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행자》
따뜻한 소통과 영혼의 동반자
“당신이야말로….”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잇는다.
“나의 진정한 친구예요.”
대쪽같이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데이지 여사가 흑인 운전수 호크의 손을 꼭 잡으며 한 말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 도시 애틀랜타. 전직교사이자 부유한 미망인인 데이지
여사(제시카 탠디)는 까탈스럽고 고집 세기로 유명하다. 노쇠한 자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자존심 강한 유태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는 어느 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차를 운전하다
사고를 내고 만다. 놀란 아들 불리(댄 애크로이드)는 즉시 흑인 호크(모간 프리만)를 운전수로
고용하지만 데이지 여사는 매몰차게 그를 거부한다.
그렇지만 유머 있고 인내심 강하며 인간미 넘치는 호크는 데이지 여사의 냉대와 무시를 참아내곤
결국 그녀를 자신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히는데 성공한다. 무려 엿새나 걸려서.
이후에도 호크는 한결같이 데이지 여사를 보살핀다. 고집불통이던 그녀도 호크의 참다운
인간성에 감동해 마침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
데이지 여사는 글을 몰라 부모의 묘지를 찾지 못하는 호크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고,
알파벳 교본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세월이 흘러 눈이 어두워진 호크는 더 이상 운전대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설상가상, 자신을 돌보던 하녀마저 세상을 떠나자 데이지 여사는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백발이 성성한 호크는 변함없이 그녀를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는데….
영화의 마지막. 나이 들어 손을 잘 쓰지 못하는 데이지 여사에게 호크가 파이를 정성스레
떠먹여준다. 얌전히 받아먹은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나직이 안부를 묻는다.
호크는 예전처럼 대답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지요.”
데이지 여사도 이렇게 답한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깐깐한 유태인 노부인과 흑인 운전사 간의 따뜻한 소통을
그리고 있다. 세상의 편견을 깨고 흑인 호크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데이지 여사,
그리고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호크.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걸어간다.
독일 작가 한스 크루파(Hans Kruppa)가 쓴 《마음의 여행자》도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처럼 소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보다 존재론적이고 영적인 소통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아울러 자신의 마음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도 강조한다. 그 자신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한스는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친다. 하지만 작가가 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결국 서른한살의 나이에 안정된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문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나는 저울질 없이 작가의 삶에 뛰어들기까지 대학 졸업 후 6년이 걸렸다.
교사라는 직업이 내게 맞지 않았고,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가 내 자신에게 무책임한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내면의 목소리가 나에게 던진
조언을 따른 것이다.”
그 때문일까. 한스는 《마음의 여행자》에 실린 11편의 단편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에 따를
것을 독자들에게 나직이 속삭인다. 그는 혼자 힘으로는 진리를 찾아, 영혼의 울림을 따라
걷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인정한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을 한스는 강조한다.
꿈 이루기, 그리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기
마치 자신의 과거를 읊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의 단편 <나비의 입맞춤>. 여기엔 말리나란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늘 이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를 억측하며 경계한다. 하지만 학생인 페터는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끌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 둘은 단번에 마음을 터놓을
상대임을 알아보고는 진심어린 대화를 나눈다.
먼저 말리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에 대해 페터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늘 그렇기 마련이야. 누군가 한 사람이 자기들과 다르면 불안해하지.
그 불안감이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만들고, 혼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조용히 살아가려는
사람을 괴팍한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거야. 그렇게 그를 오갈 데 없는 외톨이로 만들어 버리지.
그런 식으로 끝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어 놓아야 마음이 편하거든.”
“당신은 실제로 외톨이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긴 하지만 크나큰 행복이지. 서로의 마음을 진실하게 열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다만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나는 차라리 혼자 있는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페터, 네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어. 어쩌면 그것은 늘 깨어있으려는
의식 같은 걸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일상에 이끌려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넌 그렇지 않아.”
대신 그녀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진실한 친구를 얻어 그 친구가 가진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말리나는 페터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룰 만한 충분한 소질이 있다면 그 꿈을 실현시켜야만해.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어. 내가 도시에 살때 이웃에 그림 솜씨가 뛰어난 남자가
한 명 살았지. 그 남자는 화가가 되는게 꿈이었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살 수 없다고 늘
불안해했어. 그래서
그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택했지. 하지만 자신의 영혼은 텅 비어 버리고말았어.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우울해져 갔고, 마침내 불치병에 걸리게 되었지. 결국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자신의 꿈을 좇는 것에 대
한 불안감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험한 적이야. 그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리지. 두려움으로부터 너를 항상 보호하고, 오직 두려움만을 두려워해야 해.”
말리나의 충고를 받아들인 페터는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다. 그들은 떨어져 있어도
매주 한 통 씩 편지를 주고받는다. 페터는 말리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을
얻었고, 생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생 일 때 문단에 등단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작품 활동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에 첫 장편소설을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말리나로부터 오는 편지가 3주째 끊겼다. 페터는 하루하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말리나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년여 만에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두드렸다. 우편배달부였다. 그의 손에는 소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소포를 뜯자 편지가 하나 나왔다. 말리나의 편지였다.
사랑하는 나의 나비에게.
네가 그토록 아름답게 높이 날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무렵에는 너의 새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너와의 우정은 늘그막 내 인생의 태양이었다. 너의
순수한 세계가 나를 늘 새롭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의사들 역시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었지. 이제 와서 너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된 걸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그저 지난번 네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의 내 모습
을 영원히 간직하길 바랄 뿐이다.
나의 작은 집은 너에게 상속하며. 평화가 필요한 노년이 되면 이곳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페터.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나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있겠지. 하지만 나의 영혼은 항상 너의 친구로 남아 있을 거야.
너를 사랑하는 말리나가.
전쟁과 다툼, 미움을 이기는 방법
《마음의 여행자》는 이렇듯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찾기위해
방황하는 사람과, 그런 그를 주위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깨달음을 얻고,
꿈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사람 간의 교류를 그리고 있다.
단편 <보이지 않는 산>에는 아이론이란 이름의 청년이 나온다. 그는 빼어난
용모에 놀라운지혜, 그리고 실체를 통찰하는 능력을 지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고 진실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다투지 말고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그대들의 마음속에 시기와 미움을 담아 두지 마십시오. 시기와 미움은
그대들을 해치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났다고
시기하지 말고, 그들을 축하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알고
보면 같은 영혼이기 때문입니
다. 자매의 아름다움이 곧 그대 자신의 것이고, 형제의 뛰어남도 그대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조화와 이해 속에 살아간다면,
마음이 풍요로워질 뿐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생의 고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 깨달
음의 빛 속에서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외쳤다.
“세상은 온통 다툼과 전쟁, 크고 작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타나서 이 험한 세상을 평화롭고 조화로운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않다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아이론은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노력해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세속적으로 살면서,
잘못된 목표와 잘못된 가치관만을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힘을 모아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영혼 깊이 침잠하면 우리의 무지를 깨달아 무의미한 다툼과 전쟁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마음의 병입니다. 물결이 바다의 자식이듯이 우리 모두가 창조주의 자식임을
이해하면, 미움을 극복하고 다툼과 전쟁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마음은 어둠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사랑과 진실 대신 돈과 소유욕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앞서 살다간 이들의 실수를 통해 배워야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너무 많은 세월을
어두운 무지 속에서 헛되이 살았습니다.”
아이론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군주인 라반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군사를 이끌고 아이론을 찾아간다. 수천 명의 군중들에 둘러싸인
아이론을 보는 순간 라반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라반의 속내를 훤히
들어다보고 있는 아이론은 이렇게 말한다.
“군주님은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에 관심이 많으시지만,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리는 힘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군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군주님의 시선은 마음속이 아니라 항상 밖으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도 하나의 세계입니다. 군주님이 지배하
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지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두려움과 권력욕과 불신에 사로잡힌 추한
모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뚜렷이 보였다. 위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양심과 자신의 마음을 둘러싼 높은 장벽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쓸쓸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칼을 호수에 던져 버렸다.
그리곤 아이론을 위해 호숫가에 집을 한 채 지어주고 거기에 머물도록 했다.
라반은 매달 한 번씩 아이론을 찾아와 지혜를 구했다. 그때부터 라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은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시대를 누리게 되었다.
《마음의 여행자》에는 이외에도 영혼을 사로잡는 다양한 주제와 서정적인
문체로 읽은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목적지는 자네 혼자서 찾아야 해”
지인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고층에서 내려다본 도심은
비에 젖어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창유리에 맺힌 빗방울 때문에 세상은
마치 반투명의 커튼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처럼 모호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무렵, 잠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지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무척이나 낯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극히 고독한 눈빛으로 비 오는 바깥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만났으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결코 잊을수 없는 쓸쓸한 눈빛.
몇 달 후 넌지시 그에게 그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건너온 그의 대답.“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지.
그런 본래의 모습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따름이야. 하지만 때론 마음 맞는
사람 앞에서는 잠시나마 속내를 드러내고플 때가 있어.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된 상황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자신의속내를
드러내 놓고 말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 한스 크루파의 《마음의 여행자》
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자네는 생의 심장부를 향해 가는 여행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고. 왜냐하면 자신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거든. 운이 좋다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고, 자네의 삶이
풍성해지도록 도와줄 거야. 그로 인해 자네는 더욱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겠지.
그러나 마지막 목적지는 자네 혼자 찾아야 해. 자네의 영혼 말고는 누구도 자네를
목적지로 안내해 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해.
육체에만 눈이 있는 건 아니지. 마음에도 눈이 있고, 그 눈으로 보는 것만이
자네의 갈망을 채워 줄 거야.”
미래촌에서동장, 김만수보냄 / 이경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