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로 대표적인 동양화 작품의 양식적 특징
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른 중국고대의 변혁시대이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치는 청동기의 장식에 그림자그림 형식 및 선각으로 된 회화적 표현이 남아 있어 일부 회화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주제는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오락, 사냥, 전쟁, 귀신 등으로 주로 측시형(側視形)의 표현을 하며 측면상의 여자 및 봉황, 용을 먹으로 그린 전국시대의 비단그림이 유명하다.
▲ 그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회화작품인 <비단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화는 시작부터 필(筆)을 중요한 조형의 표현기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 시대(BC221~AD220)
화상석
이 시대는 봉건사회로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외래 문화의 수입과 전파 시대이다.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감행하고,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으나 그 치세는 짧았다.
한나라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같이 정치와 군사에서는 강하였으나 문화와 예술에는 앞 시대의 모방에 치우쳐 독창력이 적었다. 이 시대에는 다양성의 통일이 조화된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을 낳았는데, 재현적 기법과 상징 및 추상화 과정이 혼합된 것 이다.
한(漢)대에 전하는 그림들은 모두 지하 무덤에서 출토된 분묘미술이다. 따라서 무덤 안을 장식했던 벽화나 화상석, 화상전이 주요 미술품인데 회화적 표현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지상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표현된 내용들은 신화와 역사적 사실, 고사, 일상생활, 유교적 주제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산둥 지방의 화상석에 표현된 인물이나 자연 묘사는 그야말로 고식의 미를 한껏 보여준다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남북조 시대의 회화는 타율적인 제약에서 해방된 문인화라는 양식을 낳았다.
이 시대에는 현실을 초월한 노장의 사상이 유행하여 사실(寫實)을 초월한 추상적인 동양화의 선을 강조하였고, 산수화를 발전시켰다.
이 때의 회화는 기존의 원시적인 상하법을 대신하여 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이 성립하고, 깊이 있는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공간 처리가 분명해지고 인물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아직 전경, 중경, 후경 사시에 자연스러운 진행이 없고 크기나 비례가 잘 맞지 않으며 인물들에도 개성 표현이 없는 등 고풍스러운 표현을 간직하고 있다. 주제상으로는 기존의 유교와 도교에 새로 들어온 불교가 주 배경이 되며 신화적인 색채는 퇴조한다. 한말의 서화를 겸한 사대부 화가가 출현해서 필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白描 )가 창시되었고 문학적인 제재를 즐겨 채택하였다.
처음으로 산수화를 그리고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권」을 남겼고 산수화에 있어서의 시각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신기론(神氣論)이란 화론(畵論)을 펴 사혁(謝赫)과 함께 동양 회화의 원류가 되었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畵品錄)」이란 화평(畵評)에서 회화의 근원이 되는 육법(六法)을 논하였다. 송병(宋炳)의 산수화는 고개지에 비해 솔직하고 간명하며, 그가 발견한 '지척천리(咫尺千里)'라는 투시 원근법은 서양보다 천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후기 화북에서는 공작 기술을 겸비한 기술화가가 임용되기도 했다.
▲ 고개지, 여사잠도(女史箴圖), 두루마리, 진나라 비단에 채색, 세로 24.8Cm, 가로 348.2Cm,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여사잠'이란 궁정의 여사가 궁녀들에게 수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훈계를 뜻한다. 이 작품의 필법은 세밀하고 자세하며 둥글고 부드러우면서 빼어나다. 이러한 필법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용필의 기법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隋)·당(唐) 시대
수나라는 회화에 있어서도 남북을 통합했다. 북조계의 화가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한다는 화북중심의 통합이었다. 수에 이어 대제국이 된 당은 외국 미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화풍을 낳았다. 전기에 전래된 헬레니즘의 흐름을 섭취한 굽타조 양식의 인도미술과 사산조 양식의 이란 미술이 중국인에게 형사(形寫)라 불리는 새로운 자연주의와 표현 기법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는 중국 회화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이며 중국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인물, 도석, 산수, 화조가 많이 그려졌으며 각기 개성적인 표현을 하게되어 각각의 유파로 발달하게 된다. 즉 남화, 북화의 개념이 확립된다. 당나라의 회화는 외래양식을 소화하는 한편 고유의 전통 양식과 융합한 이른바 종합성을 가진 회화 예술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수묵화풍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남종 문인화의 출발을 뜻한다. 번영을 구가하던 당 왕조에서는 불사도관(佛事道觀)이 조성됨에 따라 벽화가 많이 그려지고, 대승적인 변상도가 그려졌다.
초당(初唐)의 대표적 화가인 염입본(閻立本)은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직공도(職貢圖)」로 유명하다.
후기 회화의 특색은 외래 영향의 중국화와 전통의 존중인데, 그러한 경향은 전기의 후반에 보인다. 사녀화, 화조화나 묵화는 측천무후 시대에 시작되고, 성당기에는 천재화가 오도현(吳道玄)이 백묘화를 부흥시켰고, 그에 입각하여 회화의 지도이념인 사의를 제창했다. 또 오도현(吳道玄)은 당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불교, 도교에 관한 것을 많이 그렸고, 이러한 필법이 오가풍(吾家風)이라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다. 이른바 '산수의 변혁'을 창시하여 산수·수석화를 자연주의의 계열에 편입시켰다.
이사훈(李思訓)은 북화의 시조이며, 귀족적 묘법으로 금벽청록(金碧靑綠)의 산수로 유명하다.
후기의 산수화가는 수묵산수화 발전의 기초를 세운다. 특히 왕유(王維)는 남화의 시조이며, 남방의 풍경을 주로 초속적인 태도로 그렸다. 선담(渲淡)의 묵법이라 하여 수묵의 멋을 십분 살렸으며, 대상의 묘사보다 정감 어린 운치를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녀화, 화조화, 산수 수석화는 공적인 목적보다 사적인 감상에 봉사하는 경향이 강한 분야이고, 후세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 염입본, 역대 제왕도, 두루마리(오른쪽은 진(陳)의 마지막 군주, ▲ 전자건, <유춘도>, 비단에 채색 43 × 80.5 Cm,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
왼쪽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비단에 채색,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이 두작품을 보면 필법이 힘이 있고 막힘이 없으며 마치 명주실같이 섬세하나 모두 용필을 골간으로 하는 전통회화 고유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현종의 피난길(明皇幸蜀圖). 唐. 견본. 세로 55.9센티. 가로81센티. 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그림은 李思訓의 북종화풍 그림에 대한 후인의 모작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사실, 단순한 산수묘사가 아니라 정치적(역사적) 이유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명황]은 바로 당의 현종이다. 그는 [안사의 난] 때, 수도 장안을 버리고 많은 위험을 겪으며 사천성으로 피난을 가는데, 사천의 옛이름이 바로 [촉]이며, 현종이 지나던 땅중 하나가 바로 [행]지방이란다. 그래서 이 그림은 현종의 피난을 묘사한 역사화이기도 한 셈이다. 이 그림은 물론 후세에 임모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표준적인 당대의 [청록산수]라 할 만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렇게 탈색이 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그림은 제작당시엔 훨씬 더 찬연한 녹색을 뿜었을 것이다. 그림속에 직립한 산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하늘거리는 구름은 음양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인물과 산수의 대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감상자는 우선 산수의 형세에 도취되기 마련인데, 이는 화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즉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비운의 역사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드러내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 사실이 매우 비극적 사건임에 비해 이 그림에서는 그것이 한여름 날에 즐겁게 산을 유람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대의 산수화: 당대는 종교화, 궁정화(인물화, 여인화), 동물화 등이 발달한 외에도, 자연을 묘사한 산수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의 산수화는 담채가 아니라 색깔을 원형대로 집어넣고자 했으므로 [靑綠山水] 도는 [金碧山水]라 한다. 이러한 산수화는 아주 짙은 청록색을 칠하고 때로는 금분을 덧입히기도 해서 화려한 효과를 꾀하였다. 당대 이후 산수화는 산수의 규모와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물을 작게 묘사하였다. 당시에는 산수화들이 대개 병풍의 소재로 쓰였다 한다.
◆한희재의 밤 잔치(韓熙載夜宴圖). 顧굉中. 南唐(실제로는 宋代의 모본. 부분)
한희재는 남당의 후주 李昱 시대의 재상이었다. 그는 관직에서 벗어난 후 울분을 삭이기 위해 날마다 잔치를 열고 매우 퇴폐적인 일상을 보냈다.(속세 를 떠나는 대신 속세속에서 세상과 등지고자 했다). 그의 밤 잔치가 너무나 소문이 나자 궁금해진 왕(이욱)은 궁정화가 고굉중을 그 파티에 보내 스케치를 해오라 명했다. 그리고 왕은 실수로 이 그림을 왕실 소장 목록에서 삭제하지 않았다. 송대의 徽宗은 이 그림을 평하면서, 그림의 내용보다 송과는 관계가 편할 리 없는 남당 후주 이욱의 이 특이한 취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 실수로 이러한 특이한 그림(비유가적이며 퇴폐적인)을 목록에서 빼내지 못했다. 이후로 "한희재야연도"는 인물화의 소재로써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다수의 작가들에게 모방되었다. 그림은 두루말이의 가장 오른쪽 부분이어서 전체그림을 실감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퇴폐적인 눈빛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들을 감상하고 있는 수염긴 남자가 바로 한희재이다. 향락에 젖어있는 남자들과 교태로운 여성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이 그림은 남의 사생활을 은밀하게 보는 즐거움을 감상자에게 선사함으로써 일종의 관음증을 유발시키는데, 이것은 인물화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효과였다. 이 두루마리에는 한희재가 모두 다섯 번 등장하는 데 각각의 씬마다 이야기를 분할하기 위해 작가는 산수화병풍을 둘러놓았다. 이러한 그림 속의 그림(병풍화) 구조는 중국화에서는 감상자의 시선을 다차원화시키는 매우 독특한 구조였다.(우홍, 《그림속의 그림》참조) 여기서는 그림의 도입부만 보인다. 두루마리의 또다른 장면들 보기: 취해서 직접 북을 연주하는 한희재, 여인들에 둘러싸여 침소에 든 한희재 장면.
◈ 당에 이르러 오도자(도현)가 다시 필묵기법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 오도자의 필법은 격정적이고 변화가 풍부한 것으로 리듬감 같은 것이 있었다. 이 같은 필법은 과거의 필선들이 딱딱하고 경직됐던 것에 반하여 동세가 더욱 강하고 변화가 풍부한 필선이라 말할 수 있다. )수와 당 이후 산수화의 발전에 따라 수묵의 용필기법은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형호(오대(五代)의 화가) - 『필법기』의 육요(기, 운, 사, 경, 필, 묵)에서 필과 묵을 표현기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로 삼았다.
송(宋) 시대
중국에서는 '육조(六朝)의 서(書), 당(唐)의 시(詩), 송(宋)의 화(畵)'라는 말이 있다. 화원이 융성한 것은 송조가 최고였으며, 한림 도화원을 설치하고 화인을 우대하였다. 북송말의 휘종과 남송초의 고종은 궁정 예술가를 양성하여, 송나라의 예원을 크게 번성시켰다. 문인화 예술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坡)와 미불과 같은 이름높은 사람이 나타났다. 북송 시대에는 오대에 이어 형호와 관동의 뜻을 따르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나 화북 산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이상주의의 2대 화풍이 성행하였다. 전통적 사실주의는 앞 시대의 전통을 지키면서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표현하는 원체화풍의 화조화와 북송 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켜 나갔다. 이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포착하여 그 속의 생명감과 인간을 이어주는 자연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흥 이상주의는 기성 형식에 거리낌 없이 마음의 이상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문인·사대부·승려 등 재야의 비전문적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수묵 담채화풍의 화자와 사군자, 남종 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아울러 성립해 나갔다. 그들의 화풍은 자연을 단순하게 추상화하여 수묵화의 형식으로 이상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이러한 양대 양식은 원말사대가를 거쳐 이사훈(李思訓)과 왕유(王維)를 시조 로 하는 이른바 남북 2대 화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성의 「청만소사도(晴巒蕭寺圖)」와 같이 치밀한 붓질과 빈틈 없는 구도에 의한 산수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성의 뒤를 이어 범관, 곽희, 허도녕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 더욱 다양한 화북 산수화가 나타났다. 곽희(郭熙 )는 11세기 산수에 능하였으며 고원, 심원, 평원의 삼원 화법을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의 시초이다. 또 허도녕의 「추강어정도(秋江漁艇圖)」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서 치솟은 산의 기상과 필력은 화북 산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강남에 자리잡았던 남송에서는 화원을 중심으로 강남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리는 직업 화가 화풍이 성행하였다. 주변 경치에 어울리는 화법을 쓰다보니 자연히 강남 산수풍의 소경(小景) 산수로 회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휘종은 제왕 화가로서 유명하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필선으로 그린 휘종의 산수화풍은 후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예술을 낳은 원류가 되었다. 마원은 이당(李唐)의 화법을 흡수하여 자기류의 화풍을 성립시킨 화가이다. 그의 산수화풍은 일본 산수화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초기 이상좌, 강희안에도 미쳤다. 하규, 이적은 용필과 용묵이 뛰어나고 각기 개성적이다. 목계는 문인화의 명수로서 당대의 대표적 화가이다. 선종 승인답게 번잡한 것에서 벗어나 마음 속의 것을 일필로 표현하였다. 그의 「소상팔경도」는 기존의 준법이나 필법을 따르지 않고 간결함과 상징성으로 표현하여 한 차원 높은 수묵의 미를 살리고 있다.
◆계산을 지나는 나그네(谿山行旅圖). 宋. 范寬. 견본묵화. 세로 206.3센티. 가로 103센티. 대북고궁박물원.
범관은 송초 3대가의 하나로, 섬서와 관중 일대의 준령을 볼륨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드라마틱한 풍경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산행려도]를 보면 중앙에 거대한 산을 배치하고 좌우로 낮은 산이 도열하고 있으며 앞쪽으로 몇 그루의 소나무를 두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화북 산수화파의 구도인데, 오른쪽 하단부에 나귀를 끌고 가는 인부들에 의해 산세는 더욱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 작품의 작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았었는데, 오른쪽 하단 숲속에 나뭇잎들 사이에 이름을 써넣은 것이 발견됨으로서 범관의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사실 元代에 이르기 전까지 그림에 題畵詩를 넣거나 심지어 작가의 싸인이나 낙관을 넣는 것도 관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관은 섬서성에 살았는데,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는 관중평원에 산재한 거대한 산봉우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 봉우리는 매우 섬세한 준법(붓의 터치)으로 암벽의 질감과 봉우리의 나무들을 표현했다. 이 봉우리의 묘사에 사용된 우점준(빗방울 모양의 터치)와 부벽준(도끼자국같은 힘있는 터치)은 후대 화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른 봄(早春圖). 郭熙. 北宋.
곽희는 중국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조선의 안평대군도 곽희의 그림을 10여편 이상 소장했을 뿐 아니라, 조선 초의 대 화가였던 안견의 [夢遊桃園圖]는 곽희의 구도와 준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곽희의 준법은 [卷雲준]이라 불리는데 붓의 터치가 둥글둥글 마치 말린(卷) 구름과 같다는 뜻에서이다. [조춘도]는 봄이 막 도래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눈이 녹고 산에는 온기가 서려 약동하는 듯하며 수목은 막 발아하려는 듯 움트고 있다. 이 역시 [대관산수]의 일종으로, 봄이 상징하는 자연의 미덕을 화폭에 담고자 한 것이다. 곽희가 나무를 그리는 기법은 [게의 발]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나무들은 모두 곡선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 가지는 마치 게의 발 같다.
▷안견(朝鮮 초)의 그림과 비교
◆청명절의 개봉시내(淸明上河圖). 張擇端. 北宋. 견본담채. 세로 24.8센티. 가로528센티.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송대는 한편 도시가 발달함으로써 도시의 삶을 표현한 많은 사실적 그림이 나오게 된다. 원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나 여기서는 부분만 실렸다. [청명]은 봄의 청명절이요, [상하]는 송대의 수도 변京(오늘날의 開封)을 가리킨다. 이 긴 두루마리 그림은 교외로부터 시작하여 강을 따라 가며 기슭의 풍경이 상세히 그려지고 점차 성안의 풍경을 바뀌어간다. 이것은 마치 감상자가 영화를 보듯이 당시 수도의 삶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눈 내린 계곡의 백로 한 쌍(雪灘雙鷺圖). 馬遠. 南宋.
南宋의 그림은 北宋에 비해, 제재 대상 장면 화면이 모두 작아진다. 북송의 산수화가들은 눈앞의 장관을 어떻게 작은 화면 속에 다 담아 웅장하게 재현할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남송의 화가들은 눈앞의 자연가운데 자기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한 부분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어했다. 때문에 산수가운데 초점이 되는 대상이 특히 강조되고, 세밀 묘사가 더 정교해진다. 의식적인 서정적 詩意 역시 북송대보다 더 농후하고 선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북송의 그림보다 남송대 것이 주제와 개념이 더 명확해지고 화가들의 개성 또한 더 뚜렷해진다. 마원은 남송대 산수화를 이끈 사람중의 하나로, 이 그림에서는 먼 산을 배경으로 중앙에 눈을 이고 약간 무겁게 아래로 내려간 듯한 가지를 주제화시켰다. 하단에는 양편에 눈과 어울릴만한 백로 두 마리를 배치하였는데, 이런 구도는 매우 남송적인 섬세함을 보여준다.
** 송대를 기점으로 수묵산수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당대의 [청록산수]는 오대 이후 수묵에 의해 담담하고 고아한 풍격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수묵산수의 발전을 촉진한 것은 신유가(주자학)의 영향에 크게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북송 때는 특히 자연은 크게, 인물은 개미처럼 아주 조그맣게 묘사한 大關山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자연의 전모를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그리고 理와 氣의 관계로 이해되는 자연과 사물들이 모두 氣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원(元) 시대
회화는 시대 양식으로서 간단하게 추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런 양식, 형식의 혼란은 명시대의 절파, 오파, 원파등을 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 초기의 산수화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 운동에서 시작되어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었다. 그러나 북송 산수화풍의 양식이나 묘사 형식을 적당히 취해 화면을 구성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형태나 기법에 대해 지나친 편집 경향만 띄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등을 원 때의 4대가가 배출되기 전까지 계속된다. 원사가(元四家)는 오대의 동원, 복송의 거연에 기초를 두고 발전하여 필묵을 중시하고, 서법과 시문을 결합하였다. 이는 원래 산수화의 주류로 명·청 양대에 걸쳐 영향이 지대했다. 도교와 불교 관계 인물화인 도석인물화에 있어서는 원 초기의 안취등이 유명한데, 필선의 변화가 심한 인물묘사와 환상적인 화면 느낌은 원대 회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조자앙, 안휘 등이 유명하다.
◆작산과 화산의 가을(鵲華秋色圖). 趙孟부. 元. 지본색채. 세로 28.4센티, 가로93.2센티. 대북고궁박물원 소장.
조맹부는 글씨 뿐 아니라 산수화로써도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원대의 화가이다. 그의 [작화추색도]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山東省 濟南 교외의 鵲山과 華不注山의 풍경이다. 이 두 산은 하나는 뾰족하여 삼각형같고, 하나는 둥글둥글 무뎌서 만두같다고 하는데, 이 슬라이드에는 鵲山의 모습은 들어있지 않다. 조맹부는 비교적 사실과 가깝게 이 산들을 묘사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청나라의 건륭황제가 산동(山東)에 와서 이 두산을 보고는, 북경으로부터 이 그림을 찾아오라고 해서 그림과 실제 풍경을 비교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두루마리의 초입에 유력한 소장자였던 건륭황제의 어필로 제목이 달려 있다. 이 그림은 담담한 붉은 빛으로 가을의 나무를 표현하였다. 산자락의 시내나 대나무 등은 필법이 모두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 [물흐릇는 듯]한 필법은 원대의 문인화가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가 되었다. 송대의 정교하고 엄격한 사실풍이 지나간 뒤, 원대의 문인들은 회화가 더욱 자유로와지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반드시 그림이 실물과 같아야할 필요는 없으며, 묘사과정에서 작가의 특수한 취향을 반영시키고자 했다.
*그림의 중간중간에 빽빽하게 찍혀있는 낙관의 흔적들은, 서양그림과 달리 중국그림에만 있는 특이한 전통을 반영한다. 중국화에서는 화가 자신 뿐 아니라, 그림에 권위를 실어줄 수 있는(혹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권위자 혹은 권력가들이 그 그림을 감상 또는 소유했다는 자취를 남기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종종 그림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는 가치를 부여했지만, 역설적으로 원작의 감상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부춘에 살고 지고(富春山居圖). 黃公望. 元. 지본색채. 대북고궁박물원 소장.
역대의 산수화 중에서 가장 많이 모방된 작품이다. 그만큼 후대인들에게 산수화의 모범으로 칭송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황공망의 그림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경치를 펼쳐보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그림의 소재가 된 富春江 언저리에 오래 기거하였던 작가는 눈에 이미 익은 강가의 풍경을 오랜시간 동안 긴 그림에 담았다. 작가의 놀라운 저력은 긴 그림 내내 일관되는 작가의 감각과 필치에 있다고 할 것이다. 작가는 그다지 화려하지도 자세하지도 않은 산세와 강물의 고요한 흐름을 통해 감상자를 그윽한 인문의 경지로 인도한다. 터치에 활용된 준법은 주로 피마준이다.
명(明) 시대.
중세까지 길러진 회화적 정신은 명대에 이르러 실제로 발로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심 사상은 동기창(董基昌), 막시룡(莫是龍)에서 시작된 남화, 북화의 2대별이다.남화와 북화는 지역의 풍토나 사람의 기질에서 연유되며 화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북종 화가들의 대부분은 원체화풍을 따라고 남종 화가들은 원체화 외에 몰골이나 수묵 담채를 즐겨 그렸다. 동기창(董基昌)은 남종과 북종을 논하고 남화 쪽을 숭상하는 논지를 펴서 남화 일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 동기창은 전통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변형의 중요성도 아울러 강조하였으나 후계자들이 전통에 집착하여 그들의 화풍은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문인화는 장감의 소주 출신의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의 출현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 심주는 관직으로 나가지 않고 평생을 예술에 경주(傾注)하여 새로운 명대식 산수화를 창출시켰다. 심주는 문인화에 철학적 사고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 하에 깊이 있는 산수 표현에 자신의 철학적 사고와 인생관을 부여하였다. 「야좌도(夜坐圖)」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림의 반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나머지 반은 산 속에서 자지 않고 좌선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여기에 많은 친구들의 찬문이나 본인의 글이 곁들여져 학구적인 회화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을 오파라 했다. 그가 화가로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은 제작 문징명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도 역시 정갈하면서 회화적 깊이가 있는 문인화를 많이 그려 오파식 그림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진계유, 심주, 문징명등은 동기창과 함께 명말(明末) 4대가이다.
◆고목과 물 찬 시내(古木寒泉). 文徵明. 明.
명초 아카데믹한 화풍을 이끌었던 吳派(沈周 唐寅 등)의 대표화가의 작품이다. 沈周의 가장 출중한 제자인 문징명은, 진지한 기질과 근엄한 창작태도로 명대를 대표하는 산수화가로 꼽히는데, 그는 균형잡힌 구도, 세심한 필법, 고상한 채식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한마디로 부드럽고 우아하다. 당송대의 청록산수는 조맹부와 문징명의 손을 거치며 바뀌어, 짙은 채색과 강렬한 색의 대비를 누그러뜨리고 石淸, 石綠, 朱色을 써서 부드럽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히 수묵만을 쓰던 문인화 초기의 표현기법을 보완해주었다.
◆포도그림(墨葡萄圖)와 게 그림(黃甲圖). 徐渭. 明.
인생을 불운과 좌절로 서위는 삶의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박복함에 대한 비애를 다룬 것이 그림의 태반이다. 묵포도도의 화제는 그림보다 더 시적이고 철리적이다. 또한 황갑도의 화제를 보면, "벼익은 강촌의 게들은 살찌고 도끼 날 같은 집게발로 진흙 속을 파고든다/ 한 마리를 종이 위에 뒤집어 놓아 보면/ 바로 앞에 동탁의 배꼽을 볼 것이다." 탐욕스런 東漢의 권신 동탁을 오만한 게에 비교하면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자기의 배를 불리는 탐관오리를 비난하였다.
명 전반기를 휩쓴 오파의 아카데믹한 화풍과 정반대의 길을 간 사람들이 명 후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시조가 된 사람이 바로 명말의 徐渭이다. 이들은, [중국의 표현주의자들]이란 별호답게, 전통적 방법을 깨고 독특한 방법으로 일가를 이룬 작가들이다. 이들(명말청초 4승)의 등장은 곧이어 양주화파를 낳게 했고, 양주화파의 화풍은 허곡이나 오창석 등으로 계승되며 근대화의 초석을 닦았으며, 마침내 제백석이나 이가염등의 현대화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청(靑) 시대
초기의 화단은 남화 일색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으나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법은 섬세하나 약하고 주제는 산수는 화조와 사군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창적인 화법과 사고로 그림을 그린 왕시민, 왕감, 왕휘 그리고 명승으로 그림으로 잘 그린 팔대산인, 석계, 석도등이 유명하다. 석도는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다. 황산을 그린 여러 장면에는 실제의 경치에 충실하기보다는 회화적으로 아름다운 구도와 먹과 멋진 조화를 이룬 담채등 무한한 변형이 이루어진다. 석도의 친구였던 팔대산인도 분출하는 창의력을 작품에 담았는데 「성난 물고기」나 「두 마리의 까투리」등을 보면 산수보다는 화조, 영모등 분야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필력이 날카롭고 핵심을 잘 포착하여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 화단은 산수화보다 화훼, 영모 등의 화조화에 치중되었고, '양주팔괴(楊洲八怪)' 라는 괴이한 작가들은 독창적인 화풍을 보였다.
청말의 임백년, 오창석, 오역등도 좋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연꽃과 작은 새(河花小鳥, 오른쪽). 八大山人(朱탑). 淸. 종이에 담채.
팔대산인은 승려의 신분으로, 단순한 필치의 동물화 또는 정물화를 통해 높은 정신적 세계를 표현하였는데, 실은 명조 황실의 후예였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마치 사람이, 그것도 고독하고 분노를 담은 사람이 서서,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명황실의 후손으로서 청의 통치를 겪는 그의 울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저항화인 셈이었다. ([조는 새] 왼쪽 그림 참조) 팔대산인의 그림은 중국수묵화가 도달할 수 있는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어떤 복잡한 조형도 한두번의 단순한 선묘만으로 생동적감있게 표현해냈다. 이러한 그림은 작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고도의 필법(손재주)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작가와 그림의 완벽한 융합으로 가능한 것인데, 그래서 그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사실상 작가 자신의 표정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그림....팔대산인의 고양이 그림. 캐리커쳐와 같이 대상의 특징만을 포착하여 순식간에 완성한 그림이다.)
◆산수(畵帖 중 한 페이지). 石濤(朱若極). 淸. 종이에 채색.
석도는 [畵語錄]이라는 화론서를 낸 이론가로도 유명한데, 그는 "무릇 그림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夫畵者, 從於心者也"라 하여 독자적 개성을 중시하였으며 또한 화론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고대의 대가들의 수염과 눈썹은/ 나의 얼굴에서 자랄 수 없고/ 예전 사람의 폐와 내장은/ 나의 배와 창자에 들여놓을 수 없다". 이 글은 석도가 자신의 법을 따를 뿐 고대 화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석도는 팔대산인과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데, 이들은 모두 명말에 유행한 동기창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취향대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석도의 그림은 黃山(실제로 황산에 오래 거하였다) 등 실제 경치에 근거를 둔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는 실제의 경치에 충실하기보다는 회화적으로 아름다운 새로운 구도와 무한한 변형을 구가했다. 먹색과 멋진 조화를 이룬 담채로 인해, 그는 가히 색의 마술사임을 입증하였다. 왼편의 그림을 보면 산세가 춤추듯이 너울거리며 준법 대신 분홍색의 점들이 흩뿌려져 있어 그가 전통적인 원의 4대가식 표현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 양주화파: 청 중기에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부유하고 번영을 구가한 도시중 하나가 양주인데, 양주는 특히 염전사업을 통해 거부가 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 거상들은 획득된 재부를 자기 정원을 꾸미는 데 쓰기도 했지만, 화가를 청해 그림을 그리게 하는 데에도(즉 문화사업)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이러한 수요에 따라 한 때 많은 화가들이 양주로 몰리게 되었다. 특히 양주의 거상들은 발랄하고 생명력있는(엄격하고 무거운 그림보다) 그림들을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양주에서 자유로운 개성을 담은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틀이 나올 수 있는 결정적인 여건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고인의 화법을 임모하지 않음으로써 특이함(기괴함)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생활자체도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揚州八怪]라 불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8명이 넘으므로 요즈음에는 그저 [揚州畵派]라 칭한다. 그중에도 금농과 鄭板橋(정판교의 대나무 그림)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양주화파의 그림은 주답이나 석도의 표현법을 본받았지만 그들과 같은 현실비판적 분위기는 소멸되어 있다. 그러나 명말 서위에서 주답 석도로 이어지는 감상주의는 이들에 와서 진일보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의 개성적 화풍은 청말민초의 근대회화로 나아가는 교량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들이 개성적 화풍을 구가하던 시기는 또한 袁枚가 성령설을 전개하던 시기와 일치하여 엄격한 보수적 인문주의의 한편에서 또다른 개성주의의 싹이 다각도로 생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노니는 물고기(魚樂圖). 金農. 청대.
그림은 [양주화파]의 대표적 작가인 금농의 그림이다. 금농의 글씨는 특히 칼로 파낸 듯 한데, 이것은 北魏 시대의 석각글자를 본 딴 것이다. 그는 마치 어떤 화파도 본받지 않으려는 듯이, 자기의 독특한 글씨처럼, 그림에서도 매우 천진하고 소박한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기존의 화법으로 보자면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민간의 설 장식 그림(年畵), 혹은 판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송원대의 문인화와 달리 다양한 색깔을 쓰고자 했으며,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에 그림에 실고자 했다. 또한 그는 민간에서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를 화제로 달기를 좋아했다. 이 그림에서도 물고기의 형상과 동작이 매우 자유롭게 천진난만하게 묘사되어 소탈한 글씨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마리의 말(百駿圖). 郎世寧(카스틸리오네). 淸. 대북고궁박물원 소장.
카스틸리오네(중국명 낭세녕)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로 강희제 치세에 중국에 와서 건륭제 치세까지 51년간 중국에 머물었던 화가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기초를 닦은 서양화 기법을 바탕으로 중국에 와서 다시 중국화를 배워 최초로 두가지 스타일을 혼합해 새로운 형태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러한 스타일은 사실적인 그림을 중시한 궁정의 양식에 맞아 황제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궁정소속의 화원화가들이 그의 화풍을 한때 본받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은 투시(엄격한 원근법 적용)와 사생(사실적인 선명한 윤곽과 색상)을 서구식으로 하였으며, 전통 중국그림과 달리 외곽선(선묘)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라든가 묘사대상의 배치(어울림)이라든가, 글씨를 화제로 넣는다든가 하는 데서는 중국식을 따랐다. 당시에 전통화법을 강조하는 많은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이단시하고 비난하였다.
근현대
중국 근대 회화는 청의 말기부터 시작되는데 그 때 궁정화가가 화단의 중심이었던 풍토에서 벗어나 각지에서 유력한 화가의 배출을 기다리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제일의 개항 도시가 된 상해에서는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여기에서 조지겸(趙之謙)과 임이, 오창석(吳昌碩)이 있다.
임이의 영향은 청말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서 상해 화단 전반에 나타났으며 오창석의 영향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전반에 전통 화풍을 새로운 시대에 접목시긴 화가로는 제백석(齊白石)과 황빈홍(黃賓虹)이 있다. 북경의 화단에서 명성을 얻은 제백석은 팔대산인과 석수, 오창석등의 감화를 받으며 독특한 화풍을 수립하였다. 미술학자이기도 했던 황빈홍은 당송 시대 회화의 깊은 맛을 살린 산수를 그렸다. 이 시대 이후로는 프랑스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독자적인 중국 전통 회화를 시도한 서비홍(徐悲鴻)이 있으며, 장대천(張大千)도 있다. 영남화파라고 일컬어졌던 광동의 고검부(高劍父), 고기봉(高奇峯) 형제는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풍과 전통 회화 양식의 통합을 기도했다. 이밖에 20세기 전반의 동향으로는 노신(魯迅)의 제창으로 이루어지는 목각화 운동, 대중과의 의사 소통을 주안점으로 한 새로운 중국 회화로의 방향도 주목되었다.
◆붉은 매화(紅梅圖). 吳昌碩. 中華民國 초기.
오창석은 평생을 서법과 전각 연구에 바친 근대 화가이다. 그는 단순한 색조와 강렬한 대비효과를 즐겼으며, 서구식 정물화를 중국적으로 소화해 독특한 취향의 남방식 그림을 창조해냈다. 그의 그림에는 문인적인 정취(고고함)와 민간의 취향(화려함)이 겸비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그림의 주요 구매자들이었던 상해부호들의 취향과 부합되어 매우 환영받았다. 오창석의 그림은 전통 중국화가 근대문화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후대의 제백석이나 이가염 또한 오창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구한말의 한국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오창석과 더불어 또 다른 海上畵派(상해화가들)의 그림을 보려면 여기를.... [등나무의 두 마리 새(紫藤雙鳥). 林伯年, 淸末] 파격적인 구도와 자유로운 발묵, 대담한 색감이 당시 上海 부호들의 취향을 반영한다.
◆새우그림. 齊白石. 中華民國 초기.
청이 멸망한 후 중국화를 계승한 작가들 중 가장 성취가 높다고 인정되는 제백석의 그림은 여러 가지이나 그중에도 작은 동물들, 특히 새우, 게, 물고기, 개구리 등의 묘사는 매우 독특하다. (제백석의 새우 그림) 이런 소재들은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과 관련이 있다. 제백석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자수성가로 대 화가가 되었기 때문에 비 현실이고 고전적인 화풍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부 치하에서 추앙을 받았다. 그는 팔대산인(주탑)의 그림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으며, 여기에 색깔을 보태 색다른 풍격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그가 그림 속에 일상의 소재를 통해 민간의 삶을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그린 산수화도 지나친 기교를 배제한 채 소박하게 자연의 특징만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40여 년의 북경생활동안 주변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동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오로지 시와, 전각과 그림에만 전념했는데, 그는 중국화가 중에도 드물게 시, 서, 화, 전각 네 방면에서 고루 성취를 보인 작가였다. 1957년 사망 후, 1962년 세계 10대 '문화거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산수도(設色山水, 왼쪽). 黃賓虹. 1950년대.
그림 속 풍경은 사실과 달리 화가의 마음속 풍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황빈홍은 북송과 원대 문인화풍 추종을 추종한 보수적 그림을 그렸지만 통찰력 있는 전통회화 형식의 연구를 통해 전통회화의 현대화를 촉진한 선구적 화가였다.
◆리강의 봄비(리江春雨). 徐悲鴻. 1937년.
서비홍은 국비유학생으로 유럽에 다녀와, 귀국 후에는 유화보다 중국화에 진력한 화가로, 비록 서양적 화법으로 중국화를 그렸지만 소재를 중국에서 취함으로써 가능한 중국적 체취를 풍기려고 하였다. 그는 귀국 뒤 북경의 중앙미술학원 학장직을 맡으면서 미술교육 행정가로서도 많은 역할을 하였는데 반대를 무릅쓰고 소학교만 나온 제백석을 교수로 모셔오는 등 파격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데생에 뛰어나 그 기초 위에서 중국화를 그렸지만 결과는 제백석처럼 전통적 양식을 따른 사람들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의 그림 가운데 유명한 것은 좀 더 중국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그가 집착한 말 그림 시리즈의 하나이다.(서비홍의 말그림, 1940년) 순수하게 흑백만으로 그려진 그의 말 그림은 원근법이나 명암 등 서양화의 데생 방법을 온전하게 반영하였으며, 발묵(붓자국이 종이 위에서 퍼지는 효과)을 매우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이렇게 질주하는 말 그림들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비상을 바라는 그의 여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중국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높이 샀으며, 자신의 작품에서 또한 선묘와 명암법을 결합시키는데 주력하여 사실주의적 화풍을 체현하려 하였다. 중국과 서양양식을 결합한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집착은 1940년대에 이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중국화에서 제백석의 전통적 화풍이나 林風眠(대표작, [목욕하는 여인] 그림보기)의 모더니즘적 성향과 구별되는 리얼리즘적 경향을 가진 일군의 후배(그중 대표적 작가 蔣兆和, [꽃파는 처녀 ]그림보기)들을 탄생시켰다. 이런 그림들은 특히 사실적 혁명화의 기법으로서 70년대까지 대륙에서 환영받았다. 위의 그림은 탁월한 발묵의 기법을 응용하여 계림 리강의 봄비 내리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리강 경치(리江天下景). 李可染. 1950년대.
이가염은 현대화가로서 여러 저명한 선생들에게서 배워 매우 복합적인 화풍을 보였지만 그가 창안한 몇가지 특색있는 화풍중 하나는 북송대 화북산수(범관 등)의 괴량감(볼륨)을 살리는 것이나 간결한 인물묘사, 물소묘사 등 선배들의 화풍이나 전통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특히 그는 남쪽의 산하에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계림의 풍광 등은 후기에 가장 좋아했던 주제였다. 그림에 보이는 것 역시 계림의 산수 풍광을 묘사한 것인데, 물위에 떠있는 어부들의 배를 최소한으로 묘사하고 우뚝 솟은 산을 강조한 것은 송대의 '대관산수'를 계승한 화풍이라고 하겠다. 특히 이 그림에서 그는 먹의 농담을 짙게 함으로써 대상을 강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산수화에서 짙은 흑색과 붉은 색을 과감하게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수묵화를 더욱 웅장하게 현대화시켰다고 할 만 하다. 이가염은 또한 물소와 아이를 그린 牧牛圖 시리즈를 통해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담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72세에 그린 牧牛圖 보기.
◆해거름의 돛단배(晩帆). 張大千. 臺北.
장대천의 말기 그림. 장대천은 70여세 쯤 전통발묵법을 토대로 추상 표현주의의 기법을 원용하여, 커다란 화면에 푸른색이 장쾌하게 퍼지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의 이런 대형 산수화들은 대부분 장개석의 패주 후 대만으로 간 그가 고향인 대륙 땅을 그리워 하며 그린 것들이다. 때문에 풍경은 사생적이기 보다는 마음에서 구성된 허구적 경치, 즉 사의적 경지를 드러낸 것이다.
☞ 필묵은 동양화가들이 현실대상을 반영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해낸 것이다. 이러한 필묵은 실제적인 창작활동의 과정을 거쳐 점차 완전한 것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반영을 떠난 필묵은 독립된 의의를 가질 수 없다. ☞ 고대의 초상화가들은 그들의 창작과정을 통해 축적되어진 필묵 표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의 피부색, 얼굴의 형태, 전반적인 표정 등을 자세히 살핀 후 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적절한 용필을 사용해야 한다.'라고...이것은 용필의 방법은 생활 속에서, 대상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대상을 표현하는 '묘법(描法)'의 발명은 화가의 공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생을 통하여 그 상황과 성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 후에 비로소 개괄되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작가인 오작인은 들소를 그리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실험과 모색을 한 결과 고도로 축약된 필묵으로 들소 특유의 모양을 표현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필묵은 화가가 특정한 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바로 생활의 반영이지 어디에나 적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만고불변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