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사 - 개항과 개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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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1.08. 04:39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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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과 개화 정책
1. 교과서 속 주개념
개항 후 추진된 정부의 개화 정책의 내용
개항 후 조선 정부는 개화파를 기용하여 자주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수신사라는(1차 김기수 - 1876, 2차 김홍집 - 1880)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하는 일본의 모습과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1880) 이것은 청의 제도를 모방한 개화 추진의 핵심 기구로 12사를 설치하고 외교, 군사, 통상, 재정 등의 분야에서 개화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군제를 중앙군은 5군영에서 2영(구식군대)으로 바꾸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설치하였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사관을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는 일본에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 : 1881)을 파견하여 일본의 문물 제도를 시찰하고 개화 추진을 위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였다.
또한 영선사(1881)를 청의 근대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습득하기 위해 파견하였으나 자금의 부족으로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그 후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근대 무기 제조창인 기기창을 설치하였다. 그 밖에 미국과 수교를 맺게 된 것을 계기로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40여 일간 미국을 순방하였고, 일부는 유럽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정부의 재정 부족과 해외 파견 학생들의 지식 부족 등으로 개화 추진의 어려움을 겪었다.
2. 확장 개념
수신사에 대하여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2관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15개월 뒤 수시로 서울에 사절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제11관에는 6개월 이내에 양국은 위원을 파견하여 통상장정과 수호조규 부록을 체결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사절을 파견했던 만큼 그 답례로서 조선도 사절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조선측 협상대표였던 신헌(申憲)도 일본의 개화 문물을 시찰하고 외침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를 올려서 마침내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해 4월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로 한일행 76명은 4월말 일본에 도착하여 20여 일 동안 도쿄[東京]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식기관과 시설을 시찰하고 7월 하순 귀국했다.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 (日東記遊)〉·〈수신사일기〉를 보면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보고에서 "일본은 모두 부강에 힘쓰고 있으며 군대는 강장(强壯)하다."며 일본의 개화 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신사 일행이 귀국하자 일본은 곧 수호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위해 서둘러 미야모토[宮本小一]를 조선에 파견했고, 1879년에는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파견하여 부산에 이어 원산을 개항하게 했으나 인천개항, 부산의 관세배상, 미곡금수(米穀禁輸) 등 현안은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그해 8월에 조선의 대외 문제에 대해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고 서양의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여 이에 대처하라는 조언을 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일본정부의 진의와 개화 정책을 알아보기 위해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1880년 5월 예조참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했다.
1차 수신사는 의례적인 일본 방문이었던 데 비해, 2차 수신사는 강화도 조약 이래 조선측의 외교 통상에 걸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수신사 김홍집 일행 58명은 8월 중순 도쿄에 도착하여 약 1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조야 인사와 만나 당시 현안이었던 관세개정, 미곡금수, 개항장의 확대 등이 일본측의 회피로 해결되지 못했지만 주일 청국공사인 허루장[何如璋], 참찬관(參贊官) 황쭌셴[黃遵憲] 등과 접촉하면서 조선이 알지 못하던 국제 정세에 관해 여러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김홍집은 황쭌셴의 〈조선책략〉을 증정받고 귀국한 후 고종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 세력을 막으려면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의 외교정책을 도모하고, 그 위에 구미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하며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서양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알려지자 개화정책에 반대했던 보수적인 유생들의 척사상소(斥邪上疏)가 일어나기도 했다. 개항 이후 2차례의 수신사 파견은 당시 정부 지배층에게 개화에 대한 인식과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후 통상과 문물의 수용을 담당하는 정부 기구의 설립에 기초가 되었다.
3. 관련 지식
통리기무아문
설치 목적은 개항 후 새로운 성격의 사무와 정세변화에 대처하려는 것으로, 삼군부(三軍府)를 계승한 위에 외교·군사 관계 전권을 부여했다. 통리기무아문의 시초는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이 청(淸)의 이홍장(李鴻章)과 무비자강책을 논의한 후 1879년 변원규(卞元圭)를 청에 파견하여 신무기 제조법의 학습, 즉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요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조하고 군국기무까지 통괄할 정1품 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880년 12월 21일 〈신설아문절목〉에 근거하여 신설되었는데, 사무 분담을 위해 사대사(事大司)·교린사(交隣司)·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군물사(軍物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사(理用司) 등 12사를 두었다.
수석인 총리대신은 현직 대신이 겸하게 했고 실무진은 당상(堂上)·낭청(郎廳)·참사(參事) 등으로 편성했다. 초대 총리대신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었고, 김보현(金輔鉉)·민겸호(閔謙鎬)·김병덕(金炳德)·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이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1881년 우선 영선사(領選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각각 청과 일본에 파견했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여 신식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다음 해에는 미국과의 통상 수호 조약 체결을 담당하고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의 신설 등 군제를 개편했다. 1881년 11월 신사유람단 위원들을 중심으로 기구 개편에 착수하여 12사를 동문사(同文司)·군무사·통상사·이용사·전선사·율례사(律例司)·감공사(監工司)의 7사로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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