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4:1-2 충성이니라
‘충성’ 한다는 것은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최선의 다해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 충성의 단어 ‘피스토스’는 믿음의 단어 ‘피스티스’에서 파생이 되었다. (누가 충성하는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충성 함) 그러므로 ‘충성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므로 충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반응과 태도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청지기는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그가 맡은 일에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오늘 본문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말씀하셨다. 나의 상황이나 기분과 판단에 따라 충성의 여부가 또한 범위가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삶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100% 반응해야 한다. 이렇게 반응할 때,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시며 상을 주신다. 마25:21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셨다. 이 시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자.
1. 적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마25:23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셨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의 달란트를 받지 못한 종은 아무도 없었다. 즉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모든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재능) 충성해야 한다. (비교하지 말자 - 비교하면 열등감, 좌절감에 빠지게 됨) 1달란트 받은 자는 충성하지 않았다. 왜, 자신의 생각 때문이었다. 첫째는, 기분이 나빴고, 둘째는, 혹시 장사하다가 다 1달란트를 잃어버릴까봐 염려와 걱정 속에 충성하지 않았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1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반응을 하고 있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감정으로, 너무 인간적인 계산법으로 반응 하고 있음) 주인이 돌아와 계산할 때, 충성하지 않은 1달란트 받은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였다. 그가 주인 앞에 섰을 때, 충성하지 않음을 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는 주인 앞에서 핑계와 변명을 하였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을 하였다. 자신이 일하지 않음을 정당화, 합리화 했다.여러분, 만약 1달란트 받은 자가 충성했지만 2,5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두 배로 남기지 못했다 해도 주인은 그를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이 그를 책망한 이유를 우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25:30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하셨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이 종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나는 청지기 - 모든 상황 속에 늘 충성하는 종이 되자) 창39장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다.
창39:1-5에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적은 일에 충성함 - 주인이 더 큰일을 맡김 - 가정총무로 신분이 상승 됨)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에 성공할 꿈을 가지고 자동차 공장의 취직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는 자동차 공장에 취직이 되어 그 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한 계단 한 계단 승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 제일의 자동차 기업주가 된 것이다.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날의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2.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영국 런던 워커 미술관 (Walker Art Gallery)에 ‘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을 화가 ‘에드워드 포인터’ 라는 사람이 그렸다. 이 그림은 A.D 79년 화산의 폭발로 완전히 묻혀버렸던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에 있던 고대 항구도시 폼페이를 발굴할 때, 거기서 발견된 화석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발견된 화석 중에 하나가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의 화석이었는데, 그 경비병은 성문 앞에서 무기를 들고 부동자세를 한 채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죽어간 그 보초병의 모습을 ‘에드워드 포인터’는 ‘충성’이라는 말로 이름을 붙여 그린 것이다. 그 그림은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화산재와 용암이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폼페이 성의 문지기였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눈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죽도록 충성하였고 결국 그는 성을 지키다가 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이다.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셨다. (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본이 되셨음 -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 - 우리들도 죽기까지 충성하여 내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함) 빌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다. (나의 구원은 예수님의 핏값이요, 목숨값으로 이루어짐 - 그 은혜 잊지말고 충성으로 보답하자) 서머나는 황제 숭배도시로 다원주의, 혼합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했던 도시였다. 그런 서머나에서 서머나 교회는 정말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했다. 그 때,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순교를 당했다. (서머나의 총독이 한 번만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내 평생 86년 동안에 예수님이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하고 죽도록 충성함)
오늘 본문 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일꾼'이 원어에는 "휘페레타스“ 되어 있다.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 쇠사슬에 묶여 죽을 때 까지 노를 짓는 자가 (충성) 일꾼인 것이다. (주신 사명에 묶여 죽기까지 충성하자 - 가나안교회로 불러 주심 - 죽도록 충성하는 일꾼으로 교회를 섬기자 - 주의 은혜에 보답)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황제 차르에게 지극히 충성하는 한 부하가 포로로 잡혔다. 그는 차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사들이 그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고 총살하려고 했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죽음이 앞에 있는데도 조금도 변치 않는 그의 충성심에 감탄한 한 장교는 그의 총살 명령을 취소하고 그의 팔에 나폴레옹을 뜻하는 N자를 새기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팔에 N자가 새겨지자 그는 순간 옆에있는 도끼로 N자가 새겨진 팔을 잘라 버리며 “내 몸은 오직 차르 황제에게 속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비록 그가 적이었지만 충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충성은 충(忠)과 성(誠) 으로 되어있다. 충은 중심으로 되어 있다. 중심이 변하지 않는 것이 충이다. 그리고 성은 언 (言)과 성(成)으로 되어있다. 말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정성이다. 말하자면 충성은 ‘중심에서 나오는 정성’이다. 나는 이 충성이 말하는 의미처럼 왕이신 나의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이제부터 더욱 적은 일에,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