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단군이래 충신1-정몽주[ 鄭夢周 2]
정몽주[ 鄭夢周 ] (1337년(충숙왕 복위 6) ~ 1392년(공양왕 4) )
‘성리학의 창시자’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고,
고려 말기에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세력이 조선을 세우는 데 협조하지 않아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기 전에 술자리에서 그의 생각을 떠보았다고 한다.
이방원은 자신들과 함께 하자는 뜻을 담아 <하여가>라는 시를 읊었고, 정몽주는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으로 <단심가>를 지어 응수했다. 제안을 거절당하자 이방원은 부하들에게 정몽주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1337년에 경상도 영천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학문이 높아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인 이색이 성리학의 창시자라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정몽주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 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몽주는 성균관 박사 시절에 유교의 경전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고려에 있는 하나뿐인 《주자집주》를 해석해 뜻을 풀이해 주었다. 이후 중국에서 유교의 경전 여러 권이 들어와 내용을 살펴보니 정몽주의 풀이가 정확하게 맞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몽주는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공민왕이 죽은 뒤 명의 사신이 친원파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명으로 건너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사건을 정확하게 해명해 외교적인 마찰을 없앴다. 이후에도 친원파들은 정몽주를 제거할 목적으로 관계가 껄끄러웠던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는 오히려 수백 명의 포로를 데려오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승의 자리에 오른 정몽주는 어지러운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학을 가르치고 관리를 양성하는 공립 학교를 세웠고, 흉년 때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의창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기운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이성계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몽주는 처음에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이성계를 지지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에도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오래지 않아 크게 갈렸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 안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이성계는 새 나라를 세워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을 탄핵해 귀양을 보내면서 이성계 세력과 맞섰고, 위협을 느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1392년 3월에 선죽교 위에서 그를 살해했다.
정몽주는 말에서 떨어져 다친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이 보낸 부하들에게 죽었다. 이후 오랫동안 그가 죽은 장소인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 ]
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청렴한 선비이자 충신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뒤 뛰어난 외교가로 활약하였다. 왜적이 쳐들어오면 군사를 지휘했고, 왜왕을 설득해 왜나라(일본)로 잡혀 갔던 포로를 구하기도 했다. 또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성리학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물리치고 공양왕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세력을 잡자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정으로 이성계 일파를 없앨 기회를 엿보았다.
어느 날,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와 함께 술자리를 했다.
“오래 된 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 법이오.”
이방원의 말에 정몽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 그늘에서 쉬어 가겠지요.”
그러자 이방원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하여가〉라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러고는 신하 된 몸으로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속마음을 확인하고 1392년 4월 4일, 선지교를 지나가는 정몽주를 해치웠다. 그 뒤 선지교에 스며든 정몽주의 핏자국이 비가 내리면 더욱 뚜렷해진다고 한다. 또한 정몽주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선지교에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해서 ‘선죽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몽주는 풍년이 들었을 때는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들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제도를 시행했고 시와 문장에도 능했다. 그가 지은 〈단심가〉를 비롯해 많은 한시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392년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선죽교
활동 사항
1. 급제와 삼년상 제도 실천
정몽주는 1355년 정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여묘를 하였다. 1357년 여름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이 감시(監試)하였는데 3등으로 합격하였다.
136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한방신(韓方信)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고시하였는데, 정몽주는 삼장(三場)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첫째로 뽑혔다.
1362년 3월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제배(除拜)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하고 경성을 회복하였으나, 도리어 김용(金鏞)에게 모해 당하여 상주에서 효수 되었는데, 정몽주는 스스로 김득배의 문생이라 하여 임금에게 청하여 그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였다.
동년 10월에 수찬(修撰)에 올랐으며, 1363년 5월 낭장 겸 합문지후(郞將兼閤門祗候)에 제배되었다. 동년 7월에 선덕랑(宣德郞) 위위시승(衛尉寺丞)에 제배되었다. 동년 8월에 종사관으로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方信)을 따라 화주에서 여진족을 징벌하였다.
1364년 2월에 여진의 삼선(三善)·삼개(三介)를 패배시키고 돌아와 조봉랑(朝奉郞)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에 제배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1365년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는데, 정월에 어머니 변한국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 상제(喪制)가 문란하였으나, 정몽주는 3년간 여묘(廬墓)하여 애례(哀禮)를 갖추어 다하니,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그 문에 정표하였다.
2. 배원친명 외교 주장
1367년 복을 벗고 나서 통직랑 전공정랑에 제배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곧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제배 되었다. 동년 중구절(重九節)[음력 9월 9일]에 영주(永州)[현 영천] 치소에 부사(副使) 이용(李容)과 함께 명원루(明遠樓)[현 서세루(瑞世樓) 또는 조양각]를 창건하였다. 1368년 봉선대부(奉善大夫) 성균사예 지제교(成均司藝知製敎)에 제배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제수에 삼자(三字)와 관각(館閣)의 벼슬을 겸대하였다.
1371년 중의대부(中議大夫) 태상소경 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에 제배되었다. 동년 12월에 중정대부(中正大夫)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제배되었다.
1372년 3월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북경에 가서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자제들의 유학을 청하고서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태풍을 만났다.
홍사범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구제되었다. 당시 황제가 이런 사실을 듣고 배를 갖추어 도로 데려가서 후하게 돌봐주었다. 1373년 7월 북경에서 돌아와 황제의 명을 선포하였다.
1372년 2월에 경상도안렴사(慶尙道安廉使)에 제배되었고, 1375년 우사의대부 예문관직제학 충춘추관수찬(右司議大夫藝文館直提學充春秋館修撰)에 제배되었다. 곧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제배되었으나, 이때 공민왕이 시해되고,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감히 정몽주가 큰 의리를 아뢰어, “요즘의 변고는 빨리 상세하게 주달(奏達)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혹을 없게 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미리 스스로 의심하고 이반하여 백성에게 화를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하니, 그제야 비로소 판종부시사 최원(崔源)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때마침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옴에 이인임(李仁任)이 맞아들이려 하였는데, 정몽주는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 등 십여 인과 함께 상서하여 다투고, 대간도 이인임을 논핵하니, 권신들이, “간관이 재상을 논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모두 하옥하여 장류(杖流)하였다. 정몽주도 죄를 얻어 언양(彦陽)에 귀양갔다.
3. 조전원수(助戰元帥)로 활약
1377년 3월에 서울로 돌아와 동년 9월에 전대사성으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1378년 11개월만인 7월에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浚)이 주맹인(周孟仁)을 시켜 함께 오게 하고, 잡혀갔던 윤명(尹明)·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돌려보냈다.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산기상시 보문각제학 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에 제배되었다. 1379년 4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典工判書)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제배되었고, 동년 윤 4월에 봉익대부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배되었다.
동년 10월에 전법판서(典法判書) 진현관제학에 제배되었다. 1380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제배되었다. 가을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峰)에 가서 왜를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동년 11월에 밀직제학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상호군(密直提學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上護軍)에 제배되었다.
1381년 2월에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同知春秋館事 上護軍)에 제배되었고, 동년 9월에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로 옮겼다.
1382년 4월에 주족금은 진공사(輳足金銀進貢使)로 경사에 갔는데,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의 차인(差人)이 성지(聖旨)를 적어 보이되 “세공(歲貢)을 수년의 물건을 합하여 한꺼번에 하니,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다”하여 입경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동년 11월에 또 청시사(請諡使)로 경사에 갔고, 1383년 정월에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에서 “들이지 말라는 칙명이 있다”라며 진헌하는 예물만 받고 입경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으며, 8월에 동북면 조전원수로 다시 이성계를 따라 정벌에 나아갔다.
4. 대명 외교 개선
1384년 7월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이때 국가에 크게 말썽이 많아서 황제가 노하여 우리에게 출병하려 하고 사신을 장류(杖流)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성절(聖節)을 축하하러 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피하니, 임견미(林堅味)가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임금이 불러서 면대하여 이르기를, “경은 고금에 널리 통하고 또 내 뜻을 알거니와, 이제 진평중(陳平仲)이 앓아서 가지 못하므로 경으로 갈음하였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은 물불도 피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천자를 뵈러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경에서 무릇 8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덜고도 실로 90일 길입니다. 이제 성절까지 겨우 60일이 남았는데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면 남은 날이 겨우 50일이니, 이것이 신의 한스러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어느 날에 길을 떠나겠는가?”라고 물으니 “어찌 감히 머물러 자겠습니까?” 하고, 밤낮으로 서둘러 가서 절일에 미쳐 표문(表文)을 바쳤다. 황제가 표문을 보고 날짜를 헤아려 보고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배신(陪臣)이 서로 사고를 핑계하여 오려 하지 않다가 너를 보냈을 것이다. 너는 전에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하고 묻자 정몽주가 당시 배가 부서졌던 정상을 죄다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중국말을 알겠다”라며 특별히 위로하고 예부에 명하여 예대(禮待)하여 보내게 하였다.
1385년 4월에 경사에서 돌아왔고,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았는데, 그때 사람들이 마땅한 선비를 뽑았다고 일컬었다. 1386년 2월에 경사에 가서 임금의 편복(便服)과 배신(陪臣)의 편복 및 조복을 청하고, 이어서 세공을 감면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백하여 5년 동안 바치지 못한 것과 늘려 청하였던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았다.
7월에 경사에서 돌아와 황제의 명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세공을 둔 것은 중국이 어찌 이것에 기대어 가멸하려는 것이겠는가. 삼한의 성사(誠詐)를 알아보는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표문에 중화(中華)의 제도를 쓰고 오랑캐의 제도를 바꾸겠다고 한 것은 그 임금과 신하가 힘써 행하기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표문에 백성이 크게 어렵다는 것은 사자가 돌아갈 때에는 짐이 다시 약속하여 세공을 삭제하였거니와 3년에 한 번 조빙하여 좋은 말 50필을 바쳐 종산(鍾山) 남쪽 목야(牧野)의 무리에 보태어, 길이 서로 보수하라”고 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의대·안마를 내렸다.
정몽주는 1387년에 청하여 해직되고 영원군(永原君)에 봉작되었다. 동년 6월에 공이 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건의하여 백관의 관복을 정하여, 호복을 폐지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보고 감탄하여,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며, 12월에 경사에 가서 조빙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5. 과전법 실시와 고려의 멸망
1388년 정월에 요동에 이르렀는데 들이지 않아 그대로 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배되었다. 이때 권세 있고 간사한 신하가 백성의 전토를 강탈하므로, 청하여 사전을 폐지하매 백성이 힘입어 살았다. 동년 7월에 문하찬성사 지서연사(門下贊成事 知書筵事)에 제배되었다.
정몽주는 1389년 6월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제배되었다. 동년 11월에 문하찬성사에 제배되었다. 1390년 8월에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훈호를 받고 중대광(重大匡)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 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領書雲觀事)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제배되었다. 동년 11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守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事 兵曹尙書寺事 領景靈殿事 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제배되었다.
정몽주는 1391년 11월에 인물추변도감 제조관(人物推辨都監 提調官)이 되었는데 동년 12월에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훈호를 더 받았다. 1392년 2월에 지은 신률(新律)을 바치니,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진강(進講)하게 하였는데, 무릇 6일 동안에 여러 번 그 훌륭함을 찬탄하였다.
절의(節義)를 지켜 동년 4월 초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일당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 해 7월에 고려가 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9권 3책의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묘소
정몽주의 묘소는 개성의 풍덕에 초장하였으나 1406년(태종 6) 3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로 이장하였으며, 이재(李縡)의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상훈과 추모
1401년에 태종이 명하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예문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館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32년 세종이 명하여 삼강행실도를 지었는데 공을 충신전에 넣었으며, 1452년에 문종이 명하여 정몽주를 마전(麻田)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1517년에 중종이 태학생 권전(權磌) 등의 상소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명하여 정몽주를 문묘(文廟)에 종사하니, 실로 9월 17일 이었다. 또 예관(禮官)에 내려 분묘를 수리하고 초목을 금지하고 비를 세웠다.
1554년 영천에 사는 선비 노수(盧遂)·정윤량(鄭允良)·김응생(金應生)·정거(鄭琚) 등이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서원을 세우니, 곧 정몽주의 구거(舊居)이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매 명종이 편액을 내려 임고 서원(臨皐書院)이라 하고 사서·오경·통감·송감(宋鑑)을 내리고, 이어서 위전(位田)을 두어 봄가을로 사사(祀事)를 닦게 하였다. 묘소 아래에 묘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또한 정몽주는 문묘(文廟)에 종사되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의 임고 서원(臨皐書院) 등 전국 20여 개 원사(院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출처] 48. 정몽주[ 鄭夢周 2] 고려말 (1337년~ 1392년 )(55) : 고려 말 단군이래 충신1(단심가)|작성자 조아조아