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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10-28
교정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1980 - 전두환대통령,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임명
국가보위입법회의 [國家保衛立法會議]
제5공화국 헌법(1980. 10. 27 공포) 부칙 제6조에 따라서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
입법기관.1980년 10월 발족하여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전개될 정치의 틀을 강압적으로 재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입법의원 81인으로 구성하였다. 조직과 운영을 위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권한과 기능은 국회와 같다. 제5공화국을 출범하기 위하여 그 기초가 되는 법률들을 제정한 혁명적이고
과도적인 입법기관으로, 특히 헌법 부칙
제6조 4항에 따라서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헌법 시행일 이전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한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1980. 11. 5 공포)'을 제정하여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제5공화국의 지도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118건의 법률안과 동의안을 처리하고
1981년 4월 10일 새 국회 개원을 앞두고 150일 만에 해산되었다. 헌법 부칙 제6조 3항에 따라서 국가보위입법회
의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해진 재판 및 예산, 기타 처분 등은 그 효력이 지속되며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2) 1977 - 자연보호협의회 발족
자연보호중앙협의회 [自然保護中央協議會]
자연보호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로 국토를 소중히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자는 취지에서
자연보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1977년 10월 28일 창립되었으며, 1979년 4월 자연보호중앙협의회로 개칭되었다.
자연보호를 위해 자연의 실태를 종합적으로 조사,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국내외 관련단체와의 유대강화를 위해
1979년 1월에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에 가입하였고, 제14·15차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기구로는 회장 밑에 사무국을 두고 전국 시·도·군·구에 자연보호협의회를 설치하고 있으며, 직장·지역단위로 조직된 자연보호회가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자연보호명예감시관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을 제정·선포하였고, 격월간으로 《자연보호》지를 발간하고 있다.
3) 1995 -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 1977
1995년 오늘 우리나라의 수출이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온 나라가 전직 대통령의 부정축재문제로 어수선한 가운데 전해진 낭보였다.
4,500만명의 국민 한 사람이 2,100달러,우리 돈으로 160만원 넘게 수출을 한 것이다.
77년 100억 달러를 달성한 이후 28년만에 10배의 성장을 한 것이다.
1) 1969 -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아동문학가 추코프스키(Chukovsky, Korney) 사망
추코프스키(추콥스키) [Chukovsky, Korney Ivanovich, 1882.3.31~1969.10.28]
본명은 Nikolay Vasilyevich Korneychukov.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언어이론가·번역문학가·아동문학가.
흔히 근대 러시아 아동 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교육을 마친 뒤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쌓아 1901~05년에 오데사의
일간지에 기고하는 한편 2년간 런던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어서 1905~08년 및 풍자 잡지 〈시그날 Signal〉의 편집을 맡았으며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에 관한 비평서를 비롯해 러시아 문학의 3세대를 포괄하는 회고록·
비평 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디킨스, 마크 트웨인, 휘트먼 등 영국 및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의 번역과 비평, 특히 19세기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에 관한 필생의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관한 글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악어 Krokodil〉(1917)·〈그들을 깨끗이 씻겨라 Moydodyr〉(1923)·〈커다란 바퀴벌레 Trakanishche〉(1923)를 비롯한 수많은 운문 동화들은 그 분야의 고전으로 꼽힌다. 이들 작품의 정교한 운율과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답답함과 단조로움을 일소해버렸다. 단체행동과 사회적
책임의식이라는 상투적인 주제는 언제나 생생한 이야기 자체에 종속되는데 이야기는 주로 일상적 상황이나,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동물을 기초로 한 환상적 내용을 포함한다. 이 동화를 각색한 연극·영화 및 오페라와 발레(프로코피예프가 몇몇 작품을 연출했음)도 20세기 전반에 걸쳐 소련 내에서 해마다 인기를 누렸다. 아동 언어에 관한 그의 연구 〈2~5세 Ot dvukh do pyati(1933)는 어린이를 둔 부모를 위한 인기 있는 지침서로서 20판 이상 발행되었다.
2) 2005 -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국립중앙박물관 용산시대 개막
민족 문화의 전당인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에 28일 개관했다. 1997년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대역사를 마무리한 중앙박물관은 이날 오전 10시 개관식을 갖고 오후 2시부터 일반 관람객을 맞이했다. 개관식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사회 각계 인사, 주한 외교사절, 외국 주요 박물관 관계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중앙박물관은 부지 9만2900여 평, 건물 연면적 1만4000여 평, 전시 면적 8100여 평으로 건물 연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6번째 큰 박물관이다. 새 박물관엔 국보와 보물 150여 점 등 총 1만1000여 점의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관람료는
올해 말까지 무료이고 내년부터는 500∼1000원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문을 연 이래 여섯 차례나 이사를 했던 중앙박물관이 광복 60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의 전용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 개관 첫날 박물관엔 관람객 2만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관람객들은 동아일보사가 특별 제작해
배포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올 가이드’를 보면서 명품을 감상했다. 특히 국보 86호 경천사 10층 석탑,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국보 191호 신라 황남대총금관 등의 명품과 최근 일본에서 되돌려 받은 북관대첩비 주변에 관람객이 많았다. 아사히TV와 아사히신문을 비롯해 일본 언론이 북관대첩비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을 취재하는 등
외국 언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광표 기자
3) 2004 -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2004년 오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전전승으로 누르고 86년만에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20년 구단주가 펜웨이 파크 건설 자금을 위해 최고의 투수인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으로 트레이드한 후 월드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멀었다.
그동안 4차례나 월드시리즈 무대에 섰지만 번번히 고비를 넘지 못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사람들은 '밤비노의 저주'로 불러왔다.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애칭이다.
1) 2) 3)
1) 1922 - 무솔리니, 로마 진군
1922년 10월 28일 아침 이탈리아 파스타 임시 수상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의용군인 '검은 셔츠단' 4만명이 로마로 진군했다는 긴급보고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 분쇄' '위대한 이탈리아'를 외치며
퀴리날궁을 향해 행진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군경은 보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전부터 파스타 내각에 자신을 포함한 자파 간부들의 입각을 요구해 왔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로마 무력점령을 강행했다. 이날의 긴급회의에서는 계엄령을 내려 무솔리니군을 저지하기로 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이 계엄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파스타는 사임했다.
10월 29일 국왕은 허약한 민주주의 정부 대신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무솔리니에
내각구성지시를 내렸고 무솔리니는 31일 수상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고,1933년 무솔리니는 선거법을 개정, 독재로의 행진을 준비했다.
2) 1959 - 쿠바의 혁명가 시엔푸에고스(Cienfuegos, Camilo) 사망
시엔푸에고스 [Cienfuegos (Gorriarán), Camilo, 1932.2.6~1959.10.28]
28일 쿠바 아바나의 엘 마엘콘 거리에서 군인들이 혁명영웅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를 기리며 묵념을 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장군이었던 시엔푸에고스는 혁명군의 승리 이후 1년이 채 안된 1959년 10월 28일 그가 탔던 비행기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와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쿠바 군인들은 매년 10월 28일 그를 기리며 바다에 꽃을 던진다.
로이터 /동아닷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아십니까?
미국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군사독재 정권을 몰아낸 쿠바 혁명의 네 영웅을 꼽는다면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피스보트가 쿠바에 도착한 지난달 28일은 마침 시엔쿠에고스가 1959년 비행기 추락사고를 유명을 달리한 지 36년째 되는 기일이었다. 쿠바에서는 볼리비아군에게 게바라가 체포된 10월8일부터 이날까지 20일 동안을 추모기간으로 정해 놓고, 시대를 앞서 살다 요절해 간 두 사람의 넋을 기리고 있다.
게바라의 유명세에 가려 나라 밖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쿠바 안에선 시엔푸에고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날렵한 베레모를 쓴 채 언제나 심각한 표정인 게바라의 초상과 달리 밀집모자를 쓴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논쟁적이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게바라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고 전해진다. 혁명 직후 대중 연설을 하던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려 연단에 있던 시엔푸에고스에게 “카밀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카스트로의 투옥과 이어진 국외추방의 도화선이 된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시엔푸에고스는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근거지로 한 쿠바 혁명 과정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이른바 ‘혁명군 제2대’를 이끌며 투쟁을 주도했다. 혁명 뒤 숨지긴 전까지 10개월 남짓 기간 동안에는 토지개혁을 주도하는 한편, 군의 최전선에서 신생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반혁명 세력’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시엔푸에고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심지어 그를 반공주의자로 분류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의 부친과 형이 유명한 급진 좌파 활동가였던 것으로 미뤄 이는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가 스탈린식 교조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점에는 상당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는 혁명 뒤 카스트로가 이끄는 국가평의회의 교조적 행태에 유감을 표시하며 공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가 반역죄로 몰린 혁명동지 우베르 마토스의 투옥을 끝까지 반대했었다. 마토스는 이후 20년 간 카스트로의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한 뒤 현재 미국에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이 성공한 지 10개월 만에 시엔푸에고스가 숨졌을 때 게바라는 “카밀로와 같은 인물은 숨을 거둔 뒤에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다”며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영혼은 인민들이 명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들 곁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헌사한 바 있다. 매년 10월8일 추모기간이 시작되는 날 쿠바 전국의 소년단원은 “체 게바라 같은 삶을 살겠노라”는 엄숙한 다짐을 한다. 반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숨진 10월28일엔 수많은 이들이 강이나 바닷가를 찾아 꽃 한 송이를 물 위에 띄우며 그의 넋을 기린다. 시엔푸에고스의 주검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
3) 1971 - 티토(Tito, Josip Broz) 유고대통령 미국 방문
유고슬라비아 저항 운동의 상징 티토 유고 대통령!
1971년 오늘, 티토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닉슨 대통령을 만난다.
닉슨 대통령은 티토 대통령을 반갑게 맞이했다.
닉슨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티토 대통령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
또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져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차 대전중에 비밀군대를 조직해 나치에 저항하다 1953년 유고의 초대 대통령이 된 티토.
대외적으로 비동맹주의 운동을 벌였으며 소련의 팽창주의를 비판했다.
티토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과 함께 데탕트 시대를 여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2009 - 천상의 마이클 잭슨 지상의 마지막 공연
리허설 장면 다큐영화로…‘디스 이즈 잇’ 전세계 동시개봉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내가 여기 당신과 함께 있어요. 비록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은 항상 내 가슴속에 있어요.”
28일 오전 서울 왕십리 씨지브이(CGV) 극장 들머리. 지난 6월 숨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곡 ‘유어 낫 얼론’의
노랫말을 담은 글들이 쌓여 있다. 주변엔 편지며 꽃다발이 수북하다. 이날 전세계 동시개봉한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감독 케니 올테가)에 바친 팬들의 선물이다.
<디스 이즈 잇>은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리허설 영상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잭슨은 지난 7월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50일 간의 세계 순회공연을 계획했으나, 6월25일 갑작스럽게 숨졌다. 제작진은 그가 소장하려던 리허설 영상을 편집해 그를 무대로 불러냈다.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10년 만의 컴백 공연’이 스크린을 통해 펼쳐진 것이다. 영화는 단 2주일 동안만 상영된다.
영화에선 ‘빌리 진’‘비트 잇’‘스릴러’ 등 생전의 히트곡을 열창하는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일 비 데어’ 등 어릴 적
활동했던 밴드 잭슨 파이브 시절 히트곡과 신곡 ‘디스 이즈 잇’도 들을 수 있다. 리허설 장면이긴 하지만 실제 공연 못잖은
생동감과 열정이 넘친다.상상을 뛰어넘는 무대장치도 압권이다. 흑백 갱스터 영화 속으로 들어간 ‘스무스 크리미널’이나 3디(D)
입체영상으로 재탄생한 ‘스릴러’ 장면은 리허설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만든다.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어스 송’을 부를 땐
무대 위로 거대한 불도저가 등장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팝의 황제’라는 타이틀에 가려진 마이클 잭슨의 인간적인 면모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스태프들을 다그치며 “잔소리가 아냐.
잘해보자는 거야”라거나 “화내는 게 아냐. 위드 엘오브이이(LOVE)”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장인 정신과 배려심이 함께 느껴진다. “이어폰 소리가 너무 커서 주먹을 귀에 쑤셔넣는 것 같다”거나, 연주자에게 “달빛에 몸이 젖듯이 천천히 들어오라”는 등 재치있는 표현도 곧잘 한다. 노래를 더 불러보라고 부추기는 백댄서들에게 “목을 아껴야지. 이건 리허설이잖아”라며 빼거나,
노래를 살살 부르다 눈치를 살짝 보며 “목을 보호하려고 살살 부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의 유작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첫 상영회에는 패리스 힐튼, 제니퍼 러브 휴이트, 제니퍼 로페즈 등 할리우드 스타와 가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저녁 열린 국내 브이아이피(VIP) 시사회에도 휘성, 브라이언, 에픽하이,
애프터스쿨, 박기영 등 유명 가수와 류승완 감독, 디자이너 앙드레김 등이 자리를 잡았다.
마이클 잭슨의 팬들도 극장을 찾았다. 회원수 4만명인 마이클 잭슨 팬클럽 회장 연정아(36)씨는 영화를 본 뒤 “저토록 멋지고 쌩쌩하게 리허설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떠났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안타까우면서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31일 단체로 영화관을 찾을 계획이다.
마이클 잭슨은 영화 속에서 노래한다. '내 이름을 불러봐. 내가 거기 있을거야." 하늘에서 팬들의 부름에 보내는 대답인 듯하다.
서정민 기자 한겨레
2008 -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개막 (창원컨벤션센터 CECO)
‘람사르 총회’ 창원서 막 올랐다
습지의 보전과 지속 가능한 이용을 추구하는 람사르협약 제10차 당사국 총회가 28일 오후 경남 창원컨벤션센터에서
150여 나라 정부 대표와 습지 관련 전문가 등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했다.
이날 개회식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아힘 슈타이너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 줄리아 마르통 르페브르 국제자연보존연맹(IUCN) 사무총장 등 환경 관련 국제기구 대표 등이 참석해 총회 개최를 축하했다. 이 대통령은 축사에서 “습지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인류가 아끼고 가꾸어 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며 “훼손된 습지와 하천을 되살려 놓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창원-조홍섭 환경전문기자, 권태호 기자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는 당사국간 논의를 통하여 지구 차원의 습지보전 상황을 평가하고 공동의 정책을 개발하는
중요한 국제 환경회의로서 매 3년마다 대륙별 순환 원칙에 의해 개최된다.
제 10차 회의는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9차 회의에서 우리나라 창원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 을 주제로, 약 165개의 당사국이 참가하여 8일간에 걸쳐 열릴 예정이다.
- 명 칭 :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 The 10th Meeting of the Conference of the Contracting Parties to the Convention on Wetlands )
- 주 제 :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 ( Healthy Wetlands, Healthy People )
- 기 간 : 2008. 10. 28 (화) ~ 11. 4 (화) - 8일간
- 장 소 : CECO ( 회의 ), 우포늪·주남 저수지·순천만 등 ( 현장견학 )
- 주 최 : 람사르협약 사무국
- 주 관 : 환경부, 경상남도
- 규 모 : 약 2,000명 ( 약 165개국 정부대표, 관련 국제기구, NGO 등 )
- 내용
공식행사 ( 개회식, 폐회식, 환영.송연 등 )
회의 ( 전체회의, 지역회의, 상임위원회의 등 )
부대행사
- 참가국 홍보관, 습지IT기술전시회, 한국전통문화 소개 등
- 일반인을 위한 자연생태 프로그램 및 다양한 지역축제 행사 개최
1958 - 요한 23세(Joannes XXIII), 제262대 로마 교황에 선출
로마의 교황(재위 1958∼1963).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알프산 자락의 소토 일 몬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젤로 G.론칼리.
북이탈리아 밀라노 출생. 1904년 사제에 서임된 후, 1931년부터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다가 1953년에는 추기경, 베네치아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958년에는 교황에 선출되었다. 6년간의 재임기간이었으나, 1962년 가톨릭의 교회쇄신과
현대에의 과감한 적응을 지향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고, 1963년 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를 발표, 세계평화
남북문제 ·노동문제 등 현대 인류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해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65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내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1955 - 마이크로소프트사 사장 빌 게이츠(Gates, Bill) 출생
게이츠 [Gates, Bill] [Gates III, William Henry "Bill", 1955.10.28~ ]
미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기업가.
세계에서 가장 큰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창업자이다. 빌 게이츠는 미국 시애틀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7년 대학진학 사립 예비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입학한 그는 초보적인 전산기로 컴퓨터 세계를 처음 경험했으며, 후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창업자가 될 2년 선배 폴 앨런을 만났다. 1973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하버드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이내 수학과로 전과했다. 1974년 그는 폴 앨런과 함께 최초의 소형 컴퓨터용 프로그램 언어인 베이식(BASIC)을 개발했고, 이어 1975년 하버드대학교를 중퇴하고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했다.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장 겸 회장에 취임한 1981년, 당시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였던 IBM은 그에게 IBM 개인용 컴퓨터에 사용할 기본 운영체제 프로그램의 개발을 맡겼다. 이것이 그에게 오늘날의 소프트웨어 제국을 이루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DOS(Disk Operating System)라고 이름 붙은 이 운영체제는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IBM으로부터 컴퓨터 업계의 왕좌를 넘겨받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빌 게이츠는 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불혹의 나이를 막 넘긴 그는 첨단
운영체제 윈도 95를 통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하여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야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빌 게이츠가 회장으로 있는 미국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1995년 8월 24일 윈도 95를 본격 출시함으로써 세계 컴퓨터 사용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윈도 95는 당시에 사용되어왔던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 중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어 출시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으며, 발매 4일 만에 전세계에서 100만 개 이상 판매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윈도 95는 컴퓨터 업계의 전반적인 변동을 일으켰으며,
1995년은 빌 게이츠가 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킨 해가 되었다.
빌 게이츠는 자선활동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2008년 6월 빌 게이츠는 자선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회장직에서는 퇴임하고 이사회장 직무만 수행하면서 그의 부인 멜린다와 함께 1994년에 설립한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자선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
1949 - 프랑스의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Cerdan, Marcel) 사망
세르당 [Cerdan, Marcellin "Marcel", 1916.7.22~1949.10.28]
[역사 속의 인물] 피아프의 연인 佛 권투선수 세르당
역대 프랑스 권투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마르셀 세르당은 19살 때인 1934년에 프로에 데뷔, 48연승을 거두며 주목 받았다. 이후 연승 중간에 패배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실격패였을 정도로 그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 웰터급 챔피언을 거쳐 유럽 웰터급 챔피언이 되었고 체급을 올려 미들급 정복에 나섰다.
1948년, 미국의 토니 자일을 꺾고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 된 세르당은 일약 파리 사교계의 명사로 떠올랐다.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그는 유명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우 헌신적이었고 진정한 사랑을 느낀 피아프는 그를 기린 노래 '사랑의 기쁨'을 불러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의 제이크 라모타에게 패해 타이틀을 내준 세르당은 라모타와의 리턴 매치를 앞두고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1949년 오늘 숨졌다.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그는 117전 109승 4패 66KO승의 전적을 남겼고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세르당과 피아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영화 '라비앙 로즈'(2007년 작)에서 다뤄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1929 - 세계 경제 대공황 확산
1929년 10월 24일 미국 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
주가 폭락은 이보다 나흘 뒤인 1929년 오늘 미국 전역의 금융시장을 마비시킨다.
모든 은행이 문을 닫고 대기업의 경영주들은 보유하고 있는 유가증권을 모두 현금으로 바꿨다.
기업들의 도산이 속출하고 실업자들은 거리를 메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경제.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주식투자가 만연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주가폭락을 가져왔고 경제활동을 마비시키는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이 공황은 독일과 영국 등으로 파급돼 유럽도 경제 대공황의 늪에 빠진다.
대공황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전체주의로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대공황의 시발점 블랙먼데이
1929년 10월 28일.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13.47% 폭락했고, 이튿날에도 11.7% 폭락했다. 이틀간의 대폭락은 대공황의 시발점이 됐다. 이전까지 71개월동안 345% 폭등했던 뉴욕 증시는 이날 주가 폭락을 기점으로 향후 2개월만에
40%가 날라갔고, 33개월 동안 87% 급락했다.
미국 경제는 1925년부터 1929년 9월까지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아무런 이익을 내지 못한 기업들조차 상장하면 대박이 터졌고, 묻지마 투자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면에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실업이라는 그늘이 존재했다. 결국 비이성적 과열과 투기를 경험하던 증시는 10월 들어 한순간에 무너졌다. 10월 28일을 기점으로 뉴욕증시는 2개월만에 40% 하락했고, 33개월동안 87% 급락세를 경험했다.증시 대폭락은 곧바로 실물 경제로 전이돼 경제활동을 마비시켰다.
기업의 부도가 속출했고 실업률은 30%까지 치솟았다. 미국을 경기침체 수렁에서 건져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뉴욕증시가 대공황 이전 주가 지수를 회복한 것은 1954년 11월23일, 25년만이다.
머니투데이 김경환 기자 머니투데이
1919 - 미국의회, 금주법(禁酒法) 가결
전국적 차원의 금주는 1906년 이후 많은 주에서 주류 판매에 대해 새로운 비판과 공격을 가하면서 추진되었다. 그 배경이 되었던 추진력으로는 도시의 성장에 대한 반기(당시 도시에서는 음주가 성행했음), 복음주의파인 프로테스탄트 중간계급의 반외국인적·반가톨릭적 감정, 그리고 수정헌법 제18조의 비준을 가능하게 해준 주의회에서의 농촌세력의 우세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술집에 존재하던 부패와 타락 및 사고를 방지하고 노동자의 효율성을 제고하려는 공장고용주들의 증대된 관심 또한 이를 부추겼다.
1906~13년에 각주에서는 1893년에 창설된 금주동맹(Anti-Saloon League)의 캠페인에 자극받아 앞다퉈
금주법을 제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식량으로 사용할 곡물을 아끼기 위해 한시적인 전시금주법(Wartime Prohibition Act)이 통과되었다. 1920년 1월에는 전체 인구의 63%를 차지하는 33개 주에서 금주법이 발효되었다. 1917년에는 금주법 수정안의 주의회 제출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연방의회에서 2/3의 찬성표를 얻었고, 그 수정안은 1919년 1월 29일에 비준, 1920년 1월 29일에 발효되었다. 1919년 10월 28일 볼스테드 법(입안자인 하원의원 앤드루 J. 볼스테드의 이름을 붙임)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금주법(National Prohibition Act)이 제정되어 그 시행지침을 규정했다.
연방정부의 금주법 시행에 대한 지지는 1920년대에 상당히 변화했다. 미국에서는 주류의 불법 제조 및 판매가 대규모로 계속되었고, 금주법은 통상 주민이 공감할 경우 어디서든지 시행되었다. 금주법에 크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대도시에서는 농촌지역이나 소도시에 비해 그 시행 정도가 훨씬 약했다. 그러나 알코올 음료와 맥주의 가격이 인상되었다는 사실은 주민들중에서 노동자 계급이 중류나 상류 계급에 비해 금주법의 제약들을 훨씬 더 많이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금주법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 즉 밀주제조를 낳았다 (→ 부틀레깅). 알 카포네의 화려한 범죄 경력은 금주법 시대에
대규모의 주류밀조를 보여주는 극적인 일례였다. 그의 연간수입은 6,000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주류밀조 갱단의 출현은 서로간의 잇단 세력다툼과 살인을 낳았다. 1929년 시카고에서는 악명높은 ' 성 발렌타인데이 학살'이 일어났는데,
그때 카포네가 이끌던 갱단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버그스 모런'(Bugs Moran:모런의 별명) 휘하의 갱 단원 7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당시 암흑가에 몸담았던 산 증인들은 1920년대 후반에 주류밀조는 거의 반독점적 통제에 직면해 있었고
갱단간의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에 접근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금주)
1918 -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선언
제1차 세계대전 중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전을 바라면서도 참전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으며, 마사리크·베네시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헝가리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단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918~1938년까지의 기간은 제1공화국시대인데,
1918년 10월 28일 독립이 선언되고, 1920년에는 헌법이 채택되어 마사리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 1934년에는 재선되었다. 그 결과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두 민족 외에 독일인 ·헝가리인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국가가 되었다.
1914 - 미국의 의사, 의학자 소크(Salk, Jonas) 출생
소크 [Salk, Jonas Edward, 1914.10.28~1995.6.23]
소크는 최초로 유효한 소아마비 백신(소크백신)을 개발한 미국의 의사이다.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소아마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52년 미국에 5만 8,000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3,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사태가 발생하자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항체를 형성하는 데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활성인자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는 비활성 바이러스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백신을 개발해서 인체실험을 시작했고, 그 실험은 자신과 가족들에게도 행해졌다. 1954년 미국의 180만 취학아동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이루어졌고, 1955년 4월 12일 마침내 백신의 효력과 안전성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결과 1962년까지 새로운 소아마비 발생건수는 대략 1,000건으로 떨어졌고, 1995년 소아마비는 웨스턴 헤미스피어
전지역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제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이 에이즈 환자로 진행되는 것을 막는 백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미국 자유훈장 등을 수상했다.
"각 개인들은 그들의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각자 표현하고 실행해야 하는 예술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
- 조나스 E. 솔크, 1991
1909 - 영국의 화가 베이컨(Bacon, Francis) 출생
1903 - 황성기독교청년회 발족
1886 -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제막
1885 - 스웨덴의 정치가 한손(Hansson, Per Albin) 출생
1874 - 중국의 혁명가 황싱[黃興] 출생
1866 - 에스파냐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바예 잉클란(Valle-Inclan, Ramon Maria del) 출생
1846 - 프랑스의 요리사 에스코피에(Escoffier, Auguste) 출생
1636 -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창립
1492 - 콜럼버스 쿠바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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