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다가 다시 찾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 눅15:11-32복음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탕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잘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종종 ‘알지, 알아’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러한 선입 견을 갖지 않고 처음부터 진지하게 읽어가다 보면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매력이고 깊이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연속적으로 잃었다가 다시 찾는 「세 가지의 비유」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① (3-7) 하나님 아버지는 100마리 양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산을 찾아다니다가 잃었던 양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뻐하는 목자와 같은 분이시고 ② (8-10) 하나님 아버지는 10개 중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아 온 방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한 드라크마 다시 찾은 여인의 기쁨을 나누는 말씀이고③ (11-32) 말씀에는 아버지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한 마리 양, 한 드라크마, 이어서 한 아들을 찾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비유는 한 가지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의 비유 중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보통 「탕자의 비유」 라고 합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셨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일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는 우선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눅15:1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 광경을 가장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2절에 나옵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왜 자신이 그들(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내 몫을 챙겨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눅15:11-16) 11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12 그 중의 작은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그들 살림을 그들에게 나누워 주매 13 그 뒤 며칠이 안 되어 작은 아들이 전부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그가 다 탕진한 뒤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니라.
15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16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자기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소서 하였을 때 아버지가 그들 몫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라고 하였습니다(12). 이때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스럽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하나님이 만드신 생의 법칙 곧 인륜과 도덕의 법칙을 떠나서의 자유는 무엇인가? 공중의 새가 공중의 대기를 떠나 자유 하겠습니까? 물고기가 물을 떠나 자유가 있겠는가? 만일 그런 자유가 자유라면 사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바로 이런 자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부친의 구속을 받기 싫어 멀리 가서 자유로이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갖고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이렇게 이 시골에서 썩을 수가 없습니다. 내 분깃을 가지고 도시에 가서 출세해 보겠습니다." 라고 조르기에 아버지는 분깃을 내주었습니다.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그가 살던 동네를 떠날 때는 그의 주머니에 돈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돈만 있으면 친구도 빨리 사귀어집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면 그 친구들이 가버립니다. 이 사람은 돈을 많이 가졌으므로 친구도 많아서 세상이 모두 자기 것으로 생각될 지경이었음로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옛말에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들고 방탕 자의 돈 앞에는 건달과 난봉꾼들이 모여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아들은 돈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돈을 마구 써 버리고나니 결국은 재산이 다 없어지고 나니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잃은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결국 남의 돼지를 치는 지경까지 떨어졌는데,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쥐엄열매)을 먹으려 해도 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주린 창자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훌륭한 집에서 자란 이 아들이 그만 이제 돼지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결국은 낮선 사람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돼지고기는 불경한 고기로 절대 먹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 돼지를 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죄악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술에 중독이 된 사람은 술을 또 먹어야 살고 담배 중독자는 자기 몸이 썩어 가는데도 담배를 피워야 살고 마약 중독자는 죽어가면서도 마약을 찾습니다. 탕자는 주린 창자를 채울 길이 없어 돼지가 먹는 것을 먹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탄의 세계는 풍년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나니 비로소 회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1. 탕자의 회개
결국 탕자는 그가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돌이켰다고 고백합니다.
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양식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그가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he came to himself"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 탕자의 회개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회개”는 자기 자신을 참으로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맹목성에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사도 요한의 안타까운 권면이 나옵니다.
(계3:17-18)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 교회들이 너무 부요하다보니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면 그 때가 회개할 기회인줄 믿습니다. 무엇이 탕자의 눈을 열게 하여서 자기 실존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탕자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흉년과 궁핍 그리고 고독이라는 환경을 이용하셨습니다. 그의 주머니가 불룩할 때, 주변에 친구들이 몰려 있을 때, 사업이 한창 잘되고 있을 때는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돈도 떨어지고 친구도 떠나고, 그리고 홀로 남겨졌을 바로 그 고독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과 마딱드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때론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입니다. 성도님들이 한없이 깊은 절망과 고독 속에 있다면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임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의 영안이 열려 우리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인지를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탕자는 혼자 이런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깁니다.
(눅15:18-20) 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중 하나로 삼아주소서, 하리라 하고 20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그는 이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최후의 소망은 아버지 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 올 때 아버지께 한 짓이 생각나서 양심상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요청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20a).
그리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 계획한 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21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고, 감히 아들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구차한 변명을 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회개는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과거를 정리하는 일에 대하여 세상은 두 가지로 우리에게 충고할 것입니다.
- 하나는 “그게 왜 죄야? 그거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그 정도 죄짓고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는 충고입니다.
- 또 하나는 “그냥 잊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죄인 것은 틀림없지만 자꾸 생각하면 너만 괴로우니 그냥 잊는 것이 최선이라는 충고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탕자의 모습을 보세요. 참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선 자신의 부끄러운 죄된 삶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의 벌거벗음과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변명은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은 참된 회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히 회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2. 회개의 결과
아들의 돌아옴은 아버지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눅15:20b)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식을 벗어난 모습입니다. 오히려 아들의 생각이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 중의 하나로 받아달라”는 그의 말은 옳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그가 아버지 집의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몇 날 몇일을 백배사죄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의 몇 일 후 아버지가 젊잖게 나와 아주 엄격한 얼굴을 하고...
“네가 이제 정신을 제대로 차렸구나. 이제 용서해 주마”해도 아버지의 사랑이 훼손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보수적인 유대 문화권에서 온 동네로부터 존경받는 지체 높은 양반이 뛰뚱거리며 동네 한 가운데를 뛰어가는 모습은 온 동네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민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가 보건 말건, 체면이야 구겨지던 말던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보면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기준으로 맞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은혜로) 맞아주십니다.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의롭게’ 맞아 주십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면 탕자는 아직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기 전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20)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였기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내어보내 놓고는 분명히 거지가 되어 돌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저 애가 얼마못가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올 텐데 “어쨌든 제발 살아서 돌아만 와다오”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온 것입니다. 이미 과거를 용서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돌아오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용서를 해놓으시고 우리를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의 음성을 듣기도 전에 이미 “그래, 잘 왔다. 내 아들아!”하고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맞이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있는 모습 그대로 맞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눅15:22-24) 22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었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가장 좋은 옷은 아들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나타냅니다.
반지는 새로운 언약을 표시하고
신발은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날 큰아들로 인해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깁니다.
(눅15:25-28) 25 큰아들은 들에 있더라. 그가 오면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종들 중의 하나를 불러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니 27 종이 그에게 말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당신의 아버지가 그를 무사히 건강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매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매
잃었던 둘째 아들을 다시 찾아서 너무 기뻐하는 시간 문밖에서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큰아들이 화가 나있다고 했습니다.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으면 주저할 것 없이 곧 뛰어 들어가 부둥켜안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이 형제간의 정인데 노한 이유는 분명히 2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큰 아들에게 갔는데 (29)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내게 염소 한 마리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즉 큰아들의 불만은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서 내 벗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거늘 창기와 더불어 자산을 탕진한 아들을 위하여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는가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면서 묻습니다.큰 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에 격분해 말합니다.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지만 염소 새끼도 주신 적이 없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으십니까!", 동생을 보고는 '이 아들이'라고 했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당신의 아들'입니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을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도 부득이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28). 동시에 큰 아들을 향해 동생으로 인해 상속에 변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큰 아들도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그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복의 근원입니다.
옛날에 아주 사이좋은 형제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장에 갔다 오는 길에 한 보따리를 주웠는데 열어 보니 주먹만 한 금 덩어리 2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그 금을 한 덩어리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는 나루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강을 절반쯤 건너가는데 갑자기 형이 눈물을 흘리면서 금 덩어리를 강 가운데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동생이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형의 말이 "내 동생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이 금 덩어리를 손에 넣은 후부터 네가 없었더라면 좋았을걸. 너를 죽여 그 금마저 빼앗으면 어떨까 하는 악한 생각을 하였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더 귀하기에 금을 던진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생도 눈물을 흘리면서 금을 강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형님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게 지내도 형제간에 변함없이 우애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아닌가요?
오늘 말씀을 통해 보면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한 아버지에게 두 명의 탕자가 있었습니다.지금까지 우리들은 「탕자의 비유」 하면 으레 작은아들 한사람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큰아들도 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먼저 첫 번째 탕자인 둘째 아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1)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분배 요청을 하였습니다.언제나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장자와 차자로 비유합니다.(2) 여기 재산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육적인 모든 은혜와 능력을 말합니다.또 본문의 먼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방인의 세상, 악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또 먼 세상에서 궁핍하게 되었다 함은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영혼이 파산을 당하였으며 양심과 도덕과 윤리를 잃어버리고,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고, 평안도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둘째 아들은 굶주림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둘째 아들은 비로소 흉년이 들자 먹을 것이 없어 배가 주리게 되었습니다. 돼지의 먹이를 함께 먹는 그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제야 둘째 아들은 생각하기를 내 아버지는 얼마나 큰 부자인데, 여기서 굶어죽을 수는 없지, 하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영혼은 죄의 종이 되었는데 이런 탕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는 자각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 집과 현재 자기 처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들은 깨달았습니다. (시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는 자신이 현 위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아들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집이 소중한 것과, 아버지의 집에서 만끽할 수 있는 평안과 평강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탕자에게 훌륭한 점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인데도 낯설고 물설은 타국에서 굶어 죽게 된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100%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굶어죽게 되었기 때문에 살기 위한 방법으로 풍요로운 아버지 집에 가서 아들 대우는 못 받을망정 실컷 먹기라도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오늘 우리들도 지난날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가지고 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 진정 돌아와야 할 탕자는 큰아들입니다.여기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노라면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와 같지 않는가 합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았습니다. 자기들만이 전통적인 신앙인 이라고 자처하고 타인의 신앙을 업신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만이 율법적으로 완전하고 무흠한 자라 믿었고 자기들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에 참다운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었던 동생이 다시 돌아오고 회개하여 재생케 됨을 기뻐하지 않는 그 형의 심정은 아버지나 동생보다도 송아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들 삶 속에 자리 잡혀야 할 것입니다. 탕자는 몸을 잃었던 사람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입니다. 또한 그 형은 마음을 잃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잃었던 자임을 알아 겸손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이 형 되는 사람이 바로 오늘의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특권을 받고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소유 전부가 내 것임을 알아 내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4 오늘날 교회 안에서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문제이다.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집에만 있다고 해서 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집에 있는 큰아들은 가출을 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큰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라고 책망을 받은 전통적으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율법사들의 모형으로써 그들은 자만심이 대단하였습니다.누가복음 18: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두 사람이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의 큰아들은 곧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예수님은 마태복음 7:21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이 말씀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볼 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입으로 주여 주여를 부른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란 겸손하고 인내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 아버지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재산을 나눠달라고 할 때 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어떻게 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측은히 여겨 견딜 수 없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땅에 꿇어앉아서 뉘우침의 눈물만 흘립니다.그리고선 "아버지, 저는 아들이 아닙니다.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소서" 라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향해 “무슨 말이냐 죽었다 살아온 내 아들이로다” 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주님께서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만 번을 죽어도 합당한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아버지는 종들을 향해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짐승을 잡아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찾았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로 죄인을 향한 무조건의 사랑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1) 그뿐만이 아들의 명분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만약에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영접하여 주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옷을 입혀주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신발을 신켜주었다는 것은 이전 아들의 모습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영접해 주지 않았다면 둘째아들은 영원히 쫓겨나서 다시는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며 또 그의 장래를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네 사람들은 고사하고 그 집 하인들까지도 업신여길 것입니다. (2) 큰아들의 불평과 원망도 다 들어주고 위로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탕자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에는 실패한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에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탕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은 돌아오는 사람을 영접하여 주시고 전에 주셨던 모든 축복과 은혜와 은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계2:2 말씀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노라” 고 하였습니다.하나님의 품안에 돌아가는 것을 미루지 말고, 세상 육욕의 달콤한 꿈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두 길은 없습니다.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 고 하였습니다.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복음성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수 없는 날들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두 허무함뿐이라수많은 재물들 부귀 권세도 어느 것 하나 나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였고수 없는 많은 사람 만나고 헤어졌지만 아무도 나에게 영원한 만족 주지 못했네. 이 한 몸 위하여 젊음 바쳐도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참 기쁨 주지 못해. 이제와 후회하여 용서 비오니 불쌍한 이 몸을 주여 용서하소서 이제야 돌아와 엎드리오니 부끄런 이 죄인 주여 용서하소서 여기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습니다. 품꾼을 많이 두고 농사를 많이 짓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께 자기 몫을 갖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될지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 아들의 행동을 보았을 때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었을 때 다 거덜내고 실패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이죠. (시139:1-4) 1 오 주여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재산을 나누어준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그 아들의 마음과 행동을 아십니다. 이것을 주면 허랑방탕해서 모두 날려먹을 것을 알지만 줍니다. 왜 그럴까요?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어떠함을 알기에 그가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알아봤습니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버지는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받은 재물을 허랑방탕해서 써버린 아들을 개의치 않고 아버지는 아들을 맞이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실패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아들에게 많은 재물을 내어주고 또 실패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반겨 맞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이는 창세기 보면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없었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거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또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이 대목을 보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만들어서 사람이 따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말대로 하나님이 사랑이 없는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때 인간이 그것을 따 먹고 범죄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 예비책을 준비하셨습니다.(엡1:43-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미 그리스도를 예비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셨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지에 대한 해결책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조물과 창조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에 아버지는 아들이 진정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환대를 아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뻐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아들을 대우합니다. 그리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죄와 허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 영적인 측면에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살리실 때에 이전의 관계보다 더 나은 관계로,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드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싫다고 떠나버린 둘째 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친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자녀의 자격을 주시는 것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이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이루어지지만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뿐인 아들을 죄인을 위해서 단번에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은 영원토록 효력이 있는 사역입니다.(히10:10-12,14)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영원한 제사로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을 영원히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우리가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시로 하나님 앞에 마음껏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영원히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 나를 위해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리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더 늦기 전에 잔치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는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제는 탕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으시는 아버지”라고 언급한다. 인간의 불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주제란 뜻이다. 유산을 가져가 방탕하게 지내고 돌아와도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이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란 의미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은 오늘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분이시오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