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여러 사정이 생겨 몇 번 미루어지다 보니 애초에 지녔던 감격이나 흥분이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흥이 났을 때 추진되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고 성취감도 생기는 법이다. 어쨌거나 나의 고희 기념 여행은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는 여름에 들어서야 추진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여행비는 예상치를 웃돌아 내심 적잖은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당초엔 5월 중에 다녀오기로 한 여행이었다. 재작년 서유럽 여행 때도 5월이었는데 안성마춤으로 좋은 계절이어 보람 있게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랬는데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기온이 낮으므로 따뜻할 때 가시라고 아이들이 말리는 바람에 한 달 미뤄 6월로 했다가, 이번에는 손주가 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또 미루어졌고, 마침내 7월29일로 출국일자가 잡혔다. 7월말경이면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고로 아들이나 며느리 모두가 휴가를 틈타 아이를 돌볼 수 있어 우리가 없어도 문제가 없는지라 그렇게 여행날짜가 잡힌 것이다. 여행의 실질적인 계획과 집행은 서울에 있는 딸애가 맡아 하기로 했고 비용은 물론 아들이 책임지기로 했으니 내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다만 이때가 동유럽 여행은 성수기이므로 비용이 상승하는 부담이 있었으나 물주(아들)가 그래도 좋다고 하니 내가 괘념할 일은 아니었다.
7월 하순으로 날짜가 접어들자 은근히 나의 마음도 들뜨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떠나기보다 무언가를 좀 알고 가야할 것 같아 여행지(국)에 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게 되고, 준비물도 준비하게 되면서는 비로소 여행에 대한 설렘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준비물로는 특별히 비상약품에 신경을 썼다. 평소 복용하는 약은 물론이려니와 여행지에서 갑작스레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병에 대하여 응급으로 처치할 수 있는 의약품과 의료용품의 구비에 만전을 기했다. 감기나 배탈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려니와 갑작스런 뇌졸중 등의 발병에도 예방적 효과가 있을 우황청심원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군것질 거리도 약간 준비했다. 옷가지는 현지의 사정에 밝은 여행사를 통해 알아내 여름옷과 봄옷을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출발 이틀 전에 먼저 서울에 있는 딸애에게로 가 남은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출국 당일 인천공항을 통해 드디어 여행길에 올랐다.
장장 11시간이 넘는 비행거리다. 좁디좁은 비행좌석에 앉아 11시간을 버틴다는 건 여간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뇨가 있는 나로서는 잦은 소변보기가 마음에 큰 짐이 되므로 미리부터 좌석을 통로 쪽으로 배정해 달라하여 일차적 근심은 덜 수 있게 조처도 했다. 읽을거리도 준비해 갔으므로 신문을 보거나 소설책을 보면서 지루한 비행시간을 때울 요령에도 만전을 기했다. 좋아하는 일을 좇아 하는 일이란 행복감을 유발하므로 하고 많은 불편이나 고통쯤은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모양이었다. 비행기는 연전에 땅콩사건으로 이름을 떨친 국적항공사다. 우스운 것은 여전히 땅콩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서비스로 땅콩이 두 번이나 제공되는 점이었다. 그리고 서비스도 종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이구동성으로 수군대는 승객들의 입방아가 지루할 틈을 앗아갔다. 활자를 보다 지겨운 감이 들면 비디오를 틀어 영화를 감상했다. 나는 벌써 여러 번 감상한 대부(代父)를 한 번 더 다 보고서는 잠시 눈을 부친다고 부쳤다. 눈에 피로가 상당히 몰려온 탓도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비행기 창밖은 여전히 밝은 대낮이었다. 상당한 시간을 비행했을 텐데도 탑승 때나 마찬가지로 여전히 바깥이 밝다는 것이 야릇하기만 했다. 그때 비행기에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삼십여 분이면 목적지인 프라하의 하벨 공항에 닿겠다는 기장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느 듯 열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비행기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5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한국과의 시차는 7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로의 회귀가 이루어진 셈이다. 인천공항에서 프라하까지는 약 11시간이 소용된다. 12시 5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으니 적어도 한국은 지금 자정이 가까워야 옳을 일이었다. 그런데 프라하는 기껏 오후 5시 정도라니….
시차라는 것 때문이다. 한국보다 서쪽 편에 있는 프라하는 한국과의 시차가 7시간이나 늦다. 비행기가 날은다고 날아와 봤자 프라하는 오후 5시경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긴 하다. 이것이 내게는 기이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7시간이라는 시간을 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7시간만큼 나는 젊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시간을 거슬러 비행기가 역주행 한다면 과연 나는 지나온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나의 생명의 세포는 이미 죽었고, 죽은 세포를 되살릴 방법은 현재의 의학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착각일 뿐이다. 자연과 우주가 연출하는 이 오묘한 착각을 장거리 여행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유쾌한 경험이 된다.
체코 입국은 간단히 끝났다. 놀라운 것은 이 조그만 나라를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외국인이 더러 눈에 뜨이긴 했으나 거개가 한국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자 신청은 없었다. 입국 심사를 할 때의 에피소드 하나. 둘러멘 카메라가방과 조끼를 벗어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고 전자감시 문을 통과하려는데 감시원이 나를 도로 불러 세우더니 뭐라뭐라 체코말로 주의를 주는 것 같은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말이지. 그래 멀뚱멀뚱 말하는 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는 거듭 뭐라뭐라 말을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질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쏟아지는 말 가운데 한 단어가 유독 귀에 들어오기는 했다. 그 단어는 〈바클〉이라는 말이었다. 그때 줄을 선 뒤에서 누군가가 ‘허리띠’ ‘허리띠’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허리띠를 매만지며 이것이냐는 시늉을 감시원에게 해보였으나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클〉이라는 말만 읊조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허리띠를 풀어 컨베이어 벨트 위의 나의 짐 위에 걸쳐놓았더니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는 걸로 보아 비로소 그것인 줄 알고 나는 사각문을 통과해 심사대를 통과해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적어도 손으로 허리띠를 풀어라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알아듣지 못할 말로만 해대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머리란 이용해 지혜를 발휘하라고 주어진 것인데 타성에 젖어 입으로만 알아듣지 못할 말만 반복해 대니 그가 여간 미련해 보이지 않았다.
입국심사를 통과해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니 인솔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우리는 거기에 합류했다. 곧이어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이동해 승차하여 일정표에 적혀있는 대로 정해진 호텔을 향해 출발했다. 도착할 곳은 체코의 제2도시로 알려진 브루노였다. 2시간 30여 분이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투숙할 예정이었다. 이것이 동유럽 여행 첫날의 일정이었다.
프라하에서 브루노로 향하는 도로상에서.
도로가 재포장 공사중에 있다. 체코가 EU에 가입하면서 받게 된 EU의 보조금으로 도로를 정비하는데 EU가 내건 기한내 공사완료 조건때문에 부실공사가 되어 세월이 흐른 지금 도로 곳곳이 패여 보완공사를 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차창을 통해 내다 본 체코의 전원 모습이다. 평화로운 전원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아래 부분은 밀밭의 풍경이다.
첫댓글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멋진 사진과 기행문~~~ 감동입니다.
건강하신 모습으로 귀국하심을 축하 드립니다.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다녀올 수 있어 은혜라 생각합니다.
틈나는 대로 기행문을 올려볼까 합니다. 그러면서 여행사진의 묘미도 함께 즐겨볼까 합니다. 너무 덥습니다. 원장선생님이 더위 먹으면 안 되겠죠?
청목 선생님의 동유럽 기행문 잘 보았습니다.
처음 가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체코 감시원과의대화가 참 재미있습니다.ㅎㅎ
덕분에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관심 가져 주심을 감사드리고 차차로 올릴 여행기와 여행사진에도 애정을부탁드립니다. 너무 덥습니다. 여의치 않은 건강이신줄 아는데 특히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 전기료 그것 좀 더 나오면 어떻습니까. 더위 먹지 않도록 적당히 관리하셔서 남은 여름 무탈하게 보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