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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주)
Q.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있습니까?
A. “순종과 죽음” 혹은 “순종과 만족”이 있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전가 교리”에 대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리(doctrine)”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Confession)도 교리(doctrine)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저술을 작성할 때에 제목을 교리(doctrine)이란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20세기 칼 바르트는 교의학(dogmatik/dogmatic)을 사용했고, 루이스 벌콥 박사는 조직신학(System theology)이라고 사용했습니다. 공적(公的)으로 인정된 신앙고백서, 표준문서(Standard Text)와 개인이 제안한 문서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는 전혀 다른 영역의 논의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있는 신학 저술의 제목을 A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칭의 교리” 혹은 “칭의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칭의 교리”는 공적 확정이 아닌 개인의 제언적 신학 진술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개혁파 신앙고백서 안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어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립파 사역자들이 작성한 “사보이 선언(1658년)”과 침례파 사역자들이 작성한 “2차 런던신앙고백서(1689년)”에는 어휘가 있습니다. “잉글랜드 독립파와 침례파”를 개혁파라고 한다면 개혁파 신앙고백서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조지 휫필드로 인해서 형성된 칼빈주의-메소디스트들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인정하지만 독자적인 표준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준 지역이 조지 휫필드 계열 신학자(로이드 존즈), 침례교 설교자(찰스 스펄전, 디엘 무디), 영국 국교회(저교회) 사제(존 스토트), 식민지 뉴잉글랜드 회중파 신학자(조나단 에드워즈)일 것입니다. 그들을 개혁파 신학자로 인정할지 명확한 분류가 필요합니다. 저는 개혁파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어휘가 없다고 밝힙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페스코(J. V. Fesko)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Westminster Divine)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해서 다수가 확실하게 견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페스코가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2014년)의 저작을 신윤수가 번역한 것을 부흥과개혁사에서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로 출판했습니다(2018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은 Chad Van Dixhoorn의 The Minutes and Papers of the Westminster Assembly, 1643-1653(5 Volume), (1st edition, 2012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643년 9월 6일에 열린 제47차 회의로부터 12월 12일에 열린 제52차 회의에 이르기까지 칭의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적인 순종”이 표기되었고, “능동적 순종”은 표기되지 않았습니다.
페스코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The Imputation of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IAOC)”를 믿은 부류와 믿지 않은 다른 부류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칭의 이해 토론에서는, 대륙에서 진행된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의 견해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피스카토르는 양쪽에서 모두 경계한 인물이었고, “피스카토르적”이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피스카토르의 사상에 대해서 이해하는 학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획득 전가”에 대해서 부정했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습니다.
페스코는 딕훈의 회의록을 통해서 능동적 순종 전가에 대한 발언 횟수는 총 106회이고, 조슈아 호일(25회), 조지 워커(24회), 하버트 파머(18회), 토머스 굿윈(17회), 래처러스 시먼(16회), 윌리엄 가우지(13회), 기타 13명(63회)라고 밝혔습니다. 반대 발표자와 횟수보다 찬성 발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칭의 관련한 발언이 총 275회인데, IAOC 지지자는 16명에 176회 발언했고, IAOC 반대자는 8명에 71회 발언했습니다.
페스코는 단순한 통계 자료를 근거해서 당시 총회에 IAOC가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발언자와 발언횟수가 많기 때문에 당시의 평균적인 이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참가 회원(잉글랜드 신학자)은 151명(신학자 121명, 상원, 하원 각 10명)입니다. 그 중에 IAOC 찬성 발언자는 16명(176회)이고, 반대 발언자는 8명(71회)입니다.
페스코는 다수의 찬성 발언자와 발언 횟수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가 확실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회의록에 나타난 내용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토의 과정에 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문에 결정이 있습니다. 좀 더 논리적인 역사 학자라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많은 발언자와 발언횟수에도 불구하고 표준문서에 표기되지 않은 이유를 탐구해서 발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페스코는 회의 과정의 많은 횟수와 발언자의 사례로 총회 문서의 성격을 규정한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찬성자와 발언 횟수는 딕훈이 편집한 회의록에 근거하면 찬성자와 찬성 발언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어휘가 아닌 “순종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페스코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의견이 표준문서에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수 발언자와 발언 횟수에도 표준문서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굴복시키지 못할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아야 더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사역자들에게 있는 신학자의 사고 체계가 “라미즘(Ramism)”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총회 신학자들이 합리적인 신학 체계보다 성경적 신앙 고백 내용을 도출했고, 그 문서에 합의했다고 평가합니다. 당시 라미즘의 이분법(dichotomy)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三段論法, Syllogism) 체계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대학에 유행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총회 참가자에서 다수였는지는 확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의록에서 찬성과 반대 발언자에서 IAOC 찬성 발언자 숫자와 횟수가 많습니다. 다수의 찬성자와 발언 횟수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문구는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출처] Q.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있습니까?|작성자 고경태
첫댓글 😊
와 이걸 이해하고 방긋 웃으시네요 ㅋㅋ대부분은 골치아파 관심없어하시는데 ㅋㅋ
@주의검을보내사 하나님이 붙여 주신 쪽집게 과외 쌤이 있어서요 발바닥근막염으로 짧게 근무하고, 쉴수있는 환경과 고구마다 의 레이스 원피스를 매달 여러벌 입혀주시고, 부채살 특수 부위로 고기 안먹으면 허기지는 체질까지 세세히 보살펴 주시는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현실에서도 시간이 사라지는 세계에서도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 이십니다
@그래도 한쌤이 진정 챔피언이십니다ㅋㅋ
@주의검을보내사 과외쌤 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라미즘Ramism이란?
16세기 개혁주의 프랑스 철학자인 페트루스 라무스(1515~1572)에 의해 발전된 라미즘(Ramism)은, 당대에 삶과 사상 및 지식과 실천 그리고 종교적 삶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학과 윤리학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breach)으로 특징지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기교적 궤변법을 교정하려고 했다.
고경태 목사님 예리한 지적을 주셨습니다. 역시 👍👍
-회의는 토의 과정에 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문에 결정이 있습니다. 좀 더 논리적인 역사 학자라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대한 많은 발언자와 발언횟수에도 불구하고 표준문서에 표기되지 않은 이유를 탐구해서 발표해야 할 것입니다-
-더 많은 의견이 표준문서에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수 발언자와 발언 횟수에도 표준문서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굴복시키지 못할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아야 더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