이 늙어가는 나를 붙잡는다. 산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어떻게 생고생을 마다않는 나를 이해하겠는가. 나는 더 이상 친구들에게 나를 설명하지 않으련다. "우리의 적은 목표가 너무 높아 이루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너무 낮은 목표를 쉽게 이루어버리는것"이라고 말한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나는 오늘 너무 낮은 성취에 만족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어쨋던 나는 오늘 내가 세운 목표 하나를 완성하였고 이 또한 지나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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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3분 화방재
화방재로 가는 마지막 관문. 저 숲 너머가 화방재다. 콸콸 쏟아지는 물에 등산화와 아이젠을 씻고나니 머리를 감고 멱을 감고 싶은 마음이 꿀처럼 간절했다. 봄이 성큼 다가온 모양이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봄인것은 아니다. 마음의 봄은 훨씬 빠르다.
- 후 기-
후회란 인생이 기대를 너무 멀리 벗어났거나 아직도 해보지 못한 꿈들이 기름 자국처럼 덕지 덕지 남았을 때 하는거다. 오늘 하루 내 꿈과 그 꿈을 향한 도전이 산비늘처럼 켜켜히 빛났던 날. 내 뜻대로 살았기에 후회 없다. 앞으로도 그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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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Poll원장님!!
멋진 흑백의 조화...
너무 멋있어서..
생각없이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움 대간길을 표현하였으니...
정말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아름다운 작품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 퍼 갑니다.........
너무 가볍게 대간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자문해 봅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아까운 것들인데
진도는 잘 나가는데 뭔가 아쉬워 뒤돌아 보곤 합니다
나의 준비가 너무 적어서 돌아올 때 아쉬움이 많은 것 일까요
체력이 좋으신 탓이 아닐까요.저는 산 잘 타시는 분이 부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