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 상주보) ① [삼강나루-영풍교-상풍교-상주보]
2020년 10월 16일 (월요일) [동행]▶ 이상배 대장
☐ 삼강나루→ 영풍교→ 상풍교→ (낙동강칠백리공원)→ 경천교→ 도남서원→ 상주보
[1] * [삼강 출행]▶ [점촌 한학수](아침식사)→ [삼강]→ 풍양면 청운리 삼거리→ 구룡교→ 하풍리[쉼터]→ 낙동강→ 영풍교(-923번 도로)→ (영강 합류)→ 풍양 낙동강 제방길[하풍제]→ (길고 긴 제방 길)→ 상풍교(강변식당)→ (택시)-[낙동강 칠백리 빗돌](사벌면 퇴강리) 왕복→ 다시 상풍교→ [낙동강 제방[東路]→ 경천교→ 자전거박물관(-경천대)→ (상주보 경천호)-[도남서원]→ (만촌 안휘덕 부부 마중)[경천섬-경천호반 테크 환상(환상(環狀) 종주]→ [점촌](샤브샤브식당)→ [旅舍] ←
*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 북동쪽에서 내성천(지보면)과 북쪽에서 금천(산북-산양) 합류
* [상주 사벌국면 퇴강리(낙동강칠백리공원)] ←서쪽의 이안천(외서면)과 북쪽의 영강(문경) 합류
* [낙동강 종주 제7구간] ▶ 삼강→ 상주보
☆…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9구간, ‘삼강나루’에서 ‘상주보’까지 걷는 날이다. 점촌의 이른 아침, 친구 한학수 사장이 숙소로 찾아와서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부인 이경임 여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은 아침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인사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왔다고 하면서, 오늘의 나의 건강한 장도를 빌며,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 정성이 여간 고맙지 않다. 어제의 장거리 여정의 피로가 남아있었지만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왔다. … 아침식사를 하고 난 후, 한 사장은 우리를, 오늘의 출발지인 삼강나루까지 태워주웠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사장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 오늘의 출발점인 낙동강 삼강나루에 도착했다.
삼 강(三江)
예천(醴泉) 풍양의 ‘삼강(三江)’는 세 강이 만나는 곳이다. 안동에서 하회마을 돌아 나와 서쪽으로 흘러온 낙동강(洛東江) 본류에, 내성천(內城川)과 금천(錦川)이 합류하여 흘러드는 곳이다. 백두대간 봉화의 선달산-풍기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영주-예천을 경유하여 흘러온 ‘내성천’은, 북쪽의 문경 동로의 대미산-황장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금천’이 합류하여,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예부터 삼강나루는 문경이나 예천 용궁에서 풍양과 의성을 오가는 길목이다.
삼강(三江) 주막
삼강(三江)은 행정구역상 서쪽에는 영강과 금천 사이 문경시 영순면(달망산)이요, 동북쪽은 내성천과 낙동강 본류 사이 예천군 지보면(비룡산)이며, 동남쪽은 예천군 풍양면(대동산)이다. 삼강나루의 주막(酒幕)은 예천군 풍양면(삼강리)에 있다. 2004년 2월 두 지역을 잇는 콘크리트 삼강교가 생기고, 삼강주막을 국민관광지로 개발하여, 옛날의 호젓한 정취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삼산(三山)과 삼강(三江)의 지형이 변한 건 아니다. 풍양과 문경시 영순면과 연결되는 현대식 교량 삼강교 아래 관광용 달망교도 있다. 여기 낙동강 본류에 유입되는 내성천과 금천은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내성천(乃城川)
삼강(三江)으로 유입되는 내성천(乃城川)은 길이 109.5㎞. 낙동강의 제1지류이다.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백두대간 선달산(1,23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봉화—영주를 경유하여 예천군 지보면과 문경시 영순면 경계에서 금천(錦川)과 합류하여 낙동강 본류[三江]로 흘러든다. 하천 상류로부터 낙화암천·용각천·서천·한천 등의 지류들이 내성천으로 흘러드는 데, 막바지에서 금천과 합류한다.
우선 내성천을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 유적지와 자연 환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내성천 최상류에는 천 년 고찰 부석사(浮石寺)가 있고, 소백산 죽계(백운동)에는 도학(道學)의 발원처라고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이 있다.
영주 부석사 (榮州 浮石寺)
백두대간 봉황산 품에 자리한 부석사(浮石寺)는 화엄경이 펼치는 정토(淨土)의 세상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석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은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 내부에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고 전한다.
무량수전無量壽殿) ― 안양루(安養樓)
한편,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義湘大師)를 흠모하여 당나라에서 따라온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이 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고색창연한 문루인 안양루(安養樓) 또한 걸작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이는 소백산의 노을은 가히 신비롭기 그지없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에는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부석사에 머물면서 부석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 7)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통(華嚴宗統)을 이어받았고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 머물렀다.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 내성천(乃城川)의 상류, 영주시 순흥에 백두대간 소백산 국망봉 아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그가 평소에 흠모하던 고려 말의 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고자 세운 것이다. 이곳 출신(순흥 안씨) 안향(安珦)은 고려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을 최초로 도입한, 우리나라 유학의 원조이다. 안향의 영정(影幀)을 서울에 있는 종가에서 옮겨오는 한편, 송나라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學規)를 본받아 서원을 건립했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안축은 죽계의 아름다움을 읊은 경기체가「죽계별곡(竹溪別曲)」을 썼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전경(全景)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노력 덕분이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으로 하여금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에서 ‘紹修’(소수)라고 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임금이 친히 쓴 ‘紹修書院)’(소수서원) 현판과 함께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내렸다.
명륜당(明倫堂)
직방재(直方齋)
☆…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유학(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가히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발원처라고 할 수 있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와 후세 교육(敎育)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 …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경렴정(景濂亭) ; 서원 입구
경석(敬石)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예천 용문의 초간정(草澗亭)
* [용문 초간정(草澗亭)과 예천 권씨 종택] — 내성천 지류인, 예천의 한천 상류에 있는 정자
☆… 국도 34번이 지나는 안동과 문경-상주 사이에 예천(醴泉)이 있다. 예천에는 내성천 지류인 ‘한천’이 흘러내려온다. 예천읍에서 928번 지방도로를 타고, 용문면에서 한천의 지류인 금곡천을 따라 올라가면 상류의 왼쪽에 초간정(草澗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고쳐지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려 1642년(광해군 2)에 후손 권봉의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고종 7)에『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포함한 권문해의 유고(遺稿)를 보관하기 위해서 거듭 고쳐지었다. 그러나 모든 서책과 유고는 예천 권씨 초간종택에 백승각(白乘閣)을 지어 이를 다시 옮기면서 지금은 비어 있는 상태이다.
초간정(草澗亭)
초간정 안쪽에서 들어가는 출입문
‘초간정(草澗亭)’은 용문면 원류마을 앞 금곡천의 물길이 감아 돌아가는 계곡의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바위 벼랑 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지어진 팔작지붕의 정자이다. 내부에는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만들어 사방으로 문을 달고, 그 외의 부분에는 대청마루를 깔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처마에는 남쪽에 ‘草澗精舍’(초간정사), 북쪽에 ‘草澗亭’(초간정), 동쪽에 ‘夕釣軒’(석조헌)이라고 쓴,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가운데 ‘草澗精舍’ 편액은 권문해가 처음으로 정자를 지을 때 박승임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草澗精舍’(초간정사) 현판이 걸린 안쪽의 모습
초간정에서 바라본 원림(園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정자(亭子)의 현판을 잃고 근심하던 종손이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떠오른 정자 앞 늪을 파보았더니 거기서 현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간정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3km 내려가면 용문 금당실 송림 건너편에 권문해의 예천 권씨 종택이 있고, 상류인 동로 방면으로 올라가면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
권문해는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되었다. 도산서당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류성룡(1542~1607년), 김성일(1538~1593년) 등과 친교가 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권문해(權文海)는 일종의 백과서인『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었다. (목판본. 20권 20책) 편찬 직후 선조에게 바쳐 나라에서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중단되고, 1798년(정조 22)에 초간의 7대손인 권진락(權進洛)이 초판을 펴냈다. … 단군 이래 선조까지의 사실(史實), 인물, 문학, 예술, 지리, 국명, 성씨, 산명(山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동물명, 차담(茶談) 등을 총망라한 방대한 저술이다. 원(元)나라 음시부(陰時夫)의『운부군옥(韻府群玉)』의 예에 따라 운자(韻字)의 차례로 배열·서술하였다. 참고한 자료는『삼국사기(三國史記)』『계원필경(桂苑筆耕)』등 우리나라 서적 176종,『사기(史記)』『한서(漢書)』등 중국 서적 15종으로 모두 191종이나 된다. 개인의 저작으로는 양과 질에서 방대하고 뛰어나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을 아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초판의 판목(板木)이 저자의 예천 권씨 종가(宗家)에 현존한다. 최남선(崔南善)의 광문회(光文會)에서 1913년에 9권까지 간행하였다가 중단되었으나, 1957년에 정양사(正陽社)에서 영인(影印)하여 색인을 덧붙여 간행하였다.
* [맑은 물, 깨끗한 모래사장, 내성천(乃城川)] ― 영주댐 건설로 인한 심각한 훼손
☆… 내성천(乃城川)은 백두대간 봉화의 선달산과 소백산에서 사시사철 내려오는 맑은 물이, 봉화의 사질풍화토(砂質風化土)가 공급하는 모래와 더불어 흐르는 모래강이다. 화강암 지층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모래사장이 발달했는데 내성천은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이다. 일찍부터 한국 모래강의 아름다움을 연구해온 오경섭 교원대 명예교수(지형학)는 ‘내성천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해도 손색이 없는 강’이라고 했다.
댐 건설 이전의 내성천(乃城川) 금모래
그런데 지금 그 유연하고 아름답던 내성천(乃城川)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4대강사업으로 강을 가로질러 영주댐[평은댐]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영주댐은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에 건설된 폭 400m 높이 55m 의 거대한 댐이다. 댐에서부터 상류까지 약 12km가 수장되었으며, 이곳에서 400년 간 대(代)를 이어 살아온 '안동 장씨' 일가를 비롯한 수백 가구의 마을 주민들이 고향을 잃었다. 영주댐은 낙동강에 맑은 물을 공급해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2009~2016년 7년간에 걸쳐 1조 1천억이라는 엄청난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질개선용댐’이다. 농업용수공급이나 홍수예방, 전력생산 등의 기타 기능을 다 합쳐도 전체 댐 효용의 10% 정도에 불과하고, 90% 효용은 수질개선을 목적으로 하여 건설한 것이다.
내성천 상류 완공된 영주댐(2016.10)
그런데 댐을 건설하기 전, 환경전문가나 환경단체들이 댐 건설을 반대하면서 제기한 문제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댐 건설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상류의 자연 하천이 완전히 사라지고 댐의 담수에 녹조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 하류는 수량이 적어지고 유속도 느려져서 긴 구간 강안이 메마르고 황량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리고 고운 모래사장이 아름답던, 신비한 생태환경은 상·하류 모두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다. 또한 상류로부터 흘러내려오던 모래가 완전 차단되어 낙동강의 수질환경이나 생태경관도 좋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녹조가 낀 영주댐 담수
이렇게 영주댐은 수질개선은커녕 강물이 마르고 녹조(綠藻)가 생기는 등 낙동강을 더럽히는 존재로 전락했다. 물과 모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아 내성천을 심각하게 파괴하고만 것이다. 이로 인해 7~30m 가량의 모래층을 가진 내성천의 독특한 생태는 사라지고 있다. …
사실 영주댐이 생기기 전 내성천은 약 80킬로미터를 모래를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강이었다. … 내성천 제1의 명승지인 용궁의 회룡포(回龍浦)는 영주댐이 건설되고 난 뒤, 망가진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2011년 내성천을 걷는 사람들. [자료 사진] 박용훈 생태 사진작가
[2013.11.30. 필자가 찍은 회룡포의 내성천] - 왼쪽의 산봉이 내성천 전망대가 있는 비룡산이다
2011년 내성천 회룡포의 모습 [자료 사진] 박용훈 생태 사진작가
2020년 회룡포의 모습. 영주댐 건설 후 아름다운 옛 모습을 잃었다. [자료 사진] 박용훈 생태 사진작가
환경부는 2019년 9월 일단 영주댐 물을 방류해서 자연 상태의 하천으로 되돌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막상 10월 15일 영주댐 방류를 시작하려 하자 영주시와 일부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주민들은 댐 바로 아래에 텐트를 치고 방류를 막았고 영주시도 이를 지원했다. 영주시와 주민들은 댐 방류 결정이 사실상 영주댐 철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면서 댐을 정상 가동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건설에 들어가기 전, 예비다탕성 조사를 치밀하게 하여, 예상되는 문제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그 대책을 세우고 추진했어야 할 국책사업이다. 이러한 거대한 국토개발 프로젝트는 다양한 전문가의 이론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자연은 한번 망가지면 원상으로 회복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졸속으로 이루어진 댐 건설로 인한 수질 오염 등 자연 환경 파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댐을 철거하는 것도 거론되고 있으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정치적 논리는 접근해서는 안 된다. 특정 지역 주민들의 이해(利害) 관계를 넘어, 아름답고 청정한 국토를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개선 방안을 찾는데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국토를 살린다는 큰 시각에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정파의 문제가 아니다. … 강이 죽으면 사람이 살지 못한다!
금 천(錦川)
낙동강의 지류인 금천(錦川)은 백두대간 문경 동로의 대미산-황장산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산북-산양을 경유하여 영순 달지에서 내성천과 합류하여, 삼강에서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 금천(錦川) 유역의 산북과 산양, 영순 등에는 옛날부터 명문가의 후손들이 세거지로 삼아, 살아오고 있다. 신전의 개성 고씨, 현리의 인천 채씨, 산북의 장수 황씨, 진정의 초계 변씨, 의령 여씨, 그리고 안동 권씨, 평산 신씨, 풍양 조씨 등이다. …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고병익 박사는 개성 고씨 출신이고, 채문식 전 국회의장, 채원식 전 서울시경찰국장은 이곳 인천 채씨이며, 황희 정승의 후손인 장수 황씨는 산북에 종택이 있는데, 지금도 명품 가양주 ‘호산춘(胡山春)’을 빚어낸다.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경의병(聞慶義兵)은 고상증 고상안 형제 등 이 금천(錦川) 지역의 선비들이 주축을 이룬다.
금천의 중류에 근암서원(近嵓書院)이 있다. 문경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서원은 당대 최고의 지성(知性)이 모인 곳으로, 고절한 유림(儒林)의 전통과 문향(文香)이 숨 쉬는 곳이다. 근암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옛날 상주목 산양현 근암리)에 있다. 완만한 마을언덕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너른 들판을 사이에 두고 금천(錦川)을 바라보고 있다. …
근암서원(近嵓書院)
☆…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3년에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과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6년에 활재(活齋) 이구(李榘)·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 7위를 배향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지원루(知遠樓) 근암서원 문루
근암서원 강당
¶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예조참판 겸 예문관 대제학 등을 거쳐 조선 한성부판윤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우정의 쌍벽을 이룬다. 이덕형(李德馨)은 임진왜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이순신이 노량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동요하는 수군을 통제하고 수습에 나섰다. 그가 사망했을 때 절친이었던 이항복은 “이덕형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며 글을 지어 그를 기렸다. 그는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었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간이다.
¶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은 홍문관 대제학, 경기관찰사를 지낸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로 문재가 뛰어나, 17세에「病顙駒賦」(병상구부)지었다.「병상구부」는 ‘운명이 매우 기박한 별박이 말(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이 마구간에서 귀를 늘어뜨리고 엎드려 있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만나면 험난한 길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자신의 처지와 신념을 표현한 글이다. … 2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예조정랑을 지냈다. 아버지 홍귀달처럼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직언하다가 참혹하게 곤장을 맞고 거제도로 유배를 갔다. 앞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안 유배 중, 자신의 앞날에 닥칠 운명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만사(輓詞)를 지었다.
‘… 대명천하, 해 먼저 떠오르는 나라에 한 남자가 있었으니, 성은 홍이요, 이름은 (언)충, 자는 직(경)이라. 기껏 반생을 사는 동안 우졸하게 살면서 문자에나 힘썼을 뿐 세상에 태어나 서른 두 해를 살다 끝마치니, 명은 어찌 이다지도 짧고 뜻은 어찌 이다지도 긴가. 옛 무림의 땅에 묻히니 푸른 산은 위에 있고 굽이치는 강물은 낭떠러지 아래에 있도다. 천추만세에 그 누군가 있어 반드시 이 들판을 지나다가 손가락 가리켜 서성대며 길이 슬퍼하리라.’
이렇게 그는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만사를 짓고 4년 뒤에 죽었다. 비장한 감과 비애의 정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영순면 의곡리 묘소 앞에 이「自挽詞碑」(자만사비)가 서 있다. 정희량, 이행, 박은과 함께 ‘시가4걸(詩歌四傑)’로 일컬어진다.
¶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1540~1594)은 본관이 상산이다. 부친 김범(金範)은 경에 밝고 행실이 높았다.(經明行修) 조정에 추천되어 옥과현감을 지냈는데, ‘후계선생’으로 잘 알려진 분으로 당대의 명사였다. 김홍민은 타고 자질이 아름다웠으며, 어릴 때부터 무척 효성스럽고 소탈·담박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총명하고,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독서량 풍부했다. 벼슬이 사간원 사간, 홍문관 응교, 춘추관 편수관, 청주목사를 지냈다. 역사서에서는 그의 행적 가운데 크게 두 가지를 특기했다. 하나는 상소문을 통해 율곡 이이와 박순을 강렬하게 탄핵한 것이고, 하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600명을 규합[충보군]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가규 조익의 임란 일기인『辰巳日記』에 그가 의병으로 활약한 기록이 있다. 1594년 임란 중에 생을 마감했다.『사담집』이 있다.
¶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부림 홍씨로, 영남 남인 출신의 관료이자 학자였다. 성종대의 명신인 홍귀달(洪貴達)이 5세손이며, 아버지 홍호(洪鎬)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른 강직한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의병장 고경명의 손녀이다. 5대조부터 문경에 이거한 후 가문의 세거지로 삼았다. 아버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는데, 아버지 홍호가 우복 정경세(1563~1633)를 스승으로 삼은 것을 미루어볼 때,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통 속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사간원 청직을 역임하면서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당대의 당파간의 견제와 갈등으로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두 번의 응지 상소를 올렸는데, 서인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아 유배되었다. 1660년(현종 1) 곧 풀려나기는 했으나 서인이 집권하는 동안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함창 율곡리(문경시 영순면)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유명한 역사서『휘찬려사』『동국통감제강』을 저술했다.
¶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본관이 안동 권씨, 상주 산양현 근암리(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났다. 18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6대조 권대기, 5대조 권우가 모두 퇴계의 문인(門人)으로, 퇴계의 학문이 가학으로 전승되었다. 권상일은 퇴계를 사숙(私淑)하여「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분리하고 이(理)는 본연의 성이며 기(氣)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조낭관, 만경현령, 사헌부 장령, 울산부사, 사헌부 집의, 지중추부사, 헌납, 집의, 이조참판,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권상일(權相一)은 다른 저서와 함께『청대일기(淸臺日記)』를 남겼는데, 이는 그가 20세가 되던 1702년 1월 1일부터 1759년 7월 1일까지 약 58년, 총 425개월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일상은 물론 친지, 동료, 관직생활 등의 다양한 생활상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청대일기는 권상일이 58년 동안 생활하며 직접 경험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정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남김으로써, 18세기(영조 대) 상주 지방의 향촌생활, 지방선비의 서울에서의 관직생활, 조선후기 지방유생들의 과거 응시 과정, 18세기 영남 사족의 일상과 생활의례, 경상도 지방 특유의 각종 관혼상제 의식을 자상하게 기록하였다. 당시 문인들의 삶과 서원 활동 등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권상일은 164수의 한시와 13편의 산문 등도 함께 실었다.
¶ 활재(活齋) 이구(李榘, 1613∼1654)는 본관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 8세손이다. 스스로 산양처사(山陽處士)라 했다. 황희의 후손인 황시간의 딸인 장수 황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있는 산북에서 살다가 관직에 있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엄중하였는데, 주자와 퇴계의 가르침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으로 이끌고 산양현(산북)으로 내려와 세상의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성리학(性理學)과 왕도(王道)의 실현을 위한 방책을 고구하는 데 힘썼다. 주렴계의 태극설의 뜻을 발휘하여「태극도설」을 지었고 아호의 이기설을 극변하여 이기 변증을 지었다. 이러한 경지는 스승에게 전수를 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득한 것이었다.『활재집』『활재유고』가 전한다.『활재집』은 본집 7권과 부록을 합하여 모두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786년(정조10)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는 일생을 학문에 몰두한 남인계의 산림학자이다. 이만부는 연안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이며, 이조참판과 경기관찰사를 지낸 이옥(李沃)의 아들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수십 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고조는 지봉(芝峯) 이수광이며 처가로는 처증조가 서애(西厓) 류성룡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몰두한 산림학자로 일가를 이루었다. 34세때 서울에서 상주 노곡으로 이주한 후, 1700년의 식산 아래에 식산정사를 짓고 원림을 경영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식산문집』『도동편』『역통』『예기상절』『사서강목』『태학성전』『지서』『누항록』등 방대한 서적을 남겼다. 그런 가운데 식산의 교유관계는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만유, 이현일, 정시한, 이광좌, 이형상, 오상원. 이익 등 당대 남인과 소론은 물론 근기학파와도 폭넓은 교류를 한 주자학의 큰 봉우리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식산의 행장(行狀)에서 “오호라, 선생은 벌렬(閥烈)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운데서 성장하여 출중한 재주를 타고 나셨다. 특별한 뜻을 가지고 서민의 무리 속에서 머물면서 학문의 근원을 밝히는 데 정신을 집중하였다. 부귀와 이욕을 뛰어넘어 도탄 속으로 들어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시면서 즐기기를 가축이 풀을 좋아하듯이 하였다. 큰 자취를 맨몸으로 행하여 뜻을 바르게 하였다. 동정과 표리가 같았으니 실천궁행하여 순일한 유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훌륭한 스승이 되셨으니 처사로서 이름이 완전하고 유학의 으뜸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근암서원 묘우(廟宇) ― 선현 7위를 모신 사당
☆… 근암서원(近嵓書院)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9월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 문루 등이 있다. 근암서원은 활재(活齋)의 후손으로, 서중리가 고향인 이정식 공이 서원을 재건하고 유지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금천(錦川)의 의기(義氣)
☆… 금천(錦川)의 지류인 산북의 대하리천 상류에 천 년 고찰 운달산 김룡사가 있다. 깊고 우람한 산세와 장엄한 고찰이라는 외형에서만이 아니라, 근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性徹)·서옹(西翁) 스님 등이 수행정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운달산(雲達山)은 임진왜란 때는 산양지역의 선비 권의중·고상증이 주도한 문경의병이 발진하였고, 김룡사에는 구한말에는 왜병과 맞서 운강 이강년이 창의한 의병이 주둔하기도 하였으며, 또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김룡사 학승들이 만세운동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문경의병(聞慶義兵)
☆… 그 동안 문경(聞慶) 의병(義兵)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천행으로 2011년 7월 27일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의『성재집(省齋集)』이 발견되고,『성재집』에 실린「용사일기(龍蛇實記)」와 그 뒤에 확인된 천연재(天淵齋) 권용중(權用中)의『용사일록(龍蛇日錄)』에 의해 ‘황시간, 고인계, 김덕윤, 권의중, 박사명, 최득강, 여춘 등 이곳 지역인사들이 의병을 창의하여 임진·정유 양란에 활약하였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이 금천(錦川) 산양 지방 선비들이다. 특히 고만진(성재의 14세손, 고려기계 사장)이 산양 신전리 고가(古家)를 수리하던 중, 선대 고상증의『성재집(省齋集)』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17년 5월 22일 영강(穎江) ‘솔숲공원’에 제막된「壬亂聞慶義兵紀念碑」(임란문경의병기념비)
¶ 1592년(임진년) 4월 13일(음력)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倭賊)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朝鮮)을 침공하였다. 조선이 제대로 방비가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왜적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국토를 유린하고 인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왜적의 부대가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밀양 대구를 거쳐 상주 문경 조령으로 향했는데 상주에서는 부분적인 전투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경상남도)에서 창의한 의병(義兵)이,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해 5월 2일 왜적이 문경 땅에 들어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면서, 고니시 유키나(小西行長)의 주력부대가 한양의 길목인 문경,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그냥 통과하였다. 신립(申砬)의 관군은 새재에서 방어하지 않고, 탄금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대패했다. 5월 3일이었다. 주요 방어선인 문경이 뚫리고 충주에서 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황급히 북으로 피난을 갔다.
5월 6일 문경지역 일대가 왜적에게 포위되는 등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때 문경의 유림이 분연히 일어났다. 초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이 의병 창의를 도모한 것이다. 대수헌(大樹軒) 권의중(權義中)과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형제 등이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왜적을 막을 방도를 의논하였다. 주로 금천(錦川) 산양지역의 선비들이다. 이어서 활과 화살을 만들고 산꼭대기에 석거(石車)를 설치하는 등 문경지역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왜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아 상주목사에게 보고하고, 날마다 무기를 제작하면서 격문(檄文)을 도내 사림에게 통문하였다.
8월 15일 궁수와 검사 백여 명이 합세하게 되자 정식으로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의병장은 상주의 권의중(權義中), 치병장은 고상증(高尙曾)·고상안(高尙顔), 막좌에 황정간(黃廷幹)·고인계(高仁繼)·채득강(蔡得江), 선봉장에 최대립(崔大立), 전향관(轉餉官)에 여춘(余春)을 임명 조직하고 산북의 김룡산(金龍山, 雲達山)에 올라가 천지신명에 고하고 입술에 짐승의 피를 발라 맹서한 후, 의병 명단을 수령과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8월 17일부터 10월 26일까지는 고상안, 이봉, 조정 등이 이끄는 함창의병진과 안동의병진 권해 부대와 협조하면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수차례 전과를 올리고, 12월 18일에는 30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것이 그 유명한 당교전투이다. 1596년 70개 고을 500여 명이 모인 팔공산회맹에 문경의병이 다수 참석하였다.
이듬해(1597) 1월에는 진지 구축에 힘쓰고 7월 19일에는 창녕(昌寧)의 화왕산에 들어가 곽재우(郭再祐) 의병장과 함께 청야전술로 왜적을 제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8월에 곽재우 의병장의 고령전투에 참여하여 왜장을 죽이고 구내역(경주)에서두목과 왜장을 잡아 죽이는 등 전과(戰果)를 올린 후에 문경 산양(山陽)으로 귀환하였다. 10월에는 300여 명의 의병으로 행점(상주 공검)에서 노략질하던 왜장 등 다수를 백갈산 아래에서 참수하였다. 문경의병(聞慶義兵)의 전투지역은 문경, 상주, 예천, 김천, 성주, 거창, 창녕, 고령, 경주, 보은 등이다.
… 성재 고상증의『용사일기』천연재 권용중의『용사일록』망우당 곽재우의『화왕산입성동고록』『용사세강록』금간 조정의『임란일기』호재 곽수지의『진사일록』가규 조익의『진사일기』에 의거, 의병들의 고귀한 성함을 비석에 새기고, 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의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 山陽義兵陣 義兵將 權義中, 治兵將 高尙曾 高尙顔, 幕佐 黃廷幹 高仁繼 蔡得江, 先鋒 崔大立, 轉餉官 余 春, 義兵 金遠振 朴元亮 金得龍 蔡得海 朴元凱 趙基遠 趙榮遠 金遠聲 申彦熙 權大勳 權己壽 卞緖 金申年 權夢周 權平 金經濟 金經澈 鄭以悟 鄭以惺 朴士文 余春福 金嗣宗 南嶸 金復興 成浹 成汝松 金鶠齡 (無名義士諸位)
☆… 2017년 5월 22일, 영강(穎江) ‘솔숲공원’에「壬亂聞慶義兵紀念碑」(임란문경의병기념비)를 제막했다. 영강 변의 솔숲은 1596년 9월 12일 당교(唐橋, 지금의 문경시청 자리)에 주둔한 왜적이 영순(永順)을 침공하는 길목인데, 당시 의병이 이곳에서 적을 크게 물리친 전적지(戰迹地)이다. 높이 6m의 거대한 자연석으로 주비(主碑)를 세우고, 그 우측에 따로 장방형의 오석(烏石)에 임란문경의병의 전적(戰跡)과 의병의 명단(名單)을 새겼다.
「임란문경의병기념비」의 비문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學術院會員)이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병호(朴秉濠) 선생이 찬(撰)하였다. 이날 제막식은, 조시원 문경향토사연구소장이 유사를 맡아서 진행하고, 고윤환(高潤煥) 문경시장이 주재(主宰)했다. 이날 김관용 경북지사, 최교일 국회의원 등이 축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각 문중의 어른들과 지방의 유림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였다. 나도 친구 한학수 공과 함께 제막식에 참석했는데, 나는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고만진 위원의 위촉을 받아 기념비 문안 교정에 참여한 바 있다.
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
☆… 김룡사(金龍寺)는 금천의 최상류, 백두대간 대미산의 지맥 운달산 아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에 위치해 있다. 금천의 최상류 운달산(雲達山)은 백두대간의 정기(精氣)가 모인 곳으로, 금천 산양의 선비들이 주도한 문경의병이 이곳에서 하늘에 맹서하고 공식적으로 발진(發陣)한 곳이다.
히말리스트 이상배(李相培) 대장은, 여기 운달산 아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출신으로, 남다른 이력을 가진 산악인이다. 1990년 미국의 요세미티국립공원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암벽등반을 시작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을 비롯하여, 히말라야 초오유(8,201m), 가셔브롬2봉(8,035m), 로체(8,516m) 등 8,000m급 고봉을 등정하였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4,101m), 대만의 옥산(3,952m), 일본의 북알프스(3,190m),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남미의 안데스산맥의 아콩카구아(6,959m), 유럽의 알프스 몽블랑(4,810m), 이란 최고봉 다마반드(5,671m), 히말라야 메라피크(6,654m), 북미 최고봉 맥킨리(6,194m), 유럽의 최고봉 엘부르즈(5,642m) 등을 등정하였다. 특히 2010년에는 히말라야 히무룽(7,126m)을 세계 최초로 개척등반한 전문산악인이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했으며, 현재는 한국히말라야클럽 이사, 사단법인 영남등산문화센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운달산-금천이 낳은 최고의 산악인이다. 저서에 산행 등정기인『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가 있고, 트레킹 가이드북인『네팔 히말라야 베낭여행』이 있다.
운달산 김룡사(金龍寺)는 신라 진평왕 10년인 588년에 운달조사(蕓達祖師)가 운달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고 운봉사(蕓峰寺)라고 했다. 후에 김룡사로 개칭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지어 운봉사 아래에서 숨어 살면서 신녀(神女)를 만나 매양 지극한 정성으로 불전에 참회하더니, 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 하였다. 아들 김룡(金龍)을 낳고 나서. 이때부터 가문이 부유해져, 사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하였고 마을 이름이 김룡리라 불렀으며 운봉사도 김룡사(金龍寺)로 개칭되었다’는 것이다.
김룡사(金龍寺) 전경(全景)
김룡사(金龍寺) 대웅전(大雄殿)
조선 인조 2년에 혜총이 중창했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에 타면서 번창하던 건물이 줄어들었다. 특히 1997년 화재로 대웅전을 제외한 불전이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들이다. 비구니 암자인 대성암(大成庵)으로 가는 짧은 전나무 숲길이 그윽하고, 절 입구에 300년 된 해우소(解憂所)가 있는데, 토속적인 목조 건물이 아주 고풍스럽다. 김룡사 동종은 보물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조 27년 설잠대사가 조성한 대웅전의 불상은 그 규모가 웅대하며 기예 또한 현묘하다. 성균대사가 만든 후불탱화가 또한 유명하다.
김룡사(金龍寺)는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경북 북부 일대에서 45개의 말사를 거느렸으나, 조계종에서는 제8교구의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 편성되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서암·서옹 등 큰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성철스님이 즐겨하던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라는 말에서 따와 일주문의 이름이 홍하문(紅霞門)이다. ‘紅霞穿碧海’는 ‘붉은 노을이 푸른 바다를 뚫는다’는 뜻이다.
홍하문(紅霞門)
☆… 수행도량 김룡사는 역사적으로 의기(義氣)가 성하다. 구한말 왜병과 맞서 싸운 의병장 이강년의 의병부대가 주둔하기도 하였고, … 또 1919년 3·1만세운동 때 김룡사 학승들이 만세운동을 기도하기도 했다.
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고찰 김룡사는 1895년 10월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1858~1907) 의병부대가 주둔했던 사찰이다. 을미의병(乙未義兵)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에 분격한 유생(儒生)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驅逐)을 목표로 일으킨 항일의병운동을 말한다.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선생은 영강의 상류인 문경의 가은 출신으로, 1880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낙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 일본군과 탐관오리를 무찔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때는 문경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이어 제천(堤川)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의를 맺고, 유인석 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조령(鳥嶺)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原州)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부대와 합세, 충주(忠州)를 공격하였다. 그후 가평·인제·강릉·양양 등지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용소동(龍沼洞)·갈기동(葛其洞)·백담사(百潭寺)·안동서벽(安東西壁)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908년 7월 청풍(淸風)의 금수산(錦繡山)에서 총탄을 맞고 체포되어 그해 10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殉國)했다.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이강년선생영정관」「유물전시관」「李公康秊之碑」이 있다. …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친회(서울 방배동 청권사)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일 도서출판 일진사 대표, 이기태 총경, 이정식 공이 매년 정성을 다해 운강 선생을 기리는 사업에 임하고 있다.
[문경 김룡사(金龍寺) 스님들의 4.13 거사] — 불교항일운동, 그 현장 |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문경 운달산 김룡사의 젊은 스님과 학생 30여 명이 산문(山門)을 나섰다.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의미 있는 날이었다. 태극기를 몰래 숨긴 스님들은 운달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일본 경찰이 주둔한 대하주재소(大下駐在所, 지금의 산북) 근처에서 조선독립을 외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우곡리 장날로 시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은 직지사 말사(末寺)이지만, 일제강점기 김룡사는 전국 31본산(本山) 가운데 하나였다. 50개 말사를 둔 큰절로 지방학림(地方學林)을 운영하며 젊은 스님과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달여 앞서 서울에서 벌어진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의기투합했다.
그해 3월25일 불교중앙학림에 다니던 전장헌(錢藏憲) 스님이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 한 장을 구두 밑창에 몰래 숨겨 김룡사에 잠입했다. 지방학림 스님들에게 독립선언문이 전달되면서 만세운동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전장헌 스님은 김룡사에서 장학금을 받아 서울로 유학한 인물이다.
문경 김룡사 공비생(公費生)으로 김룡사의 젊은 스님들과 막역한 사이였던 전장헌 스님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 상황을 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한 일경(日警)이 김룡사 스님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것은 당연했다. 때문에 전장헌 스님은 이튿날 급히 서울로 돌아갔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알게 된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들과 학생들은 비밀을 유지하며 동지를 규합했다. 송인수, 성도환 스님이 주도했다. 4월 11일 오후 7시 요사(寮舍, 寄宿舍)에 모인 송인수, 성도환, 최덕찰 스님 등 10여명은 만세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4월13일 수업이 끝난 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날 사용할 태극기 4매를 비밀리에 만들었다. 주민들에게 나눠줄 독립선언문도 필사(筆寫)했다. 당시 2년제로 운영되던 김룡사 지방학림에는 말사에서 온 공비생 스님들과 일반 학생 등 8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일반 학생들은 신학문을 배우려는 불교 신도들의 자제였다. 문경은 물론 상주, 예천 등 주변 지역에서 온 젊은이들 이었다.
산문을 나선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대하리를 향해 걸었다. 절에서는 약 10km 정도 거리이다. 걸어서 1시간 30분내지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김룡사 지방학림에 다녔던 민동선(閔東宣) 스님은 훗날 “태극기, 독립선언문, 경고문(警告文)을 감춰 절을 나섰다”면서 “30명이 1개의 단(團)을 구성했다”고 증언했다. 지방학림 재학생이 80여명이었으며, 1개단이 30명임을 감안하면 기존 18명이 참여했다는 기록과 달리 많은 인원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날 김룡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행진은 중도에 멈추고 말았다. 스님과 학생들이 우곡리 석문(石門) 인근에 도달했을 때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김룡사 주지 김혜옹(金慧翁) 스님이 조랑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기 때문이다. 혜옹스님은 김룡사 지방학림 교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스님은 학생들을 가로 막고 사찰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일부 기록에는 “학생들을 윽박질렀다”고 하지만, 젊은 스님과 학생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귀사(歸寺)를 종용했을 것이다.
혜옹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인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사찰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님과 학생들의 거사 정보를 확인한 일본 헌병이 다음날 김룡사에 들이 닥쳤다. 수업 중이던 스님과 학생들을 한 곳으로 몰아놓은 뒤 가담자를 색출했다. 이날 27명이 밧줄로 손이 묶인 채 문경헌병대로 연행됐다. 10일간 모진 고초를 겪은 뒤에야 24명은 풀려났다. 하지만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 스님은 재판에 회부되어 형(刑)을 받았다. — 「경북매일」 [문경] 이성수 기자 2018.11.16 16:17
대웅전 앞마당의 노주석(露柱石) — '불우리', '광명대(光明臺)', '화사석(火舍石)', '정료대(庭燎帶)' 등 다양한 이름을 가졌다. 노주석은 사찰의 야간법회 때 횃불을 밝히거나 또는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석물이다. 일제시대의 연기 ‘昭和’가 지워져 있다
☆… 문경문화원 연구위원 최병식(당시 70세) 씨는 2002년 문경문화원에서 발간한 <문경문화>에 ‘김룡사 지방학림의 만세사건’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튿날 문경읍 헌병대에 체포된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이 석봉리 새목재를 넘을 때 동네 사람들이 나와 지켜보았으며, 먼발치에 있던 농민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농민들은 헌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심하게 당했다. 비록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룡사 스님들의 항일(抗日)정신은 퇴색하지 않았다.
* [금천(錦川)의 화가, 임무상(林茂相) 화백] — ‘삼강(三江)’을 아호로 삼다!
☆… 한국화가 임무상(林茂相, 1942~ )은 삼강(낙동강)의 지류인 금천(錦川)의 최상류, 산골 중에서도 산골인 문경 산북면(山北面) 창구에서 태어나,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형상화하여 대한민국 화단에 우뚝한 작가가 되었다. 그가 자란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오지(奧地)이지만 50여 호의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겨운 마을이었다. 콩 반쪽도 나누어 먹는 그런 인정이 넘치는 동네이다. 초기의 임무상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 몸에 배인 흙냄새와 그 초가집의 서정적 분위기를 오브제로하여 그림을 그렸다. 임무상 화백은 집 앞에 흐르는 금천(錦川)이 지향하는 삼강(三江)을 아호로 삼은 것도 그러한 정서의 소산이다.
집으로 가는 길(1994년작)
삼강(三江) 임무상(林茂相) 화백
그는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풍경을 주제로 하여 「곡선공동체의 미―린(隣)」의 세계를 추구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이고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참다운 본성인 원융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임무상 화백은 초창기부터 20년을 우리네 초가의 지붕이 갖는, 소박한 자연미와 인정어린 이웃들[隣]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곡선의 어울림이라는 특유의 필치로 표현했다. 그런데 2008년 「금강산전」(2008.11., 조선일보 갤러리)을 계기로 새로운 화풍을 보여준다. 삼강 화백은, 아름답고 장엄한 민족의 정기를 화폭에 담기 위해, 직접 금강산과 백두산을 다녀왔다. 금강산과 백두산의 실경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자연의 아름답고 장엄함을 추상화 기법으로 승화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했다. 자연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초월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특히 산·소나무·달이 어우러진 일련의 작품들은 산의 기골과 소나무의 절조 거기에 은은하고 원융한 달이 조화된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곡선공동체의 미―린(隣)」
하나로 옹기종기 모여사는 정겨운 초가마을
「금강산 전도」
금강산 (달-산-폭포-노송)
☆… 임무상 화백은 2010년부터 중국의 베이징 초대전을 시작으로, 이태리, 프랑스, 홍콩 등에서 수차례 초대전에 참여하여 유럽 화단에 주목을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로 발돋움했다.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스물다섯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치열한 예술혼과 철저하고 부지런한 근성,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성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기간에, 고향 문경시 점촌에서 「<文化共感(Cultureum)-小窓多明> 개관 기념 임무상 초대전」(2020.11.20~12.31)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이천(利川) 시립 ‘월전미술관’ 기획 <松下步月>展(2020.11.26~2021.01.31)에도 참가하고 있다. 특히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한 삼강 화백에게는 문경에서 개최되는 초대전이 특별한 의미 있다.
* [금천(錦川)] ― 금천 유역의 중심지 ‘산양(山陽)’
☆… 삼강의 또 한 지류인 금천(錦川)은 백두대간 문경 동로의 대미산-황장산의 산곡(山谷)에서 발원하여 문경시 산북과 산양을 경유하여 영순면 달지에서, 내성천을 만나 낙동강에 유입된다. … 그러므로 삼강(三江)나루에서 지류인 ‘금천(錦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고향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불암리가 있다.
지금은 새로운 외곽도로의 건설로 거의 한촌이 되었지만, 옛날의 산양(山陽 佛岩)은 인근에서 가장 큰 5일장이 서는 장터로 유명했다. 동로와 산북 등 인근의 주민과 농산물이 모이고 상주와 점촌과 용궁에서 들어오는 물산과 사람들이 모이어 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인근에서 가장 큰 우(牛)시장이 있었고,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산양(山陽)은 상주에서 예천, 안동으로 가는 길목이요, 안동, 예천, 의성 등에서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갈 때 꼭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 [산양(山陽)] ― 구한말, 영남 유림이 만인소(萬人疏)를 작성하여 발진한 곳
구한말, 안동에서 발기한 영남 유림들이 각 지역의 인사들을 규합하여 만인소(萬人疏)를 작성하여 발진한 곳이 바로 산양(山陽)이었다. 만인소(萬人疏)는 김홍집의「조선책략(朝鮮策略)」에 의한 고종의 외세의존(外勢依存)의 개화정책(開化政策)에 반발하여, 영남의 유림 만 명이 참여하고 서명하여 강력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결의를 밝힌 상소문이다.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책략」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막는다는 내용이었다.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 열린 안동도회와 1880년 12월 15일 개령향교에서 열린 개령도회 이후, 경상좌·우도의 유생들은, 만인소의 도회소(都會所)를 문경 산양(山陽, 당시 상주 산양)으로 정하였다. 1881년 정월 20일 경부터 각처에서 만인소에 동참하려는 유생들이 산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월 29일 산양도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 문경 산양(山陽)은 지리적으로 조령[새재]에 가까운 지역으로 서울[한양]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1881년 정월 20일부터 2월 4일 복합상소를 위해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산양에는 영남 각처의 유생들이 집결하였다. 유생들은 산양에서 도회를 열어 각 지역으로부터 도착한 척사소(斥邪疏)를 검토하여 전 예조판서 강진규(姜晉奎)가 작성한 것을 대표적인 척사소로 채택하였다. 이때 척사소를 작성한 유생들은 김석규, 이승희, 송인호, 이종기, 김기선, 김노선 등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그 외 한주 이진상도 산양도회에 편지로 척양(斥洋)의 뜻을 전하였다.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문경시, p.25)
* [금천의 산양(山陽)] — 내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 나는 1948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 옥산(玉山)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힌터’ 고개 넘어 면소재지인 불암리로 이사를 왔다. 우리 집은 산양 냇가[錦川]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소년시절 그 금천에서 뼈를 키웠다. 나는 유난히 물을 좋아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 냇가에 가서 살았다. 1967년 대학에 합격하여 상경하기 전까지, 나는 그곳 금천의 산양(山陽)에서 초등학교(1955~1960)를 다녔고, 이어서 읍내[점촌]의 문경중학교(1961~1963)와 문경종합고등학교(1964~1966)를 다녔다.
… 내가 태어나기 전, 옥산(玉山)의 우리 집은 유족했다. 아버지는 착실한 농부였다. 원래 착하고 부지런한 아버지[壽자煥자]는 젊은 시절, 두 동생[達煥·潤煥]과 함께 남의 땅까지 부치며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어머니는 알뜰하게 살림을 하여, 해마다 땅을 사들이면서 재산을 늘렸다. 옥산 동네 인근의 여기저기 우리 땅이 많았다. 할아버지도 살아계실 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맏며느리인 어머니를 무척 아끼셨다. 맏이인 아버지(1905)는 어머니와 결혼한 후, 아래의 두 분 동생을 모두 건사하여 혼인 시키고, 이웃에 새로 집을 지어서 땅을 분배해 주기도 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좌측에 큰집이 있고 오른쪽에 중숙(中叔)의 집, 앞에는 계숙(季叔)의 집이 있어, 옹기종기 작은 마을을 이루어 정겹게 살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당시 전후의 상황은 모두 네 분의 누님들이 생전(生前)에 수없이 들려준 것이었다.
… 어머니(1906)는 열여덟 살(1924)에 아버지(1905)에게 시집을 와서, 1926년에 큰누님을 낳았다. 다음에 ‘아들’을 기대하여 이름을 후남(後男)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이후 어머니는 딸만 내리 여섯 분을 낳았다. 그러나 옆집의 중숙(仲叔)과 숙모는 아들만 내리 셋을 낳았다. … 아버지는 중숙의 맏아들 ‘학술’ 형님을 양자로 들이기로 했다. 남아(男兒)로 대를 잇는 전통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때마다, 양자가 된 그 형님을 불러다 챙기게 되니, 상대적으로 누님들은 늘 찬밥이었다. 당시 남아선호는 보편적인 관례였고 남존여비는 노골적인 풍조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누님들까지 어머니의 아들 낳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 그런데 엄청난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가 마흔이 넘어서 ‘화투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딸만 바글거리는(?) 집안에 실망해서였을까. 처음에 ‘웃마’(윗마을) 친구의 유혹에 이끌려 발을 들여 놓았다가 거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내가 보아도, 아버지는 어리숙할 정도로 순진한 분이었다. 화투판은 기질상 아버지가 놀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가 노름판에 빠졌다. 가세(家勢)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누님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밤중에 들어와 땅문서를 가지고 나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집안이 뒤집어지고 어머니는 말없이 우셨다. 고금을 막론하고 노름은 하면 할수록 빠져 들어가는 늪이다. 아버지의 화투판은 집안을 망하게 하는 블랙홀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장난삼아하는 화투는 물론 잡기(雜技)를 거의 하지 않는다.
☆… 어머니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이 모든 것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누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특히 기억력과 언변이 유난히 좋은 남희 누님의 회고담은 눈물겨운 드라마였다. 누님은 ‘살아있는 실록(實錄)’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집안 사정과 어머니의 마음 고생 이야기는 처연했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가세는 기울어지고, 어머니의 세월은 아픔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어머니는 말없이 집안을 지켜나갔다. 나중에 내가 보아도 어머니는 참 무던하고 정렬하셨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치성을 드렸다. 어머니가 의지하는 곳은 오직 천지신명이었다. 나도 어릴 적에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았다.
… 마침내 어머니는 마흔 셋에 아들을 낳으셨다! (1948년 8월 18일, 무자생) 그때 8월 15일 광복절 3주년,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 앞에서 취임식을 했다. 중앙청(中央廳)은 일제가 경복궁 광화문을 철거하고 근정전을 가로막은 자리에 지은 총독부 건물인데, 김영삼 대통령 때 중앙의 돔의 머리를 자르고 철거했다.
어머니는 딸 일곱을 낳고 나서 얻은 아들, 천신만고(千辛萬苦), 평생 가슴을 태우며 갈망하던 아들을 낳았다. 누님들이 더 난리였다고 했다. 당시 큰 누님은 결혼을 했고, 12살이었던 성격이 활달한 남희 누님은 “우리 엄마! 아들 낳았어요! 아들!” 하고 맨발로 동네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내가 태어남으로써 어머니나 누님들은 그 동안 아들 없는 설움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필생의 역작이었다. 그리고 누님들의 뜨거운 열망의 결과였다. 누님들의 애지중지 동생 사랑은 지극했다. ‘조선에 없는 우리 상수’, 금이야 옥이야, 집안의 분위기가 생기(生氣)로 충만했다. … 그런 누님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셨다. 2018년 6월 양산의 남희 누님을 마지막으로!
내가 태어날 때 쯤, 우리 집에 가난했다. 남은 것은 일 년 양식 정도밖에 안 되는 논 몇 마지기뿐이었다. 그렇게 근근이 살아가는 가운데, 나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6살 때, 우리 집은 옥산(촌)에서, 학교가 있는 산양면 소재지인 금천(錦川)의 불암(佛岩)으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의 결단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상수,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산양 집 바로 옆에 앞서 시집온 둘째누님[吳南珠]이 살았다. 착하고 성실한 자형(辛相玉)은 어머니가 아들처럼 아끼는 사위였다. 어머니는 자형에게 많이 의지했다.
… 시대(時代)는 나라가 전쟁 중이었다. 1950년 북의 침략으로 6·25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 휴전협정이 이루지기까지 온 나라가 초토화 되고 수많은 사람이 살상되었다. 다행히 우리집안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절대 빈곤상태였다. 금천의 콘크리트 다리 밑에 거적대기를 치고 살며 때마다 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아침에 찾아오는 그들의 바가지에 따뜻한 밥을 퍼주었다.
☆… 내가 1955년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교 다니는 동안 미국의 구호물자인 분유와 강냉이가루를 나누어주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부황이 들어 죽어간 사람이 많았다. ‘보릿고개’는 겨울 지나고 봄이 왔는데 가을 양식은 다 떨어지고, 아직 보리가 수확되기 전 양식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하거나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시기를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보릿고개」가 바로 그것이다. 1960년, 6학년 때 3·15 부정선거로 인해 서울에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권력을 누리던 이기붕은 자기 아들 강석의 총탄에 쓰러졌다.
☆ [내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의 모습(사진)] ☆
초등학교 3학년(1957년) 때인가 김천에 사는 큰누님 가족이 왔다. (뒷줄에 어머니, 큰누님, 자형, 그리고 생질 그리고 나)
☆…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는데 시골 동네는 평온했다. 사는 것이 다 어려웠지만 이웃끼리, 친구끼리 참 정겹게 지냈다. 상류의 동로에 경천댐(1983~1986)이 생기기 전에는 금천의 물은 맑고 수량도 풍부했다. 여름이면 냇가에 나가 헤엄하고 고기 잡고, 백사장에서 씨름을 했다. 겨울에는 얼음판에서 시게또[썰매]를 탔다.
당시 산양에서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 지금도 변함없이 우정을 나누고 있다, 윤동주가「별헤는 밤」에서 정겨운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 고향의 친구들이다. 김이수(국세청, 세무사), 김영규(문경), 김영길(국립영화제작소), 서종태(서울명일초등학교 교장), 전병대(문경관광고등학교 교장), 최경준(대구, 사업) 등 … 이제 모두 일흔 중반이 되었지만, 강옥수와 전병대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북선한의원’ 경준이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50대 후반 중풍을 맞아 자리에 누웠을 때 침(鍼)을 놓아 완치시켜 주셨다. 비교적 연세가 많은 우리 아버지는 친구 할아버지와 어울렸다. 특히 이수 할아버지 친구였다. 겨울에는 늘 이수네 집 안방에서 화투치며 소일했다.
☆… 1961년, 나는 읍내(점촌)에 있는 문경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 문경중학교는 당시 지역의 명문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해 서울에선 박정희 육군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세상이 또 뒤집어졌다. … 영강(穎江)이 흐르는 문경중학교까지는 우리 동네에서 5km, 버스가 다녔지만, 나는 걸어서 다녔다. 일과를 마치고, 학교에서 배구를 하거나 공을 차고 놀다가 집으로 걸어왔다. 그 길을 걸으며 영어 단어를 외웠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머니는 봄·여름에는 장에 나가 좌판을 펴고 장사를 했다. 추운 겨울에는 우리 집 큰방에서 한과(韓菓)를 만들어 장날을 찾아다니며 내다팔았다. 한과를 만드는 일은 절차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힘든 작업이다. 방앗간에서 내린 고운 쌀가루·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네모지게 과반을 만들어 살짝 건조한 후, 그것을 기름먹인 굵은 모래에 튀기고 조청을 발라 은은한 색상의 쌀티밥을 입히는 …. 당시 결혼하지 않은 막내 영자 누님(1943)이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는 밤을 새워 그렇게 한과를 만들고 낮에는 그것을 이고 장에 내다 팔았다. 동네에서 장이 서는 날, 나는 여름철 뙤약볕 아래 좌판을 벌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고, 겨울이면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고 한과를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안쓰러웠다. 다행히 나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간절함이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매년 종업식 때 우등상장을 받아왔다.
☆… 그런데, 1963년, 내 중학교 3학년 여름부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시더니,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해 초겨울, 찬바람이 부는 음력 10월 28일 저녁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셨다. 기울어진 집안을 여린 몸으로 지켜온 고단한 세월,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온 마음고생, 참으로 아프고 힘든 생애였다. 당신의 목숨보다 귀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였을 것이다.
…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나는 천애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찬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었다. 연세 많으신 아버지는 완고했고 누나는 미성년이었다. 어머니는 마흔 셋에 나를 낳으시고 쉰 여덟 살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14년이었다. 그 14년 동안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다. 비록 가난했지만 내 성장기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일생의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잠시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어머니는 평산 신(申) 씨, 함자는 ‘귀(貴)’자 분(分)’자, 결혼하기 전 외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소학 등 한학을 공부하고 또 언문도 익혔다. 어머니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고 현숙한 분이셨다. 돌아가신 큰누님에 의하면, 어머니는 6남매의 맏며느리로 들어오셔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시면서 늘 경우 바르고 원만했다. 당시는 대부분 여인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글은 물론 한문도 깊이 알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후, 밤이면 어머니는 빛바랜 한지로 엮은「한양가(漢陽歌)」를 읽어주셨다. 어머니가 읽어주신 그 「한양가」는 어머니가 손수 필사하신 것이었다. 경상북도 북부지방 양반가 부녀자들은 4·4조의 율을 가진 내방가사를 즐겨 불렀다. 평소「시집살이 노래」등 전래해 온 것도 읊조리고, 스스로 마음에 맺힌 것들을 가사로 지어 불렀다.「한양가」는 조선의 건국에서부터 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4·4조의 가사체로 표현한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을 통하여 나는 ‘수양대군’과 ‘사육신’, ‘단종’의 처절한 이야기를 들었고 ‘만고충신 엄홍도’ 이야기도 들었다. 임진왜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이여송’과 ‘소서비’(소서행장), 그리고 ‘김덕령 장군’과 평양 기생 ‘계월향’의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전공으로 하게 된 것은 아마 어머니의 문향(文香)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머니는 동네 어느 집에 혼인(婚姻)이 있을 때 예단(禮緞)에 들어갈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손수 붓을 들어 써 주시기도 했다. … 어머니는 나를 말없이 훈육하셨다. 어릴 적 기고만장한 나를 한 번도 언짢은 표정으로 질책한 적이 없다. 늘 은근히 눈길로 바라보시다가 심하면 ‘상수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순간, 나는 주춤하고 조심했다.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 절도(節度)를 갖추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내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당시 철없는 나는 천방지축이었다. 학교에서 여자 아이들 노는데 방해하거나 짓궂게 괴롭혔다. 그래서 당시 권도목 선생님에게 자주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는데, 또 잘못을 저지른 어느 날, 선생님은 꾸중을 하시면서 “바지 걷어!”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몇 대 때리셨다. 하얀 종아리에 벌건 맷자국이 났다. 내가 누구에게 맞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 집에 와서는 어머니에게는 감추려했는데 어찌하다 어머니가 보셨다. 어머니는 놀라서 잠시 눈을 크게 뜨셨다가 금방 정색한 얼굴로 “이건 맷자국인데 … 누구한테 왜 맞았노?” 나는 머뭇거리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엄정한 얼굴로 “맞을 짓을 했네!” 그것이 전부였다. 동정하거나 감싸지 않았다. … ‘아아, 맞을 짓!’ …
혹심한 가난 속에서, 어머니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다. 지금도 산양 냇가 그 둑방에 그때의 버드나무 고목(古木) 한 그루가 묵연히 서 있다. 나의 추억과 어머니의 아픈 세월을 간직하고 …. 그래서 낙동강 지류인 금천(錦川)은 내 성장의 강이요, 삼강(三江)은 어머니의 강이다. 병오생(1906년)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올해 115세이시다.
☆… 삼강(三江)은 그리운 어머니의 강이다. 나의 어머니 평산 신(申)씨는 의성군 다인에서 태어나, 삼강나루를 건너 문경 산양 옥산(玉山)의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을 것이다. 삼강나루는 우리 어머니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