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Essay 350 - 부자(父子) 의병장(義兵將)들
♣ 歷史 Essay 350 ♣
☞ 부자(父子) 의병장들
왜란(倭亂) 때 수원 지방의 의병장 홍언수(洪彦秀?-1592)가 왜군에게 전사하자
그의 아들 홍계남(洪季男)은 왼손으로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분전하여 왜적 수십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계남은 곧 전국에 통문을 돌려 의병(義兵)을 모집했는데
호남에서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1533-92)의 맏아들 고종후(高從厚1554-93)가
충청에서는 의병장 조헌(趙憲1544-92)의 아들 조완배(趙完培)가 호응하여 각 지방 3개 부대는
‘복수’라는 군기를 내걸고 분연히 싸웠다.
서로는 일면식도 없지만 의병장이던 아버지를 왜군에게 잃은 공통점을 가진 세 장군은
혈연의식을 호국의식(護國意識)으로 전향시킨 좋은 예이다.
歷史 Essay 351 - 이순신(李舜臣)과 이일(李鎰) 두 장군
♣ 歷史 Essay 351 ♣
☞ 이순신과 이일 두 장군
녹둔도(鹿屯島)에서 유일하게 패한 이순신(李舜臣1545-98)의 사형을 건의하며 못되게 굴던
이일(李鎰1538-1601)과 이순신의 운명은 그 후 정반대로 되었으니 사필귀정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연전연승하는 동안 경상도 순변사(巡邊使)였던
이일은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한 후 신립(申砬)과 함께 싸운 탄금대 전투에서 또 패해
신립은 자결했고 이일은 황해도로 밀려났다.
이일도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조총에는 역부족인 반면
이순신은 거북선과 화포로 무장해 무패의 장군이 되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의 분조를 돕기도 하고 포도대장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 등을 역임하다
1601년 부하를 죽인 살인죄로 잡혀 죽었다.
歷史 Essay 352 - 소나무 덕분에 이순신(李舜臣)의 연승
♣ 歷史 Essay 352 ♣
☞ 소나무 덕분에 이순신의 연승
이순신(李舜臣1545-98) 장군의 23전 23승 불패 신화의 원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소나무의 힘도 있었다.
장군의 병법은 단병접전(短兵接戰)이 아니라 원거리 포격전(砲擊戰)이었는데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을 비롯한 주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왜군(倭軍)의 배는 삼(杉)나무로 만들어졌기에 함포전(艦砲戰)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 배는 무겁고 튼튼해 함포가 발사될 때의 반동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어서
한 척에 20여문 이상의 함포를 장착해 동시 발사할 수 있지만 삼나무 배는 가벼워서
빠르기는 하지만 함포를 한두문 밖에 장착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왜군은 조총(鳥銃) 공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