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에서 완도의 화흥포항으로 가는
여객선 승선권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소안도
1년 365일 집마다 태극기 펄럭이는 항일운동 성지
중앙일보 기사 입력일 : 2022.02.25.
소안도(완도) 글·사진=손민호 기자
전남 완도군 소안도는 태극기 섬이다. 1년 365일 집집이 태극기가 펄럭인다. 길가에 태극기가 줄 서 있고 호수에도 태극기가 떠 있다. 소안도 태극기는 여느 관광지의 이색 볼거리와 차원이 다르다. 항일 운동의 전통을 잇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어서다. 이 섬에서만 독립유공자가 22명이 나왔다. 3·15 완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섬답게 지금도 3월 15일이면 주민 스스로 태극기 흔들며 행진한다. 삼일절을 앞두고 소안도를 갔다 왔다. 섬에 밴 항일운동의 흔적보다, 섬 주민의 자긍심이 더 기억에 남았다.
배달의 민족
여객선 이름은 ‘대한호’였다. 소안도 여객선은 모두 세 대가 있는데, 이름이 ‘대한호’‘민국호’‘만세호’라고 했다. 소안도 어귀에 구도가 보였다. 열 가구나 살까 싶은 이 작은 섬에서 국내 스타트업계의 전설이 태어났다. 구도는 ‘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46) ‘우아한형제들’ 의장의 고향이다. 취재에 동행한 ‘완도뉴스’ 박주성 편집국장의 설명을 인용한다.
“소안도 항일운동을 주도한 단체 중에 배달청년회가 있습니다. 현재 완도군 12개 청년회 중에서 소안도 청년회만 이름에 ‘배달’이 들어갑니다.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요. 김 의장도 ‘배달의민족’의 모태가 소안도 배달청년회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작년엔 김 의장이 완도군 중·고교 학생을 위해 태블릿PC 1838대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대한호가 소안항에 도착했다. 선착장 어귀에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새긴 기념비가 서 있었다. 소안배달청년회가 세운 기념비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수의위친계·배달청년회·살자회·일심단 같은 단체가 이끌었는데, 교사 출신 독립운동가 송내호(1895∼1928) 선생이 이들 단체를 모두 조직했거나 주도했다. 1919년 3월 15일 완도 만세운동도 그가 앞장섰다.
소안도 주민은 송내호 선생을 순교자처럼 받든다. 실제로 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월 15일 소안도에서 태극기 행진을 할 때 반환점이 송내호 선생 묘역이다. 행진을 시작하는 항일운동기념공원에서 묘역까지는 약 2.3㎞ 거리다. 소안항일운동 기념사업회 김광선(66) 회장은 “섬 주민 2600여 명 중 절반 정도인 1000여 명이 태극기 행진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소안항 선착장에서 나오자 도로 옆으로 태극기 수십 기가 휘날린다. 길가에 심은 나무는 무궁화라고 한다. 여름에 소안도에 들면 무궁화 활짝 핀 꽃길을 지나게 된단다. 방파제를 따라 도로가 이어진다. 왼쪽이 민물을 담은 달목공원이고 오른쪽이 다도해 바다다. 달목공원 호수에 대형 태극기가 떠 있다. 가로 18m 세로 12m 크기의 태극기다. 모두 2420개 부표로 만들었다고 한다.
항일운동기념공원에 도착했다. 소안도 항일운동 유적 대부분이 기념공원에 몰려 있다. 특히 사립소안학교는 소안도 항일운동의 진원지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1909년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소안도 토지 소유권이 조선 왕족 이기용에게 넘어가자, 주민들은 4년의 준비를 거쳐 법적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1921년 13년에 걸친 소송 끝에 승리했다. 소송에서 이기자 소안도 주민은 성금 1만454원(현재 1억원 상당)을 모아 1923년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도 학교는 일장기를 걸지 않았고 일제 국경일에 학교를 열었다. 일제는 1927년 사립소안학교를 강제 폐교했다.
주민은 폐교 반대 운동에 나섰고 일제는 탄압을 자행했다. 그 결과 수많은 주민이 투옥됐다. 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중배(75)씨는 “그 시절 연인원 300여 명이 잡혀갔는데, 감옥에 끌려간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주민들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이불을 덮지 않으며 의지를 불태웠다”고 말했다.
소안도는 독립유공자 22명과 애국지사 69명을 배출했다. 항일운동사보다 더 위대한 건 남다른 전통을 지키려는 주민의 노력이다. 성금 300만원을 종잣돈 삼아 소안도는 2003년 소안항일운동 기념관을 열었고, 2005년에는 기념탑과 사립소안학교 기념관을 세웠다. 집마다 365일 태극기를 내다 걸고 길가에 무궁화를 심기 시작한 것도 그맘때부터다.
섬 남쪽 물치기미 쉼터에 들렀다. 깎아지른 해안절벽 위에 들어선 전망대다. 멀리 길게 누운 당사도가 보였다. 섬 왼쪽 끄트머리에 등대가 서 있었다. 1909년 소안도 주민들이 일본인 4명을 처단한 현장이다. 당사도 앞바다는 일본과 목포를 잇는 물길이었다. 저 고운 바다마저 수탈과 항쟁의 현장이었다. 소안도에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항일의 섬 소안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소안도 들어가는 배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뜬다. 오전 7시께부터 1시간에 한 번 출발한다. 뱃삯은 어른 7700원, 승용차 2만원. 완도와 소안도는 직선거리로 약 20㎞로 배 시간은 1시간쯤 걸린다. 차를 갖고 섬에 들어가는 게 편하다. 섬에 대중교통이 있으나 형편이 좋지는 않다. 소안면사무소가 있는 비서리에 모텔과 식당이 모여 있다.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항일의 땅 소안도 독립운동 큰 별, 송내호
일제, 소안도 토지소유권 이전 면민 법정투쟁 벌여 승소
면민, 학교설립 독립혼 교육…일제, 소안학교 강제 폐교
소안도 독립운동 큰 별 송내호 교육과 군자금 모금 주도
수의위친계·살자회·일심단 등 조직 가열찬 독립투쟁 벌여
고문과 수감생활 반복으로 폐결핵 악화 34세 나이로 숨져
소안도, 독립운동가 20명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전남일보 기사 게재일 : 2020-11-10
By 최도철 기자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독립운동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완도 소안도는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다. 소안도가 항일의 땅이라 불리게 된 본격적인 투쟁은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경작해오던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자작(子爵)이란 작위와 함께 소유권을 이전한다. 당시 이기용은 수조권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 이전은, 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소안도 면민들은 최성태 등 4명의 면민 대표를 뽑아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벌인다. 13년간의 법정 투쟁 결과 1921년 2월, 소안도 6천여 면민이 승소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에 "소안은 집요한 토지계쟁사건에 귀가 익은 곳이다. 13년 동안 다투어 얻은 토지는 이미 민유지로 해결됐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소송에서 이긴 주민들은 이 일을 기념하여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운다. 소안도에는 1913년 설립된 소안 중화학원이 있었다. 소안도 면민들은 토지를 지켜내자 그 기념으로 중화학원을 정식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자금 1만 454원을 모금하였는데, 지금 가치로는 1억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따라서 사립 소안학교에는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면민들의 열망이 묻어 있다. 사립 소안학교가 다른 사립학교와는 다른 특별한 이유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의 통제하에 있는 공립학교와는 달리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독립군가, 독립가, 청년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일제의 축제일에 휴교하지 않고 일본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국상(國喪) 기간에도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았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이에 일제는 1927년 5월 사립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했다.
이에 소안면민은 거세게 항거했다. 당시 중외일보는 '군수와 시장이 출동하여 돌연 학교 폐쇄(중외일보 5월 16일자)', '호별 방문하여 의견 청취 결과 소안교 폐지 반대 절대다수(중외일보 6월 15일자)'. '사립 소안학교 복교동맹 조직, 동맹원 700여 명(중외일보 7월 6일자)'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그러나 1927년 11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소안도의 민족운동가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사립 소안학교 복교 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 송내호
항일의 땅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은 누가 뭐래도 송내호(宋乃浩, 1895~1928)다. 그는 1895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에서 태어난다. 송내호가 태어난 비자리 항구는 제주도, 목포, 부산 등과 일본 오사카를 연결하는 배가 다니는 선박의 주요 통로였다. 비자리 항구에서 여각을 차려 돈을 번 부친은 세 아들을 서울, 광주, 일본에 유학 보낸다. 1911년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송내호가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녔던 이유다. 중앙학교 졸업 후 그는 고향에서 국권 회복 운동에 뛰어든다. 먼저 한 일은 교육활동이었다. 그는 사립 중화학원과 완도군 노화도의 사립 영흥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의 혼을 불어넣었다.
1919년 완도읍 3·1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한 것도 그였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에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의 전라도 지단(支團) 책임자가 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1922년, 출옥 후 고향 동지들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수의위친계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명칭만으로 보면 상부상조하는 전통적 계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독립자금을 걷고 계원을 파견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였다.
1923년, 송내호는 소안도의 청년 100여 명을 모아 청년조직인 배달청년회를 재조직했다. 송내호가 회장, 정남국이 부회장이었다. 배달청년회는 1924년 조직된 노농대성회와 1926년 조직된 살자회, 여성회와 소년단 등의 조직을 지원한 후 그들과 연대하여 투쟁했다. 1924년 3월 노농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소안노농대성회를 개최하였는데, 임석 경관을 배척한 사건으로 또 체포되어 1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의 항일투쟁은 끝이 없었다. 1926년 6월 소안도에서 사상단체인 살자회를 조직했고, 7월에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전진회(前進會)와 조선물산장려회 등이 결합한 조선민흥회의 발기모임에서 사회를 맡는다. 1927년 1월에는 청년 비밀결사체인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상무간사로 선출된다.
1928년 11월, 배달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의 1군 1동맹 원칙에 따라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 당시 만든 '선언'이란 문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는다. 세 번째 구속이었다.
송내호는 목포형무소에 복역 중 연이은 구속과 고문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된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1928년 12월 20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한다. 소안도 독립운동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소안도, 현장을 찾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 떨어진 곳에 소안도(所安島)가 있다. 험난한 항해를 하다 비로소 닿은 '안전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소안도는 노화, 보길, 횡간, 당사도 등의 섬들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루고 있다.
소안도는 고려 현종 9년(1018)이래 영암현에 속해 있었고 '달목도'라 불렸다. 조선 명종(1546~1567) 대에 처음 김해 김씨와 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1896년 완도군이 만들어지면서 소안면이 된다. 여의도의 3배 정도이니 비교적 작은 섬이다. 오늘 소안도에는 15개 마을에 2,700여 명이 살고 있다.
조그마한 섬 소안도는 보통 섬이 아니다. 소안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표지석이다.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라는 호칭부터 예사롭지 않다. 호칭은 그냥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 6천여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 항일독립운동가 89명이 배출되었고, 그중 20명은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는다. 전국 면 단위 중 최고다. 조그마한 섬 소안도에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라는 표지석이 자랑스럽게 서 있는 이유다.
소안항에서 소안항일독립운동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것은 엄청난 태극기다. 태극기는 국가기념일에만 다는데, 항일의 땅 소안도는 연중무휴로 휘날린다. 이는 완도군이 365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조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소안도가 태극기의 섬이 된 이유다.
남쪽과 북쪽 섬 사이를 연결하는 부근인 소안면 가학리에 2003년 문을 연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과 복원된 사립소안학교도 함께 있다. 원래 기념탑은 1990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안면 비자리에 건립했다. 2003년 기념관이 건립되자, 2005년 비자리 기념탑과 거의 비슷한 기념탑이 또 세워진다. 비자리에 처음 세워진 기념탑은 검은 돌과 하얀 돌로 이루어진 높이 8미터 폭 4미터의 크기다. 검은 돌은 일제 탄압을, 하얀 돌은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세 갈래로 솟아오른 탑은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한다.
기념관에서는 소안도의 항일운동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소안도의 항일운동 역사를, 전시관에서는 송내호·송기호 형제를 비롯, 정남국 등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20분의 얼굴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형상화한 디오라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1909년 1월, 일본은 먼 바다로 나가는 일본 상선의 안전을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세운다. 불을 밝힌 지 2개월 만에,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 등이 해안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당사도 등대 사건의 현장, 당사도는 소안도에서 4㎞ 쯤 떨어진 곳에 있다. 일제는 1910년 '등대 간수가 1909년 적의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라고 쓴 '조난기념비'를 세운다. 조난기념비마저도 소안도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 가장 먼저 조난기념비를 박살낸다. 그리고 1997년, 당사도 등대 사건을 기리는 '항일전적비'를 건립한 후 박살된 조난기념비를 다시 일으켜 옆에 세운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기념비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소안면 이월리 산496번지에는 소안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송내호·송기호 형제가 묻힌 조촐한 무덤이 있다
작은 섬마을에 숨겨진 4가지 보물
보물창고 완도 소안도 박재완의 남도마실
전남일보 기사 게재일 : 2017-11-12
소안도는 보물 창고다.
첫 번째가 소안도의 독립유공자 선인(鮮人)들이다.
소안 항구에 들어서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표지석이 섬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소안도는 독립유공자 19명을 비롯하여 57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항일운동의 섬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소안도 앞 당사도(옛 지명 자지도)등대를 설치하였다. 소안도 사람들은 등대에 잠입하여 일본인 등대수를 살해하고 등대를 파괴하는 등 한동안 등대 사용을 못하게 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뿐 아니라 소안도의 소작쟁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소안도는 원래 궁방전으로 조선 왕실소유 땅으로 1905년 토지조사사업 때 친일파의 이기용이 소유권을 가로채, 분노한 소안면민들이 13년간 법정투쟁을 벌여 1921년 승소를 하였다. 이처럼 강고하고 확고한 항일운동의 구심점은 중화학원이었다. 농민들은 배워야 모든 투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성금을 모아 '사립 중화학원'을 '사립 소안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학교로 승격시켜 민족혼을 심는데 주력한다.
특이한 현상은 당시 6000명의 주민이 1만400원을 쾌척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화폐단위로 1억이 넘는 돈이다. 그 당시 소안도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공립학교가 있었으나, 일본 군무원 자녀 등 30여 명이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소안학교는 노화, 청산, 완도, 해남, 멀리 제주에서 까지 유학을 와서 15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눈에 가시 같은 소안학교를 폐교 시키려 별별 음모를 하다가 1927년 일제의 사립학교 폐쇄령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는다. 소안학교의 영향으로 800여명의 섬사람들이 일제의 보안감시망인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찍혀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고 살아가는 악몽의 생활을 했다. 이런 바탕이 소안도를 함경도 북청, 경상도 동래와 함께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3곳 가운데 한 곳이 된 연유다.
두 번째는 2개의 천연기념물이다.
그중 하나가 미라리 472에 있는 천연기념물 339호다. 완도군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미라리에는 후박나무를 주목으로 모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밤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후박나무, 보리밥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 해송 등 24종 776주의 수목이 상록수림을 형성하고 있다. 규모는 1만6000㎡ 에 달한다. 수림대의 길이는 400m에 이르며 시각적으로는 소안도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한다. 기능적으로는 해풍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낙엽활엽수가 난대 상록활엽수림 지대에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인위적으로 보호를 받은 방풍림의 특성 때문이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목신이 방풍림 속에 산다고 믿어, 이 방풍림을 잘 가꿔왔다. 고기잡이하러 떠난 자식과 남편의 만선과 무사 귀환을 나무에 의지해 기원하는 풍습도 있어 해안의 수목은 오래도록 보호되고 있다. 지금도 설날이면 첫 새벽에 용왕께 음식을 차려 놓고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낸다. 미라리 해안은 풍부한 어족의 바다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가족단위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겨울 바다 낚시터로 전국에 알려져 겨울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하나가 맹선리 상록수림이다. 소안면 맹선리 산 370와 산 402 일대에 8506㎡ 면적의 천연기념물 제340호 지정된 상록림이다. 사람의 보호를 받는 방풍림은 인위적인 간섭으로 천이가 정지되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희귀종이 보존되기도 한다. 맹선리 상록수림은 희귀수종이 다양한 국내최대의 난대상록수림이다. 수령은 200∼300년으로 추정되며 후박나무를 비롯한 21종 245그루의 상록수가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길이는 500m에 이른다. 이 상록수림은 마을의 내지를 보호해 주는 방어림 역할과 함께 마을에 미관을 더해주는 풍치림 구실도 한다. 바람이 많은 해안지방이기에 방풍목적으로 보호되어 온 것도 하나의 형성 원인이다. 그보다 시장의 배경시설물로서의 역할도 지금까지 보호되어온 더 큰 이유다. 즉 이곳은 선박이 정박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시장이 성립되기에 알맞은 '장뜰'이라 하였다. 수림은 바로 따가운 햇볕을 피해주는 녹음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이곳이 인근 도서지방의 생활권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완도지방에 난온대 식물인 상록활엽수림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다. 잘 발달된 방풍림이 풍부한 난온대 식물이 적응하기 좋은 여름철에는 2∼3℃ 낮고 겨울철에는 2∼3℃가 높은 뚜렷한 해양성 기후대이다.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가장 겨울이 짧은 영향의 탓으로 따뜻한 대만해류와 쓰시마해류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세 번째가 명품 전복이다. 청정해역 맥반석 층의 깨끗한 바다에서 자라며 살아가는 갈조류(다시마, 미역)만을 먹고 자라므로 전복 내장에서 해초냄새가 진동하며, 쫄깃한 질감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전복을 복어(鰒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살코기는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그 장(腸)은 익혀 먹어도 좋고 젓갈을 담가 먹어도 좋으며 종기치료에 효과가 있다. 봄과 여름에는 독이 있는데 이 독에 접촉하면 살이 부르터 종기가 되고 환부가 터진다"고 적혀있다. 우리 조상들은 전복을 약으로 사용 했다. 전복을 쪄서 말렸을 때 오징어나 문어처럼 표면에 흰 가루가 생기는데, 이것이 타우린 성분이다. 타우린은 담석을 녹이고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춰줄 뿐 아니라 신장기능을 향상시키고 시력회복과 함께 간장의 해독작용을 돕는다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마지막으로 소안도 섬사람들이다.
항일정신 DNA를 계승한 소안도 섬사람들은 나라사랑 정신으로, 소안항에서 달목공원(1.3㎞)간에 약600m에 태극기 거리를 조성했다. 133개의 태극기를 365일 섬사람 각 개개인이 자기 국기를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섬 마을 전체로 확대 시켜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고 태극기 공원과 태극기 광장을 만들어 항상 태극기가 펄럭이는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가로수로 조성하는 등 유별난 나라사랑을 하는 작은 섬마을 사람들이다.
(사)남도마실길 박재완 대표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구도대교(좌)와 구도(우)
구도(鳩島)
요약 : 구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46′, 북위 34°12′에 위치하며 면적 0.39km2, 해안선 길이 2.4km, 산 높이 105.6m(구도봉), 인구는 29가구 79명(2010년)이다.
구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0.39km2, 해안선 길이 2.4km, 산 높이 105.6m(구도봉), 인구는 29가구 79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를 보면 '구도(鳩島)'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섬의 모양이 비둘기를 닮아서 구도라고 하였다는 설과 섬에 서식하는 비둘기가 많아서 구도라고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구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14.6km 떨어져 있으며, 노화도와 보길도, 횡간도 등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루는 섬이다.
입도 이후 처음 들어온 여객선
80여 명이 사는 완도군 소안면 구도(鳩島)에 여객선 섬사랑1호를 취항시켜 188년 만에 뱃길이 열렸다. 지난 2008년 9월의 이야기이다. 목포지방해양항만청은 낙도주민들이 섬을 생활근거지로 살 수 있도록 완도군 소안면 구도에 여객선 섬사랑1호(101t · 정원 50명)를 취항한다고 밝혔다. 그 동안 수심이 낮고 주변에 전복 양식장 시설이 산재하여 여객선이 기항하지 못해 불편이 많았던 섬으로서 실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선착장시설과 함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양식장을 철거해 바닷길을 내주어 항로 폭을 확대함으로써 여객선이 기항할 수 있게 됐다. 구도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정직하다고 알려져 왔다. 작은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하고 신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환경에 비해서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섬이라고 알려져 있다.
구도와 노화도를 연결하는 연도교(구도대교)의 완공
이 연도교는 노화도 동천항과 소안면 구도 사이에 거문고 형태의 교량으로 건설되었다. 길이는 760m이고, 폭은 9~10m다. 2017년 말 완공되었다. 구도대교가 완성된 후, 구도와 소안도 사이에도 다리가 놓이면 소안군도의 3개 섬인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 다리만 건너면 바로 동천항으로 가서 육지 나들이가 한결 수월해진다.
구도는 소안면 소속의 섬이지만 노화의 관문인 동천항과 불과 68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노화도 생활권으로 분류된다. 둥글게 생긴 섬, 그래서 구도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적어 단조롭다. 거기에다 수심이 얕아 여객선이 닿지 않고, 산이 높아 경지 면적도 거의 없어 바다만 바라고 사는 섬이다. 포구에는 세 개의 크고 작은 방파제가 있다. 마을은 남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회관 오른쪽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소가 없었던 섬 구도
구도를 우도(牛島)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대대로 구도엔 소가 없다. 비록 땅이 협소하고 비탈진 곳이라고 해도 밭이 있어 쟁기질도 해야 할 텐데 비싼 소를 사다가 키우려고 데려다 놓으면 늘 죽어나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소 키우기를 포기했다. 일설에 횡간도의 사자바위 때문이라고도 한다. 사자의 위용에 눌려 소가 살 수 없다는 얘기지만, 사실 큰 밭이 없는 상태라 소가 필요 없을 것 같다. 밭농사가 소득원이 될 수 없는 그들에게 소 사육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아무튼 오래 전부터 구전된, 소 없는 마을의 유래가 재미가 있다.
그러나 소가 없는 진짜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 예전에는 어느 섬이나 연료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였다. 그래서 해방 이후 산림의 남벌로 단속이 심했다. 따라서 구도도 연료의 확보책으로 소와 염소 사육을 금하였거나 삼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산이 낮아 연료로 쓸 변변한 재료가 적은 구도에서는 일년초와 농작물의 부산물을 땔감으로 이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소의 먹이까지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민초다. 고단함이 보이고도 남는다.
섬 크기에 비하여 기복이 큰 산지(최고 높이 105.5m)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쪽 사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농경지가 분포한다. 구도 사람들의 대부분은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간다. 주요 수산물로 장어와 도미, 볼락, 멸치 등이다. 어족이 풍부하고 마을 앞 무인도에서 농어 낚시가 잘 된다. 1820년경으로 김해 김씨가 처음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 말까지 김 양식과 톳 채취로 활발한 삶을 영위하였으나 현재는 주민 대부분이 고령자이며 소규모 전복 양식에 주력하고 있다. 밭 위쪽에 물탱크시설이 보인다. 여기서 노화도를 바라보니 원체 높은 지대라 그런지 노화도의 온갖 산들이 다 눈에 들어온다. 저 끝은 보길도의 산과 들이다.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구도대교와
다리 아래로 보이는
횡간도 사자바위
[구도대교의 다른 이름은 소안1교다.]
완도 노화∼소안 구도 연도교 완공…9월 정식 개통
(완도=뉴스1) 박영래 기자
뉴스1 기사 등록일 : 2017-08-11
완도 노화도와 소안 구도를 연결하는 연도교(임시명칭 소안1교)가 완공돼 임시개통에 들어갔다.
11일 완도군에 따르면 이 연도교는 2007년도 제3차 도서종합개발사업 시범사업에 반영돼 2011년 착공됐으며, 총 사업비 570억원으로 국비 70%, 도비와 군비 각각 15%씩 투입됐다.
완도군이 발주하고 3개사가 공동 도급해 시공한 연도교는 E/D교(엑스트라도즈교)로 교량길이 780m, 접속도로 840m로 이뤄졌다.
현재 완도군 12개 읍면 중 노화, 소안, 보길 3개 읍면이 공동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노화~보길 연도교 개통에 이어 이번 연도교 완공으로 3개 읍면이 더욱 원활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특히 소안면 주민들이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소안면 구도는 야간에도 노화읍을 수시로 왕래하게 돼 주민교통 편익 증진은 물론 각종 수산물의 물류 수송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완도군은 1차구간 완공에 따라 2차 구간인 구도와 소안간 조기 착공을 위해 지난해부터 국회와 중앙부처를 수시로 방문해 연도교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
2차 구간을 착공해 노화도, 소안도, 보길도가 다리로 연결되면 단일 생활권으로 완전 통합돼 식수난, 교통난, 교육환경 조성, 의료지원 등 주민숙원 해소와 소득 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군 관계자는 "조만간 군정조정위원회서 연도교 이름을 확정하고, 완도군 지명위원회를 거쳐 전남도에서 교량명이 최종 확정되면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정식 개통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노화도 동천항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구도대교와
다리 아래로 보이는
완도 상왕봉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구도
[구도는
대한민국 제1의 배달 주문 서비스 브랜드인
'배달의 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의장의 고향이다.]
'배달의 민족' 김봉진 의장…그는 누구인가?
김덕권 시인
브레이크뉴스 기사 입력일 : 2021/04/12
‘사랑의 열매’에 71억 원을 기부하는 등, 100억 원 넘게 기부
요즘 '배달의 민족' 창업자 김봉진 의장 만큼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너무나 엄청난 일을 했기 때문이지요. 전라도 촌놈(?) 출신이 그 누구도 못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편법 부 대물림, 가족 간 재산 다툼, 여성편력과 이혼 등, 기존 재벌들 행태에 익숙한 우리에겐 신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대표적인 ‘흙 수저’ 출신입니다. 1976년 전남 완도의 주먹만 한 작은 섬, 소안도의 부속 섬 ‘구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4남 중 막내로 말이지요.
가난 속에서 태어난 그는 엄마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식당의 손님들이 쓰는 식당 방에서 잠을 자면서 컸습니다. 실업계 수도공고를 겨우 마치고, 뒤 늦게야 전문대인 서울예전을 겨우 졸업을 했지요. 내신 15등급 중 14등급이었습니다. 그것도 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워 대학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웹 디자이너’가 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패의 맛도 봤습니다. 한때 전세 보증금까지 날리고 2억 원의 빚더미 속에 집 월세를 못내 극심한 생활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 '배달의 민족'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창업에 도전했습니다. '배달의 민족'은 ㈜우아한 형제들에서 운영하는 대한민국 배달 주문 서비스 브랜드 이름입니다.
2019년 12월 ‘딜리버리 히어로’가 '배달의 민족' 운영사 ㈜우아한 형제들의 국내외 투자자 지분 87%를 인수 합병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 후, 김봉진 의장은 최근 자신의 재산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며, 세계적 기부클럽 ‘더 기빙 플레지’에 한국인 최초, 전 세계 219번째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배달의 민족'은 처음에는 김봉진 의장의 셋째 형을 포함한 후배, 친구 등 5~6명이 모여 ‘우아한 형제들’을 결성하고 카페를 작업실 삼아 주말마다 모여 프로젝트를 진척시켰습니다. 드디어 2010년 6월 25일 ‘배달 앱’을 출시한 것입니다. 그는 ‘거리를 어지럽히고 집집마다 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음식점 전단지를 모바일로 옮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회사 창립의 계기가 됐다고 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음식점을 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음식점 정보가 많을수록 ‘앱 경쟁력’이 커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전단지를 모으고자 직접 온 동네를 다니며 수거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발로 뛰고,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부탁하고, 심지어 휴지통을 뒤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하네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먼발치에서 땅에 떨어진 전단지만 봐도 어떤 메뉴의 어느 음식점인지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남다른 발품을 파는 성실함과 실행력을 알아본 ‘본 엔젤스’로부터 1억 원의 투자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배민’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갔습니다.
10년 만인 2019년에는 1천만을 넘는 국내 대표 배달 앱으로 되어 기업가치 5조원의 ‘유니콘’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 기부클럽인 ‘더 기빙 플레지’의 한국인 최초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기빙 플레지’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회장이 만든 기부단체로 유명하지요. 이 단체는 아무나 참여할 수 없습니다. 재산이 1조원이 넘어야 하고, 그 중 반인 최소 5500억 원 이상을 기부해야 자격이 부여 된다고 하네요. 페이스 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테슬라 CEO 앨런 머스크,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회장,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이 가입되 있어서 그 면모가 어 마 어마 합니다.
김봉진 의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시아에서 7번째, 세계에서 219번째 기부자가 됐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25번째 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와는 별도로, 그는 그동안 ‘사랑의 열매’에 7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최근까지 100억 원 넘게 기부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이라고 합니다. 부인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고, 초기에는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그에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고자 창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족사랑은 자녀의 이름을 글꼴에 적용한 데에서도 읽혀집니다. 배달 앱에서 제공하는 무료 글꼴 가운데 ‘한나체’와 ‘주아체’는 첫째와 둘째 딸 한나와 주아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네요.
김봉진 의장은 그가 이룬 성공은 ‘좋은 운과 진리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지, 자기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면서, 끝까지 겸손해 하는 면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기존 재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요?
어떻습니까? 굉장한 분입니다. 아마 이분은 여러 생에 걸쳐 어 마 어마한 공덕(功德)을 쌓으신 분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 생에 그런 엄청난 공덕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우리 남을 위하고 세상을 구원할 마음을 가지며, 널리 대중을 위하여 기도하고 정성을 드립시다. 이렇게 덕화만발 가족들의 염원을 실천하는 것도 큰 공덕이 되지 않을는지요.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구도대교와
다리 아래로 보이는
횡간도 사자바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구도, 구도대교, 노화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횡간도 사자바위(좌)와 해남의 두륜산(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해남의 두륜산(좌)과 완도 상왕봉(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완도 상왕봉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횡간도 사자바위(좌)와 해남의 달마산(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해남의 달마산(좌)과 두륜산(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횡간도 사자바위, 해남의 달마산, 두륜산, 완도 상왕봉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신지도(좌)와 생일도(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소모도, 청산도, 대모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해남의 두륜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횡간도 사자바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해남의 달마산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구도, 구도대교, 노화도
[ 노화도 뒤로 보길도가 보인다.]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횡간도 사자바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노화도(앞)와 보길도(뒤)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완도 상왕봉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소모도, 청산도, 대모도
[소안항~화흥포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화흥포항
완도군 섬 위치도
2022년08월26일(금요일) 심야 출발 2022년08월28일(일요일) 귀경 1무박3일 완도군 [보길도&노화도&소안도] 여행기 2022년08월26일(금요일)~ 2022년08월27일(토요일) 여행기 * 2022년08월26일(금요일) 24:00시~ 2022년08월27일(토요일) 04:43시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지하철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1017-2 번지에 있는 완도항 방파제등대로 이동 (414km) [4시간43분 소요] 04:43~05:10 완도항 방파제등대 탐방 [27분 소요] 05:10~05:30 “좋은사람들“ 버스로 완도항 방파제등대를 출발하여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 830-1 번지에 있는 화흥포항으로 이동 (10km) [20분 소요] 05:30~06:10 화흥포항에 있는 산들바람 휴게소에서 김밥 2개와 라면 1개로 아침식사 [식사 비용 : 9천원] [2022년08월27일(토요일) 완도군 일출시각 : 6시2분] 06:10~06:46 화흥포항에서 노화도로 가는 여객선 승선 대기 (신분증 준비) 06:46~07:31 여객선을 타고 완도 화흥포항을 출발하여 노화도 동천항으로 이동 [여객선 운임 : 5,200원] [45분 소요] 07:31~07:32 “좋은사람들“에 승차 07:32~08:10 “좋은사람들“ 버스로 노화도 동천항에서 전남 완도군 보길면 정자리에 있는 보길도 망끝 전망대로 이동 [동천항~망끝 전망대 : 21km] [38분 소요)] [노화도와 보길도는 보길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망끝 전망대는 낙조로 유명한 조망처다. 전망대 앞으로 갈도, 옥매도, 미역섬, 상도 등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전망대의 남쪽에는 뾰족산이라고도 불리는 '보죽산'이 위치하고 있다.] 산 : 완도군 보길도 [ 망월봉 & 격자봉 & 수리봉 ] 산행코스 : [ 망끝 전망대-(1.1km)-망월봉(망뫼봉)-(1.3km)-뽀래기재-(2.5km)-누룩바위- 격자봉-수리봉-큰길재-곡수당- 낙서재- 낙서재 주차장 ] (약8km) 산행일 : 2022년08월27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3시간43분 소요) 08:10~09:01 전남 완도군 보길면 정자리에 있는 망끝 전망대에서 탐방 출발하여 망월봉(364m, 망뫼봉)으로 이동 [망끝 전망대는 보옥리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 해안도로가 지나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지도상에서 보면 보길도의 서쪽 끝점이다. 갈도, 옥매도, 미역섬, 상도 등의 무인도가 지척에 있고 남쪽으로는 횡간도와 추자도가 또렷하게 조망된다. 이곳에는 파도를 상징하는 벤치 위에 영문으로 ‘BOGIL’을 조합한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일몰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멋진 포토존이다.] 09:01~09:06 사진촬영 09:06~09:37 뽀래기재로 이동 09:37~10:10 누룩바위로 이동 10:10~10:14 사진촬영 10:14~10:21 보길도 최고봉인 격자봉(格紫峰, 430.3m) 정상으로 이동 10:21~10:25 물을 마시면서 휴식 10:25~10:45 수리봉(407m)으로 이동 10:45~11:14 큰길재로 이동 11:14~11:17 물을 마시면서 휴식 11:17~11:35 곡수당(曲水堂)으로 이동 [곡수당은 고산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거주했던 집이다.] 11:35~11:39 사진촬영 11:39~11:44 낙서재(樂書齋)로 이동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주거했던 집이다.] 11:44~11:47 사진촬영 11:47~11:53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411 번지에 있는 낙서재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1:53~12:30 휴식 12:30~12:35 “좋은사람들“ 버스로 낙서재 주차장을 출발하여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 번지에 있는 세연정으로 이동 [5분 소요] 12:35~13:07 세연정 탐방 [입장요금 : 3천원] [32분 소요] 13:07~13:13 “좋은사람들“ 버스로 세연정을 출발하여 보길면 청별길 26 번지에 있는 “나무숲” 식당으로 이동 (1.5km)[6분 소요] 13:13~14:00 “나무숲” 식당에서 전복 해초 비빔밥으로 점심식사 [식사 비용 : 15,000원] 14:00~14:18 “좋은사람들“ 버스로 보길면 청별길 26 번지에 있는 “나무숲” 식당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에 있는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입구로 이동 (7.5km) [18분 소요] 14:18~14:58 송시열 글씐바위 탐방 [40분 소요] [보길도의 동쪽 끝 해안 절벽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윤선도가 스스로 보길도에 정착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면, 송시열은 제주도로 향하는 유배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글씨는 많이 훼손되어 형태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변 백도리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길도 여행에서 꼭 다녀와야 할 명소로 손꼽힌다.] 14:58~15:16 “좋은사람들“ 버스로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입구를 출발하여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으로 이동 (8.3km) [18분 소요] 15:16~15:40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 102호실에서 샤워 후 짐 정리 탐방지 : 보길도 어부사시사 명상길 [ 예송리 해수욕장 & 예작도와 당사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 탐방코스 : [ 해돋이 펜션 ~ 예송리 해수욕장 상록수림(천연기념물 40호) ~ 어부사시사 명상길 ~ 예작도와 당사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어부사시사 명상길 ~ 해돋이 펜션 ] (총 거리 : 7km) 탐방일 : 2022년08월27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 소요시간 2시간15분 소요) 15:40~15:45 전남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에서 탐방 출발하여 예송리 해수욕장에 있는 상록수림(천연기념물 40호)으로 이동 [둥글납작한 갯돌이 1.4km나 펼쳐져 있는 예송리 갯돌해변은 오래 전부터 보길도 최고의 명소로 꼽혔다. 해변 둘레에는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상록수림(천연기념물 40호)이 펼쳐져 있어 더욱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예송리해변에서 불과 400m 건너편에는 예작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의 감탕나무 또한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이다. 추후 예송리와 예작도는 해상진입로로 이어질 예정이다.] 15:45~15:50 사진촬영 15:50~16:43 어부사시사 명상길을 따라서 예작도와 당사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이동 16:43~16:52 사진촬영 후 휴식 16:52~17:55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7:55~18:30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 102호실에서 샤워 후 휴식 18:30~18:38 “좋은사람들“ 버스로 예송리 해수욕장 주차장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보길면 청별길 20 번지에 있는 “우리식당”으로 이동 (4.4km) [8분 소요] 18:38~20:00 전남 완도군 보길면 청별길 20 번지에 있는 “우리식당”에서 제육볶음(1인당 12,000원)을 안주로 하여 잎새주 2병(8,000원)을 음주 [식사 비용 : 20,000원] 20:00~20:08 사전에 Call한 택시로 완도군 보길면 청별길 20 번지에 있는 “우리식당”을 출발하여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으로 이동 (4.4km) [8분 소요] [택시 이용요금 : 10,000원] 20:08~22:00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 102호실에서 샤워 후 룸메이트들과 담소 22:00~ 예송리 해변에 있는 해돋이 펜션 102호실에서 취침 2022년08월28일(일요일) 여행기 04:20~05:00 예송리 해변에 있는 해돋이 펜션 102호실에서 기상하여 샤워 후 짐 정리 05:00~05:39 해돋이 펜션에서 전복죽으로 아침식사 05:39~06:05 “좋은사람들“ 버스로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 258 번지에 있는 해돋이 펜션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노화읍 노화로 16 번지에 있는 노화도 동천항으로 이동 (15km) [26분 소요] [2022년08월28일(일요일) 완도군 일출시각 : 6시3분] 06:05~07:22 노화도 동천항에서 소안도로 가는 여객선 승선 준비 07:22~07:42 여객선을 타고 노화도 동천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소안면 이월리에 있는 소안도 소안항으로 이동 (3.2km) [20분 소요] 07:42~07:45 미리 대절한 마을 버스에 승차 [승차요금 : 1인당 1,500원] 07:45~07:58 미리 대절한 마을 버스를 타고 소안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소안면 진산리 산 358-8 번지에 있는 물치기미 쉼터로 이동 (7.1km) [13분 소요] [소안도에는 마을버스가 1대, 택시가 4대 있다.] 산 : 완도군 소안도 [ 가학산(駕鶴山) & 아부산(兒負山) ] [소안도에서 가장 높은 가학산(駕鶴山·359m)은 학이 가마를 타는 듯한 형세라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 가학산 정상은 일망무제, 동서남북 사방으로 막힘 없는 조망이 일품이다. 인근 보길도의 격자봉보다 풍광이 뛰어나다. 발아래 다도해는 장판을 깐 것처럼 고요하다. 그 위에 양식장 시설물들이 장판 무늬처럼 박혀 있다. 쳥명한 날에는 수평선 너머 제주 한라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높이 135m의 아부산은 일출로 유명하다. 대봉산과 가학산 등반이 부담스럽다면 바다 전망이 뛰어나 소안 8경으로 꼽히는 아부산 탐방을 권한다. 아부산의 이름은 멀리서 바라보면 두 개의 바위가 아기를 업은 모습으로 겹쳐져 ‘아기 업은 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됐다.]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린다. 세 지역은 지속적이고 다양한 항일운동을 펼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안도에서는 평화적 시위와 무력 항쟁, 교육 운동과 노농 운동, 비밀결사와 법정투쟁, 섬 주민의 자발적인 학교 설립 등 일제강점기 내내 다양한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당사도등대 습격 사건을 비롯해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이 대표적이다. 완도 본섬에서 한참 떨어진데다 인구가 6000여 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 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로도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소안 항일운동기념관 전시관은 진(盡, 온 힘을 다하다) 인(人, 사람이 희망이다), 사(事, 행동하는 양심, 역사가 되다), 대(待, 힘을 모아 막아내다), 천(天, 하늘이 내린 천직을 받들다), 명(命, 힘을 보태 강해지다)을 테마로 항일운동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시관 중심에 소안도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의 디오라마가 있고, 천장은 다양한 태극기로 수놓았다. 사립소안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 1920~1930년대 신문 지면을 장식한 소안도 기사, 독립운동가의 형사판결 원본 등 당시의 유물과 기록도 전시된다.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은 소안도 항일운동의 시작점이다. 1909년 일본은 본국을 향해 먼 바다로 나가는 상선을 돕기 위해 당사도에 등대를 세웠다.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를 비롯한 5명은 일본 선박의 남해 항로를 방해하기 위해 거친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일본인 등대원 4명을 죽이고, 등대를 파괴했다. 당사도등대가 생긴 지 불과 2개월 만이다. 당시 불빛을 밝히던 등명기를 파괴하려 했지만, 너무 단단해 바다에 빠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등대 주변에는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항일전적비와 광복 후 파괴된 등대원추모비 일부가 역사의 증인처럼 오롯이 섰다.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도 같은 해 시작된다. 소안도는 왕실에 세금을 내는 궁납전이었는데, 1905년 친일 매국노 이기용이 토지를 사유화하자 소송을 벌였다. 일본과 조선 왕실을 상대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만, 13년 법정투쟁 끝에 승리를 거뒀다. 소송 승리의 기쁨은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안도 주민이 자발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여 1만 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70원인 점을 생각하면 꽤 큰 액수다. 사립소안학교에서 ‘사립’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을 주민이 스스로 세웠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사립소안학교에는 일장기가 없었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항일 정신을 가르쳤다. 노화도를 비롯한 주변 섬뿐 아니라 해남과 제주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산행코스: [ 물치기미 쉼터-맹선재-해도정-가학산-학운정-잔디쉼터-해안도로-거북바위- 아부산 정상-소안 미라 펜션 ] (8km) 일시 : 2022년08월28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3시간35분 소요) 07:58~08:21 전남 완도군 소안면 진산리 산 358-8 번지에 있는 물치기미 쉼터에서 탐방 출발하여 맹선재로 이동 08:21~08:43 해도정으로 이동 08:43~09:30 소안도의 최고봉인 가학산(359m, 駕鶴山) 정상으로 이동 [학이 가마를 타는 듯한 형세라고 하여 駕鶴山으로 불리게 된 가학산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을 감상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소안도의 금성산과 그 너머로 완도 상왕봉(646m)이, 북동쪽으로는 소안도의 대봉산과 그 뒤로 완도군의 대모도와 그 너머로 완도군의 신지도가, 동쪽으로는 완도군의 청산도가, 동남쪽으로는 완도군의 여서도가, 남쪽으로는 제주시 추자면의 사수도와 그 너머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남서쪽으로는 제주시 추자면의 추자도가, 서쪽으로는 완도군의 보길도가, 북서쪽으로는 완도군의 노화도가 조망된다.] [학령귀운(鶴嶺歸雲, 가학산 봉우리를 휘감아 도는 구름)은 소안팔경(所安八景) 중 제5경이다.] <소안팔경(所安八景)> 1. 금성명월(錦城明月): 금성산에 뜨는 밝은 달. 2. 내동장천(內洞長川): 비자리 동네를 굽이쳐 흐르는 시내. 3. 귀하파성(龜河波聲): 과목 바닷가에 부딪혀 흩날리는 파도소리. 4. 이령목적(梨嶺牧笛): 배난골 고개의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 5. 학령귀운(鶴嶺歸雲): 가학산 봉우리를 휘감아 도는 구름. 6. 미포어화(美浦漁火): 미라리 포구에서 보는 멸치잡이 배의 불. 7. 은곡창송(隱谷蒼松): 소진리와 부상리 깊은 골의 푸른 소나무 숲. 8. 백포귀범(白浦歸帆): 석양을 뒤로 하고 백도와 맹선 사이로 돌아오는 돛단배. 09:30~09:36 사진촬영 09:36~09:47 학운정으로 이동 09:47~10:42 아부산(兒負山) 거북바위로 이동 10:42~10:48 사진촬영 10:48~11:02 아부산(兒負山, 135m) 정상으로 이동 11:02~11:07 사진촬영 11:07~11:33 전남 완도군 소안면 소안로 567 번지에 있는 소안 미라 펜션으로 이동하여 소안도 탐방 완료 [미라 펜션은 2020년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의 소안도편에 멤버들의 숙소로 등장했던 펜션이다. 과거 미라리 학산 초등학교가 폐교된 자리에 세워졌다. 마을 기업에서 운영하는 미라 펜션은 원룸 7개와 투룸 3개로 이뤄져 있고 세미나실, 식당, 운동장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운동장을 벗어나면 바로 미라리 해수욕장과 연결되는 등 자연 입지가 뛰어나다.] [미라리 해수욕장은 동글동글한 몽돌로 이뤄진 해변으로 길이가 약 1㎞에 달한다. 미라 8경 가운데 하나인 완도 미라리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339)에는 20여 종의 상록수가 뿌리를 내렸고, 앞 바다는 바다 낚시터로 인기가 높다. 상록수림에서 품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하면 피로가 금새 달아난다. 소위 멍 때리며 힐링하기 좋은 장소다.] <미라팔경(美羅八景)> 1. 학산귀운(鶴山歸雲): 봄비가 내린 뒤 가학산을 감싼 구름. 2. 대동장천(大洞長川): 가학산으로부터 마을로 흐르는 큰 시냇물. 3. 미포귀범(美浦歸帆): 미라리 포구로 만선의 깃발을 올리고 들어오는 돛단배. 4. 부아망월(負兒望月): 아부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완상하는 것. 5. 전방가림(前坊嘉林): 미라리 마을 앞 상록수의 아름다운 숲. 6. 용담괴혈(龍潭怪穴): 아부산 절벽 이래 용이 머물던 동굴. 7. 강빈어화(綱濱漁火): 조강마루에서 바라보는 어선의 불빛. 8. 오산낙조(烏山落照): 오산의 저녁노을. 11:33~11:55 휴식 11:55~12:02 미리 대절한 마을 버스를 타고 전남 완도군 소안면 소안로 567 번지에 있는 소안 미라 펜션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소안면 비자2길 23번지에 있는 “청포도 식당”으로 이동 (3.8km) [7분 소요] [마을버스 요금 : 1인당 1,500원] 12:02~12:52 “청포도 식당”에서 민어탕 정식(1인당 12,000원)에 잎새주 1병(4천원)을 반주로 하여 점심식사 [식사 비용 : 16,000원] 12:52~13:01 휴식 탐방지 : 완도군 소안도 [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 사립 소안학교 작은도서관 & 인공호수 위에 떠 있는 태극기 ] 탐방코스 : [ 청포도 식당 ~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 ~ 사립 소안학교 작은도서관 ~ 인공호수 위에 떠 있는 태극기 ~ 소안항 ] (총 거리 : 6km) 탐방일 : 2022년08월28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 소요시간 1시간41분 소요) 13:01~13:16 전남 완도군 소안면 비자2길 23번지에 있는 “청포도 식당”에서 탐방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소안면 가학리 263 번지에 있는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으로 이동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은 소안도 출신의 애국선열들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2003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독립 유공자들의 얼굴 조각을 전시해 추모하고 있으며, 항일 운동 관련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소안도는 독립유공자 19명을 비롯하여 57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항일운동의 섬이다. 사립소안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 신문 기사 등 당시의 유물도 전시돼 있다.] 13:16~13:31 소안 항일운동 기념관과 사립 소안학교 작은도서관을 관람 [독립운동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완도 소안도는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다. 소안도가 항일의 땅이라 불리게 된 본격적인 투쟁은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경작해오던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자작(子爵)이란 작위와 함께 소유권을 이전한다. 당시 이기용은 수조권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 이전은, 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소안도 면민들은 최성태 등 4명의 면민 대표를 뽑아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벌인다. 13년간의 법정 투쟁 결과 1921년 2월, 소안도 6천여 면민이 승소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에 "소안은 집요한 토지계쟁사건에 귀가 익은 곳이다. 13년 동안 다투어 얻은 토지는 이미 민유지로 해결됐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소송에서 이긴 주민들은 이 일을 기념하여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운다. 소안도에는 1913년 설립된 소안 중화학원이 있었다. 소안도 면민들은 토지를 지켜내자 그 기념으로 중화학원을 정식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자금 1만 454원을 모금하였는데, 지금 가치로는 1억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따라서 사립 소안학교에는 '배움만이 살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면민들의 열망이 묻어 있다. 사립 소안학교가 다른 사립학교와는 다른 특별한 이유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의 통제하에 있는 공립학교와는 달리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독립군가, 독립가, 청년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일제의 축제일에 휴교하지 않고 일본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국상(國喪) 기간에도 상장(喪章)을 붙이지 않았다. 사립 소안학교는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다. 이에 일제는 1927년 5월 사립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했다. 이에 소안면민은 거세게 항거했다. 당시 중외일보는 '군수와 시장이 출동하여 돌연 학교 폐쇄(중외일보 5월 16일자)', '호별 방문하여 의견 청취 결과 소안교 폐지 반대 절대다수(중외일보 6월 15일자)'. '사립 소안학교 복교동맹 조직, 동맹원 700여 명(중외일보 7월 6일자)'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그러나 1927년 11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소안도의 민족운동가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사립 소안학교 복교 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지금의 사립소안학교(항일의 정신적 산실이며 현재는 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는 2005년 주민들의 기금으로 복원한 것이다.] 13:31~13:57 왔던 길을 걸어서 “인공호수 위에 떠 있는 태극기”로 이동 13:57~14:06 사진촬영 후 휴식 14:06~14:42 방파제로 형성된 인공호수 위에 지은 정자를 방문한 후 소안항으로 이동 14:42~15:00 소안도에서 화흥포항으로 가는 여객선 승선 준비 (신분증 준비) 15:00~16:01 여객선을 타고 소안도 소안항에서 완도 화흥포항으로 이동 (16km) [여객선 운임 : 6,200원] [1시간1분 소요] 16:01~16:09 “좋은사람들“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 대기 16:09~16:15 “좋은사람들“ 버스로 완도 화흥포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구계등길 48 번지에 있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정도리 탐방지원센터로 이동 (3.9km) [6분 소요] 16:15~16:23 국립공원 스탬프투어 인증 16:23~22:00 “좋은사람들“ 버스로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구계등길 48번지에 있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정도리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귀경 (434km) [5시간37분 소요] [노화도&보길도&소안도]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