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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씨의 연원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각각 울진지씨, 경주지씨, 충주지씨, 청주지씨, 단양지씨, 광주지씨 대종회을 따로 함
경주지씨의 유래
◑ 대동항렬표 (大同行列表)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30 | 勳(훈),德(덕) |
31
錫(석),龍(용)
32
泰(태),弘(홍)
33
錫(석),光(광)
34
煥(환),重(중)
35
商(상),承(승)
36
淵(연),永(영)
37
景(경),鉉(현)
38
善(선),燮(섭)
39
相(상),求(구)
40
培(배),喆(철)
41
承(승),晟(성)
42
秉(병),行(행)
43
鎰(일),原(원)
45
秀(수),辛(신)
시조 문성공 지원부이며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인 정숙은 해주정씨 시조이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
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왔으며 설과 또다른 지씨성을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는 충주지씨 시조 지경의 후손인지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는 해주정씨 시조 정숙은 생존연대는 대략 1190~121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합니다.
문성공 지원부의 생존연대 1170~118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를 것입니다
충주지씨 시조로부터 충무공 지용수의 조부 지원부까지의 약 300~400년의 상계는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현재 충주지씨 대동보에 실려있는 지원부 계보도는 잘못된 정보이며 아직 고증이 안되는 부분이다.
경주지씨 계보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지원부- 지 환- 지용도-지현경-지한심-지언국-지득홍-지봉원(절제공파)인구 수 1만여명
-지만원(참판공파)인구 수 400여명
-지한근-지언방-지수홍-지연(현감공파) 인구 수 300여명
-지언백-지윤신-지귀원(처사공파) 인구 수 40여명
-지언성-지흥신-지용달(진사공파) 인구 수 80여명
-지현우-지한성-지 성-지득후-지수오(감사공파) 인구 수 300여명
-지영천-지충신(거사공파) 인구 수 200여명
- 지용수(충무공파계)
-지 백-지용현(감팔공파계)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은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으며 경주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명을 배출했다.
충의공 지용도의 6세손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이다. 지정은 본래 이름은 지봉원이며 우의정 정분의 생질이다. 공은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그 외에도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경주지씨(慶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경주지씨 인구수는 1만3000여명이다.
경주지씨 10파 유래
충의공 지용도계 총 인구 수가 1만 1300여명이다.
충의공 지용도이다.
공은 충무공 지용수의 형이며 자는 뇌성, 호는 월정이다.
공은 만하시랑평장사, 상원수직에 지냈으며 최영, 안우경, 이순등과 함계 전공은 세워 여조수훈사적에 그 공훈이 실려졌다. 묘소는 문경시 마성면 정리 성주봉 아래에 있는데 매년 음력 10월 8일에 제사를 모신다. 시호는 충의공이다. 배위는 밀양박씨 중랑장 박충달의 딸이다. 2형제 두셨다.
장남 지현경은 수문적제학직에 지냈으며 차남 지현우은 찬성사을 지냈다,
지현경의 장남 지한심은 강화부사를 지냈으며 차남은 지한심은 진사 증찬성를 지냈다,
지현우의 아들 지한성은 통덕랑를 지냈다,
충의공 지용도계 계보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지원부- 지 환- 지용도-지현경-지한심-지언국-지득홍-지봉원(절제공파)인구 수 1만여명
-지만원(참판공파)인구 수 400여명
-지한근-지언방-지수홍-지연(현감공파) 인구 수 300여명
-지언백-지윤신-지귀원(처사공파) 인구 수 40여명
-지언성-지흥신-지용달(진사공파) 인구 수 80여명
-지현우-지한성-지 성-지득후-지수오(감사공파) 인구 수 300여명
-지영천-지충신(거사공파) 인구 수 200여명
1. 절제공파
절제공파시조 지봉원(1421~1453)이다.
공은 1450년에 문과에 특등으로 장원하여 판사복사직에 역임되었고 1453년에는 도승지로 충청도 절제사직에 역임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고 아들 지선, 지한무이다.
절제공의 유적으로서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에 우송정경묘가 있어 매년 유림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개성군 풍덕에 있다.
절제공파 가장 후손이 번성하였다.
절제공파 17대(38대)대종손 지한구(1921년생), 종부 광주노씨(1924년생)이다.
절제공파 인구수가 1만여명이다.
2. 참판공파
참판공파시조 지만원(1434~?)이다.
공의 조부는 삼등현령을 지내신 지언국이며 부는 홍주목사를 지내신 지득홍이고 형은 도승지 절제사를 지내신 지봉원이다. 공은 지득홍와 진주강씨 사이에서 2남 2녀중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아들 지경구(1462~?)은 무과에 급제하여 어희장군를 지냈다.
참파공파계보도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지만원-지경구-지헌산-지수인-지활영-지보원-지귀명-지흥장-지윤해
(통덕랑)문전적 통덕랑 수첨중추 수가선
-지중산-지수환-지시영-지문원-지정발-지탐이(무후)
(통덕랑)수문장 장사랑 통정
-지한산-지영남(무후)
(첨정)-지영후(무후)
-지영춘(무후)
지경구의 3형제 중 장남 지헌산은 통덕랑를 지냈고, 차남 지중산은 통덕랑은 지냈으며, 삼남 지한산은 첨정를 지냈으며, 이중 지한산의 아들대에서 절손되었고, 차남 지중산은 5대손에서 절손되었으며 장남 지헌산만이 대를 이었다.
참파공파는 38대손까지 내려옴
참판공파 15대손(36대)종손 지송호(1930년생), 종부 동래정씨 정순덕(1940년생)이다.
참판공파 인구 수는 대략 400여명이다.
3.현감공파
현감공파시조 지연이다.
공은 어회장군 포을하첨절제사 행 송희현감직에 역임되었고 배위는 숙인 연안김씨이며 아들 2형제 두었으며 장남 지영걸, 차남 지대창이다
장남 지영걸(1538~1647)은 마양첨절제사를 지냈으며 차남은 지대창(?~?)은 통덕랑를 지냈다,
지영걸집안은 2형제를 두었다,
장남 지천제(?~?)부터 11대손 지천룡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으며 지천제부터 손자 지응권까지 모두 기록이 실전되었다. 후손이 번성하지 않았다.
차남 지제(1595~1667)집안은 후손이 번성하여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지제은 3형제를 두었으나 막내 지사룡만이 무후이며 그중 차남 지진룡의 후손이 가장 후손이 번성하였고 그다음 장남 지기룡이다.
차남 지대창(?~?)집안은 외아들를 두셨다.
지대창부터 6대손 지수만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으며 지수만대에서 2형제를 두었으나 장남 지봉의은 절손되었다. 차남 지봉채은 3형제를 두었으나 막내만이 대를 이었다. 현재 인구수는 10여명이다.
현감공파 37대손까지 내려옴
현감공파 인구 수는 대략 300여명이다.
현감공파 14대(35대)종손 지태중(1942년생), 경주이씨(1942년생)이다.
4. 처사공파
처사공파시조 지귀원이며 공은 처사이다. 처사이란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이란 말한다. 현감공파시조 지연의 6촌형제이다.
공의 아들 지사국은 벼슬이 없었으며 손자 지태후는 장낙원정증좌승지에 역임되었고 공의 증손자 지사익은 벼슬이 없었고 공의 고손자 지응관은 첨절제사진무원종공신에 역임되었고, 공의 현손자 지계란은 벼슬이 없었고 공의 6대손 지옥선은 통정대부직에 지냈다.
지귀원부터 6대손지옥선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으며 지옥선대에서 3형제를 두었다.
처사공파 인구수는 대략 40여명이다.
37대손까지 내려옴
처사공파 15대(36대)종손 지성관(1957년생), 종부 경주이씨(1960년생)이다.
5. 진사공파
진사공파시조 지연(?~?)이다.
공은 진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군으로 왜적 수백명을 섬멸 평정한후 전망하였다,
배위는 실전되어 알수 없고 아들 지수이다.
공의 아들 지수는 통덕랑을 지냈으며 공의 맏손자 지종수는 가선대부를 지냈고, 자종수의 아우 지종원은 증병조참의직에 지냈다. 지종수의 아들 지갑해는 가선이며 지종원의 장남 지철강은 벼슬이 없었으며 차남 지우강은 증공조참판직에 지냈다.
지갑해의 4형제 아들중에 막내 지세정만이 가선대부를 지냈으며, 지우강의 아들 지윤해은 증호조참판직에 지냈다.
진사공파은 5대손까지 벼슬을 하였으나 6대손부터 벼슬을 하지 않았다.
진사공파 인구수는 80여명이다. 36대손까지 내려옴
진사공파 13대(34대)종손 지동희(1925년생), 달성서씨(1928년생)이다.
6. 감사공파
감사공파시조 지수오(?~?)이다.
공은 황해감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허씨이며 아들 지한익이다.
감사공파계보도
지수오부터 지병립까지 독자로 내려옴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지수오-지한익-지영욱-지윤결-지장린-지영희-지병립-지석종-지필희(손자대에서 절손)
-지악희
-지한종-지성희
감사공파는 29세손대에서 후손이 번성하였다.
39대손까지 내려온
감사공파 15대(36대)종손 지성호(1930년생), 종부 안동권씨(1931년생)이다.
감사공파 인구 수는 300여명이다.
7, 거사공파
거사공파시조 지충신(?~?)이다.
공은 운거사이며 배위는 곡부공씨이고 아들은 지한수이다.
거사공파 최초로 벼슬하신 지탐이다.
지충신의 7대손 지탐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지희세은 증가선을 지냈다.
지충신의 7대손 5명이 있는데 이 중 지탐만이 대를 이었으며 후손이 번성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 조선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임
*통정대부 [通政大夫] -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정3품 상계부터 당상관이라 하였고, 하계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하였다
거사공파 14대(35대)종손 지임환(1952년생), 종부 은진송씨(1955년생)이다.
37대손까지 내려온
거사공파인구수는 200여명이다
2. 충무공 지용수계 총 인구 수가 만여명(남북한 전체 인구)이다.
충무공 지용수이다.
공은 문하시중 찬성사 겸 평장사로 역임되어 광정대부 정일품 녹공일등공신으로 일충무공에 봉하였다. 공은 고려조에서는 가장 뛰어난 영도력을 지닌 무장이었다.
묘소는 양주준 풍덕면 풍양리 천도봉자좌에 비석이 있다.
그의 장남 지찬은 이부시랑직에 지냈으며 이조혁정에 불복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함경도 명천과 경성 등지에서 향토문화 발전에 전념 하였으며 차남 지철은 찬성사이고 삼남 지장은 참찬이며 맏형 같이 향경도 이주하였다,
지찬의 아들 지원종은 상서직에 지냈으며, 지철의 아들 지한생은 한성판관직에 지냈고, 지장의 아들 지한보은 진사직에 지냈으나 이조햑정에 불복하고 강원도통천으로 낙향하여 서민이 되었다.
지원종의 증손 지승한이 바로 교수공파시조이다.
공은 서기 1506년생 중종 병인생으로 경원교수직에 역임되었다.
묘소는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천년덕리 천년원 곤좌에 있다.
교수공파는 지승한은 2형제 두었으나 차남 지진용집안 28대손데에서 끊겼다,
장남 지기룡(1548~1577)만이 대를 이었으며 지기용의 아들 지달원(1570~1632)은 사사율곡제능참봉이며 임진왜란때 분의장군으로 증호조좌랑으로 함경도 경성에 창열사를 이룩하다, 고종때에 증 좌승지부제학 추증되었다.
지달원의 동생 지정원은 사사서평 성균관생원에 지냈다. 지달원의 아들 지윤해는 기원난때 공을 세워 안원권관녹에 수록되었다.
지정원(1573~1637)의 장손자 호산공 지천석(1620~1699)은 1648년 진사시 급제하였으며
숙종(肅宗) 12년(1686년), 별시(別試) 을과에 급제하였고, 예조정랑직에 지냈다.
지달원집안은 5형제를 두었으나 장남 지계해(1605~?)은 무후이며, 차남 지윤해(1607~?)은 고손재대에서 끈기고, 삼남 지성해(1613~?)은 4형제 두었으나 모두 증손자대에서 끊기고 오남 지방해은 고손자대에서 끊기었으며 오직 사남 지학해(1617~?)만이 대를 이었다.
지정원집안은 5형제를 두었으나 차남 지일해는 5형제 두었으나 증손대에서 대가 끊기고, 삼남 지지해은 4형제 두었으나 역시 증손대에서 대가 끊기고 사남 지옥해과 오남 지장해이도 역시 증손자에서 대가 끊겼으며 오직 장남 지조해(1595~?)만이 대를 이었으며 지조해은 4형제 두었으나 차남 지천여, 삼남 지천뢰, 오남 지천익은 모두 증손자대에서 대가 끊겼다 장남 지천석(1620~1699)은 4형제 두었으나 차남 지용과 사남 지허는 모두 손자대에서 대가 끈겼으며 장남 지빈과 삼남 지인은 대를 이었다. 37대손까지 내려옴
교수공파 인구 수는 40여명이다.
14대(34대)종손 지장활(1915년생), 원주원씨(1928년생)이다.
학생공파시조 지인동이다.
공은 교수공파시조 지승한의 6촌형제이다.
학생공파는 25대손부터 27대손까지 후손이 번성하였으나 28대이후 후손 번성하지 않았다.
지인동의 외아들 지선이며 지선은 2형제를 두었으며 차남 지은세집안 장남집안보다 후손이 번성하였다. 24대손(아들) 3명, 25대손(손자) 8명, 26대손(증손자) 22명, 27대손(고손자) 40명이다. 40명중에 4명이 대를 이었으나 모두 28대손에서 대가 끊기고 지은세집안 대가 끊기었다.
장남 지선문집안은 차남집안보다 후손이 번성하지 않았다. 24대손(아들) 2명, 25대손(손자) 3명,
26대손(증손자) 7명, 27대손(고손자) 11명이다. 11명 중에 3명 대를 이었으나, 2명이 모두 28대손대에서 대가 끊기고 1명이 대를 이었다.
지명원은 유일하게 대를 이었으며 그와 2명은 모두 4촌형제이다.
37대손까지 내려오고 15대(36세)종손 지영걸(1926년생), 종부 청주한씨(1938년생)이다.
학생공파 인구 수는 10여명이다.
충무공파계 교수공파 인구 수는 40여명이다,
진사공파 인구 수는 10여명이다.
충무공파계 총 인구 수는 50여명이다.
북한에 만여명이다.
3. 감찰공 지용현계 총 인구 수가 3000여명(남북한 전체 인구)이다.
감찰공 지용현이다.
그는 충무공 지용수의 사촌동생이다.
그의 손자 지거원, 지석원은 판사 종2품 병의익대종훈공신이다.
지거원의 증손자 봉사공파시조 지세문이다.
지세문의 2형제 두었으며 그중 차남집안 후손이 번창하였다.
지세문의 고손자 지득용은 병인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남행부장에 지냈다.
인구수는 대략 300여명이다.
위 경주지씨 성씨연원은 경주지씨족보. 기타 모든 기록에 동일하게 정의한 경주지씨 성씨역사입니다.
충주지씨와 경주지씨 관계
경주지씨 시조 문성공 지원부(1170~1180 출생함)이며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인 정숙은 해주정씨 시조이다.
경주지씨는 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왔으며 설과 또다른 지씨성을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는 충주지씨 시조 지경의 후손인지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는 해주정씨 시조 정숙은 생존연대는 대략 1190~121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합니다.
문성공 지원부의 생존연대 1170~118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를 것입니다
충주지씨족보 역시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충주지씨족보에 기록된 우사간(벼슬이름) 지원부 세계도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현재 충주지씨 대동보에 실려있는 지원부 계보도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충주지씨족보 및 관련들이 90%는 신뢰가 가지 않고 있다.
다만 아래의 내용은 충주지씨족보에 의하며, 역사적인 검증이 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충주지씨족보에 따르면, 충주지씨는 지씨의 시조(1세조)인 "지경"으로부터 6세가 되는 "종해"에서 본관이 충주로 정해졌고, 경주지씨는 역시 "지경" 시조로 부터 충주지씨로 이어져 16세 "元夫(원부)"에서 본이 경주로 정해집니다. 즉, 경주지씨는 충주지씨에 속해있다가 시조로 부터 16세 "원부"를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주지씨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충주지씨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경주지씨를 인정하는 사람은 16세에서 독립한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검증이 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정확한 문헌이 없으며 충주지씨 시조 지경으로부터 경주지씨 시조 지원부까지 연계할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충주지씨정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경주지씨의 일부 후손들도 현재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통설로 보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고 아직 정확한 고증 계대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각각 울진지씨, 경주지씨, 충주지씨, 청주지씨, 단양지씨, 광주지씨 대종회을 따로 한다고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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