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과 책방 이야기
③ 책방을 운영한 시인들
김남주 시인 외에도 문인이면서 직접 책방을 운영하거나 책방 직원으로 일한 경우가 적잖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꿈이 책방 주인이 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한때의 꿈이 만화방 주인이었다고 누가 얘기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밥때 잊고 만화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 있었을 게 틀림없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고 오직 책 읽는 욕심만 주체 못할 정도가 되면 손님이 뜨문뜨문 오는 게 더 낫겠다. 그런 소원(?)은 대개 이루어졌는지 자릿세 마련 등 최소한의 현상 유지를 못하고 문을 일찍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그럼 누가 책방 운영에 나서며 책벌레의 꿈을 잠시나마 이뤘는지 짚어보도록 하자.
먼저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 위원으로서 한의학 책을 다수 쓰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가 북으로 넘어간 조헌영 선생이다. 조헌영은 1936년 인사동에 고서점 일월서방(日月書房)을 낸다. 조씨 문중이 있는 주실 마을이 영양군 일월면 소재니 여기서 이름을 따왔을 개연성이 높다. 조헌영은 열일곱 나이로 상경한 아들 조지훈에게 일월서방 운영을 바로 맡겼으니, 이때의 독서와 시 습작이 훗날 조지훈이 학자와 문인의 삶을 사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이백, 두보를 두루 읽던 조지훈은 사업가의 수완도 있었는지 모윤숙의 『렌의 애가』(1937)를 출판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사모의 대상인 ‘시몬’이 누구냐에 대해선 모윤숙이 대놓고 애기하지 않았지만 이광수로 특정되는 분위기다.
이웃한 종로 관훈동에서 오장환 시인은 남만서방(南蠻書房, 1938~1940)을 낸다. 남쪽 오랑캐를 이름한 데서 그의 야성을 짐작할 만도 하다. 시집 『분수령』(1937)으로 북쪽 정서를 장악한 이용악 시인을 의식한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반대로 이용악의 「오랑캐꽃」(1939)이 남만(南蠻)과 어떤 영향 관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방과 인근 종로와 명동 거리를 같이 술 마시며 횡행했던 이봉구는 책방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문학과 철학 서적이 전문이었고 절판, 한정판, 호화판, 진귀본, 구해볼 수 없는 책, 구해보려 애쓰는 책들이 꽉 들이차 있었다. 책방 정면 벽에는 이상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그리운 이를 따라-명동 20년』)고.
책방 내부에 보들레르 원서, 작가 에드가 앨런 포의 사진, 그 한 해 전에 죽은 이상의 자화상이 있었다고 하니, 스승인 정지용을 비롯해 오장환이 사모했던 예술가의 면면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남만서방도 출판업을 겸해 김광균의 『와사등』(1939)을 찍고, 책방 문을 닫은 후에도 서정주의 『화사집』(1941)을 출간한다.
종로에 기억할 만한 또 하나의 책방이 있으니 마리서사(1945-1948)다. 이상을 좋아해, 이상 기일를 기념해 며칠간 폭음하다가 그만 죽음까지 따라간 박인환 시인이 주인이다. 마리는 〈책 읽는 여인〉(1913) 등 주로 여인의 모습을 그린 화가인데,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죽음을 접하고 “죽음보다 잊힌 것”(「진정제」)이 더 슬프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마리서사엔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서양 시집이나 문학 전집, 미술 화보집을 갖춰놓고 있었다. 앞서 남만서방이 그랬듯이 인근 종로3가에 위치한 마리서사도 이봉구, 김광균, 김수영, 김규동 등 많은 문인이 드나들며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노래했고, 실제 김수영에게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는 서운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인환은 마리 로랑생과 그의 연인이 그랬듯이 죽음으로도 잊히는 일 없이 지금껏 사랑받고 있다.
1953년 신동엽 시인은 돈암동 네거리 헌책방에서 친구 대신 일을 봐주다가 그 책방에 종종 들르던 여고생에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다. “그는 가난했고 무직자였고 친구의 서점이나 봐주는 룸펜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형한 눈은 늘 이상과 신념에 불타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다 싸고도 남았다”(『벼랑 끝에 하늘』)는 아내 인병선의 촌평대로 신동엽은 실직과 구직을 오가며 건강 문제도 근심을 주고 세상을 일찍 떴으니, 룸펜을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신동엽이 보여준 시의 생명력은 그가 노래했던 금강 줄기처럼 길게 이어질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동갑내기 신동엽이 죽은 후 “잡초 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 외로움”이라며 「곡(哭 신동엽)」을 썼다. 천상병도 「책미치광이」에서 밝히기를, 어머니가 자신을 ‘책미치광이’로 불렀다고 했다. 초등 6학년 시절, 학교 파하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할 때도 도서관장이 외출하면서 서가 열쇠를 맡기니, “시립도서관장 임시대행을/ 살짝 지냈다는 꼴이 아닙니까?”라며 뿌듯해한 바 있다.
정창일 시인도 책방 점원으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대구 남문시장 근처 헌책방 거리에 자리 잡은 문홍서림은 한강 이남에 제일 크다는 고서점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채용을 꺼리는 사장에게 자기 꿈이 책방 점원이란 사실을 밝히고야 장정일은 겨우 취업한다. 취업 기간은 두어 달을 넘지 못했다. 이유인즉,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장정일 입장에서야 쓸쓸한 기억이겠지만 이때 집중적으로 읽는 시 문학 잡지로 시 수업을 대신한 셈이다. 열다섯 중학 시절 수업 시간에 몰래 읽기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삼중당 문고」는 그때까지의 장정일의 삶을 압축해놓은 듯한 시인데,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를 예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소설 『바스커빌의 개』를 생물 시간에 몰래 읽다가 들켜서 따귀까지 맞은 기억이 있으니 몰래 읽는 기술이 장정일만큼 능하지 못했나 보다. <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이동훈, 서해문집,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11. 4.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