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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가서 매점이나 차릴까 / 3월
대청도 삼각산 ^^ 인천 옹진군
매바위전망대 – 삼각산 – 광난두정자각 – 서풍받이 - 조각바위언덕 – 하늘전망대 – 마당바위 – 기름항아리
대청도의 선진포선착장에 접안한다. 인천연안부두를 출발한지 세 시간 반 만이었다. 칠 년 전에도 눈인사만 주고받았고 재작년 그러께에도 그냥 지나쳤던 작은 섬일 뿐인데 두고두고 선망의 대상으로 남았던 섬이었다.
여행사에서 나온 작은 버스로 갈아탔다. 백령도나 동해의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도 현지의 버스가 기다리고 관광가이드가 차에 오르던 것과 같다. 매바위전망대에 서면 수리봉과 서풍받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거센 물살로 달려들던 바다는 서풍받이에서 기세가 한풀 꺾이고 수리봉을 만나면서 물결도 고분고분해진다.
수리봉이란 지명은 어느 날 아무렇게나 지어 부른 이름이 아닌 부엉이를 꼭 빼어 닮은 산이기에 붙여졌다.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대청도를 비행하는 모습이다. 능선 하나를 더 올랐다. 이번에는 더 크게 날개를 펴고 바다 속으로 부리를 넣는 수리부엉이의 형상이다.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영락없는 부엉이다.
삼각산의 정상은 그만그만한 세 개의 봉우리가 마주보고 서 있는 대청도의 중심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소사나무 아래의 절벽으로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정면으로는 백령도가 있고 더 멀리로는 북한의 옹진군이 있다. 몇 개의 바위능선을 내려서면 광난두 정자각인데 삼각산 정상에서 잘만 보이던 정자각 지붕이 소나무 숲에 가려졌다가는 보이고 또 가려지기를 반복한다. 길섶에는 순수 우리 혈통의 춘란이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지난 이른 봄, 남녘의 섬에서 봤던 춘란처럼 빵끗 웃는 얼굴이다.
서풍받이 벼랑에서 뒤를 돌아보면 삼각산이고 아래의 모래을 해변이다. 하늘전망대에 올랐다. 서해바다 최고의 선경이기에 해와 달과 별이 하늘의 기운을 받아갔다는 대청도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풍광이 아찔하다. 능선 너머로 저녁노을을 기다리는 독바위가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저녁밥상으로 대청도 홍어를 주문한다. 흔히 홍어하면 고약한 냄새를 동반한 삭힌 홍어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대개 항아리에 볏짚과 소금을 넣고 홍어를 삭히는데 삭힌 숙성기간에 따라 큼큼한 냄새의 정도가 달라진다. 사나흘 삭힌 홍어는 비릿하면서도 퀴퀴하지만 보름을 더 익은 홍어는 톡 쏘는 맛에 큼큼하면서 음흉한 냄새를 풍긴다. 그 매운맛 때문에 사람들은 질금질금 눈물을 흘리며 특유의 맛에 취한다. 홍어하면 이런 식감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흑산도의 홍어가 그렇고 목포와 여수 역시 탁 쏘는 남도 특유의 맛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청도의 홍어는 먹는 방법부터 딴판이다. 오래전부터 대청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잡는 족족 삭히는 과정을 생략한 채 회를 처서 먹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청도에서는 삭힌 홍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홍어삼합이란 메뉴도 남녘에만 있을 뿐이다.
홍어회를 비우자 홍어탕이 나온다. 홍어의 뼈에서 진국이 나올 정도가 되면 홍어의 내장인 홍어애라는 것을 넣고 푹 고아낸다. 이래저래 홍어란 놈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고기다. 회로 맛볼 적에 애를 태우더니 홍어애탕을 먹으면서는 애간장을 녹이고 만다.
이른 봄날에 남해의 이름 없는 섬에 들어갔었다. 이렇게 정갈하고 깨끗한 섬이 또 있을까 싶어 감탄을 했다. 두 내외가 사는 집에 민박을 했다.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고 재작년에 막내딸을 출가시켰으니 이들 내외 둘뿐이다.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뱃사람을 만나 시집을 오게 된 사연에서부터 바지락을 캐서 배를 한 척 더 샀다는 얘기 등등, 시시껄렁한 얘기를 늘여 놓으며 밤이 이슥토록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안 한다. 섬에서 오죽이나 말동무가 없었으면 민박손님에게 이러나 싶어 들어주고 있었다. 늘어지고 늘어지는 얘기는 부부싸움의 극적인 상황까지 들어야했다.
된통 부부싸움을 했던 어느 날이란다. 잘잘못을 떠나 부부싸움이란 늘 누가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지 서로 눈치를 보살피는 거다. 그런데 남편이 큰아들이 사는 서울로 올라가 사흘이 지나도록 오질 않더란다. 이 아내는 그날로 배를 몰아 고향인 여수로 내려갔다고 한다. 결과는 해피앤딩으로 끝났다는 뻔한 줄거리였다.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몸을 추스르고 또 졸다가 듣기를 반복하는데 새벽 한 시를 넘겨서야 내외의 실화소설은 막이 내려졌다. 누가 손님이고 누가 주인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7년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서해의 외딴 섬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는 막배를 타던 날이었다. 바지락이 많이 나는 섬이라는 정보를 듣고 바지락을 캘 수 있는 갯벌을 알려달라는 주문을 넣었다. 답변은 신통치 않았다. 갯벌이 허허벌판 같지만 주인이 따로 있다는 설명이었다. 즉, 섬에 사는 주민들이 주인은 맞지만 하도 사람들은 아예 자격이 없고 상도에 사는 사람들만 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통사정을 해서 얻은 결론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냐는 거다.
가슴장화로 갈아 신고 바닷물이 물러난 갯벌로 들어섰다. 한참을 뒤지지만 소득이 신통치 않아 애가 타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댁은 뉘신데 여길 오셨슈?"
할 말이 궁핍해서 민박집 주인의 얼굴을 보며 도움을 청하는데 못 본체 딴전을 핀다.
"이 섬의 양반은 아닌 거 같은데 뉘시유."
어제 교육 받은 대로 하면 되겠거니 싶어 큰 소리로 대꾸했다.
"예, 최 서방네 친척인데요."
"어허 친척은 무슨 친척이셔 어제 민박 오셨구먼?“
민박 나그네의 갯벌체험은 여기까지였다. 멀찌감치 물러나 바닷바람을 쐬는데 목덜미가 시려웠다. 바다도 갯벌도 다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청도야 말로 꼭꼭 숨었다가 나타난 신기하고 진귀한 섬이다. 섬이 그립다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대청도로 가라. 그동안 섬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면 그때도 대청도로 가라. 뱃멀미는 감내하고라도 꼭 대청도를 가보시라. 아직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섬의 속살이 거기 있다.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남도의 흑산도와 목포 그리고 여수라는 지역은 홍어로 유명한 고장이다. 집안의 애경사와 제삿날에는 반드시 홍어가 상에 오른다. 이 지역의 홍어삼합은 알아준다. 그런데 대청도에서 만큼은 홍어를 먹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삭히는 홍어가 아니라 즉석에서 회를 썰어 내온다는 점이다. 어느 지역의 홍어 맛이 좋은지는 각자의 식성에 따라 다를 것이다. 누구나 섬을 나올 때는 싱싱한 홍어를 사고 싶어 할 테지만 대청도에는 수산물 판매점이 아직 없다.
공룡능선에서 설악을 품다 / 9월
설악산 ^^ 강원 속초, 양양, 인제, 고성
설악동소공원 - 비선대 – 금강굴 – 금강문 – 마등령 - 나한봉 - 1,275봉 - 신선대 – 희운각 - 무너미고개 – 천당폭포 – 양폭대 피소 - 천불동계곡 – 귀면암 - 설악동
칠흑 같은 밤에 내딛는 발자국은 조심스럽다. 곤히 잠든 설악을 깨우는 행위는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비선대를 등지고 금강굴 방향으로 암벽을 오른다. 새벽의 향기는 언제나 풋풋하다. 붉은 피부의 금강송에서 묻어나는 향기는 더 그렇다. 크게 한 번 내뱉고 다시 들여 마시면 더 그윽하다.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능선에 오르는데 하얀 운해가 천불동계곡을 뒤덮는다. 이제 산행의 시작일 뿐인데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흥건하다. 벌써 체력을 걱정할 지점은 아니건만 공룡능선을 타야한다는 중압감 때문이리라.
설악공룡은 일단 산행을 시작하면 천불동으로 빠지던, 오세암으로 갈라지던 종주하지 않고는 달리 탈출로가 마땅찮은 코스다. 그래서 많은 산악인들이 대청은 쉽게 오르면서도 공룡능선을 종주하는데 주저하는 이유다. 엄두가 나지 않는 고행의 길이라고 말한다.
한참동안 화강암 너덜지대를 지난다. 키 작은 편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산해당화라 부르는 연분홍 인가목이 길섶에서 반긴다. 금강문을 지나면서 배낭을 풀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봐도 설악은 늠름한 산이요, 내려다 봐도 굵은 산줄기다.
마등령삼거리쯤 왔을 때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른 아침 백담사를 출발해 오세암을 거친 산객들이 군데군데 둘러앉아 행동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서로 눈인사를 나눈다.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산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까지 잘 왔으니 날머리까지 안전산행을 하자는 서로의 교감이리라.
나한봉쯤 왔다. 설악의 공룡은 이제 고생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공룡의 꼬리를 밟고 있을 뿐이다.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가 도열하고 그 아래로 산안개가 흐른다.
설악산은 속리산, 월악산, 월출산, 북한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암산(巖山)인데 화강암의 피부를 지녀 때깔마저 좋다. 특히나 공룡능선이 그렇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백두대간의 등뼈지점인데 시선을 한군데 고정시킬 수 없을 지경이다.
구릉지를 깊게 타다 다시 올라서서 대청봉을 바라본다. 용아장성을 휘감던 구름이 범봉 아래로 흐르고 1,275봉에서 신선대로 운해가 일렁인다. 1,275봉에 이르러서는 내설악 외설악 할 것 없이 기기묘묘한 골산의 자태가 눈을 홀리게 만든다. 보이는 암봉마다 공룡의 몸통이고 공룡의 등뼈다.
신선대에서 뒤를 돌아보면 범봉과 용아장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바꾸고 있다. 1,275봉에 시선을 두면 나한봉이 구름에 가려지고, 다시 신선봉이 나타나고, 또 한눈을 팔면 1,275봉은 구름 속에 가려지면서 한 폭의 수묵담채를 그려내고 있었다. 황홀하다.
설악의 공룡능선은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산이다. 몇 번을 벼르다 공룡능선을 타고도 설악의 비경에 감흥하지 못했다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만큼 설악은 날씨의 변화가 심해 산악사고도 빈번히 일어난다. 산을 오를 때는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요동을 치며 구름을 부르고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만난다. 먹구름이 몰려와 허겁지겁 하산을 서두르는 바람에 엉금엉금 기어 내려왔다고 털어놓는 곳이 설악공룡이다. 요술도 이런 요술이 있을까 싶다. 이런 날은 설악의 비경이고 뭐고 무사히 하산하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그저 집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완벽한 장비를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변화무쌍한 날씨도 감안해야하는 산이 설악산이다. 그래서 설악공룡은 선택받은 자만이 설악의 비경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룡능선을 오르지 않고는 더 이상 설악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그만큼 공룡능선의 선경을 함축한 말일 것이다. 화창하게 맑은 오늘이 그날인가 싶다.
1,275봉의 봉우리는 어깨와 목만 내놓고 산안개가 출렁인다. 그러다가는 다시 봉우리 하나가 파묻히고 암벽을 타고 흐르던 안개가 서로 만나 군무를 펼친다. 여섯 개 암봉에서 안개가 모두 걷히는 데는 족히 십 여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천불동계곡을 막 들어서는데 여기저기서 다람쥐가 뛰어 다닌다. 굴참나무를 타고 오르다 박달나무로 건너뛴다. 다시 쪼르르 내려와서는 너럭바위에 앉아 앞발을 치켜 올린다. 다시 주변을 돌던 놈은 사람의 꽁무니를 졸졸 따른다. 앞을 가로 지르다가는 돌아서고 또 막아서기를 반복한다. 어느 산객이 땅콩을 손바닥에 놓고 자세를 한껏 낮춰 앉는다. 때를 기다렸던 다람쥐가 냉큼 받아먹고 쏜살같이 수풀로 사라진다. 때마침 대청봉에서 설악산 현장 점검을 마치고 내려오던 국립공원 직원이 한 마디 한다.
"다람쥐 먹이주지 마세요. 결코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거든요."
"왜요, 요즘 먹이도 많지 않을텐데 ...“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잘한일 아니냐는 반문이다.
"야생성이 없어지고 생태계가 교란이 되지요."
산객은 땅콩봉지를 둘둘 말아 배낭에 찔러 넣는다.
천불동계곡을 지나는데 양폭에서부터 따라 나서던 밀잠자리 떼가 돌아설 줄을 모르고 배웅을 한다. 잠자리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는 것은 저녁 해가 그리 길지 않다는 신호다. 비선대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때까치 한 마리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설악소공원의 분홍색 지붕이 보인다. 그제서야 종아리와 발목이 아파온다.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방대한 면적을 품고있는 설악산은 설악동의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를 비롯해 점봉산분소, 장수대분소, 오색분소, 백담분소, 대청분소에서등산객들의 산행을 돕고 있다. 설악 공룡능선은 체력과 끈기가 있어야 종주할 수 있는 험한 코스다. 새벽같이 들머리를 잡아도 열 시간은 족히 걸린다. 일단 산행을 시작하면 날머리까지 마땅한 탈출로가 없는 코스가 설악공룡이다. 지형의 특성상 높낮이가 있겠으나 설악산에서 공룡능선만큼 힘든 코스도 드물다하겠다. 열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여름에게 길을 물어 본다 / 7월
각흘산 ^^ 경기 포천, 강원 철원
김가네농장 – 각흘북능 – 시루떡바위 – 석 이바위 - 각흘산정상 – 삼거리 – 765봉 – 각흘봉 – 각흘계곡 - 와폭 – 한국성서학교 수양관
길이 다 문드러졌다. 당연히 있어야할 등산로 들머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포장도로 한쪽이 모두 파헤쳐져 방치되고 있었다. 새로운 길을 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땅 분쟁으로 인한 감정싸움인지, 하여튼 정상적인 공사는 아닌 듯싶다. 등산로 초입이라고 쓰인 안내판도 없으니 모두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는다. 규모가 꽤 커 보이는 농장 같은데 굳게 문이 잠겨 사냥개만이 컹컹거리고 있었다. 인적이 없다.
하늘과 땅이 맨 처음 생기던 날에 길은 없었다. 태초로부터 길은 나지 않았다. 그 누군가가 없었던 길을 내면 그 길을 다른 이가 따라가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곧 지름길이 되었다. 길은 언제나 쓰임새에 따라 넓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한다.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은 조붓한 오솔길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던 성황당 넘는 고갯마루가 있었다.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일수록 발바닥은 더 아프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릴 적 걷던 황토 길은 학교 가는 길이었는데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아침이슬로 머리감은 햇살이 초롱초롱 마당 한가득 채워지면 살구나무 그늘을 따라 시오리로 제법 멀었다. 학교길이다. 물감으로 색칠하면 수채화로 그려지는 동화 같은 길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나 있다. 물이 흐르는 물길이 있고 새들이 나는 하늘길이 있다. 고래도 저만의 바닷길이 있으며 능선으로 불어오는 바람 도 길을 찾아 분다. 길이 없으면 자연이나 사람이나 꽉 갇히는 존재가 되고 만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면 개울을 끼고 붉디붉은 나리꽃이 물빛까지 빨갛게 적시는 강물도 건넌다. 버드나무 한 가지 꺾어 호드기를 불어보는데 발을 헛디뎌 징검다리에 빠지면 송사리 떼가 몰려와 새끼발가락을 간지럽히던 꽃길도 있었다. 아랫말에 사는 소녀와 말없이 걷던 밤은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밤이 이슥하도록 온 동네 소문내며 날아다니는 풀벌레가 미웠다.
들머리 초입을 찾기 위해 선발대장이 나섰다. 풍부한 산행경험은 물론 풍수지리에도 해박한 청년이다. 대장은 인적이 드문 억새 숲과 가시덤불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얼마가지 않아 되돌아 나온다. 싱긋 웃으며 멋쩍은 얼굴이다. 또 다른 길을 살펴본다. 또 길이 끊기고 낭떠러지 절벽과 마주한다. 그렇게 한참을 허비한 끝에 길이 보였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쏟아졌던 장맛비로 개울이 넘쳐났다. 수풀이 우거진 계곡에서 몸단장을 하던 비단개구리가 인적에 놀라 첨벙첨벙 물속으로 도망을 친다. 빨간 산딸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넝쿨 사이로 물안개가 번진다.
장다리 꽃대처럼 키 큰 여성회원은 가시에 찔려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억새풀에 스친 자국이 선명한 회원도 있었다. 산악인들이 말하는 혹독한 산행아르바이트의 상흔이었다.
세 시간의 사투 끝에 멀리 각흘산 정상이 보이는 808능선까지 왔다. 비 그친 아침의 산길은 걸어본 사람만이 산뜻함을 안다. 청명한 하늘에 능선이 곱다. 용화저수지 너머의 철원평야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산각시원추리 꽃도 화려하다.
녹색의 잣나무도 계곡의 자작나무도 그늘을 만드는 작업에 여념이 없는 계절이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여름날의 산행은 짐이다. 그 짐을 지고 산을 오르니 무지하게 덥다. 군인들이 작전을 위해 만든 벙커에서 잠시 더위를 피했다. 봉우리 곳곳에 지하 벙커가 있는 것을 보면 국토의 전방까지 파고들어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각흘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흡족하다. 가까이로는 명성산이 자리하고 서울 쪽으로 국망봉과 청계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광덕산과 화학산이 겹겹으로 다가온다. 그만그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새털구름이 흘러간다.
작은 각흘봉 개울에서 등산화를 벗었다. 등산화가 뜨끈뜨끈하다. 등산화에 코를 대려다 퀴퀴한 냄새로 얼른 내려놓는다. 천천히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오싹한 냉기가 가슴까지 시려온다. 햇살 퍼지는 바위 위에 발을 올려놓고 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열 개의 발가락을 말린다.
배낭을 챙겨 하산을 하려는데 길이 막혔다. <이 곳은 개인 사유지이므로 우회하기 바람>이라는 팻말과 함께 말뚝을 박고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철책으로 감아 막아버렸다. 멋모르고 출입했다가 오십만 원을 물고 내려온 적이 있다는 문구가 적힌 팻말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실제 돈을 물고 나왔는지, 산 임자의 뜻을 담은 일종의 심리적 경고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오십만 원이 없으니 한 시간 가까이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장뇌삼 씨를 뿌려 놨다는 후문이지만 인심 한 번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지은 농사를 등산화로 짓밟아서야 쓸 일이겠는가. 햇살이 쏟아지는 함박꽃나무의 그늘아래에는 다래열매가 포동포동 살을 찌우고 있었다. 각흘산의 어치와 청설모는 간식 걱정은 덜 것 같다.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각흘산은 능선을 따라 걷는 트레일 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산이다. 다만 산에 나무가 없어 삼복더위는 피하는 것이 좋다. 빈 벙커에서 햇살을 피할 수는 있다. 산행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는 것이 흠이라 하겠다.
숨은벽은 어디에 숨었을까 / 12월
북한산 백운대 ^^ 서울, 경기 고양
밤골 - 샘터 – 해골바위 - 백운대 – 만경 대 - 용암문 – 북한산대피소 – 대동문 – 봉성암 – 중흥사지 - 중성문 – 의상봉 – 대서문 - 산성탐방지원쎈터
밤골 언덕을 지나면 지붕 낮은 국사당이 보인다. 마지막 공연을 끝낸 서커스단이 철수를 기다리는 가설무대처럼 을씨년스럽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북한산 백운대의 숨은벽 능선은 아직 아침햇살이 닿지 않았다.
깔딱고개 턱밑 약수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시원한 샘물을 마셨다. 사계절 마르지 않는 약수로 유명하다. 눈 쌓인 계단을 넘어서자 인수봉의 날렵한 암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보름 전에 내린 첫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찍 서둘러 산행에 나섰지만 북한산 숨은벽의 등산로는 벌써부터 산객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어깨선이 매끄러운 인수봉을 바라보며 계단을 오른다. 쇠줄을 잡고 이동하지만 아래를 보면 아찔하다. 돌아서고 비켜서고 한참을 양보한 끝에 백운대 정상이다. 어김없이 태극기가 휘날린다. 수도권의 산 정상에는 이날도 어김없이 태극기가 나부끼도록 깃발을 올렸다. 늘 봐오던 터다. 피부가 미끈한 인수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국망봉과 노적봉이 발아래 있다. 도봉산과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이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백운대 정상은 5일 마다 돌아오는 시골의 장터보다 더 혼잡하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징표 하나 남기기 위해서다. 이른바 명산일수록 유명한 만큼 텃세를 부린다. 좀 기다리다 사진 한 장 남길까 싶지만 돌아섰다. 요즘 산을 찾는 사람들은 예전처럼 무거운 사진기를 목에 걸고 등산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휴대가 간편한 스마트폰을 선호하는데 기능도 다양하다. 대화를 주고받는 성능을 벗어나 이제는 기록과 음성을 저장하고 움직이는 영상까지도 찍어내는 세상이다.
셀프카메라는 이제 산객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소지품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팔을 쭉 뻗어 자신의 얼굴을 담아내는 셀카봉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폭포의 물줄기에 얼굴이 떠 있고 기암괴석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영상만 없다면 말이다. 셀프카메라 역시 기술이 필요하다.
백운대를 내려오면 북쪽으로 연결되는 원효능선과 의상능선이 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 줄기의 깊은 골을 따라 능선을 잇고 계곡을 건너 봉우리를 연결하는 긴 성곽이다. 성곽의 안쪽을 따라 걷는 오솔길도 있지만 가파른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어 지정된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만경대를 거쳐 용암문을 지나 동장대 망루에 섰다.
서울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동문에 이르러서는 마치 그 옛날 저잣거리처럼 왁자지껄이다. 널따란 안부가 있어 단체 탐방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칼바위능선 삼거리에서 중흥사지 방향으로 내려오는 산책로 역시 응달이라 눈길이 미끄러웠다.
백운대를 조망하는 의상봉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서울의 사물은 한낱 점이다. 점과 점이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늘 아옹다옹 사는 게 세상살이가 아니던가.
서울이 타관이면서 서울사람이 다 돼버린 친구는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어쩌다 고향으로 떠나는 막차라도 놓치면 건넌방 하나쯤은 선뜻 내줄 수 있는 친구임에 틀림없는데 서로 만나는 시간을 미루며 살고 있다. 치아가 성하지 않은지가 서너 해를 넘기고도 여태 앞니 빠진 채 호탕하게 웃고 있으니 치과 문턱을 드나드는 것도 여의치 않은 바쁜 몸인가 보다. 어제도 북한산 백운대에 동행하자고 전화를 넣었지만 너무 바쁘니 하산해서 소주라도 마시자며 그냥 내려가면 재미없다고 협박까지 한다.
삼국시대 때부터 부르기 시작한 북한산은 한강의 북쪽에 솟아오른 산이라고 해서 편하게 북한산이라고 불러왔다. 삼각산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는 고려가 도성을 개성으로 옮겼을 당시 개성의 송악산에서 남쪽을 보면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의 세 봉우리가 또렷이 보인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지금의 북한산을 북한산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삼각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세 봉우리를 아우르는 백운대, 인수봉, 망경대만을 지칭하여 삼각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지금의 북한산을 삼각산이라 부른 역사적 인물이 있으니 그가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지낸 김상헌이다. ‘삼각산’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병자호란 때 김상헌은 청나라로 붙잡혀 가면서 지금의 북한산을 바라보며 시조 한 수를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어찌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사실 서울의 사대문 안에서는 이 세 봉우리가 또렷하게 볼 수가 없다. 세 봉우리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벽제인데 조선시대의 지명은 고양군이었다. 이곳에서는 백운대와 인수봉, 망경대의 세 봉우리가 명확히 보인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삼각산을 올려다 본 장소는 다름 아닌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가 분명하다하겠다. 여기서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세 개의 봉우리를 두고 읊은 것이요, 한강수는 한강을 뜻하는데 고양시에서도 한강은 잘 보인다. 북한산이냐, 삼각산이냐. 이 두 개의 지명을 놓고 인기투표를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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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불수사도북’이라 일컫는 수도권의 산은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으로서 산을 좀 탄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한번쯤 도전해보는 종주코스다. 산행의 길이는 43킬로미터로서 마라톤 정규코스보다도 길다. 무박2일 일정으로 20시간은 족히 걸린다.
대한민국에 있는 산을 왜 영남일프스라 부를까 / 9월
신불산과 간월산 ^^ 경남 울산, 경북 경주, 경남 밀양
등억온천단지 스카이모텔 - 편백나무숲 – 바위쉼터 - 839봉 - 공룡능선 - 신불산 - 간월재 - 임도 – 홍류폭포 - 간월산장
사람들은 왜 영남지방에 있는 산을 가리켜 영남알프스라 부를까.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 마다 알프스산맥을 떠올리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몽블랑을 동경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유럽의 중부에 불쑥 솟아오른 알프스산맥,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시작해서 스위스, 이탈리아, 리히텐슈타인, 독일을 거쳐 프랑스까지 일곱 개 나라에 걸쳐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그런데 이 알프스를 우리만 동경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일본에도 미나미알프스가 있고 뉴질랜드에도 서던알프스가 있다. 두 곳 모두 사시사철 만년설이 덮이고 광활한 면적을 거느리고 있으며 지역주민에 의해서 불러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남알프스 역시 울산지역의 산악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영남알프스는 1,240미터에 이르는 가지산을 비롯해 간월산과 신불산, 영축산, 천황산, 재약산, 고헌산, 운문산, 문복산 등의 1,000미터가 넘는 광활한 면적의 덩치 큰 산을 아우른다. 경상남도 밀양과 양산,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 청도에 걸쳐있는 아홉 봉우리의 큰 산이다. 이 아홉 개의 산을 모두 등정하려면 3박 4일은 족히 걸린다. 최근 들어 이 영남알프스를 종주하는 산객들은 해마다 늘고 있다.
오늘의 산행은 신불산과 간월산이다. 신불산과 간월산에서의 구시월에 억새의 만남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숙박시설이 운집한 후미진 곳을 들머리로 정했으니 첫 인상치고는 엉성하다 싶다. 그러나 도심의 건물이 멀어지면서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설렘으로의 반전이다. 배낭을 풀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응시하고는 편백나무에 몸을 기댄다. 팔을 벌리고 가슴을 늘려 폐 속 깊이 편백향을 들이마신다. 상큼한 피톤치드 향이다.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너덜길이 이어진다. 굴참나무 몇 그루와 잡목이 서성이고 또 너덜지대는 계속된다. 한참을 오르다보면 심한 암벽능선을 만난다. 신불공룡의 초입으로 등고선이 촘촘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월산 구릉지를 내려서면 작괘천이 흐르고 마을 언저리에 간월사지가 펼쳐지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이 있다.
하늘억새길에 들어섰다. 밋밋한 능선의 좌우로 긴 목책이 이어지고 양 옆으로 온통 은빛 물결이다. 서풍이 불어도 일렁이고 북풍에도 흔들리며 북서풍이 지나가면 더 힘차게 출렁인다. 신불공룡능선을 빠져나오면 억새평원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영축산까지는 신불산억새평원이고 오른쪽으로 간월산까지는 간월재 억새평원이다. 보호목책 사이로 쑥부쟁이가 하늘거린다. 흰색과 연분홍의 구철초도 보이고 미역취에 용담 그리고 산부추 꽃도 바람에 일렁인다.
영남알프스는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여름이면 주암계곡의 오싹한 골바람이 그만이며 가을이면 구릉지와 계곡으로 억새의 파노라마가 현란하다. 눈꽃이 만발하고 상고대가 열리는 겨울이 있으니 그렇게 4계절 산객을 불러들이는 산이 영남알프스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억새평원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이다. 간월재의 허리춤에는 돌탑이 있고 언저리에는 타원형의 무대가 있다. 김창완 밴드의 억새축제공연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간월재에서의 저녁노을이 장관이라는데 비박장비를 갖추지 않았으니 이제 하산이다.
구불구불 임도의 포장길로 산악자전거 행렬이 보이고 어깨가 처진 듯, 뜨문뜨문 뒤를 따르는 탐방객은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 잡목이 무성한 구릉지로 내려오는데 낭떠러지 절벽에는 하산을 돕는 밧줄이 걸려있다. 장단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늘 하산이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홍류폭포에 내려서는데 현수막에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 나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간월재 케이블카 설치를 두고 지방정부는 곤 도라를 매달겠다고 안달이고 환경단체는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반대 논리를 펴고 있다. 개발의 논리와 보전의 당위성으로 영남알프스의 케이블카는 아직 진행형이다. 언양불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판단일랑 유보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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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는 1,000미터 이상의 가지산(1,240미터), 운문산(1,880미터), 재약산(1,189미터), 신불산(1,208미터), 영축산(1,059미터), 고현산(1,032미터), 간월산(1,083미터), 문복산(1,014미터), 천황산(1,189미터)의 산군을 일컫는데 최근에는 이 아홉 개의 산을 모두 종주하는 산악인들이 늘고 있다. 웬만한 체력이 아니면 종주는 어렵다.
수덕사 덕숭산 가는 길 / 4월
덕숭산 ^^ 충남 예산
수덕고개 – 전월사 – 덕숭산 – 정혜사 –향 운각 - 사면불상 – 수덕사
출발하기 직전에 헐레벌떡 달려온 친구가 있다. 하는 일들이 서로 다르다 보니 자주 있는 일이다.
"그게 말이야, 난 오늘이 낚시 가는 날인가 착각을 했네 미안허이."
산이 아니면 낚시고 손맛이 신통치 않으면 늘 산을 찾는 친구다. 산에 가면 산꾼이요, 낚시터에서는 낚시광이다.
"오늘 가기만 하면 월척인데 놓쳤구먼."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편적으로 낚시하는 사람들은 허풍이 좀 있는 편이다. 놓친 고기는 매양 월척이고 잡은 고기는 늘 누구에게 쏟아 주고 왔다고 말한다. 보지 않아서 알 턱이 없다. 오늘은 가까운 수덕사니까 미안해 할 거 없다고 슬쩍 편을 들어주면 모두 기분 좋은 출발이다.
덕숭산은 모르면서 수덕사는 잘 안다. 수려한 암봉도 아니고 조망이 뛰어난 산도 아니다. 그런데도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산이니 온전히 수덕사의 명성으로 대접받는 산이다. 덕숭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수덕사 경내로 진입해서 대웅전을 끼고 왼쪽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주차장에서 보이는 논두렁을 지나 외딴집 하나와 채마밭이 있는 언덕으로 진입하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먼저 가는 길은 문화재관람료를 내는 것이고 언덕으로 가는 길은 입장료 없이 올라가는 길이다.
소나무와 노간주나무가 보이는 언덕은 흔히 보는 야산이다. 힘겨운 암벽이나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거수가 기다리는 벼랑의 기암절벽도 만날 수 없다. 그렇다고 산행거리가 긴 것도 아니다. 시적시적 청산도 슬로걷기의 느린 걸음으로도 두 시간 반이면 족한 산이다. 여느 산처럼 때가 되면 생강나무에서 먼저 꽃이 피고 진달래가 덩달아 피는 어릴 적 고향의 뒷산과 다름없는 산이다. 100대 명산으로서의 체면치레를 하듯 양지꽃이 보이고 보라색 제비꽃이 고개를 쳐든다. 집채만 한 바위 아래로 청노루귀가 숨어있다. 검단산에서 봤던 봄꽃인데 반가웠다.
정상에서의 조망이라는 것이 산행에서의 감동하고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서둘러 하산이다. 석문을 빠지면 정혜사로 들어가는 나무대문이 있는데 굳게 잠겨있다. 토끼발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지만 허우대 좋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몇 그루 보일뿐, 경내가 조용하다. 꺾어지고 돌아서는 암자로 가는길은 막돌을 정으로 쫘서 놓은 계단이다. 관세움보살 입상을 지나 소림초당에 이르기까지 반듯한 108개의 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길도 수행의 길일 것이다.
토담이 끝나면 느티나무 고목을 만나고 다시 오르막 돌계단이다. 암자로 가는 굽어진 길이 이처럼 멋들어진 길일까 싶다. 이 돌계단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실망이 컸으랴.
덕숭산 수덕사는 김일엽 스님과의 인연이 각별한 사찰이다.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정혜사로 가는 언덕으로 아주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김일엽이 어렵사리 삭발을 하고 수도한 곳이 바로 견성암이었다. 그는 여승이 되기 직전까지 수덕사 일주문 앞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데 바로 수덕여관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수덕사에서 참선하고는 돌아가는 길에 꼭 수덕여관을 둘러본다.
일찍이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운 김일엽은 일본 유학시절 화가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한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서울 선학원 등에서 참선하였으며 1933년 출가하여 수도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김일엽이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입적하니 1971년 2월 1일로 그의 나이 일흔일곱 살이었다. 스님이자 여성운동가였고 시인이자 수필가였으며 교육자였고 언론인이었다. 일엽도 정혜사로 향하는 108계단을 자주 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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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석가모니 삼불상을 모셔놓은 대웅전(국보 제49호)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물이므로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여름날이면 일주문 언저리로 보랏빛 맥문동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옥구슬처럼 곱게 피어 손을 흔든다. 일주문을 나서는 길에 수덕여관도 들러보라. 여류화가 나혜석과 이응로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남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 / 4월
설흘산 ^^ 경남 남해
선구마을 팽나무언덕 - 칼날능선 – 응봉산 – 설흘산 - 가천다랭이마을
남해 다랭이마을이 전국적으로 얼굴이 팔린 것은 채 20년이 못 된다. 응봉산은 모르면서 다랭이마을은 잘 알고 설흘산이 다랭이마을의 앞에 있는 산이라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한다. 오늘은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응봉산과 설흘산을 오른다. 삼천포대교와 남해대교를 건너자 어슴푸레 설흘산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선구마을의 팽나무언덕이 산행 들머리다. 삼백오십 년 묶은 팽나무 밑동에는 금줄이 둘러져있으니 아마도 지난 정월보름에 누군가가 치성을 드린 모양이다. 갈매기 몇 마리 기운찬 날갯짓과 함께 남해바다에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마늘밭이 끝나는 숲속으로 산악회의 리본이 묶여있다. 산행의 들머리는 산악회의 리본이 먼저 시작한다. 남해와 사천을 연결하는 연육교가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설흘산과 응봉산은 섬 어딘가에 솟아오른 그렇고 그런 산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오늘도 뭍에 사는 사람들은 응봉산과 설흘산을 오르기 위해 선구마을의 팽나무 언덕을 찾는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가천 다랭이마을은 더 궁금해 한다.
철쭉이 곱게 핀 솔밭을 지나 칼날능선으로 접어들었다. 삐죽삐죽 솟아오른 바위가 이구아나의 등처럼 험상궂게 불거져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남해바다를 내려다본다. 청옥빛 바다에 점점으로 떠 있는 섬과 섬이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황홀한 비경에 정신이 몽롱하다.
칼날같이 솟아오른 바위에서 암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섬찟한 경고문구가 보인다. <사진촬영을 하면서 뒷걸음질 치지 마시오.> 남해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안내 팻말이다. 경고 문구를 먼저 읽은 일행은 저만치 선두에서 차라리 배를 깔고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여수공단에서 화물을 실은 화물선이 긴 뱃고동 소리를 내며 앵강만을 빠져나간다. 태평양을 건너 오대양 육대주로 나갈 수출품들이다. 소나무 한 그루 외롭게 서 있는 너럭바위에 앉았다. 햇송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어릴 적 할아버지 제삿날에는 제수로 찹쌀다식과 검은깨다식 그리고 송화다식이 제수로 올라왔었다. 그런데 이 흑임자가루로 만든 검정깨다식은 맛이 있었지만 이 송화다식에는 손이 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나이 들어 맡아 보는 송화냄새는 그윽하고 화한 향이다.
이쯤에서 힐끔 뒤를 돌아본다. 아까의 섬은 보이지 않고 해솔 몇 그루 서 있는 작은 섬이 나타난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보이고 금산도 가깝다. 내가 산길을 걸으면 바다가 따라 나서고 또 내가 앞서가면 수십 개의 섬들도 그림자처럼 곁에서 동행을 한다. 조망바위를 거쳐 응봉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울퉁불퉁 앙칼진 암릉의 연속이다. 설흘산 정상이다. 깊숙하게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펼쳐지고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가 보이는데 금산도 가깝다.
멀리 한려수도가 펼쳐지면서 여수 시가지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고 욕지도가 그림같이 다가온다. 햇살 너그러운 봄날이고 바람도 잔잔한 설흘산이다.
봄꽃이 반기는 다랭이마을 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산길이다. 진달래꽃은 흔적도 없고 이제 산철쭉 꽃이 설흘산 능선을 풀어 놓는다. 이끼 낀 바위 틈새로 제비꽃이 피어나고 햇살이 넉넉한 언덕으로 양지꽃도 자잘하다. 병아리 솜털피부의 할미꽃이 허리를 숙인 채 얌전한 자세로 피었다. 이파리가 성근 봄보리수나무도 여름이 깊어지면 골고루 흰점이 박힌 분홍색 보리수 열매로 매달릴 것이다. 연두색 등산복의 산객이 지나간 자리에 진한 더덕향이 남아있다. 이 바위산에도 더덕이 있구나 싶어 한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봉수대를 돌아서는 마지막 하산 길에 귀한 천남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넓은 떡잎 사이로 얼핏 보면 개불알꽃처럼 생겼다. 지금 설흘산은 먼저 차지한 봄기운으로 오만가지 꽃들이 피고 또 피어난다. 괴불주머니가 피어나고 붓꽃이 보이고 금낭화도 봄 햇살이 간지럽다.
조팝나무꽃이 환하게 피어났다. 조팝나무의 자잘한 꽃이 설흘산과 다랭이마을의 경계를 허문다. 멀리서도 이 냄새를 맡으면 콧구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60년대 단골 다방의 마담 목덜미에서 맡아 보던 냄새도 조팝나무 냄새였다. 처음엔 역겨운 듯 하지만 맡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한 냄새였다. 그 다방 마담이 설흘산을 다녀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조팝나무 향이 코를 찌른다.
꼭대기 능선으로부터 시작되는 다랭이 논은 계단을 따라 곡선을 이루며 갯바위 끄트머리까지 이어진다. 사실 남해라는 섬은 몇 척의 고깃배가 드나드는 작은 포구였었다. 넓지도 않은 비탈진 땅이기에 곡식이 귀한 시절이 있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비탈진 산에 돌을 쌓고 손바닥만 한 땅을 층층으로 일궈 땅을 개간하였다. 외진 섬에서 귀한 쌀밥이라도 먹어 보자는 작은 기대 때문임은 물론이다.
산 중턱부터 시작되는 계단식 논은 바다가 보이는 턱밑까지 108층이나 된다. 다랭이 논의 모퉁이로 나이 지긋한 농부는 누런 암소를 앞세우고 한나절이 되도록 논을 갈고 있다. 그리고 남해마늘이 통통하게 살을 찌우는 밭은 서너 배미 건너의 더 작은 다랭이 밭이었다. 사나흘 후, 마늘 농사가 끝나면 이 밭에도 다시 봄물이 흘러 들고, 논농사를 위한 볍씨가 뿌려질 것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의 이모작인 것이다.
꺾어지다 휘어진 돌담길을 내려서면 암수바위가 마지막 집의 마당을 지키고 있는 어부의 집이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마당에 큼직한 두 개의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바다에서 날아왔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마치 포탄처럼 박혀있다. 포구 쪽으로 슬쩍 몸을 기댄 것은 필시 파도소리를 듣기 위함이리라.
이름 없는 갯바위에서 가천 다랭이마을을 올려다본다. 바닷가를 휘감는 모퉁이로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고 좁다란 언덕길이 갈래갈래 뻗어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한갓진 마을에서 파도소리를 듣는다. 타관을 정리하고 다시 찾아온 고향 같은 느낌이다.
남해대교가 놓이면서 이 작은 섬마을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심하다. 다랭이마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림 같은 영화가 무수히 만들어지고 봄이면 가장 가보고 싶은 섬으로 소개되고 있다. 계절과 절기를 따지지 않고 뭍사람들의 발길이 봇물을 이루는 섬 아닌 섬이 되고 있다.
고요하던 마을에 펜션이라는 요상한 간판이 세워지고 햇살 먼저 드는 언덕이면 어김없이 모텔이 자리를 잡는다. 좁은 길 양쪽으로 자동차가 즐비하고 동동주를 파는 가게는 하루 종일 시끄럽다. 잠자리안경을 걸친 육지의 색시가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은 이제 이상하지도 않고 이상스러울 수도 없다.
한쪽에서는 황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데 다른 쪽 언덕에서는 비탈길을 깎아 내리는 중장비가 흙먼지를 일으킨다. 선구몽해변을 터벅터벅 걷는데 땀이 다 식었다. 아직은 바닷바람이 차다. 멀리 대나무 말뚝을 엮어 세운 원시어업방식의 멸치잡이인 죽방렴이 보인다. 시장기가 몰려온다. 오늘은 싱싱한 멸치 회를 곁들인 죽방렴 멸치쌈밥을 먹어야겠다. 죽방렴 너머로 물 드는 해넘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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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말목을 갯벌에 박고 그 사이사이를 대나무로 엮어 조류가 흘러올 때 고기를 잡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이다. 남해의 바닷가를 지나다보면 바다 곳곳에 기다란 말뚝이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죽방렴멸치잡이다. 꼭 멸치회무침과 멸치정식을 맛보시라. 처음엔 비릿하지만 밥을 두 그릇 비우고 나면 그제야 멸치쌈밥이 밥도둑임을 알아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죽방렴 사이로 넘어가는 저녁노을도 감상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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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봄여름가을에 가도 걷기좋은 길일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