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기념비
강 문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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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 붙어있는 글이다. 자유에 대한 담론이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그 가치는 실로 고귀하다는 걸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했다. 일제 36년간의 압제야 말할 것도 없고 동족상잔의 6.25사변 또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참혹하게 말살했던가. 광복 이후 공산독재 치하에서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삼팔선을 넘은 동포들이 그 증인들이 아니겠는가. 동란 때 수도 서울은 석 달 동안이나 빨갱이들 치하에서 자유를 유린당한 채 온갖 만행에 시달려야 했다. 삼척 울진에 나타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친 반공소년도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고 인천 자유공원이나 판문점 자유의 다리 또한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요청하여 그기에 응답한 조국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워싱턴에다 6.25 참전용사 기념비를 만든 미국은 전쟁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이렇게 위로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참전하여 전사한 미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현충시설이지만 세계평화나 자유와 같은 거대한 담론은 없었다. 어쩌면 미국은 이제 6.25를 잊히는 전쟁쯤으로 기억하다가 앞으론 영원히 없었던 일로 치부할는지 모른다. 사변 당시에도 합참의장 오마 브리들리는 6.25를 일러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이라고 혹평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그저 동아시아의 조그만 반도국가에서 일어난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젊은이들을 기억할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한때 미국은 자신들이 지켜준 나라가 번영을 이루어 굉장히 자랑스럽다고까지 했었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이제 6.25사변을 부정하는 세력들에 의해 백주대낮에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반미를 외치며 성조기를 불태우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6.25에 기습남침을 감행했던 괴뢰들의 망령이라도 되살아났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6.25를 북침이라고 떠들어댈 수 있단 말인가. 모르긴 해도 미국은 아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찌 한국이 우리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통탄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6.25에서 희생된 미군 전사자만 54,246명, 유엔군 전사자는 628,833명이나 되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런데도 2004년 우리나라 육사생도들에게 대한민국 주적을 물었더니 그 1위가 미국이었다.
6.25에 목숨 바친 미국의 젊은 영령들이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탄할 것 같다. 참전 기념비가 들어선 인근에 링컨기념관과 제퍼슨기념관 그리고 워싱턴기념탑까지 있어서인지 상상외로 많은 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옷들은 평상복처럼 수수했고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들도 영령들을 기리는 표정이 자못 엄숙해 보였다. 재미교포인 마흔 후반 우리 가이드는 기념비를 찾은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가리키면서 참으로 웃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기념비는 미군과 중공군이 맞붙은 장진호전투를 형상화한 것인데 원수의 나라 후손들이 왜 보러오느냐고 그들을 ‘또라이’라고 몰아붙였다. 난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가이드 직업을 계속하려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치는 게 좋겠다고 일렀다.
미군 전투사상 가장 의미 있는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제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2주간에 걸쳐 철수한 작전이다. 북괴 김일성이 도망간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해갔던 유엔군이 1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흥남으로 철수한 사건이다. 그런데도 미 해병대는 가장 큰 희생을 치루면서도 대한민국을 지킨 의미 있는 전투라고 말한다.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군 작전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투여서 당시 언론에서는 장진호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전으로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공군도 4만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19,202명이지만 동상 등 비전투 요인으로 발생한 사상자가 28,954명이나 되었던 것. 세계사는 장진호전투를 현대에 들어와서 미국과 중국이 제대로 맞붙어 싸운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 의의를 부여하기도 한다. 미국은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고 성공적으로 철수한 사례로 꼽기도 한다. 영어로는 장진長津의 일본어 독음인 ちょうしん을 가져와 ‘초신호전투’나 ‘초신호작전’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장진호에 대한 한글판 지도가 없어서 일본지도를 작전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장진호전투는 미국 입장에선 해병대뿐 아니라 미군 전체가 포위섬멸작전에 빠졌던 전투였다.
미군이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인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투력 소멸상황에 빠지기는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장진호전투 동안 서부전선의 미8군 지역에 있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포위섬멸작전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다. 만약 이때 중공군이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정도의 기동력과 공군력이 있었다면 미 해병대는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공군 사단은 1개 포병대대만 있었고 기갑부대 같은 중화기도 없었고 공군도 없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은 오직 소총과 박격포, 약간의 포병화력만 가지고 있어 각종 중화기와 항공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와는 엄청난 화력의 차이가 있었다.
기념비 인근 미 FBI훈련소로 유명한 콴티코에는 장진호전투의 의미를 담아 미 해병대박물관도 들어섰다. 우리는 장진호전투를 잘 모르고 있지만 미국은 굉장한 의미를 부여해서 장진호전투 추모비와 해병대박물관까지 세운 것이다. 장진호전투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미군이 중공군 침략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장진호전투에서 전열을 재정비했기 때문에 다시 싸울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장진호전투에서 해병대가 희생되지 않았으면 흥남철수도 힘들었다. 흥남철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할 수 있었으니 장진호전투에 감사하며 자유와 한미동맹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야 한다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한다.
참전 기념비는 장진호전투에서 판초우의를 입고 진군하는 19명의 해병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바닥을 사시사철 푸른 향나무 숲으로 깔아 현장감이 많이 떨어진다. 실제 전투가 벌어진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군은 희색봉 아득령 유린산 문암산 등 해발 2천 미터가 넘거나 가까운 고봉들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10월이 되면 벌써 눈이 내리고 겨울날씨가 시작된다.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져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장진호전투 당시에도 백설로 뒤덮인 눈밭이었는데 폭설까지 계속 퍼붓는 장면을 종군기자들은 카메라에 담아 기록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념비 바닥처리만 눈밭으로 제대로 했더라면 극적인 효과는 훨씬 높았을 것이란 아쉬움을 갖게 했다.
반세기 전 미국으로 건너간 친구가 카톡 메시지를 자주 보내온다. 주로 나라를 걱정하는 글들이나 국내에서 벌어진 망국적인 사건들에 관한 뉴스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지구 반대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한반도 소식을 대하면 참으로 난감해진다. 누구나 조국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만 교포사회도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마트나 음식점에 진열된 수많은 무가지 신문들은 현 시국을 바르게 보고 비판하는 쪽과 좌파정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갈리고 있었다. 어떤 경로로 유인물 제작 자금이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헌법에서 자유를 빼려고 발악하는 세력들을 옹호하는 신문도 버젓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6.25사변’이라 불러야한다고 주장해 왔다. 사변은 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것을 말한다. 6.25 직후 한때는 동란이란 말도 함께 썼다. 동란은 폭동이나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걸 이르는 말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사변이나 동란을 쓰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그냥 국가와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전쟁으로 부른다. 가장 많이 부르는 것은 6.25전쟁이고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한국전쟁이란 명칭은 그 다음쯤 될 것 같다.
6.25사변에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한 인물은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가 일찍이 유학하면서 미국에 폭넓게 닦아놓은 인맥을 활용하여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등 요인들을 움직였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맥아더는 사석에서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다. 전시에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의 비서이자 타자수로서 역할을 다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쟁일기를 썼고 대통령이 요청하면 미국 요로에 띄우는 친서를 작성했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이러한 피맺힌 기록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안도하게 된다. 동작동 서울현충원에서 이승만을 파내야한다고 기고만장한 얼빠진 인간도 아직 눈알이 썩지 않았다면 사변공간의 기록들부터 챙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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