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953. 작곡가.
유형 인물
출생 - 사망 1901년 ~ 1953년
성격 음악인
출신지 전라남도 보성
성별 남
저서(작품) 채동선가곡집
대표관직(경력) 예술원 회원, 작곡가협회장
정의
작곡가.
민족음악가 채동선 선생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꽃피는 봄 사월 돌아 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넘고 머언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멘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런가 /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마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망향 - 박화목 작시 / 채동선 작곡)
학창 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외숙부님을 통해 처음으로 이 <망향>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그 후, 봄이면 가끔 인적 없는 변두리 들판을 찾아가 종일을 이 노래에 취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 노래를 부르고 있자면, 노래 속의 ‘어여쁜 님’을 그리는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노래는 아련하고도 슬픈 곡조이지만 그 슬픔을 통해 가슴 속 시름과 세상의 때가 씻겨나가는 걸 경험하곤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좋은 노래의 힘일 것이다.
나중에야 이 노래에 여러 개의 가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지용 시의 <고향>과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 등이 모두 같은 곡에 가사만 다를 뿐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곡조가 너무 좋아서 너도나도 가사를 붙여본 것일까? 원래는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을 텍스트로 하여 곡을 붙인 것이 최초다. 하지만 정지용 시인이 육이오 때 ‘월북시인’라는 낙인이 찍힌 이후로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이 노래가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고 또 당시 출판된 유명 가곡집에도 이미 실린 상태였기 때문에, 각 출판사들은 궁여지책으로 부랴부랴 다시 박화목, 이은상의 가사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곡에 3개의 다른 가사가 붙는 가곡이 탄생되었다. 아마 세계 음악사에서 ‘전래민요’가 아닌 한 개인의 순수 창작품으로써 이런 곡절을 겪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민족 분단이 가져다 준 아픔일 터이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이것이 오히려 우리 노래를 풍부하게 해준 측면도 없지는 않다. 이 노래가 본래의 가사를 되찾은 것은 1988년 월북문인들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시, 고향)
이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온전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표출되어 있고, 반면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은 좀 더 보편적인 정서를 이루면서 님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승화되어 있다. 또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는 못 다 이룬 사랑의 아픔과 애절함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 3개의 노래는 같은 곡이면서도 각기 다른 정서를 드러낸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망향>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좋을 뿐이다.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좌표를 이루는 정서 하나쯤은 있는 법이므로.
민족음악가 채동선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세망리에서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여 벌교의 부호로 알려진 채충현은 지역사회의 여러 공익사업에도 앞장 섰던 인물이었다. 당시 벌교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채동선은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40리길을 머슴과 함께 걷거나 업혀 다녔다고 한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벌교의 남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인민재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바로 채동선의 부친인 채충현의 송덕비가 서 있다. 채충현이 부지를 희사하여 남초등학교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채동선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경기고보를 다녔다. 이 시절 채동선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밤새워 조국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는 등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채동선이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 당시 장안의 손꼽히는 연주가였던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나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렇게 채동선은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면서 퇴학을 당하고 만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에게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였다. 결국 미국 생활을 접고 다시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슈테른센 음악원에서 리하르트 하르체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웠다. 채동선은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의사를 굽히는 법이 없었고, 말수는 적었으나 강직하여 한번 옳다고 느낀 것은 지체없이 실천에 옮기곤 했다. 부자집의 장남으로 적당히 놀고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음악예술에 대한 불 같은 정열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어려운 미지의 세계, 독일까지 유학을 하고 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5년동안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한 채동선은 서울에서 4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 동료인 최호영, 이혜구 등과 함께 실내악 운동을 시작했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현제명 등과 함께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작곡활동과 전통음악의 발굴
채동선은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누이 채선엽의 이화여중 동기였던 이소란과 결혼하였다. 이후 서울 성북동에 터를 잡고 가끔 이화여전에 나가 외국어를 강의하는 것 외에는 작품 창작과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하였다. 1932년 <현악4중주곡 제1번, Op.3>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그의 대표적 가곡이 되어버린 <고향>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는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으며, 1939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를 발표하였다.
또 그는 이 시절부터 우리의 전통 민요를 채집편곡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새야 새야> 같은 편곡 작품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음악인들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우리의 전통음악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는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판소리의 고장인 ‘보성소리’의 맥이 그의 몸에도 자연스럽게 녹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무렵 일제의 탄압과 회유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후생단 등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에 가담하였으나, 채동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한 채 모든 대외적인 활동을 끊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의 땅을 처분하여 수유리 근처에 땅을 사서 화초와 관상수 등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소란 여사는 “새벽마다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명륜동 자택에서부터 수유리까지 걸어갔다가 해질 무렵에야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었다”며 당시를 술회한 바 있다. 이에 채동선은 “한국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 머지 않아 곧 해방이 될 테니 염려 말라”라는 말로 부인을 달랬다고 한다. 또 일제가 한복을 입지 못하게 했을 때도 끝내 한복 입기를 고집하였고, 집의 문패에 ‘성북동 183의 17’을 표기할 때도 번지수 사이에 꼭 우리말 ‘의’를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굽히지 않는 민족의식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아무튼 이 시기에 그는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하면서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쌓아나가는 일에 몰두하였다.
건전한 음악문화의 건설
1945년 마침내 해방이 되자 채동선은 당시 좌익과 우익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하였으며, 곧바로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고 1947년에는 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이해 12월에 발표한 「음악문화 건설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건전한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상아탑에 안주하는 모든 예술지상주의를 버릴 것을 역설하고, 민족자결정신을 음악문화 건설을 위한 기본 이념으로 주창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5대 음악기관, 즉 국립교향악단, 국립합창단, 국립음악학교, 국립 육군취주악단, 국립음악출판사 등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또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문화정책의 수립과 문화정책 우감(偶感)」이라는 글을 통해 신생독립국가에 있어서 문화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정치인들의 문화부분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그의 작품으로는 조국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교성곡 <조국>, <독립축전곡>, 그리고 칸타타 <한강> 등과 <입성가>, <3.1절의 노래>, <개천절의 노래>, <한글날의 노래>, <무궁화의 노래>, <선열추모가> 등이 있다. 그 이전의 곡들이 주로 서정적이면서도 토속성이 강한 반면, 해방 이후에 작곡된 곡들은 국민을 계몽하고 새로운 조국건설을 기리는 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통 음악에 대한 관심은 변함이 없어서, <서울 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도 아리랑>, <도라지타령>, <흥타령> 등 많은 우리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하고 <별유천지> 같은 전통 음악을 채보하기도 했다.
육이오 때는 부산에서 양담배 장사 등으로 연명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하루 종일 하나도 팔지 못하고 모든 식구들이 쫄딱 굶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1953년 2월 2일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부산 피난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은 그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영양실조에다 복막염이 겹쳐 결국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영원히 가슴에 남아 흐르는 노래
1963년, 육이오 때 서울 성북동 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의 원본을 부인 이소란 여사가 찾아내면서 그의 작품들은 사후 10년 뒤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1979년에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83년 채동선 사망 30주기를 계기로 원로 음악평론가인 박용구를 회장으로 하고 음악계의 여러 인사, 이소란 여사 및 그 자녀들이 중심이 된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음악상’을 수여해왔는데, 제1회 '채동선 음악상'은 피아니스트 김원복이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소란 여사의 사망 이후에는 아쉽게도 이 ‘음악상’ 사업은 중단되어 있는 실정이다. 1989년에는 보성군 관계자들이 뜻을 모아 높이 3.6미터, 넓이 3미터 크기의 기념비를 벌교 공원에 세웠다. 1993년에는 그의 사망 40주기를 맞아 ‘채동선 기념사업회’에서 작품집 「고향」을 출간하였으며, 1995년 9월에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고, ‘광복50주년 채동선 기념음악회‘ 가 열리기도 했다.
채동선의 음악 활동을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기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바이올리스트와 작곡가로서 활동한 시기이며, 2기는 은둔하면서 작곡가로서 내실을 기하고 국악채보를 통해 민족음악 수립을 한 시기이고, 3기는 해방과 더불어 관현악, 합창, 취주악 활동을 한 시기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월 속에서도 민족의 노래, 민족의 가락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던 채동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고 예술 정신을 올곧게 실천해 나갔던 채동선.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는 오늘도 보성강을 휘돌아 이 땅의 들판을 촉촉이 적시며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