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들을 그려 보도록 해요.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도 되고 공룡같은 예전에 살았던 동물들도 괜찮아요."
그것은 1학년 1반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1반의 교실 안에는 모두 서른명 가량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교탁에는 많이 잡아 보아도 대략 2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에 청순한 이미지의 여자가 부드러운 말투로 30명 남짓되는 아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수업을 진행 하고 있었다.
"선생님! 포켓몬도 괜찮나요?"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한눈에 보기에도 개구장이 일 것 같은 남자아이가 물었다
"만화에 나오는 동물들도 괜찮아요. 선일아 근데 그건 동물이 아니잖니. 다른걸 생각해 보지 않을래?"
"치... 난 포켓몬이 좋은데..."
한창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이상스래 유난히 조용한 아이가 있었다. 포켓몬을 그리겠다고 때를 쓰던 선일이 보다도 키가 작고 아이답지 않게 볼살조차 없고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로아는 좋아하는 동물이 없니?"
"...."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이는 멍하게 자기 손보다 열뼘은 더 큰 스케치북 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선생은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없는 대화를 이어 갔다.
"음... 로아야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냥 로아가 그리고 싶어하는 대로 그리면 되는거야. 하지만 꼭 로아가 좋아하는 동물이여야 해요 알았죠?"
아이는 여전히 조그만 입술을 다물고 있었지만 여선생은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태도로 아이를 다독여 주었다.
"선생님! 선일이가 제 크레파스를 뺏어 갔어요!"
"알았지 로아야? 선생님 잠깐 가볼게. 선일이 너 또 은영이 괴롭히니?"
로아라 불린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선생님이 걸어가는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10분 뒤, 여선생이 다시 자리로 왔을 때 로아는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로아의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뭔지 한번 볼까?"
스케치북을 쳐다본 여선생의 얼굴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로아란 아이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던 스케치 북은 온통 어두운 검은색으로 색칠 되어 있었다. 무엇인가를 그렸다고 보긴 힘들었다. 여선생 에게 그것은 단지 검은색으로 색칠되고 있는 도화지로 보였다.
"로...로아야 뭘 그린건지 선생님한테 말해줄 수 없을까?"
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조그마한 손에 검은색 크레파스를 꼭 쥐고 도화지를 온통 검은색으로 색칠하기만 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 미술시간에도 로아는 도화지를 검은색으로 색칠하고 또 색칠했다. 더불어 선생의 마음도 온통 검은색으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러한 일이 하루, 이틀, 삼일 계속 반복 되자 결국 여선생은 로아의 어머니 에게 전화를 했다.
"보세요 어머니 오늘만 해도 벌써 다섯 장 째에요."
책상에 펼쳐진 도화지는 온통 어두운 색으로 색칠되어 있었다. 로아의 어머니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로아 병원에 대려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번에도 다녀 왔지만. 그다지 심해지거나 하진 않았다던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로아 어머니의 얼굴엔 걱정스러운 표정이 일었다.
"글쎄요.. 이런 건 저도 처음이라.."
보통의 의사들과는 달리 간단한 청진기 조차 목에 걸고 있지 않고 단지 하얀 가운만을 입은 부드러운 인상의 의사가 의자에 앉아 말했다.
"보통 자폐아동의 경우에는 대부분 자신의 흥미 부분에서는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 냅니다. 그림을 곧잘 그렸던 로아가 갑자기 이런 걸 그렸다는 건 조금 이상 합니다만은..."
어머니와 의사선생님이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로아는 단지 어머니의 손만을 꼭 잡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다른 이상이 있는건 아니라는 말씀이죠?"
로아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로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단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지 않을정도로 높은 의자에 앉아 물장구를 치듯 명량하게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예, 다양한 검사를 해 봤지만 그 전에 비해 다른 문제 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단은 로아가 끝까지 그릴 수 있게 냅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봅니다. 괜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간 전처럼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심지어는 등교거부 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로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진료실을 나갔다.
아이의 이름은 박로아 였다.
아기 치고도 귀여운 얼굴을 가져 혹여 연예인 까지 되지 않을까 주위의 주목을 받던 아이는 두살때 영아자폐증 판정을 받았다.
단지 수줍음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던 로아는 태어나 면서 부터 선천적으로 자폐증을 앓고 있었고 덕분에 학교조차 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몇 개월 전부터 이곳 소망정신병원을 다니면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차츰 증상이 호전되고 있었고 더불어 언젠가는 정상적으로 살수 있을 거라는 로아 어머니의 희망도 나날히 증폭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학교에서 검은 도화지만을 그려내는 딸이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벌써 스물 세장 째.
그 후로도 로아는 매일 미술시간 마다 어두운 색으로 도화지를 색칠 했고, 로아 어머니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여선생도 나날히 검은 도화지를 그려내는 로아를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자 모두 서른 세장의 도화지가 모였고 서른 세번째 도화지를 끝으로 더 이상 로아는 도화지를 검은색 으로 색칠하지 않았다.
몇일 뒤 여선생은 책상을 정리하다 로아의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을 들고 로아가 왜 도화지를 색칠했을까 하고 한참을 생각하다 도화지를 자세히 보니 각각의 도화지 마다 조금씩 색깔이 달랐고 또한 몇몇 도화지 들은 군대군대 비어있는 곳이 있기도 했다.
더욱 자세히 도화지를 들여다 보자 왼쪽 구석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숫자였다. 검은색 도화지에 연필로 그것도 구석에 숫자가 적혀있으니 발견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선생은 서둘러 로아가 색칠한 모든 도화지를 꼼꼼히 살펴 보았고 역시나 모든 도화지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여선생은 퍼즐 마추기를 하듯 나무로된 교실 바닥에 번호대로 도화지를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모두 차례대로 나열하자 검은 도화지들은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그것은 코끼리 였다. 한마리의 거대한 코끼리. 두달 전 그림의 주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 이었고 로아는 평소 좋아하던 커다란 코끼리를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검은 도화지라고 생각하고 로아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이다.
그림을 더 자세히 보기위해 여선생은 책상위로 올라갔다.
"아!.."
여선생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책상 위에서 보자 로아가 그린 커다란 코끼리는 각 부위마다 매우 섬세하게 명암처리가 되어 있었고 또한 그 크기 덕분에 더욱 웅장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오자마자 교실 뒷편에 모여 있었다. 여선생이 들어오자 선일이가 큰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코끼리 누가 그린 거에요? 되게 멋지다! 나 이제 좋아하는 동물 코끼리로 할래요!"
"선일아 그럼 포켓몬은 어떻게 하고?"
"코끼리! 저 코끼리 대빵 멋져요. 나 저렇게 멋있는건 처음 봐"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교실 뒷편에 걸린 회색빛의 코끼리는 아이들의 호들갑이 과하지 않다고 할 정도로 멋졌다.
여선생은 로아에게 다가가 멋진 코끼리를 그려줘서 고맙다고 귓속말로 속삭이고는 수업을 진행하려 교탁으로 가려고 뒤를 도는 순간 로아가 여선생의 손을 살짝 잡았다.
뒤를 돌아본 여선생은 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맑은 눈동자에는 투명한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고 앙증맞은 코는 빨갛게 물이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닫혀있던 촉촉하고 조그마한 분홍색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선생님.."
-끝-
처음으로 써본 단편입니다. 몇매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떻게 세는지 몰라서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 이거 다른분 에게 물어보니 원작이 있다고 하네요; 제 친구가 대충 들려준 얘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 써본건데... 이런... 원작이 있었다니.
원작은 일본에서 나온 광고 입니다. 공익광고같은건데요 상당히 감동적이죠. ^^ 마지막 코멘트 안달아주셨으면 표절시비 걸리셨을수도..^^ 원작은 고래를 그리거든요.. ㅎㅎ.. 직접 보신 것도 아닌데 생생하게 잘 쓰신거같아요.. 게다가 이야기도 들어 있어서 더 재밌었습니다. ^^
장수를 가르쳐 주신 김재융님 감사합니다.
와우, 멋져요! 결말을 보는순간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