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 전문
이 작품은 <현대문학>(1955)에 실린 김춘수의 대표작이다. 존재와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언어가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물은 언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개체를 꽃피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의미있는 상호관계라고 최목사는 말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시는 존재와의 행복한 만남과 그것이 더욱 확장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무의미한 관계였던 '나'와 '너'가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닌 이름을 불러주는
상호인식의 과정을 통해, 서로는 서로에게 '꽃'이라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변모하거든요. 나아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인 꽃'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최일도 목사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걷는 이 땅의 시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기 힘든 척박한 환경에서 시를 쓰는 동지들이여! 사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시는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시를 더욱 열심히 씁시다. 갈수록 시를 읽고 시집을 사는 사람이
적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시를 더 많이 써야 합니다. 그래서 시가 온 세상을 감싸고, 시가 사람들에게
공기처럼 스며들 때까지 시 쓰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인터넷상에 난무하는 국적불명의 말들은
한글을 거의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순화해주는 우리말글 지킴이가 돼주십시오."
밥퍼 300만 그릇의 훈훈한 '나눔'
참사랑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 최일도 목사의 밥퍼 운동은 지난 4월 27일 서울에서 300만 그릇을 돌파했다.
최 목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5월 2일 서울 청량리역 광장에서 잔치를 벌였다. 매년 이날은 '밥퍼의 날'로
정한 '오병이어五餠二漁의 날'이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성경 속의 기적 이야기에서 따온 말로 올해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이날 잔치에는 1천5백인 분의 대형 비빔밥을
한꺼번에 비벼 참석자들이 함께 나눠먹었다.
최 목사는 지난 18년 동안 변함없이 노숙자와 무의탁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왔다. 그의 순수한 열정과 뚝심과
끈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길거리 배식을 하던 무료급식소는 매일 1천 5백여 명에게 급식하는 밥퍼나눔운동본부로
바뀌었다. 이제는 중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칠리핀에서도 밥퍼운동과 무료 진료, 고아원 사역이 펼쳐지고 있다.
최일도 목사의 감회가 어찌 깊지 않겠는가.
"단돈 1만 원도 없이 시작했던 밥 나누기가 300만 그릇을 넘어섰다니 저 자신도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만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매일같이 하루만 잘 하면 된다고 마음 다잡던 일도 파노라마가 되어 지나갑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먹거리가 부족해서 못한 일이 없었죠. 지난 18년간 한결같이 성원해준 수많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밥퍼의 기적을 만든 진정한 주인공들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더욱 겸손한 자세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할 것을 다짐합니다."
밥퍼는 순수한 나눔 운동이다. 자원봉사자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그동안 청량리 급식소를 다녀간
밥퍼 봉사자는 매년 1만 7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밥퍼에서 진지를 드신 분 가운데 식중독으로 탈이 난 사례는
지금까지 한 건도 없다고 한다.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면 진지상에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존심 유지비로 노숙인에게 100원씩 받은 돈을 모아 해외에서 급식소를 세웠다. 이 모든 것이
'쌍굴다리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최 목사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전국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들떠있을 때였다.
신학생 최일도는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춘천에서 돌아오던 그는 우연히
청량리역 앞을 지나가다가 구석에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한 할아버지를 보았다. 함경도 출신이라는 할아버니는
피난 내려와서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 문득, 황해도 출신 선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밥을 굶은
허기진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께 설렁탕을 사드렸다.
다일공동체 최초의 밥퍼 사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가 지은 <사선死線을 넘어서>란 자전적 소설이 있다. 최일도의 인생을 움직인
한 권의 책이다. 빈민 사역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 최 목사가 중학교 시절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는
고독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란 신조를 가지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나눠 먹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겨내고 주일학교를 세웠다. 베스트셀러가 된 <사선을 넘어서>의
인세 전부를 빈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청년 최일도는 도요히코 목사처러 평생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실천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독일 유학을 포기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한다.
청년 최일도가 할아버지에게 대접한 밥 한 그릇은 '나눔의 꽃씨'가 되었다. 그의 뜨거운 밥 사랑은
300만 그릇의 나눔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최일도 목사를 표현하는 데 이만한 문구도 없을 듯하다.
최일도 목사는 아름다운 기적을 하나 일구려 한다. 그것은 '쌀 한 톨의 기적 365'이다. 다일공동체의 국내외
밥퍼에서 밥 지으려면 하루에 쌀 3가마가 들어간다. 금액으로 치면 50만원. 하루 3가마의 쌀이 매일
채워진다면 국내외 밥퍼를 찾는 하루 3천여 명에게 따뜻한 진지를 대접할 수 있다. 후원의 손길을 확산하기
위해 연극배우 윤석화, 아나운서 손범수, 영화배우 박상원, 탤런트 오미희 씨도 다일의 홍보대사가 되어 활동한다.
밥은 생명이다. 누구나 밥을 굶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날마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위해 줄을 선 노인들을 보면
최일도 목사의 가슴이 아려온다. 그들도 한때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였을 것이다.
세상에 사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밥퍼를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절절한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를 보듬고 살아간다.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그래서 밥퍼에서는 사람을 가려 밥을 나누지 않는다.
어느 해 겨울의 일이다. 밥퍼에는 항상 노숙자와 독고노인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색이 멀쩡한 분이 오면
금방 눈에 뜨게 마련이다. 그런데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가 몇 주째 혼자 찾아왔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계속 배식을 받아서 먹고 간다. 어느 날, 최 목사는 큰 맘 먹고 그를 붙잡고
어려운 말을 꺼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말씀드립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이렇게 밥퍼에서 식사하실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
"보시다시피 이곳은 노숙자와 행려자, 독거노인들이 한 끼 밥을 해결하기 위해 찾는 곳입니다.
그러니 더 어려운 분들을 위해 가능하면 무료급식을 양보해주시면 좋겠는데요."
"......"
사내는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사내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목사님, 이번 겨울만 넘기도록 해주십시오."
"예?"
"저는 하루 한 끼로만 지내고 있어요..."
사연은 이랬다. 사내는 실직한 지 두 달이 돼 가는데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낙심할까 봐 아직
실직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아침에 집을 나와 돌아다니다 주린 배를 채울 곳이 없어서 이곳을 찾았다. 양복 입고
밥퍼를 찾을 때마다 자기도 죄책감이 들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밥을 먹고
힘을 얻는다고. 이번 겨울만 지나고, 봄이 되면 새 일자리가 구해질 것 같다고 사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실직 가장의 슬픈 자화상이다. 사내의 사연을 들은 최 목사는 그를 껴안고 같이
울었다. 그리고 얼마나 교만한 마음으로 사람을 판단했는지 반성했다.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두어 시간 줄을 선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겉모습만 보고, 속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그 뒤 밥퍼에서는 아무 조건 없이 밥을 퍼 준다. 어떤 이유로 이곳을 찾았는지, 밥 먹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밥을 굶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분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한 그릇의
밥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다일정신多一情神이 아닌가.
사랑과 정성과 눈물로 세운 '다일천사병원'
최일도 목사가 일으킨 놀라운 기적은 또 있다. 그것은 개신교 최초로 세워진 무료 종합병원인
다일천사병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들은 대형화에 집착한다.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절반가량이 한국 교회가
차지한다. 우리나라 교회는 돈만 생기면 건물을 짓고, 땅을 사고, 번듯한 예배당을 짓는다. 이어서 교육관이나
기도원 짓고, 주차장 부지 마련하고, 공동묘지 만든다. 하나님이 왜 바벨탑을 저지했는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 무의탁 노인과 노숙자들을 위한 전문 무료 종합병원은 없었다.
언젠가 최일도 목사는 다급한 환자를 들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갔지만 홀대만 받았다. 그들을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둔 노인도 있었다고. 그래서 최 목사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전액 무료병원 건립을
결심했다고 한다.
"돈 없고 연고가 없으면 큰 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 입원해야 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는
병원은 없잖아요. 천사병원 건립을 위한 최초의 기금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눈물로 모은 47만 5천원이었습니다.
그렇게 밥퍼를 핍박하던 청량리 588의 직업여성과 펨푸 아줌마들이 모아준 돈이었죠.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눈물과 정성으로 천사병원의 벽돌을 쌓아주었습니다."
최일도 목사는 병원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천사(天使.1004운동)을 펼쳤다. 오직 땀과 정성이 밴 성금만 받았다.
마침내 8년 만에 5천 4명의 정성이 쌓이고 쌓여 거금 50억 원이 되었다. 한 덩어리의 큰 돈보다 작은 돈이 모여
큰 덩어리를 이룬 것이다. 드디어 시민들의 소중한 정성으로 2002년 10월 4일, 청량리 쌍굴다리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
다일천사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꿈이 큰 소망을 이루어 낸 것이다. 병원이 세워진 것도 놀랍지만,
병원이 운영되고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깝다. 요즘 일반병원도 경영이 어려워 문 닫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하지 않는가.
월 1억 5천만 원에 이르는 병원 운영비 역시 2만 명의 후원자가 매일 1만 원씩 후원해주고 있다.
다일천사병원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야간진료(13:00~21:00)만 한다. 자원봉사를 하는 80여 명의 의료진들이
병원근무를 끝내고 오기 때문이다. 몇 분의 한의사도 함께 진료 봉사를 한다.
오후가 되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숙자와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든다. 청량리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뿐 아니라
멀리 부천.인천.성남.의정부 등지에서도 찾아온다. 매일 30~40명의 환자들이 천사병원을 찾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통증을 호소한다. 의사와 간호사, 의료진들은 서둘러 진료를 준비한다.
"노숙자나 독거노인들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죠. 그들이 안고 있는 아픈 사연만큼 증세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의료진들은 그들의 마음까지 살피는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상처가 깊은데도 치료를 못 받는
환자들입니다. 환자의 3분의 2는 주민증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의료사각 지대에서 병을 키워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약봉지를 받아가는 할아버지의 얼굴빛이 무척 밝아 보인다. 그 약봉지 속에는 약뿐만 아니라 의료 봉사단이 함께 처방한
따스한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육신의 아픔만 치료하지 않는다. 노숙자들의 힘든 삶, 아픈
속내도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지난 4년간 천사병원을 거쳐 간 환자들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총 외래진료 건수가 4만 3천여 건이 넘는다.
연 3만여 명의 환자가 입원을 했으며, 수술 건수는 500여 건이 된다. 환자 중에는 안과 질환을 앓는 노인들이 많다.
최근 배우 배용준 씨의 소속사인 (주)BOF의 도움과 수술장비 납품업체의 후원으로 안과 수술장비를 갖출 수 있었다.
첫 개안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앞으로 백내장 환자들에게 무료 수술을 해줄 작정이다. 어디 그뿐인가.
LG복지재단에서는 고가의 치과 진료장비를 기증해주어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펼치고 있다.
그동안 자원봉사자들은 2천여 명이나 다녀갔다. 그들은 환자를 씻어주거나, 세탁을 하고, 밥을 짓는다.
또 호스피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사람들의 봉사 덕분에 수많은 환자들의 고귀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참사랑'은 세상을 바꾸게 한다
최일도 목사 부부는 시인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 시단에 부부시인은 꽤 있다. 대충 꼽아보더라도 홍신선-노향림,
용혜원-이수인, 김기택-이진명, 함성호-김소연 부부 등등...
최일도는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었다. 한 수녀의 생을 바꿔놓은 장본인 아닌가. 그의 아내 김연수(아네스 로즈)는
10년 만에 종신 서원을 깨뜨리고 개신교 목사 부인이 되었다. 연하남 신학생과 연상녀 수녀가 운명처럼 만난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숱한 화제를 뿌렸다.
당시 카톨릭 쪽에서는 많은 분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안타까워하며 반대했다. 지금은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여러 분들이
그것은 신의 섭리고 다분히 운명적이었다며 두 사람을 격려한다고. 그렇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역시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밥퍼 사역을 펼치면서 온갖 고난을 딛고 우뚝 일어섰다. 숱한 고비 고비를 잘 넘겨왔다.
밥퍼는 가족의 사랑과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최 목사는 회고한다.
"가장 힘들고 주저앉고 싶었을 때는 다일공동체를 그만두라는 협박이나 비난을 받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억울하게 집단
구타를 당할 때도 아니었죠. 홀어머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길거리 노인들을 섬긴다는 비난을 받을 때였습니다.
공휴일에도 자신들과 놀아주지 않고 밥퍼 사역하려 나가는 아빠를 바라보는 어린 자식들의 애처로운 눈망울이었습니다.
아내가 밥퍼를 그만두든지 이혼을 하자면서 외치는 분노의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아내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신학 공부와 목회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아내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가계를 꾸려나갔다. 아내는 남편의 정신적인 동지이자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남편은
허구한 날 노숙자 밥만 해 먹이고 가족은 뒷전이다. 때로는 청량리 깡패들에게 끌려가 얻어맞고 오지 않나.
쌍굴다리 밑에서 밥을 푸다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더 이상 그 꼴을
볼 수가 없었다. 다섯 살 연하인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솟구쳤다. 남편은 저돌적인 추진력과 급한 성격을 가진 반면,
아내는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을 가졌다. 너무나 여성스럽던 아내도 참고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부부 시인이라 해서
부부싸움까지 시적으로 하지 않는다. 뮤즈의 신이 나서도 별 수 없었다.
그런 아내는 결혼 5년 만에 이혼하자며 보따리를 싸가지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어느 남편인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맏이는 공휴일인데도 자기들과 놀아주지 않고 집을 나서는 아빠를 붙잡고 울었다. 애원하듯 쳐다보는 아들의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무릎을 꿇고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막내를 둘러업고 아들 손을 잡고
공동체 사무실로 갔다. 그 모습을 본 청량리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애들을 돌봐주었다. 혼자 밥 짓고, 노인들에게
식사 대접하고, 설거지 끝내고 수유리 지하 셋방으로 돌아오니 밤 열시가 넘었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켰다.
"자식들한테 아빠 노릇도 못하면서 노숙자들에게 밥을 해준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가족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밥퍼를 계속해야 하는가? 밤새 잠을 설치며 회의와 갈등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안 가면 당시 200명이 넘는 노인들이
밥을 굶어야 합니다. 만약 그때 '이거 더 이상 못할 짓이지!' 했으면 오늘의 다일공동체는 아마 그때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아내의 빈자리를 돌아보며 울고 싶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 사흘간이나 소리 높여 기도하며
속울음을 토해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한 것일까. 집 나간 아내는 나흘 만에 돌아왓다. 아내의 자리로,
3남매의 어머니 자리로... 아내는 깨달았다. 남편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참 목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공동체의 일을 머리로 이해하던 아내는 가슴으로 이해한 것이다. 부부란 역시 서로의 짐을 등에 지고 가는 관계다.
아내는 날마다 마주하는 밥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화해한 것이다. 밥상 위의 모든 생명체는 제가 가진 생명의 몫을
온전히 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밥인가? 그렇다. 사람은 누군가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당신의 밥 이 되고, 당신은 나의 밥이 되고, 우리는 이웃의 밥이 되어 살아간다.
따라서 밥 나누기는 거룩한 사역인 것이다.
그날 이후, 아내는 달라졌다. 아내는 공동체의 나눔 사역에 진실한 동력자가 돼 주었다. 두 사람은 지금껏 한 그릇의
밥으로 '사랑의 꽃씨'를 퍼뜨리고 잇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내를 '국퍼 사모'라 부른다.
아내는 가평 다일영성수련원에서 영성수련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최일도 목사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이다.
소외된 이웃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관심한 아들과 남편과 아빠로 살아온 것이다. 가족이니까 나를 십분 잘
이해해주리라는 믿음은 혼자만의 오해였다. 오히려 가족일수록 더 섬세한 보살핌과 자상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잇으랴.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모든 상처가 다 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상처를 잘 다룬다면 흉터가 아닌 별이 되고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다는 최 목사의 믿음이다.
"여보, 고맙소. 상처받은 이에겐 사랑의 위로자로, 소외된 사람들에겐 다정한 친구로, 춥고 배고픈 사람에겐 밥집 아저씨로,
어둡고 썩어가는 이 험한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고픈 내 작은 소망을 귀히 여긴 당신이 정말 고맙소.
지금까지 잘 참아준 당신이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오. 여보, 내가 아는 당신은 선녀야, 천사야! 당신을 사랑해요."
이와 같이 다일공동체는 자리를 잡기까지 숱한 위기를 잘 이겨냈다. 가족과의 온갖 갈등이 풀리자 공동체의 일도
잘 풀려나갔다. 핏줄에 얽매이는 '작은 사랑'을 넘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소외된 이들에게
보다 '큰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
특히 최 목사가 1995년에 펴낸 산문집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동아일보사)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밥퍼' 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그는 이 책의 인세로 거금 3억 원을 받았다. 평생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이었다.
최 목사는 가족회의를 거쳐 이 가운데 1억 5천만 원을 들여 이동 결핵진료 차량 1대를 특수 제작해 의약품과 함께 북한
동포에게 전달했다. 또 남은 인세의 절반을 다일공동체에 헌금했다. 나머지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영성생활수련원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역시 입으로 사랑을 말하지 않는 밥퍼 목사다운 결단이었다.
다일공동체는 어느 듯 한 두 사람의 힘만으로 운영할 수 없는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협력단체는 120여 군데가 넘고,
천사후원회원은 8천여 명, 밥퍼 나눔회원과 만사후원회원은 2만여 명이나 된다. 현재 다일공동체는 다일복지재단을
위시하여 다일교회.다일천사병원.다일요양원.다일자연치유센터.다일영성수련원.다일해외분원을 갖추었다.
세계적인 구제긍휼단체로 발돋움한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참사랑으로 아름다운 기적을 일궈낸다. 그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다일천사병원 로비에는 1988년 청량리에서 처음 밥퍼 사역을 하면서 라면을 끓였던 녹슨 냄비와 버너가 놓여 있다.
이를 볼 때마다 최 목사는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고 초심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칭찬에 우쭐거리지 않았고,
비난에 기죽지도 않았고, 늘 대범하게 대처해 온 것이다. 그는 앞으로 어떤 꿈을 펼쳐보고 싶은 것일까?
"청량리 역 광장,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나누던 그때의 마음으로 계속 밥을 푸고 싶어요.
청량리와 목포, 부산에서, 나아가 캄보디아와 베트남, 필리핀, 미국에서도..., 그리고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살피고 싶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밥을 푸고
진료하는 일을 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최일도 목사의 모습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가.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시인 목사 최일도의 웃음꽃은 쌀밥처럼 하얗게 피어난다.
김장호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했으며,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따스
한 눈길을 보내는 시인이다. 대학에서 화공학, 대학원에서 홍보광고학
을 공부했다. 현재 프리랜서로 우리나라 CEO를 비롯한 명사들을 취재하
고 있다.
-현대시 2006년 8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