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차 기행 오라동
28명이 참가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답사회에는 열정 가득한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하늘타리님이 안내를 맡았다. 제주에 들어와 산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는데 안 가 본 곳이 없는 것 같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아니 여유를 만들어서라도 혼자 답사를 다니는 듯하다. 내가 가 보지 못한 곳까지 많이도 알고 있다.
오라1동 표석이 있는 곳에서 오라동이 원래 매우 넓은 땅이었는데 일부는 용담동에, 일부는 삼도동에, 또 일부는 연동에 떼어 줘 버리니 땅이 좁아졌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도 상당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동이다.
한천 내창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을 ‘벵풍소’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은 생활하수가 내려와 고이기 때문에 악취가 나겠지만 옛날에는 당연히 이 물을 식수로 사용했을 것이다.
4․3 때 쌓은 마을성담을 보고 한천을 따라서 1시간 남짓 올라갔다. 내창 답사는 재미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에는 약간 위험 요소가 있다. 엄청나게 큰 포트홀이 몇 개 보였다. 그 중에 하나는 사각형이었다.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다. 역사탐방만이 아니라 지질탐방도 재미있는 테마가 될 수 있겠다.
이 내창에 있는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은 방선문과 똑 닮은 바위였다. 사람이 약간 허리를 굽히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小訪仙門’이라고 글자라도 새기고 싶을 정도였다. 매끈한 면이 북쪽에 있어 내가 터졌을 때에도 글자가 훼손되지 않을 터이니 오래 보존될 것이다. 언젠가 시간이 있으면 해 보고 싶은 일이다.(안 되겠죠? 입건될 수도 있을테니)
그밖에도 ‘판관소’, ‘람쥐궤’ 등 이름이 붙어 있는 곳, 등산하는 사람들이 암벽 오르기 연습을 위해 쇠를 박아 놓은 곳, 자갈 퇴적층, 이름이 안 붙여졌지만 경치가 좋은 곳 등 시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면 좋을 곳이 많았다.
이윤의 아들 이중발의 묘가 연삼로변에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윤은 제주에 유배당했던 간옹 이익의 증손이다. 이익은 당시 제주 최고 갑부인 김만일의 딸을 현지처로 취했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재산이 많은 사람이 결합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런데 김만일 쪽에서 억울한 것은 출륙금지령을 핑계로 유배가 풀려 돌아가면서도 데리고 왔던 아들만 데리고 갔다는 사실이다. 그 후 연락도 한 번 없었다고 한다.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아버지로서의 도리는 다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익의 족보에 제대로 올려져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낳은 아들이 ‘인제’이고 인제의 아들이 ‘윤’이다. 이윤의 무덤은 신효동 월라봉 남쪽 절벽 위에 있다. 비석에는 ‘조선국훈련원판관’이라고 직함이 새겨져 있다. 아들 이중발은 오라동에 살면서 어찌 그곳까지 가서 묘를 썼을까? 재산 많은 사람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떡이라도 나누어주게 하려는 지관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이중발은 훈장 정도에 머물렀던 사람이지만 우리가 기행에서 중발의 무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의 증조부가 이익이고 증조모가 김만일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유명하고 볼 일이다.)
고인돌을 보고, 내왓당을 들렀을 때에는 내왓당 옆의 조그만 땅을 보며 흥사단 사무실을 이곳에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이제는 개발제한구역이 풀렸으니 웬만해서는 사기 힘들 것이다. 제주흥사단이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천만원으로 살 수 있는 땅은 어디에쯤 있을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동성마을을 거쳐서 연미마을로 들어섰다. 연미마을에는 사신서당비가 있다. 이 비석은 오라초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개량서당을 세울 때 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1면1교 정책으로 학교를 세울 수 없던 시절에 자녀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조금 서쪽에는 4․3 당시 방화사건 ‘오라리 방화사건’의 현장이다. 이곳에 표석이라도 하나 세우면 좋지 않을까?
조설대는 그것이 처음 소개될 때에는 꽤 의미있는 곳으로 여겼던 곳이다. 독립운동의 불씨가 여기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제주통사』에 조설대를 장황하게 소개했던 김봉옥 선생이 『증보제주통사』에서는 빼 버린 사건이 집의계사건이다. 역사는 준엄하게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집의계선서’라는 문서 한 장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꾸며댔으니 그 후손이 선조를 먹칠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새구룽이라는 곳에 갔다. 사람 키 이상으로 겹담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공을 들여 만든 연못이었다. 담을 터서 우마가 드나들도록 만든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식수로만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을공동으로 만들었던 이 연못이 지금은 사유지라고 한다. 옆밭에서 만난 주민의 말로는 집집마다 쌀을 얼마씩 모아서 땅값을 지불했다고 구전되어온다고 하나 이제 와서는 그 증거가 없으니 마을공유지로 인정받지 못한는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했는지 갈대가 연못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낮은 물팡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으려니 그 분이 끼어들었다. 그건 물팡이 아니라 계단이라고, 물팡은 도난당했다고. 허 이런 일이…. 문화재가 도난당하는 일은 이렇게 하찮은 물건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연미마을 포제단은 경작지에 있다. 남쪽을 향하여 제단을 만들었다. 북쪽에 난 입구에는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주일 전에 왔을 때에는 지저분했었는데 오늘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포제를 지내지는 않는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포제를 지내는데 이곳에 와서 ‘인사’ 정도만 한다고 한다.
전주이씨덕흥대원군파 입도조라고 하는 묘를 찾아갔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생부이다. 입도조라는 사람의 이름은 이정매. 덕흥대원군의 3세손 태경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태경은 미혼으로 19세에 역모사건에 왕으로 추대되려 했다고 하여 사사된 사람이다. 어찌된 일일까? 후에 정매를 양자로 들였다는 건가? 의문이 남지만 남의 집안 일에 왈가왈부하기는 그렇다.
진주강씨 강철의 묘는 매우 특이하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명문가에 이어져온 방묘와도 전혀 다른 방묘였다. 일반적으로 방묘는 넓은 돌판을 몇 개 짜 맞추는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이 묘는 작은 돌로 담을 쌓고 시멘트로 마감했다. 옛날 모습이 아니고 현대에 이르러 개조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무장의병을 일으켰던 김석윤은 스님이었다. 당시의 스님들은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석윤의 셋째아들 김덕수도 스님이었다고 한다. 4.3 때 끝까지 월정사를 지키다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월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월정사 바로 옆에 추모비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없어져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더 남쪽 밭으로 옮겨 세웠다. 길가에 있을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들여다보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그 궨당이나 아니면 볼 사람도 없는 위치이다. 아래 사진은 2007년에 찍은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5562474F4634A52A)
난지농업연구소 남쪽 밭에 있는 김석익의 묘에는 비석이 없다. 나란히 있는 부인의 묘에는 비석이 있지만. 김석익의 묘가 다른 곳에 있을 때 묘비를 도난당했다고 한다. 본인이 미리 쓴 글씨가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부인의 묘갈 역시 그가 쓴 글씨이다. 서예를 잘 모르지만 정갈하다고 표현하고 싶은 글씨이다.
첫댓글 꼭 가고 싶었던 곳 하늘타리님 멋진 이야기 듣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고회장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언제 번개로 한번 더 하면 어떨꺼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내시면 함께 갈 용의 있습니다.
그런 좋은 기회가 온다면 저두 함께하고 싶습니다 ㅎ 함께 하지못해 아쉬움이 커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