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 정구선 저 / 애플북스 > | |||
전하,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하셨나이까? 왕을 꾸짖은 조선의 미네르바! 헛된 것 가운데 가장 헛된 것이 권력 아닐까? 시대의 흐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어제의 일인자가 오늘의 비참한 죄인이 되기도 하는 권력의 세계. 하지만 권력에 대한 야망은 쉽사리 뿌리치기 힘들다. 역사는 권력의 추이와 그것을 둘러싼 투쟁의 기록이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역사는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권력의 역사力史’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15명의 처사들의 모습은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와 권력, 언론 등의 문제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을 꾸짖은 처사들 왕조시대에 왕은 법이었고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큰 죄였다. 그런데 왕을 우습게 여긴 자들이 있었으니 …… 권력과 벼슬을 탐하지 않으며,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자연을 유람하며 시를 읊은 재야의 선비들, 즉 처사들이었다. 왕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그들은 왕이 얼굴 한번 보자고 불러도 좀처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이 실정을 할 때면 어김없이 상소를 올려 꾸짖으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요새 말로 하자면 ‘미네르바’ 같은 발칙한 사람들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현대의 미네르바와 처사들은 매체환경과 시대상황, 언론이나 교육(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있어 큰 차이가 있지만 결국 언론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처사들은 현대인이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는 권력, 돈, 명예를 탐하지 않고 청빈한 가운데 오직 자기의 신념과 의지대로 살다 간 참다운 은자들이었다. 처사, 그들은 누구인가? 옛 선비들 가운데 처사處士 또는 유일遺逸, 은일隱逸 등으로 불린 재야의 선비들은 권력과 벼슬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처사는 대개 벼슬하지 않은 선비, 또는 세파世波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파묻혀 사는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 쓰인 처사의 개념은 이와 약간 다르다. 벼슬을 아예 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관직에 일단 임명되었지만 출사出仕하지 않은 자, 즉 벼슬아치가 되었으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도 처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관직에 임명되어 몇 번 출사했다가 초야로 돌아와서 은거생활을 한 사람도 처사라 했다. 벼슬을 아예 하지 않은 선비는 물론이고 벼슬을 받고 나아가지 않은 사람, 일단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와서 초야에 묻힌 인물까지 처사에 포함된다. 관직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전혀 출사하지 않은 성수침, 조식, 윤선거 등은 물론, 잠시 출사했다가 은거를 계속한 성혼, 최영경 등도 처사라 했다. 왕이 노해도 내 뜻을 꺾지 않으리, 조식曺植 조식이 명종에게 올린 상소를 통해 정치, 왕, 권력에 대한 발칙한 처사들의 비판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조식이 올린 사직상소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명종 10년 11월에 단성 현감을 사퇴하면서 쓴 상소다. 당시 경상도 단성 현감에 제수되자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사퇴의 변을 토로했는데, 이 상소는 그의 강직함과 관직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관직을 내린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치며 은근히 임금을 비판한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심에 미쳐서는 두 번이나 주부에 제수하셨고, 이번에는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함이 산을 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궐에 나아가서 천은天恩에 사례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취하는 일은 장인匠人이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 대장大匠이 나무를 구하는 것이고 나무가 자발적으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임금 된 책임이고 신이 염려할 바가 아니므로 그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명종실록』 권19, 10년 11월 경술 그는 인재를 얻는 것은 왕의 책임이라면서 관직을 제수한 것을 왕의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며 오히려 왕을 비판했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조식의 위치였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 무슨 조각組閣이니 개각이니 하는 것이 단행될 때마다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은 혹시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 오지 않을까 목을 빼고 기다린다. 장관이나 청장 직이라도 하나 받으면 감지덕지 그것을 챙기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정이 이어지더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는가.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조식은 조정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밝힌다.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이 학덕이 부족하여 조정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유학자로 칭송받던 그가 학덕이 부족하여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친 겸양의 표현일 뿐 사퇴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벼슬을 마다한 진정한 이유는 임금이 어리석고 조정이 썩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정치판에 끼어들기 싫다는 것. 이는 그가 거론한 사직의 두 번째 이유에 잘 나타난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쓸 곳이 없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재물만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스럽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내렸으니 그 재변災變의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가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이나 소공召公과 같은 재주를 겸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초개 같은 한 미신微臣의 재질로 어찌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을 사고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명종실록』 권19, 10년 11월 경술 당시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논조가, 왕조시대에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참으로 위태위태하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운 일 아닌가? 요즘 같으면 구속감이 아니었을까. 이 상소에서 조식은 제동장치 망가진 자동차처럼 겁 없이 돌진하여 임금과 신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임금의 정치는 하늘과 인심도 떠나갈 정도로 망가졌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말 건드리면 안 될 부분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임금의 모친으로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그 유명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문정왕후가 누구인가? 중종의 부인으로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보위에 앉히고 여자의 몸으로 대권을 움켜쥐고 천하를 호령하던 여걸이 아니던가. 그녀는 임금도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치던 호랑이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대역에 버금가는 불충한 행위였다. 조식은 이런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해버린 것이다. 이런 비난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요즘 모가지 잘릴까 두려워하지 않고 윗사람의 불의한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서 항의할 수 있는 그런 이들이 몇이나 될까. | |||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 정구선 저 / 애플북스 > | 작성자 | 성공시대 관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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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하셨나이까? 왕을 꾸짖은 조선의 미네르바! 헛된 것 가운데 가장 헛된 것이 권력 아닐까? 시대의 흐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어제의 일인자가 오늘의 비참한 죄인이 되기도 하는 권력의 세계. 하지만 권력에 대한 야망은 쉽사리 뿌리치기 힘들다. 역사는 권력의 추이와 그것을 둘러싼 투쟁의 기록이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역사는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권력의 역사力史’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15명의 처사들의 모습은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와 권력, 언론 등의 문제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을 꾸짖은 처사들 왕조시대에 왕은 법이었고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큰 죄였다. 그런데 왕을 우습게 여긴 자들이 있었으니 …… 권력과 벼슬을 탐하지 않으며,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자연을 유람하며 시를 읊은 재야의 선비들, 즉 처사들이었다. 왕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그들은 왕이 얼굴 한번 보자고 불러도 좀처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이 실정을 할 때면 어김없이 상소를 올려 꾸짖으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요새 말로 하자면 ‘미네르바’ 같은 발칙한 사람들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현대의 미네르바와 처사들은 매체환경과 시대상황, 언론이나 교육(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있어 큰 차이가 있지만 결국 언론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처사들은 현대인이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는 권력, 돈, 명예를 탐하지 않고 청빈한 가운데 오직 자기의 신념과 의지대로 살다 간 참다운 은자들이었다. 처사, 그들은 누구인가? 옛 선비들 가운데 처사處士 또는 유일遺逸, 은일隱逸 등으로 불린 재야의 선비들은 권력과 벼슬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처사는 대개 벼슬하지 않은 선비, 또는 세파世波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파묻혀 사는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 쓰인 처사의 개념은 이와 약간 다르다. 벼슬을 아예 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관직에 일단 임명되었지만 출사出仕하지 않은 자, 즉 벼슬아치가 되었으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도 처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관직에 임명되어 몇 번 출사했다가 초야로 돌아와서 은거생활을 한 사람도 처사라 했다. 벼슬을 아예 하지 않은 선비는 물론이고 벼슬을 받고 나아가지 않은 사람, 일단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와서 초야에 묻힌 인물까지 처사에 포함된다. 관직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전혀 출사하지 않은 성수침, 조식, 윤선거 등은 물론, 잠시 출사했다가 은거를 계속한 성혼, 최영경 등도 처사라 했다. 왕이 노해도 내 뜻을 꺾지 않으리, 조식曺植 조식이 명종에게 올린 상소를 통해 정치, 왕, 권력에 대한 발칙한 처사들의 비판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조식이 올린 사직상소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명종 10년 11월에 단성 현감을 사퇴하면서 쓴 상소다. 당시 경상도 단성 현감에 제수되자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사퇴의 변을 토로했는데, 이 상소는 그의 강직함과 관직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관직을 내린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치며 은근히 임금을 비판한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심에 미쳐서는 두 번이나 주부에 제수하셨고, 이번에는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함이 산을 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궐에 나아가서 천은天恩에 사례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취하는 일은 장인匠人이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 대장大匠이 나무를 구하는 것이고 나무가 자발적으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임금 된 책임이고 신이 염려할 바가 아니므로 그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명종실록』 권19, 10년 11월 경술 그는 인재를 얻는 것은 왕의 책임이라면서 관직을 제수한 것을 왕의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며 오히려 왕을 비판했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조식의 위치였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 무슨 조각組閣이니 개각이니 하는 것이 단행될 때마다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은 혹시 청와대에서 전화 한 통 오지 않을까 목을 빼고 기다린다. 장관이나 청장 직이라도 하나 받으면 감지덕지 그것을 챙기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니 실정이 이어지더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는가.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조식은 조정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밝힌다.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이 학덕이 부족하여 조정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유학자로 칭송받던 그가 학덕이 부족하여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친 겸양의 표현일 뿐 사퇴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벼슬을 마다한 진정한 이유는 임금이 어리석고 조정이 썩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정치판에 끼어들기 싫다는 것. 이는 그가 거론한 사직의 두 번째 이유에 잘 나타난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쓸 곳이 없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재물만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스럽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내렸으니 그 재변災變의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가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이나 소공召公과 같은 재주를 겸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초개 같은 한 미신微臣의 재질로 어찌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을 사고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명종실록』 권19, 10년 11월 경술 당시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논조가, 왕조시대에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참으로 위태위태하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운 일 아닌가? 요즘 같으면 구속감이 아니었을까. 이 상소에서 조식은 제동장치 망가진 자동차처럼 겁 없이 돌진하여 임금과 신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임금의 정치는 하늘과 인심도 떠나갈 정도로 망가졌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말 건드리면 안 될 부분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임금의 모친으로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그 유명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문정왕후가 누구인가? 중종의 부인으로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보위에 앉히고 여자의 몸으로 대권을 움켜쥐고 천하를 호령하던 여걸이 아니던가. 그녀는 임금도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치던 호랑이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대역에 버금가는 불충한 행위였다. 조식은 이런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해버린 것이다. 이런 비난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요즘 모가지 잘릴까 두려워하지 않고 윗사람의 불의한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서 항의할 수 있는 그런 이들이 몇이나 될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