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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평
동일한 행위 그러나 이중의 자각
- 문학도시 11,12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을 쓴다는 것은?
수필을 쓴다는 것은 수필을 쓰는 그 자체의 행위일 뿐이 아니라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부단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수필창작은 곧 수필창작론의 탐구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동일행위이지만, 이중의 자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수필 창작의 비밀을 아는 수필가가 얼마나 될까. 수필론에 대한 이해 없이 수필을 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수필가는 수필의 주제와 관련된 형이하학적인 제재의 발견을 통해 우주나 삶에 대한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논리 하에서 수필가는 진리의 발견을 위한 통섭과 지적 세계의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이 이야기의 나열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수필 창작 과정에 철학성이 요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II. 2007 신입회원 수필, 분석당하다
수필이 누구나 아무나 쓰는 글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쉽게 여기로 쓰는 글이라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민의 글이라느니, 생활문학이라는 정의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본격수필은 적어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된 문학이다. 대중적 이해와 시각을 넘어서는 예술의 차원 속에 존재한다. 대중이란 세계를 자기 한계 속에 두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수필도 자기 이해와 지적 세계의 한계 속에서 수필을 이해하려고 하고, 수필을 규정하려 하는 습성이 있다. 훌륭한 수필가는 적어도 이런 수필에 대한 대중적 이해와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수필을 쓰는 것이 그 자체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수필이다’라는 자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 창작은 그 자체 행위일 뿐만 아니라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그 해답이어야 할 것이다. 경험의 나열이나 이야기의 조술이 아니라 수필의 지향점이 우주와 인간 존재의 해명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도시 11,12월호는 2007년 신입회원 9명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나름의 색깔을 지닌 작품이지만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면, 여섯 분은 제목을 구체어로 나타내고 있고, 세 분은 추상어로 제시하고 있다. 예술은 관념이나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인 수필의 제목은 구체어로 제시하는 게 바람직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배병채의 <갓쟁이>, 김용식의 <우리의 기도 9988234>, 김도우의 <문양을 따라>, 김소희의 <추억의 19공탄>, 홍화자의 <무녀리>, 김금아의 <그리고 나무>는 제목론의 기본을 잘 지켰다고 하겠다.
암시와 함축의 효과 측면에서 제목을 다시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김용식의 ‘우리의 기도 9988234’는 그 자체로도 무난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부려 말하면, ‘우리의 기도’를 빼고 그냥 ‘9988234’로 단순화시키는 게 훨씬 더 긴장감을 주면서 호기심을 우발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하겠다. 김도우의 ‘문양을 따라’도 위와 마찬가지다. ‘~을 따라’라는 말은 사족이다. ‘~에 기대어’, ‘~을 태우며’ 등의 어투는 7,80년대 수필집 제목 같은 데 많이 써먹히던 스타일이다. 여운의 문학이란 수필의 특성을 살려 그렇게 한다고 하겠지만, 여운은 결말부의 함축이나 생략 등의 기법을 통해 제시되는 게 더욱 문학적이다. 김소희의 ‘추억의 19공탄’도 제목에서 ‘추억의’라는 말을 빼버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없어도 될 ‘추억’이란 말이 들어감으로써 독자들의 상상력이 제한되고, 이미 주제의식이 어렴풋하게 드러나 버려 문학적인 맛을 앗아간다. 명사 중심의 구체어로 된 제목은 심상을 확대하고, 상상과 연상 효과를 배가해 수필의 맛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렇지만 제목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구체어 전후로 다른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수식어가 붙으면 독자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호기심뿐만 아니라 감상의 맛도 약화시킨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수필문학의 진수가 담겨있는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을 보면, 수필의 제목을 어떻게 적는 게 좋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필에서 문장이 생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목도 과히 생명적 요소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김유미 씨의 <단기 출가>를 보자, 이 수필은 작가가 범어사에 단기 출가하여 얻은 교훈을 적은 글이다. 이 분 글의 제목 ‘단기 출가’에서 ‘단기’ 도 ‘출가’도 어떤 구체적 형상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제목으로도 제재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단기’나 ‘출가’ 등의 개념은 수필독자가 수필을 읽어 가면서 찾아내어야 할 것이지, 작가가 먼저 제시해 버리면 아무래도 독자의 측면에서는 섭섭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글을 감상하는 것에는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란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용 구성이나 제목, 제재 등이 구체적 용어로 되어 있으면, 독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구체어들이 심상과 상징을 불러와 독자들의 상상력과 연상력을 자극하면 감동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런 이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문학 언어의 목적은 전달성에 있지 않고, 전달 차단성에 그 목적이 있다는 논리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진필경 씨의 <동행>도 마찬가지다. ‘동행’이란 추상적 개념이다. ‘동행’이란 독자가 찾아내어야 할 주제의식의 일부이지, 그 자체가 제목으로 들어앉을 차원의 말이 아니다. 최홍석 씨의 <공경하는 마음으로> 역시 제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공경하는 마음으로’는 이미 글을 쓰는 목적이자, 글쓴이가 작품에 나타낼 주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제목에 작가의 메시지가 다 드러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독자가 글을 읽어 주겠는가. ‘공경하는 마음으로’는 독자가 최종적으로 수필을 읽고 찾아내어야 할 가치요, 글의 핵심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제재나 제목을 통해 함축되거나 글 속에 숨어 있어야 함을 알았으면 싶다.
배병채의 <갓쟁이>는 상하의 균형을 찾지 못하는 가분수를 나타내는 말인데, 작가는 이 말을 이용해서, 마음과 몸이 같지 못한 것, 행동과 생각이 조화롭지 못한 것, 이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것 등의 부조화, 불균형을 지적하는 수필을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서 균형의 미학, 즉 중용을 강조하고 있듯, 이원적인 구조 속에 있는 우리 인간 삶의 갈등은 거의 부조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배병채 씨의 수필은 ‘갓쟁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통해서 균형미학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이란 무엇이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물론 이 작가는 수미상관에 대한 집착을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갓쟁이’에 대한 설명을 발단부에도 하고, 결말부에 다시 한 번 더 하고 있다. 정서적 감동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 글에서 ‘설명’은 정서를 죽이는 역할을 한다. ’갓쟁이라는 말은 머리가 커서 하체와 비례 대칭을 이루지 못하고 유독 머리 쪽이 큰 사람을 말한다. 고로 갓쟁이는 두드러진 머리 크기를 가진 가분수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같은 발단부 진술문은 전형적인 정의와 풀이로 연결된 설명의 기법이며, 이런 문장은 전달성을 목적으로 하는 논술문이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설명문에 어울릴 듯한 것이다.
김도우의 <문양을 따라>는 차분하게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에 젖게 하는 수필이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을 보고 느끼는 작가의 심미적 체취가 공감을 준다. 아름다운 것을 느끼되 그 느낌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으면, 일단 성공이다. 김도우 글의 특징은 논리와 설득으로 또는 특유의 언어적인 필치로 독자를 공감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것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평의 원조인 칸트가 말한 ‘심미적 의무’를 작가 김도우는 정확히 수행하고 있다. 신비평이론은 내용보다 형식에 더 포커스를 둔다.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다루고 있는가를 중요시한다. 이런 포멀리즘 차원으로 볼 때, 김도우의 문학은 확실히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본 것, 한 것이 a라고 하면, 느낌이나 해석, 의미부여는 b다. 적어도 김도우의 수필은 a와 b가 균형을 이룬다. 철학적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는 의미다. 김도우의 문장은 병렬구조로 연결되면서 예리한 미적 정서를 뽑아낸다. 작가는 섬세한 대적광전을 예사로 보지 않는다. 제재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탐구하여 그것이 암시하거나 숨기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 또한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답한다.
그녀에게는 이름만으로도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친구가 있다. 작가 역시 확실한 향기를 지닌 사람이다. 수필이 수필다운 향기를 지니려면 우선 수필가 자신부터 자신의 분명한 향기를 지녀야 한다. ‘자기 향기’란 작가의 숨결이요, 체취다. 이런 체취가 김도우 수필의 문체로 잘 드러나고 있다. 독자는 작가의 체취를 음미하기 위해 시나 소설보다 수필을 즐겨 찾는다. 들뢰즈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자기 향기가 없으면 자기 영혼이 없다는 것이며, 영혼이 없는 사람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이미 사람이 아닌 바와 마찬가지로 수필 작품에도 언제나 작가의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만의 향기를 갖추는 일이다. 김도우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찾아든다. 그녀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세상은 음양의 조화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앞의 수필이 조화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웠다면, 이 수필 또한 조화를 주제 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자의 수필이 ‘갓쟁이’란 사람을 제재로 내세웠다면, 김도우는 음각과 양각이 있는 문양을 내세웠다. 그녀는 이런 삶의 본질을 ‘문양’이라는 말로 의미화하였다. 흠잡을 데 없는 수필이다.
홍화자의 <무녀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무녀리’는 그 어원을 추적하지 않고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이다. 무녀가 많이 살았다 하여 동네 이름이 무녀리가 되었겠구나 하는 정도의 빗나간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끌면서 예측불허의 긴장감을 준다는 측면에서 ‘무녀리’는 제재로서 적합하고, 제목으로도 성공적이다. 무녀리는 말 그대로 처음 문을 열고 나왔다 하여 “문 열이” 또는 “무녀리”로 불린다. 여러 마리 새끼들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맏이가 무녀리란 걸 작가는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고, 이렇게 알게 된 지식을 자신의 삶에 용해시켜 한 편의 멋진 수필로 버물어내었다. 좋은 수필은 이런 발견과 멋진 상관화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일종의 맏이의 애환을 실감나게 그려낸 수필이다. 이 작품의 수필적 요소라고 할까, 문학적 요소는 맏이를 무녀리로 의미화한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는 무녀리인 작가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나아가 작가는 무녀리의 운명을 결코 한국적 미덕인 헌신이나 희생 또는 체념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맏이이기에 받은 부당함보다는 얻은 것과 좋았던 점이 많았다는 깨달음의 고백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작가의 솔직함이 바로 이 수필의 쾌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그 근거를 드는데,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 포용력, 책임감, 리더십 등의 요건을 자신이 갖추게 배경에는 바로 무녀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것은 작가를 무녀리로 만족하게 만드는 정 많은 동생들이다.
이 수필이 주는 또 하나의 맛은 연륜에서 풍기는 노련함이다. 글을 쓰는 작업은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도모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적 향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홍화자 수필에 보이는 구성적 특징이라면 주제의식의 의미화 단계 또는 구체화 단계에 반드시 제재에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필은 이 인간화 작업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향기를 내는 것이다. 다산종인 돼지 새끼 열 마리 중 맏이인 무녀리는 상품성이 없어 장꾼들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을뿐더러 무더기 금으로 넘어가거나 끼워 팔기 하듯이 흥정되기 일쑤였다. 이런 무녀리의 슬픈 삶을 작가는 자신과 동일화하지만, 결코 슬픈 감상에 빠져 신세를 한탄하거나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주제의식을 인간화하고 있는 결말부 마지막 문장,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눈이 뻣뻣하고 뒷머리가 당기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일 밥을 맛있게 먹어줄 동생들을 위해 아침 준비를 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는 진술이 작품의 안정적인 구도를 떠받친다. 삶은 객관적인 평가 기준에 의해서만 그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주관적인 인식의 수용에 따른 결과이지, 객관적으로 그 우열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살아가면서 사라져가는 한국의 전통적 미덕인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수필 작품을 통해서 드높이고 있어 더욱 감동을 준다. 이 수필은 수필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해명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좋은 수필이라 하겠다.
김금아의 <그리고 나무>를 분석해 본다. 마지막 작품이다. 아홉 편 중에서 일단 네 편을 분석 대상으로 골랐다. 김금아의 ‘그리고 나무’는 구성면에서 부분적인 무제점이 있지만 괜찮은 작품이었다는 전제로 분석에 포함시켰다. 나무가 주는 교훈을 다루면서, 그 교훈을 사람과 사람 사는 일과 견주고 있어서 일독할 가치를 느끼게 한다. 좋은 문학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가치라면, 참신성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보면, 김금아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무를 제재로 한 것도 그렇고, 나무를 관찰하여 뽑아낸 깨달음이라든지 의미부여 역시 정상적인 정서를 지닌 사람이라면 나무가 주는 이만한 미덕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평범한 소재를 다루었다고,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을 의미화하고, 수필로 썼다고 해서 안 좋은 수필이라는 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이 작가에게 한하여 제재와 주제의 평범성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작가의 신춘문예 출신이기 때문이다. 기대를 잔뜩 하고 이 작품을 읽었던 탓일 게다. 글을 쓰다 보면 수작도 나오고, 또 평범한 작품도 있는 법이다. 신춘문예 출신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남달리 좋아야 할 법도 없다는 쯤도 다 안다.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의미화하는 과정이 평범했다면, 다른 측면, 즉 구성적인 면에서 완벽했다면 좋을 뻔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제목을 ‘그리고 나무’라 했을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냥 제목을 ‘나무’로 하자니 단순하고, 평범해서 접속사인 ‘그리고’를 제목 앞에 전치시켰을까. 아니면 포스트모던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기존의 문법 질서를 살짝 파괴해 부조리한 삶에 회의를 던지고 있는 자신의 심사를 제목 속에 함축하려 했을까.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한 전략적 차원에서 제목이 지어졌으리란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 근거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좋은 방향, 긍정적인 차원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려했지만 명확하게 그 의미를 찾을 단서를 밝힐 수 없었다. 글이 평자에게 넘어온 이상 그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온전히 평자의 몫이거늘, 나는 그 이유를 풀 수 없어 다시 다른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해 보았다.
문학은 논리적인 글이다. 아무렇게나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되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 한국, 일본이 회담을 했을 때, 한국 사람이면 응당 한일 회담이라고 해야 하듯이 언어에도 질서가 있다. 작가는 땅 투기를 하다 들켜 높은 자리에서 물러난 예쁜 여자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창밖에 눈을 돌린다. 그리고 한마디 멋진 말을 내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얼굴을 가진 것은 저 자연뿐이다. 저들은 바람이 불면 피하려 하지 않고 부는 대로 맞는다.”란 두 문장을 이어 해석해 보면, ‘자연’ 그리고 ‘저들은’ 등이 지칭하는 것은 ‘나무들’로 보인다. 어찌 정직한 게 나무뿐이겠는가. 자연이란 다 정직한 것이다. 이런 논리 하에서 ‘자연’에서 ‘나무’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석해 보면, ‘상위어 개념’에서 ‘하위어 개념’으로 나아가는 연결 고리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계절별 나무의 모습을 다루는 차원에서도 작가는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즉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않아 체계에 혼란을 준다. 넷째 단락에서 ‘봄’을 이야기하다가, 이어지는 단락에서 ‘겨울’을 이야기하고, 이어 다시 ‘봄’의 나무를 말하다가, 다음 단락에 가서 ‘태풍이 불면’이란 어구를 통해 여름의 나무를 암시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단락에서 ‘봄’의 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가든가 아니면 여름, 가을 겨울, 봄으로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논리적 서술이다. 작가라고 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반적으로 정해진 논리적이고 관습적 언어질서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유념했으면 싶다.
III. 비평의 무력화를 시도하는 자에게
문학비평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비평 활동의 핵심적인 목표는 작품의 ‘가치’를 밝혀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비평가로서의 제일 큰 임무는 손에 들어온 작품이 문학작품으로써 잘 된 작품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일이요, 그런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남다른 정열과 각오, 거기에 따른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11월 부산수필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부산문인협회 정인조 회장은 오늘날 비평가의 비평 논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비평가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비평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 자신의 저서에 붙일 평을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월간평, 계간평에 있어서는 주례사비평이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방침을 그 자리에서 다진 바 있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비평을 하든 비평이란 그 일의 대상이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 더 쉬운 말로 ‘느낌’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비평은 과학이나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비평의 딜레마는 위대한 독일의 철학자 칸트에게 돌아가 의지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는 일찍이 이 중요한 문제에 착안하여 명쾌한 해답을 내려 비평의 길을 열어주었다.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미학적 취향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미학적 취향’ 속에서는 개인적인 이해나 고집, 편견 같은 것은 극복되거나 초월된다. ‘심미적 취향’에서 나온 반응은 어떤 특정인에 대한 반응이 아니고 인간적 본성에 대한 반응이며, 그 비평가의 이상적이며 동시에 총체적인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어떤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는 가능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는 진선미에 공감하고 동의해야만 한다. 정상적인 작가라면, 이 ‘심미적 의무’를 받아들여야만 하며, 동시에 성실히 수행하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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