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魔
— 가면별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녀가 마련한 공동묘지 무대 무덤에 엎드린 사내가 있다. 그 사내를 나는 안다, 그녀를 평생 성에 가둔 사내가 아닌가. 그 두려운 눈을 지닌 사내가 저리 부드러워져 무릎을 꿇고 있다니, 그 살기 어린 그 얼굴 가면이 바뀌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그녀 무덤에 스산한 바람이 분다.
그녀는 평생 제 무덤을 껴안고 살며 무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무덤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은 무덤밖에 없기에 사내들이 무덤 앞에서 살해당한들 무덤만 무사하다면 그 시체를 묻어 줄 수 있다. 그녀는 무덤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기에 무덤 말고는 평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녀는 성에 가둔 사내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의 무덤이 성안에 있기에 성을 떠나지 못한다고 시인이 말했다. 나도 그녀의 무덤을 알기에 그녀가 떠나지 못할 것을 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멀리서 본 적이 있기에 그가 그녀를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녀를 성안에 가둔 그가 이제 성에 갇힌 것이다, 누구나 가두다 갇힌다. 상중의 여인에게
전화가 자꾸 걸려오네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녀가 공동묘지 무대를 보며 말했다, 그의 가면을 벗기지 말라고. 그의 가면은 그의 얼굴이라고. 이미 얼굴이 되어버린 가면은 벗길 수 없는 거라고. 이미 얼굴인 가면은 가면이 아니라고. 가면을 벗는 걸 도와주지 말라고. 그가 벗기 전에 가면은 가면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그의 가면을 벗겨 사랑은 깨진 거라고.
그녀가 마련한 공동묘지 무대 무덤에 엎드린 사내를 나는 안다, 그는 오래전 그녀를 성에 가둔 사내가 아닌가. 모든 풍화작용 얼굴마저 바뀌게 하는가. 그 사내는 얼굴이 바뀌어 나타났다. 모든 연적은 닮는가, 그 얼굴 가면까지도! 그의 연적이 죽고 그가 살아 그녀 얼굴에서 연적의 얼굴을 보고 피를 토하며 산 지 삼십 년.
그녀는 그 사내의 가면을 벗기지 않고 기다렸다, 가면을 벗기면 사랑이 깨질 것이기에. 그의 천도제를 지내며 무당의 입을 빌려 목소리 듣고, 성을 탈출해 그에게 가고 싶었지. “잘 있으니 걱정마, 걱정마!” 그녀를 위로하던 목소리. 그녀를 애무하던 무덤의 목소리. 그녀 목숨은 성의 절벽만큼 위험하다고 시인은 말했다, 죽은 자도 산 자도 가면을 벗기면 위험하다! 무덤에 엎드린 사내가 성에 가둔 사내가 되고 성에 가둔 사내가 무덤에 엎드린 사내가 되고 이미 모든 가면은 얼굴에 배인 무덤.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녀 무덤에 또 스산한 바람이 분다. 그 사내가 그녀 무덤을 둘러보다 몸서리친다. 그는 그녀에게서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았으나 무덤밖에 보이는 게 없다고. 그녀 무덤을 만든 건 그녀가 아니라 성에 가둔 그 자신인지 모른다고. 성에 가둔 그를 그녀는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그녀 증오의 세월 무덤이 되고 그녀 무덤 껴안지 않으면 오히려 죽는 것이기에 여태 죽은 자를 껴안고 상복 입고 살았다고.
그 사내는 그녀 무덤을 애무하며 산다, 그 사내를 아는 사람들은 또다시 말했다. “그녀 무덤을 그가 끌어안고 산다!” “그녀 미이라를 그가 안고 산다!” 그녀를 성에 가두고 무덤에 가둔 사내는 자신이 무덤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이 도시는 그녀 무덤을 위해 마련한 공동묘지. 그녀 무덤이 가장 사랑한 것은 모든 비석을 황금의 비로 젖게 하는 황혼.
그 사내를 언젠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쉬지 않고 걸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무덤 주위를 돌아도 도심 공원묘지의 그를 찾을 수 없는가, 그리고 나는 또 생각했다. 그는 죽은 자이기에 나를 보더라도 이제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그녀 무덤에 그가 나타나다니, 무엇이 그 얼굴을 바뀌게 했는가. 그 가면이 누구인가.
사랑은 돌고 도는 게 아닌가, 모든 남자가 한 남자인지 모른다. 모든 여자가 한 여자인지 모른다. 그는 죽기 전 이 공원묘지에 왔다, 하얀 목련 핀 봄밤에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며 묘지를 서성거렸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나는 들은 적 있다. 모든 사랑은 꽃 같아서 져버리면 꽃 진 자리를 모른다, 그 꽃 진 자리는 환한 그늘을 더듬어 다시 꽃 피운다! 여자대학 옆 공원묘지 밤새 그녀를 기다리던 청년.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의 얼굴은 촛불 뒤에서 흔들리고 있네. 그의 얼굴은 향불 연기 뒤에서 흔들리고 있네. 그녀가 병풍 뒤에서 잠을 잘 때 그도 무덤에 엎드려 자고, 그 무덤에 엎드린 사내는 성에 가둔 사내가 보이지 않을 때만 보이네. 그녀 방의 공동묘지, 그녀 공동묘지 방의 병풍 뒤가 그녀의 잠자리. 그녀가 죽은 자의 자리에 누워, 병풍 뒤의 잠은 죽음의 잠 왜 이리 아늑한가. 병풍 뒤가 아늑한 것은 병풍 앞은 삶이요 병풍 뒤는 죽음이라는 것, 오래 전 병풍 뒤의 죽음을 치운 뒤 그녀가 대신 누워본 습관은 죽음의 염습.
내 병풍 뒤가 아니면 당신을 만날 수 없다. 내가 병풍 뒤에 숨어 당신을 만나러 간다. 당신은 내게 죽음의 환희 병풍 뒤에서만 만날 수 있다— 아 병풍 뒤 굿당 가는 길 이른 새벽 발목이 이슬에 젖는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모두 산길이라 살아서 죽어서 우리 산길을 간다. 촛불은 흔들리고 오색 깃발 색동저고리 흰 고무신 사탕도 과자도 알록달록 산속에 소풍 왔는가, 당신 수술 자국 아물 겨를 없이 떠난 산길.
그녀가 병풍 뒤로 돌아와 도둑잠이 드네. 병풍 뒤의 잠은 아늑하여 병풍은 그녀의 가면 병풍은 죽음을 가린다, 아무리 죽음을 겹쳐도 죽지 않는 삶 어김없이 새벽이면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와 쌀을 씻고 밥을 안치네. 그녀는 삼십 년을 상복 입고 무덤을 찾고 맛있는 죽음의 요리를 했네.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녀의 가면은 이야기인지 모른다, 제가 제 자신에게 하는 고백도 무덤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모두 무덤의 광녀 이야기인지 모른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 성에 가둔 사내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그 무덤에 엎드린 사내의 가면도 벗겨진다, 가면을 벗기면 무덤은 사라진다고.
이곳은 황혼의 도시이기에 그녀는 날마다 황금빛 상여를 타고 갈 궁리를 하는지 모른다. 그녀가 사는 도시의 강변에 그의 무덤이 사라져도 새로 생긴 황혼의 무덤, 그녀는 황혼이 질 때까지 강물을 퍼다 나른다. 이 도시를 휘어져 도는 강물을 끌어다가 그녀가 느리게 울며 그를 천도하는 것이다.
그 얼굴의 절벽 두 강줄기, 그 얼굴 모퉁이 돌아가면 무엇이 있나. 모퉁이 아무리 돌아가도 다다르지 못한 얼굴의 모퉁이 돌아가면 돌아가는 절벽 아무리 돌아가도 제 얼굴의 절벽에 이른 자는 없다. 제 얼굴을 본 자는 죽은 자, 산 자는 제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 화장을 하며 얼굴을 볼 거라 했다. 거울 없는 화장장, 모든 화장은 가면의 절규라! 얼굴의 절벽에 분을 바른다,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그녀의 장례는 우주의 가면 가면! 가면! 가면! 가면에는 눈이 없다, 완벽한 가면만이 눈이 있다. 그녀 죽음의 가면 시의 얼굴에 붙어버렸다. 가면은 시의 얼굴이다. 이미 우리 얼굴은 수많은 얼굴을 지녔다, 시의 얼굴에 풍이 오는지 자꾸 안면 근육이 일그러진다. 시의 얼굴에 어린 수많은 얼굴, 이 시대 얼굴은 그릴 수 있나? 너무 복잡한 인면(人面) 아닌가.
시의 얼굴은 십일면관음이지만
시인은 한 얼굴 밖에 보지 못한다
시의 십일면관음상
그녀 얼굴 이미 많은 걸 지녔다
얼굴 드리운 퀭한 눈빛
얼굴에 파인 깊은 그늘
자비상 분노상 백아상출상
보이지 않는 뒷모습
열 개 얼굴
그녀 얼굴 정수리
불면(佛面)이 사라진 흔적
자비상
그녀 이야기는 모두 병풍 뒤에서 일어난 이야기. 그 광녀가 들려준 무덤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묘비에서 시작되나 비석도 무덤도 없는 옛 이야기. 그 평평한 무덤이 ‘무구장’이다.
어느 골병든 어미와 딸이 무구장 파헤쳐 한 소쿠리 인골(人骨) 가져다가 왕겨 태워 갱엿 환을 만들어 먹었다고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분노상
그녀에게 그 광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묘지에서 들려준 이야기. 그는 고향의 부음을 듣고 내려갔다고. 고향은 공동묘지만 남기고 사라지고 무덤가 아무도 없는데 풍문이 풍비(風碑)인지 모른다고.
나는 죽은 자, 나는 산 자와 묫자리가 뒤바뀌기도 하는가—
그해 여름 군인들이 묫자리를 보러왔고 내 평묘 파헤쳐 구덩이 파더니 그 사람들 암매장, 이 묫자리 위에 바윗돌 올려놓고. 묫자리 위에서 정사(政事)를!
백아상출상
그녀 이야기는 모두 병풍 뒤 무덤에서 일어난 이야기. 그녀가 그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 상복 입은 그녀가 마련한 병풍 뒤의 무덤 이야기. 그녀의 무덤이 ‘무구장’이다.
그가 죽고 그 사내의 성에서 사는 그녀는 왜 병풍 뒤에 제 무덤을 마련했는가— 그녀 이야기는 병풍 뒤의 이야기, 이제 병풍 뒤 오래된 무덤이 평평해져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병풍의 이야기.
그녀의 가면이 별이네
하얀 별은 하얀 가면
검은 별은 검은 가면
우주의 가면이 별이네
김영산
199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冬至』, 『평일』, 『화』, 『게임광』,『詩魔』, 『하얀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