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금강산 문학기행] < 2006. 2. 6(월)~2.8(수)>
*금강金剛, -짧은 만남 긴 여운- 朴 水 鎭 (시인) *
떠나기 전에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는 민족의 영산靈山 금강을 대하는 마음이 어떠해야 할지 몰라 낡았지만 아끼는 등산화를 꺼내 정성껏 닦는다.그 옛날에는 길이 멀어, 또 한때는 길이 끊겨 나서지 못하며 꿈에나 그리던 명산 앞에 내가 선다는 생각에 며칠을 두고 가슴이 설레었다.
중국 북송(北宋)의 큰 시인 소동파도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보면, 금강산은 예부터 먼 중국까지 이름이 높게 난 것이 분명한데 이 땅에 태어나고서도 이제야 금강산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음벽 같은 불신(不信)의 벽이 이해와 용서의 훈풍에 한 귀퉁이가 녹아 바닷길에 이어 육로가 열린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대화의 통로요 만남을 위한 약속이며 믿음과 희망의 손짓이 아니던가. 그 동안 어렵게 북으로의 길을 닦은 많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금강으로 떠나기 전날 밤, 조금이라도 낯익은 모습으로 금강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학창시절 배우고 교사가 되어 가르쳤던 송강의 ‘관동별곡’과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부산의 어느 선생님이 인터넷에 올린 금강산 기행문과 몇몇 시인이 보내준 금강산 예찬 시를 읽으며 잠자리에 든다.
* 명산(名山) 가인(佳人)은 언제나 멀리에 있고...*
이른 아침을 먹은 뒤 신발끈을 단단히 매고 집을 나선다. 몇해 전 중국땅 장춘 연변을 경유해 백두산을 갈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동트기 전 출발이었고 민족혼이 서린 웅대한 산과 천지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는 가슴을 신발 끈 동여매며 다독였었다. 8시 15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에서 우리 교사연수단을 실은 8대의 관광버스는 출근길로 붐비는 서울을 떠나 금강산으로 향한다.
양평휴게소를 들른 뒤 홍천ㆍ인제를 지나 거침없이 내설악으로 접어들자 설산의 정취가 눈길을 끈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한겨울, 매서운 추위 탓인지 산도 길도 마을도 인적이 끊긴 풍경 속을 적당한 긴장과 기대에 찬 표정들이 언뜻언뜻 차창에 어린다.
이때쯤 해서 지나는 위치를 확인해 보려고 가지고 간 수첩 속 지도를 꺼내보니 속초 위로 간성, 거진 지명까지밖에 나와 있지 않아 새삼 분단의 현실을 느낀다. 12시 50분, 금강산 콘도에 도착해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는다. 여기서 수 킬로만 더 가면 남쪽의 최북단 통일전망대가 나오고 거기서부터는 군사지역이다. 한시라도 빨리 금강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기다림의 절차는 호락호락하게 길을 터주지 않는다.
금강산 콘도에서 조금 북쪽으로 이동해 썰렁한 강당에 들어가 입북에 필요한 사전교육을 받는다. 강당에 들어가기 전 버스 안에서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의 반입이 안 되는 물품을 맡겨야 하는데너도나도 휴대폰으로 마지막 전화를 거는 모습이 마치 신병교육대 입소를 앞둔 장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휴대폰을 포함해 망원렌즈, 북한관련 책자, 녹음기나 소형 라디오는 물론 만보기까지 허용이 안 된다고 하여 실소를 자아냈다.
언젠가 한 사람은 부주의로 휴대폰을 소지했다가 3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안내 중에 압수나 벌금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제는 남북의 교류도 많아졌고 특히 이곳 금강산 행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해상 및 육로관광으로 낯익은 길이 되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북녘이 초행인 우리 일행은 호기심과 긴장이 섞인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경상대학에서 강의한다는 K교수는 간결하고도 재미있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예화를 들어가며 전달한다. 과음으로 인한 추태나 졸부 근성의 팁주기,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언행과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행위들은 굳이 북쪽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할 부끄러운 자화상이어서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이 붉어진다.
간단한 교육이 끝나고 비무장지대를 향해 이동한 시간은 15시 30분. 서울을 떠나온 지 7시간이 훌쩍 지났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한 발은 기울었다. 비무장지대 바로 앞쪽에 위치한 남측 통과소에서 비교적 간단한 출경(出境) 수속을 밟는다. 나가는 입구에 '출경'이란 팻말이 조금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남북 사이에 오고감에 출국이라기보다는 경계를 잠시 벗어난다는 출경이라는 말이 생각할수록 이치에 맞지 않은가. 단어 하나의 힘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제부터 33명을 한 조로 나눠 우리를 안내할 조선족 청년도 공식 호칭이 영어의 가이드가 아닌 조장이란다. 출경 수속을 마치고 나간 북쪽 마당에는 33인승 금강산 관광전용 중형버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전용 버스가 출발한 시간은 16시 10분, 해는 또 한걸음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안내하는 조장이 마이크를 든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서둔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며 남과 북 서로가 약속한 시간에 정확하게 일정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러고 보니 새벽부터 나와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금강산을 찾아가는 이 길이 어쩌면 통일로 가는 먼 길과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다, 명산(名山 )가인(佳人)은 언제나 멀리 있고 꿈은 아주 천천히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 앞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명산 가인이 귀하다 할 것이며 누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한 생을 바칠 수 있겠는가.
* 북녘 땅, 눈부신 금강(金剛)의 품에 안기다*
지난 날 더는 북으로 갈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금강을 바라보던 통일전망대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남방한계선을 통과하여 적막에 잠긴 비무장지대를 서행으로 통과한다. 동해북부선 철로 연결공사는 끝나 당장이라도 기차가 지나가도 좋을 듯이 남북으로 시원스레 뻗어 있다. 말뚝이 비뚜름히 서 있는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녘땅에 들어선다. 경계근무 중인 북측군인들은 미동도 않은 채 고요를 깨며 지나가는 버스행렬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북방한계선이 지나는 곳에 낙타 모양을 한 구선봉에 눈길이 머문다.
누구보다 금강산을 사랑해 곳곳에 체취를 남긴 조선시대 문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그가 이곳에 기거했다는 전설이 있고 그 앞에는 감호라는 호수가 눈에 덮여 외로이 겨울을 나고 있다. 구선봉을 빼고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북쪽의 통관소가 있다. 천막건물과 간이화장실 몇 개 정도가 서 있는 허름한 시설인데 스피커에서는 남쪽에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반갑습니다’ 노래와 ‘도라지 타령’이 되풀이 흘러나오며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 찾아온 손님에 대한 환영행사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검색대를 통과할 때는 잠시 긴장감이 흘렀다. 이곳 근무자들은 남쪽처럼 세관원이 아닌 군인들인데 어깨에 붉은 별 표시가 선명한 군복차림의 40대로 보이는 통관원은 자기보다 10년도 더 연상인 듯한 내 앞사람의 여행증 사진과 실제 모습을 뜯어보다가 ‘이거 오래된 거이구만’ 하고 한마디 툭 던진다. 그 말투가 참으로 힘있고 위압적이다. 북한 말투가 으레 그렇긴 하지만 그깟 부티 좀 나는 옷차림이나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연치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그들만이 가지는 자신감이랄까 아니면 저들의 꼿꼿한 자존심 같은 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찾아오는 손님에 대한 예의나 친절을 기대하기는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존중해야 하겠다는 떠나기 전의 다짐을 생각하니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17시. 하루가 다 저물어 갈 무렵에야 나고드는 모든 절차가 끝난다.
멀지 않은 곳, 아니 아주 가까운 곳에 민족의 정기가 맥동치는 금강이 있었다. 그 산자락 온정리에 금강산 관광의 심장 온정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흰눈을 머리에 인 환상적인 바위산 봉우리들이 눈길을 사로잡아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탄성과 함께 사진찍기에 부산하다. 주위에 보이는 낮은 봉우리들만 해도 매바위봉, 바리봉, 수정봉, 문필봉, 하관음봉 등 벌써부터 부실한 기억의 범 위를 벗어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일만이천 봉을 한 번 다 불러나 볼 것 인가.
그러나 그야말로 금강산도 식후경, 한식 뷔페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 고 나니 저녁 6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 하루 한 일이라고는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온 것 밖에는 없지만 여독을 푼다는 핑계를 달아 천연온수 50도를 자랑하는 온정리 온천에 몸을 담근다. 한 번 온천욕에 10년이 젊어진다니 누군들 그 말에 혹하지 않겠는가. 노천탕으로 나가니 내리는 눈이 불빛에 반사되어 하늘에 떠 있던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거리며 설야의 풍경을 연출한다.
금강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눈 맑고 마음이 맑아지는 참에 온천욕까지 하고 나니 세속의 티끌이 이미 말끔히 가신 듯 머리가 상쾌하다. 이곳 숙소는 호텔해금강, 금강팬션, 그리고 항아리형의 아름다운 고성항(장전항)을 바라보는 해변의 금강패밀리비치호텔이 있는데 온정각을 중심으로 조금씩 떨어져 있어 버스로 이동을 한다. 그러나 저녁 7시 30분이면 막차가 끊어져 왕래가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는 바닷가 호텔에 배정이 되어 짐을 푼 후 눈 내리는 항구를 산책하다 내일의 산행을 위해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 지나온 하루를 돌이켜보며 잠들기 전, 한참을 집 걱정에 몸을 뒤챈다. 중환에 계신 어머니를 두고 떠나온 길인데 비상전화도 하나 없어 안부를 모르니 불안한 상상이 구름처럼 머릿속에 인다. 이 점에서 아직 이곳은 절해고도絶海孤島나 다름이 없다.
* 아름다워라 금강, 눈 덮인 설봉산雪峰山이여!
금강산 속살에 안긴다는 기쁨에 새벽같이 잠이 깼다. 바다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여니 밤새 눈이 내려 세상은 온통 하얀 설국雪國으로 변했다. 하얀 눈과 푸른 바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눈을 받아들이며 맘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남쪽 방송이 나오는 TV를 켜니 전국이 눈예보 속에 있다. 산행을 위해 아침 일찍 호텔 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배를 채운다. 어제 저녁은 간량을 잘 못해 음식을 남겼는데 어디쯤에서 허기진 아침을 보내고 있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침에는 적당 양을 가져다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고 숭늉과 함께 깨끗이 비웠다.
눈이 내려 시야가 시원스레 트이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물속 모래알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바다와 설경에 취한 여행객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이는 것이 하루 밤새 벌써 금강을 닮은 표정들이다. 출발예정 시간이 넘어서도 좀체 차에 오를 줄 모르고 안내원조차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는다. 8시쯤 하여 버스가 산쪽을 향해 출발한다.
오늘의 산행 코스는 구룡연九龍淵으로 왕복 8.4km에 3~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다시 온정각을 지나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산길은 제설작업 때문에 지연되다가 9시가 거의 되어서야 길이 뚫린다.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김정숙 휴양관’을 오른 쪽으로 끼고 돌아 버스는 천천히 눈길을 오른다. 길가 바위에는 <주체 향도성 김정일>이라는 힘찬 궁체 글발 새김이 보이고 길 양쪽으로는 곧게 뻗은 적송들이 각선미를 뽐내고 있다. 이름하여 미인송美人松 . 아름다운 자연을 흔히 사람에 비유한 것을 보면 비록 명리물욕에 빠져 아웅다웅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인간의 존귀함을 인정한 조상들의 사려에 머리가 숙여진다.
왼쪽의 눈덮인 계곡은 전설어린 신계천. 1500년 역사의 신계사 우측으로는 붓처럼 생긴 문필봉이 우뚝 서 있다. 눈에 덮여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을까마는 신묘한 바위산의 설경은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아마도 오늘 이 산속에는 요정들의 눈꽃축제라도 열린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최고의 솜씨로 빚어놓은 조각들이 널려 있고 웃음과 탄성이 쏟아지는 사이로 끊임없이 공중에서 은가루로 만든 육화송이를 뿌려대는 걸 보면. 일찍이 미당 시인은 젊은 시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라고 노래했지만 생각해보건대 지천명知天命의 나를 이만큼이나마 키운 건 자연과 병病이 아니었나 싶다. 훌륭한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은 언제나 내 삶의 모습을 가르쳤고 간단없이 찾아오는 육신의 병은 생명의 의미를 각성케 해 주었다.
나를 키운 자연 중에도 정화랄 수 있는 금강, 그 금강이 지금 내 눈앞에 황홀하게 펼쳐지고 있다. 9시경 등산장비를 갖추고 금강산의 중심부인 구룡연 산행을 시작한다. 한꺼번에 몰린 인파와 눈으로 인해 좁은 외길 등산로는 초입부터 정체를 빚자 어느 여선생님이 신도림역 같다고 해서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여기 와서 새로 안 것은 금강산의 이름이 넷이 아니라 다섯이란 사실이다. 춘하추동 다른 이름 금강산, 金剛山,봉래산逢萊山,풍악산楓嶽山, 개골산皆骨山 외에 눈에 덮인 겨울산인 설봉산雪峰山! 어느 한 계절 빼놓을 경치가 없지만 그중 백미가 설봉산이라니 눈을 맞으며 설봉을 대하는 행운에 감사의 언어들이 입가에 맴돌며 체력이 약한 몸이지만 신기한 봉우리를 감상하며 오르는 길에 힘든 줄을 모르겠다. 한 구비 돌 때마다 얼굴 내미는 봉우리들의 향연, 모두가 다른 모습이면서도 하나 같이 아름답고 놀라와 절로 감탄이 쏟아지는 걸 보면 옛글과 전하는 말들이 조금도 거짓 아님을 알겠다.
그래서 금강산의 10대 미로 산악미, 계곡미, 수림미, 해양미, 호수미, 풍운조화미, 전망미, 색채미, 건축조각미에 이어 끝 순서에 감탄미를 넣었던가. 이태 전 중국 계림을 갔을 때 그곳 안내원이 계림의 3만 6천봉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는데 그 또한 빼어난 조화옹의 솜씨였지만 그것은 너른 벌판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였다면 금강은 한 곳에 온갖 조화를 모아놓은 집대성이라고나 할까?
금강산의 이름이 불교의 화엄경에서 나왔으며 그 의미인 ‘영원불멸의 보배’란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무감한 사람이라도 어찌 이쯤에서 노래 한 구절이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 사랑 금강산
작시;박수진 시인 / 작곡;김애경 선생님.
*민족의 숨결 맥동치는 천하의 으뜸 금강산이여
이제 와 그 품에 안기니 세상 시름 흔적 없네
맑고 고운 빛 다 우려내 하늘 향해 우뚝 솟으니
수만 년 변함없는 모습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라
철 따라 새 옷 치장하고
날마다 첫날인 듯 사는 불멸의 보배로세
우리의 금강, 우리 사랑 금강산................. *
#위 시는 작곡가 김애경님이 가곡으로 작곡하고있는 중에 있습니다.-오두영 근배
금강문과 비봉폭포를 지나 일곱 번째의 다리를 건너며 두 시간 정 도 걸어오르니 구룡폭포를 볼 수 있는 관폭정觀瀑亭에 다다른다.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담긴 상팔담을 돌아 하계下界로 떨어지는 우리나라 3대 명승 폭포인 구룡푝포와 그 아래 구룡연. 바위를 파놓은 깊이만도 무려 13m나 된다고 하니 그 세월이 얼마나 될지 차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지금은 한겨울이라 견고한 얼음에 발목이 잡혀 장대한 빙폭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 눈이 덮여 그저 상상으로 물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상팔담上八潭 가는 길 또한 내린 눈에 막혀 있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 여유롭게 상팔담을 지나 금강의 주봉 비로봉毘盧峰에 오를 날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하기사 송강 정철도 개심대 쯤에서 비로봉을 바라보며 ‘금강산 상상두에 올라본 이 그 뉘신고’ 하며 ‘오르지 못하고니 내려가미 고이할가’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관동별곡 한 구절로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서는 발 위로 흰눈이 자꾸 내려앉는다.
* 통일교육과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감동 공연 (12시 30분.)*
산 입구에 있는 북한의 나라꽃 이름을 딴 북측 식당 <목란관>에 도착해 시원한 냉면으로 시장기를 달랜다. 물냉면 한 젓가락을 먹고 난 뒤인데 시중드는 북한 여성봉사원이 평양말로 맛이 없으면 비빔밥으로 바꾸어 주겠단다. 그 친절과 여유가 기특해 몇 마디 농담을 걸었더니 그걸 기억했다가 다 먹고 난 뒤에 다시 다가와서는 맛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농담 빚을 되갚아 빈 그릇을 보여주며 한참을 같이 웃었다.
오후에는 온정각 극장에서 ‘반갑습니다’와 ‘다시 만납시다’라는 만남과 이별의 북한 노래 두 곡을 배우고 북으로 오기 전 교육을 맡았던 역시 경상대 윤리교육과 K교수로부터 30분짜리 강의를 듣는다. 나누어 준 북한 노래집을 보니 북한 노래는 가사와 멜로디가 단순하면서도 주제가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금강산 관광의 의의에 대한 강의도 북한노래처럼 쉬우면서 주제가 분명해 귀에 쏙 들어왔다.
금강산 관광은 통일의 앞날을 내다보며 남과 북이 함께 이기는 윈-윈 게임에 기초한다는 사실과 가치가 혼재된 통일교육은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금강산 방문을 통해 통일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는데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잘 구성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는 말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귀가 번쩍 띄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은 TV를 통해 몇 차례 본 적이 있지만 가까이서 보는 감동은 전혀 새롭다. 장르로 따지면 종합창작예술이라 할 수 있는 교예단 공연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데 대부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공중묘기 공연 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어 나도 몰래 메모장을 꺼내 든다.
*기예는 놀랍고 아름답지만 눈물 난다
서늘한 공중에서 날고 돌며 춤추는 것은 꽃잎인가 나비인가 선녀인가
한 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저 숨 막히게 비정한 몸짓을 보아라
실끈 한 가닥에 기꺼이 생을 맡기는
은장도 서슬 같은 집중 앞에 누가 스스로의 삶 가벼이 하리
박수를 먹고 눈물을 먹고 배우도 관객도 손을 흔든다*
저녁 6시경 교예단의 짜릿한 감동을 안은 채 금강산호텔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밤에는 고성횟집에서 자연산 회로 일행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꿈같이 보낸 하루를 돌아본다.
* 서로의 다름을 보고 인정하며 가는 길*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번 금강산 여행은 시작이 곧 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일정이 빠듯하고 시간 또한 너무 빨리 흘러간다. 오늘이 벌써 2박 3일의 마지막 날. 밤새 눈이 내려 세상은 다시 한번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눈이 부시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시야는 다소 트였지만 만물상萬物相 가는 길은 통제가 되어 중간까지만 갈 수 있다는 말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해금강海金剛과 삼일포三日浦로 향한다.
만물상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만상정에서부터 약 2km에 이르는 오르막길로 금강산에서 으뜸으로 치는 산악미요 절경을 이루는 곳이라고 한다. 가는 길에 삼선암三仙岩, 귀면암鬼面岩을 비롯 나무꾼이 선녀가 떠난 뒤 실의에 빠져 도끼로 찍어 생겨났다는 절부암切斧岩 등 절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사진첩 하나를 사서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해금강으로 떠나기에 앞서 잠시 짬을 내 온정각 서편에 서 있는 정몽헌 전 현대회장의 추모비 앞에 서 본다. ‘여기 조선 땅의 숨결이 맥동치는~’으로 시작되는 도올 김용옥이 짓고 쓴 헌사가 남북교류의 장하고도 아픈 역사의 단면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어 가슴이 시리다.
지금까지 버스가 다닌 길은 양쪽에 담장이 쳐진 2차선 관광전용도로였다. 가끔 일반 도로와 교차하는 곳에는 양쪽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 있었다. 그렇게 민간인들과는 철저히 격리된 탓에 저만치 눈내린 길을 걸어서 이동하거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아낙, 소달구지를 끌고 길을 가는 주민의 모습은 설경의 산수와 어울려 흑백 영화의 한 장면같이 천천히 지나간다.
그래도 고성은 제법 큰 고장이어서 3,4층 높이의 건물이 몇 채 보이지만 대부분 집들은 낮은 지붕에 연기가 모락모락 솟는 풍경이 내 어릴 적 고향 마을의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해금강과 삼일포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일반 도로에 진입한다. 단층의 중학교 건물과 우체국이 있는 읍내 거리를 지날 때도 길가에는 세워둔 자전거만 보일 뿐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안내하는 조장의 말에 따르면, 관광버스가 지나갈 때 주민들은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워둔 채 건물이나 골목 뒤편으로 몸을 감춘다는 것이다. 물론 길가에 서 있는 군인들의 통제에 따른 것이겠지만…….
민족의 명산 금강산은 이런저런 목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문을 열었어도 수십 년 닫고 살아온 그들의 안방 모습까지 한꺼번에 내보이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이동하는 길가에는 마을이든 산이든 벌판이든 가릴 것 없이 한 손에 붉은 기를 든 군인들이 서로 수신호를 할 정도의 거리에 어김없이 배치되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언뜻 보아도 어린 나이다. 평균치로 보아 기껏해야 열예닐곱 살 정도로 스무살을 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들이다. 그래서 먼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관광지 밖에서 마주치는 유일한 북쪽사람인 군인들에게 그토록 연민을 느꼈나 보다.
북쪽의 학제는 유치원 2년에 인민학교 4년, 그리고 중등학교 6년이며 의무 군복무기간은 10년이라고 한다. 16세부터 군입대가 가능하며 복무를 마쳐야 개인에 따라 대학공부를 하든가 장가를 들어 가정을 꾸릴 수 있으므로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하여 일찍 군대에 자원입대를 한다는 것이다. 군에서 보내는 기간이 긴 만큼 인성교육을 포함한 직업교육 등 사회 적응 교육을 실시하겠지만 그 내용이 어떠한지 여기서 알 수는 없다. 설명을 듣고서야 북쪽 병사들이 하나같이 나이가 어린 이유를 알겠다.
그리고 어젯밤 횟집에서 평양에서 왔다는 여성 봉사원과 선호하는 신랑감 후보에 대해 말하던 중 ‘남쪽에서는 군인도 결혼 합네까?’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던데 대한 의문도 풀린다. 혼자서 생각건대 꽃다운 청춘기에 병역 10년은 아무래도 너무 길다고 느껴지지만 그 또한 이곳 사회화의 한 과정이고 우리와 다름의 일부로 인정한다면 그동안 나이어린 군인들에 대해 보낸 지나친 연민의 눈길은 일방적인 우리의 주관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지난 해 인도를 여행할 때 나는 가는 곳마다 손 내미는 초췌한 거지아이들이 눈에 밟혀 잠자리에 누워서도 마음 쓰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어린날의 자화상이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들 못지않게 동정받아 마땅한 가엾은 존재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통일로 가는 길도 지나친 연민이나 동정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따뜻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바다의 금강, 금강의 바다 그리고 삼일포(三日浦)*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는 사이 버스는 해금강 주차장 에 닿는다. 바다로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착용하고 지팡이 를 짚고 나선다. 해금강은 말 그대로 바다의 금강이다. 바다에 그대로 옮겨 놓은 금강산은 조각같은 바위섬이 물 위에 점점이 떠 있고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해풍을 맞으며 자라는 소나무가 한데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조물주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한 번 최상의 솜씨로 시험삼아 만들어 보았다는 만물상, 눈 때문에 길이 막혀 가보지 못한 만물상까지 이곳에다 다시 한번 펼쳐 놓은 바다만물상에 수없이 카메라 렌즈를 맞춘다. 시간에 쫒겨 돌려야 하는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지만 마지막 코스 삼일포에 대한 기대로 다시 차에 오른다.
삼일포는 해금강에서 5km, 온정리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 한 관동8경 중의 하나인데 산과 호수와 바위와 정자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으로 우리를 맞는다. 호수는 얼음과 눈으로 덮여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물속은 볼 수 없지만 둘레가 이십여 리에 수심이 깊은 곳은 13m라고 하니 낚시를 즐기기에는 그만인 호수이겠다.
신라때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라는 4선이 하루를 놀다가려고 왔다가 경치에 빠져 사흘을 머물고 가 삼일포란 이름을 남겼다니 예부터 이곳이 빼어난 선경이었음을 짐작하겠다.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싼 장군대와 연화대, 양사언의 호를 딴 봉래대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큰 바위마다에는 김일성, 김정숙 등 이곳 지도자들을 찬양하는 글귀가 크고 선명하게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호숫가에는 기념품과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정자 하나 밖에는 다른 시설물이 없을뿐더러 시간에 맞추다보니 3일은커녕 1시간 동안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다시 관동별곡 삼일포 구절에 실어 읊어본다.
고성을랑 저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단서丹書는 완연하되 사선四仙은 어데 가니,
예 사흘 머문 후에 어데 가 또 머물꼬.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 몇 곳에 앉아 놀았던고
그러고 보니 어느새 금강산에서의 사흘째 일정이 다 끝나가고 있다.
* 아쉬움과 미련을 희망으로 남기고……*
금강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북측 식당 옥류관으로 간다. 어느 차에선가 이동 중에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검색을 한다고 하여 긴장감이 돈다. 정통 평양냉면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버스 탑승시간에 겨우 맞춘다. 13시 40분. 약속된 출경과 남으로의 입경을 위해 우리를 위해 애써준 아산현대 측 근무자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아쉬움 속에 금강을 뒤로 한다.
얼음 낀 개울가에서 물지게로 물을 떠가는 사람, 자전거를 끌고 개울을 건너는 사람, 눈길을 걸어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과 눈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마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 동안 금강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만다.
눈을 감으니 금강산 쉼터나 전망대에서 또록한 북쪽말로 설명하던 안내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계절 따라 경치 따라 금강산의 이름만 해도 다섯 가지요, 이제 겨우 설봉산 하나를 본 것이니 앞으로 네 번은 더 와야 그제사 금강을 보았다 할 것이므로 이제 돌아가 금강산을 다 보았다고 하지 말고 그냥 금강산을 보고 왔노라고 하시라요”라던 말이 너무 딱 맞아 머리를 주억거려본다.
서둘지는 않더라도 남북이 같은 핏줄이라는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경제적 삶의 차이를 자꾸 줄여나가 자신있게 서로의 좋은 점을 주고받으며 토론하고 금강산 백두산만이라도 자유왕래가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그때는 천하제일 금강 품에 더 오래 안기어 마음 편히 못다 보고 들은 풍경과 전설에 밤을 새워보리라 다짐해 본다. 여행안내증이 물기에 조금 훼손되었다고 북측 검사원으로부터 10달러의 벌금을 맞았다는 어느 여선생님의 푸념을 낙수거리로 하여 남쪽 세관을 통과하자 휴대폰 소리의 일상이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끝>
첫댓글 안녕하십니까! 내 다니는 문학아카데미 담당교수 박수진 시인께서 금강산에 다녀오신후관악문학 아카데에서 발표하tl고 내 카페에 글을 올려주셨습니다.내 글은 자작글방에만 올리는 때문에 우리 자작글방님들에게[{박수진의'금강산 문학기행문'}을 먼저보여드리고 싶어 여기에 올립니다. 즐감하시고 고운 날 되십시오.^^
허걱...... 시간 될 때 천천히 읽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저도 금강산 구경 한 번 하고 싶은데 기회가 아직 닿질 않는군요.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 되소서!
봄바라기님! 글 올리고 교정 보는데 들어오셨네요.박수진 시인은 월간[순수문학]지 &[문학서울]지 편집장이시지요.좋은 글이니 필히 한번 읽어보십시오. 금강산에 곽시인께서도 다녀오실 기회가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감사!^^*
오선생님 어쩌면 좋아요 넘 길어서 지금 못 읽었어요.낼 꼭 읽어볼께요.지도 금강산 가고 싶답니다..선생님 긴글 올리시는라 수고 많으셨습니다..고운 밤 편안하세요!
저도 그러네요.틀림없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듯한 글인데 오늘은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에 꼭 한번 읽어보겠습니다.편안한 밤 되세요.
박수진 선생님의 금강산 기행 꼭 읽어봐야 할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 글을 짧게 여러편으로 나눠서 올리는게 읽는데 부담이 없지 않을까요 오늘은 제가 영 시간이 없어서 위에 편만 읽고 갑니다 다른 글도 보아야 하고... ㅎㅎㅎ 죄송합니다. 좋은밤 되십시오
ㅎㅎㅎ~ 선생님 저두요^^ 이 짧은밤에? ....낼 꼭 읽어보겠습니다... 그럼, 편안한밤 되십시요^^
seagul님!하늘빛님!왕고들님! 오두막님! 천천히 읽어보십시오.여러편으로 올린다...?난, 한번 잡으면 끝장 내야 하는데...내일이면 늦으리!...^*^....이글 복사해 놓으시면 좋은 자료가 되실 것입니다..미안미안..... 고운 밤 되세요.^^*
선생님!!글로써 함께 떠나는 금강산 여행인듯 싶네요..금강산 여행갈때 참고가 꼭 될 것 같습니다..늘 건안하세요.
이글은 한부 복사해둘만한 글입니다. 다녀가시묘도장 찍어주심에 감사입니다.건승하십시오.^^*
선생님 금강산 구경 잘했습니다. 박수진 선생님뿐 아니라 읽은 저도 간접적으로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군복무기간이 10년이군요 선생님 글이 너무 붙어 있어 읽을때 눈이 좀 시려요 위아래 간격을 띄우면...
왕님!고맙습니다.글이 너무 붙어있나요? 수필의 기본원칙을 지키고자 했더니 그렇게 되네요.글을 위아래로 한칸식 띄어 놓으면 또 너무 늘어지는 때문에...그래도 다음부터는 될수록 좋은 글은 좋은 글방에 올리고 꼭 자작방에 올리고자 할 때엔 한칸씩 간격을 두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