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숲길'.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는 이 길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왕의 숲길은 여주 북성산 자락에 있는 영릉(英陵, 세종대왕릉)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을 잇는 700m의 길이다. 두 명군을 연결하는 길이니 자연스레 왕의 기운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숙종, 영조, 정조는 이 길을 통해 효종릉을 참배하고 세종릉으로 걸어갔다고 기록되어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가 양 옆에 줄지어 있는 좁은 흙길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신비의 숲 속 어딘가를 걷는 느낌을 준다.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24313096_thumb.JPG)
왕의 숲길
왜 세종대왕릉(영릉)은 여주에 있을까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다.
영릉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과 깨끗한 기운에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도, 이곳이 천하 제일의 명당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조선시대 가장 성군인 세종대왕을 이 곳에 모심으로써 조선왕조 국운이 100년은 연장됐을것이라고 풍수지리 학자들은 말한다.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24608786_thumb.JPG)
세종대왕의 업적을 전시해놓은 세종대왕 광장
그런데 세종대왕릉은 왜 여주에 있을까. 왕의 숲길을 찾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의문이었다.
보통 조선시대 왕릉은 임금의 참배행렬이 하루만에 다녀오기 편한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양 주변에 있다. (단, 단종의 장릉은 안타까운 이유로 조선 왕릉 중 가장 먼 영월에 위치해있지만)
영릉은 원래 오늘날 서초구에 있는 헌릉 주변에 있었다. 헌릉은 태종, 즉 세종의 아버지 무덤이다. 헌릉의 지세는 답답하고 주변이 소음이 많아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세종은 오로지 효심으로 부왕의 곁에 눕고자 했다. 부인 소헌왕후가 죽자 지관들은 이곳은 왕위 계승이 끊어지고 장자가 죽는 흉당이라고 만류했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다른 곳에 좋은 땅을 얻는 것이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는 이유였다. 명군 답게 효심 또한 지극하다.
세종은 소현왕후가 죽자 능 곁에 빈 석실을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길지가 아니었던지, 장자인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병으로 죽었고, 그 아들 단종은 삼촌(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세조또한 장자인 의경세자가 죽고 그 이후에도 그런일이 발생하자 조정은 아무래도 세종의 묘 위치가 문제라고 생각하여 옮기기로 결정한다.
세종의 묘를 이전할 곳을 찾던 지관은 마침 여주를 헤매다 지금의 영릉 근처를 지난다. 때마침 비가 내려 여주 양반가의 재실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와중에 가만히 이 곳은 천하 명당자리였다. 그리고 세종의 능은 1469년 여주로 옮겨진다.
세종대왕릉이 몇년간의 보수를 끝내고 2020년 관람객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왕의 숲길 또한 일반인들에게 새롭게 선을 보였다. 예법에 맞지 않게 조성된 인위적인 시설물을 철거했고, 재실 등을 원형에 가깝게 정비했다.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24757874_thumb.JPG)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100909_thumb.JPG)
새롭게 정비된 재실
세종대왕릉 홍살문. 죽은 영혼(왕)이 이용하는 신도와 살아있는 왕이 이용하는 어도가 있다. 일반인들은 어도로 걸어가야한다.
세종대왕과 서현왕후가 함께 하는 합장릉.
영릉에서 바라본 풍경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209101_thumb.JPG)
아이손을 잡고 온 가족들이 많이 보인다. 산책하기 좋은 장소다.
"아빠, 세종대왕이 누구야?"
"응 한글을 만드신 분이야"
세종대왕은 평생 '생생지락(生生之樂,백성이 행복하게 산다)' 의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한글창제 또한 그의 일환이었다.
오늘은 오로지 세종대왕의 뜻을 생각하며 숲길을 걸어보련다.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25349679_thumb.JPG)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75908124_thumb.JPG)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1111398_thumb.JPG)
왕의 숲길 그리고 효종대왕릉(영릉)
세종대왕릉 옆으로 이어진 왕의 숲길을 걷다보니 영릉에 도착했다.
정조시절 그대로 흙길을 보존해놔서 구불구불하고 약간의 오르막도 있지만, 걷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다.
영릉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다. 영릉 또한 푸른 소나무들에 둘러쌓여 아늑하지만 세종릉에 비해 찾는 이가 적어 훨씬 더 조용하고 호젓한 느낌이다.
능을 감싸며 흘려내려오는 묘내수는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를 빠져나와 참도를 가로질러 흐르고, 참도 가운데에 금천교가 높인 것이 주변의 경관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세종릉과 달리 효종릉은 쌍릉이지만 앞뒤로 엇비슷하게 있어서 처음부터 합장된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선왕후 장씨는 병자호란 뒤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갈때 따라가 8년간이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그녀도 효종 못지 않은 북벌론 지지자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 색을 적색과 청색 두가지로만 정해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부창부수라 할 수 있다.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309312_thumb.JPG)
효종대왕 영릉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422636_thumb.JPG)
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당한 치욕과 굴욕을 두눈으로 직접 본 인물이다.
또한 본인도 직접 청에 볼모로 잡혀갔기에 청에 대한 복수는 그의 재위시절 가장 큰 목표였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민중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강력한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씻기 위함이다. 그러나 재위 10년만인 41세에 승하하여 북벌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청의 침략전쟁에 힘없이 당하지 않겠다는 자주의식이 뚜렸했던 왕이었다.
효종릉 또한 원래부터 여주에 있던 건 아니었고 능의 석물에 틈이 생겨 능안으로 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어 동구릉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현종 14년).
효종은 영릉에서 못다한 북벌의 꿈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627877_thumb.JPG)
효종과 인선왕후의 릉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708684_thumb.JPG)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1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924540_thumb.JPG)
![정조가 거닌 길, 왕의 숲길을 걷다2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1%2F06%2F26%2F20210626180954348_thumb.JPG)
효종대왕릉의 재실. 수령이 300년이 넘는 회양목이 있다.(천연기념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